Journal of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Article

서울 송현동 일대의 문화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 분석

최지영*, 조경진**
Ji-Young Choe*, Kyung-Jin Zoh**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수료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Ph.D. Candidate, Interdisciplinary Program in Landscape Architec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Professor, Graduate School of Environment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Kyung-Jin Zoh, Professor, Graduate School of Environment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Korea, Tel.:+82-2-880-1358, E-mail: kjzo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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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Dec 03, 2021; Revised: Jan 15, 2022; Accepted: Jan 15, 2022

Published Online: Feb 28, 2022

국문초록

서울 송현동에 역사문화공원과 이건희 기증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송현동의 역사성은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받은 시련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장소성 분석은 역사적 맥락보다는 토지소유자와 용도 변화에 국한해서 다루어졌다. 그래서 본 연구는 현대문화지리학과 비교역사학 관점을 활용하여 송현동의 장소성이 문화 헤게모니에 따라 변화한 맥락을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역사적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중화주의, 대항해, 시민혁명, 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 대중예술, 신자유주의 같은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는 송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에 새로운 지식인층을 만들어냈고, 사회제도와 공간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송현동의 장소성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첫째, 송현의 소나무숲은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목표로 했던 조선 건국세력이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며 만든 비보숲이었고, 내사산의 지맥을 보호하는 사산금표제로 관리되었다. 세계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조선 후기에는 연행이 늘며 청나라 문화를 향유하는 경화세족의 정원이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단지개발로 소나무 숲과 정원은 사라졌지만, 인공적인 정원과 외부의 자연을 조화롭게 연결했던 차경의 경관적 미학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 둘째, 세계의 근대화 물결은 북촌 일대에 신식학교를, 친일파 소유의 송현동에는 하숙집을 만들었다. 송현동 옆의 안국동천길은 시민혁명과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사상가들이 교류했던 장소였고, 최대규모의 하숙집이었던 송현동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며 학생운동문화가 발아한 계기가 되었다. 안국동천길은 옛길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어 광화문-북촌-인사동-돈화문로를 연결하는 역사 도심 보행 재생의 한 부분으로 의의를 지닌다. 셋째,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기부터 군사 정권기까지 송현동은 조선식산은행의 서구식 문화주택과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서며 서구문화의 통로였다. 주변 지역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며 근현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이건희 기증관은 북촌한옥마을, 공예박물관, 현대미술관, 갤러리와 문화벨트를 이루며 시민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같이 장소를 이루었던 숲과 정원, 시민탄생의 거리, 근·현대 미술의 진원지로서 의미가 새롭게 조성될 역사문화공원과 미술관 그리고 주변 보행 네트워크와 조화롭게 재창조될 수 있도록 담론과 도전이 필요하다.

ABSTRACT

The History and Culture Park and the Lee Kun-hee Donation Hall will be built in Songhyeon-dong, Seoul. Political games from the Joseon Dynasty to the present greatly influenced the historicity of Songhyeon-dong. However, place analysis was limited to changes in landowners and land uses rather than a historical context. Therefore, this study analyzed the context in which the placeness of Songhyeon-dong changed according to the emergence of cultural hegemony using the perspective of modern cultural geography and comparative history. As a result of the analysis, cultural hegemony in historical transitions, such as Sinocentrism, maritime expansion, civil revolutions, imperialism, nationalism, popular art, and neoliberalism, was found to have created new intellectuals in Bukchon, including Songhyeon-dong, and influenced social systems and spatial policies. In this social relations, the placeness of Songhyeon-dong changed as follows. First, the founding forces of Joseon created pine forests as Bibo Forests to invocate the permanence of the dynas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was an era of maritime expansion, and as Joseon’s yeonhaeng increased, a garden for the Gyeonghwasejok, who enjoyed the culture of the Qing dynasty, was built. Although pine forests and gardens disappeared due to the development of housing complexes as the population soar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Cha Gyeong’s landscape aesthetics, which harmonized artificial gardens and external nature, are worth reinterpreting in modern times. Second, the wave of modernization created a new school in Bukchon and a boarding house in Songhyeon-dong owned by a pro-Japanese faction. Angukdongcheon-gil, next to Songhyeon-dong, was where thinkers who promoted civil revolution and national self-determination exchanged ideas. Songhyeon-dong, the largest boarding house, served as a residence for students to participate in the March 1st Movement and was the cradle of the resulting culture of student movements. The appearance of the old road is preserved, so it is a significant part of the regeneration of walking in the historic city center, connecting Gwanghwamun-Bukchon-Insadong-Donhwamunro. Third, from the cultural rule of the Government General of Joseon to the Military Government, Songhyeon-dong acted as a passage to western culture with the Joseon Siksan Bank’s cultural housing and staff accommodations at the U.S. Embassy. Ancient and contemporary art coexisted in the surrounding area, so the modern and contemporary art market was formed. The Lee Kun-hee Donation Hall is expected to form a cultural belt for citizens with the gallery, Bukchon Hanok Village, the Craft Museum, and the Modern Museum of Art.

Discourses and challenges are needed to recreate the place in harmony with the forests, gardens, the street of citizens’ birth, history and culture park, the art museum, and the surrounding walking network.

Keywords: 역사문화공원; 북촌; 문화권력; 이건희 기증관; 문화지리학
Keywords: History and Culture Park; Bukchon; Cultural Power; Lee Kun-Hee Donation Hall; Cultural Geography

Ⅰ. 서론

서울 송현동은 조선 시대에 소나무 숲이었다가 왕실과 권문세가, 친일파, 일본 식산은행, 미국대사관 등 당대 권력층에 귀속되는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지였다. 현대에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대기업이 복합문화관과 한옥호텔을 제안했으나 시민들이 역사성과 교육환경 보호를 주장하여 상업개발과 역사문화보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1). 대립의 요지는 역사문화 지역에서 ‘장소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때 생기는 ‘역사 소비’와 대규모개발로 인한 ‘장소 상실’에 대한 우려라 볼 수 있다. 현대 공간생산의 주체가 ‘자본’과 ‘시민’, 사적 공간과 공공공간이라는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상징적인 사례로 볼 수도 있다(Relph, 1976; Tuan, 1977).

장소성 보전과 상업개발의 갈등 속에서 시민과 정부는 담론을 형성하고, 역사성을 강조함으로써 향후 송현동에는 공공을 위한 역사문화공원과 이건희 기증관이 건립될 예정이다2). 하지만 현재 송현동은 빈터로 남아 있다. 역사성이 뚜렷하지만 장소기억만 남아 있는 역사문화지역은 파편화된 역사문화의 흔적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장소에 관련된 역사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한 장소에서 상반되는 이데올로기가 충돌하기도 하고 장소기억이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식민지로 왜곡된 전통문화경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전통에 기반을 둔 복원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개발로 소멸한 역사문화경관을 새롭게 장소만들기로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억 투쟁’이라 불리는데, 상반된 장소기억이나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역사문화지역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특성이 있다(Jeong et al., 2011).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역사문화유적의 수효를 세고, 역사 인물의 생가나 활동지역에 표지석을 두고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기 쉽다. 둘째는 식민지와 근대화로 전통문화경관 해체라는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역사 도심에서 다른 복원지역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이다. 역사 소비가 만연해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사문화정책의 기조도 관광자원확보를 위한 복원과 기념이 목적인 경향이 있다. 무조건적인 원형 복구나 공원 조성, 박물관 건립 등은 또 다른 획일화를 낳을 수 있다(Graeme, 2003).

표피적인 사료 해석이나 획일화된 공간조성이 되지 않도록 장소성을 분석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장소는 공간을 조성하는 주체의 사상과 미의식 그리고 당대 기술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의사결정의 물리적 재현이다(Lefevre, 2011). 각 시대의 공유가치 또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 장소성이 만들어진 역사 속의 지배적인 문화와 국제정세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상과 담론이 전개된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므로 지금 우리가 계승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송현동 일대가 역사이행과정에서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문화 권력과 혁신 주체가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공간적 실천에 따라 ‘장소성’이 변화한 과정을 밝힘으로써 재창조를 위해 계승할 가치를 모색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송현동과 관련된 1차 문헌을 정리하고, 문화지리학과 비교역사학 관점으로 송현동의 문화 권력과 공간정책 관계를 고찰하고, QGIS를 이용해 공간데이터로 표시하여 주요 활동과 시설의 위치 및 범위 또는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시간적 범위는 정치체제에 따라 전근대, 근대, 현대로 크게 나누고, 송현동의 공간 변화에 따라 세분한다. 전근대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장소성이 변하였으므로 조선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근대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부터 1919년 3·1운동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문화통치기부터 전시체제기로 구분한다. 갑신정변 실패 후 북촌에 거주했던 급진개화파의 주거지가 몰수되어 신식학교로 바뀌면서 북촌 일대의 장소성이 변하였고,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주변에 식민시설이 증가하는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현대는 정책지향점이 다른 군사정권 시기와 문민정부 시기로 세분한다.

공간적 범위는 맥락 분석을 위하여 송현동 부지와 북촌 일대로 구분한다. 송현동 부지는 문화공원예정부지로 송현동 48-9, 48-3, 사간동 97-2번지에 해당하며, 면적 3만 7,117m2(1만 1,247 평), 역사문화특화경관지구, 제1종 지구단위계획구역(북촌 지구단위계획)이다. 이보다 확대한 북촌 일대는 종로 이북부터 북악산 아래까지 대규모 필지를 중심으로 상호영향을 파악하고자 한다.

2장은 문화적 헤게모니와 장소성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하고, 3장은 문화적 헤게모니가 변화함에 따라 송현동 일대에 장소성이 변화한 과정을 고찰한다. 4장 분석을 토대로 장소성 변화가 갖는 시사점 도출한다. 5장은 결론으로서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를 요약하고 본 연구의 시사점과 한계에 대해 논한다.

II. 이론적 고찰

1. 문화적 헤게모니

장소에 관한 연구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기초한 인문지리학에서 다루기 시작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문화지리학과 비판지리학으로 발전하면서 정치적 측면이 주목받게 되었다(Park, 1995; Cresswell, 2004; The Association, 2015). 주요 논의를 보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예술작품과 사유, 정치적 행위 등을 통해 장소에서 실존하려는 본성을 가진다(Heidegger, 2020: 77). 이를 근거로 인문지리학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념비적인 상징물을 세워 정체성을 표현하는 존재 방식을 다루고 있다(Tuan, 1977: 174). 신문화지리학은 문화연구를 접목하여 지배집단과 피지배 집단의 관계가 드러나는 장소의 정치적 맥락을 부각시켰다(Jackson, 1989). 더 나아가 비판지리학은 장소를 선점하기 위한 권력 간의 투쟁을 문화전쟁으로 표현할 정도로 정치적 행위와 장소의 관계는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Mitchell, 1994).

이 중에서 잭슨의 연구는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를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적용하여 계층 간의 행동과 물리적 환경 조성방식의 차이를 지도화하는 시도를 하였다(Jackson, 1989: 52-55).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지배력을 갖기 위해 강압과 폭력을 사용하는 강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식인을 형성하여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서 연대하고 매체나 교육을 통해 설득하고 자발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문화적 동화’를 특징으로 한다(Gramsci, 1978: 22-23).

문화적 동화에서 주목하는 면은 정치적·경제적 목적의 통합뿐만 아니라 지적인 문화 자본을 축적하고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혁신이고, 역사를 이행시키는 세력 관계들의 운동이다(Hall, 2016). 이 의미는 헤게모니 과정이 한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헤게모니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장소는 내부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로컬과 글로벌을 가로지르며 장소 너머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조합으로 볼 수 있다(Massey, 1994: 5). 예를 들면, 글로벌 기업들이 전 세계에 체인점 형태로 진출해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고유의 장소성이 사라지는 현상은 현대 경제사회의 헤게모니인 신자유주의 경제가 장소에 미친 영향이다(Harvey, 1995). 급속한 동질화라는 점에는 차이가 있지만 글로벌화 자체는 비단 오늘만의 현상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중국의 실크로드와 동서문화교류, 대항해시대와 서구 자본주의의 발아, 제국주의 열풍, 프랑스 대혁명에서 시작된 시민혁명, 세계대전 이후 국민의 탄생과 민족주의는 각 시대에 헤게모니를 획득하며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Huntington, 1997: 117).

선행연구를 토대로 헤게모니의 두 가지 특징인 문화적 동화와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문화 헤게모니’는 하위계층이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혁신 주체가 공동체 성원 대다수의 동의를 얻기 위해 당대의 이데올로기, 전통 재창조, 신기술 등을 학습하여 고도로 문명화된 취향으로 공간을 지배하고 동화전략을 펼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자 한다(Gramsci, 1978; Lefevre, 2011; Hall, 2016). 그리고 본 연구는 위에 열거한 중화주의, 제국주의, 시민혁명, 민족주의 같은 범세계 차원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로컬에 해당하는 송현동 일대에 새로운 사상을 가진 혁신 주체를 만들어내고, 이념을 장소에 투영하는 과정에서 장소성이 변화한다는 흐름을 전제한다.

2. 장소성

장소성은 장소애착, 장소감, 장소정체성과 같이 사람들이 느끼는 실존의식이다. 선행연구에서 장소애착과 장소감이 주로 개인의 경험으로 한정한다면, 장소성은 개인이 느끼는 장소애, 장소감이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외부와는 차별화된 장소 정체성을 형성하여 집단의식으로 승화되는 총제적인 특질을 의미한다(Lee and Hwang, 1997: 181; Choi and Kim, 2001: 154; Choi, 2002: 257). 특히 역사문화지역의 장소성은 사회와 문화 속에서 모여진 의미들이 장소의 혼을 이루며 일종의 지위를 갖게 되고(Schulz, 1984: 170), 사람들이 장소를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도록 영향을 미친다(Relph, 1976: 71).

장소성의 형성요소는 오랜 시간에 걸친 ‘반복적인 활동’, ‘유사 시설의 밀집성’, 구성원 간에 장소의 ‘의미 공유’ 등이 있다(Relph, 1976; Tuan, 1977; Choi and Kim, 2001). 서울의 대학로, 홍대, 삼청동, 신사동, 북촌 등의 장소성 연구를 보면 특정 계층의 ‘반복적인 활동’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유사 시설의 밀집성’은 결합하여서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문화를 만들어 장소성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문화활동이 인지되는 지역은 문화관련시설이 증가하면서 유사 시설이 밀집하게 되고, 정치 활동이 일어나는 지역은 의례와 상징의 공간이 생겨나고, 권력이 집중하는 지역은 환경 및 사회자본시설을 점유해가는 특성을 보인다(Shin and Choi, 2010; Han and Zoh, 2010; Na, 2019). 한편, 반복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계기는 제도변화, 문화 취향, 경제적 배경 등 다양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활동을 장려하는 문화지구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있다. 한옥마을을 만들기 위해서 인문학적인 홍보와 교육을 통해 구성원이 가치를 이해할 때 보존이 가능해지듯 장소성은 제도로 활동과 시설을 관리하는 것보다 구성원의 장소이해와 구성원 간의 ‘의미 공유’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음을 피력한다(Jung, 2011).

장소성의 상실과 복원 문제는 고대 그리스 크리티아스에서도 개간과 함께 사라진 숲에 대해 개탄하며 장소 상실을 거론할 정도로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문제이다(Plato, 2020: 34). 역사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왕정의 공간점유나 새로운 계층의 공간투쟁은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의 장소성에 영향을 미쳤다(Duncan, 1990; Harvey, 2019). 신자유주의 경제하에서 장소성에 제기된 문제들은 다양성 파괴, 투기자본에 의한 장소 침략, 난해한 포스트 모던 경관이 빚은 장소 상실과 무장소, 이동과 소비시대에서 유대감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비장소에 대한 우려가 있다(Relph, 1976; Augé, 1995; Harvey, 1995). 피에르 노라는 역사의 가속화로 기억의 환경들이 사라진 자리를 ‘기억의 터’로, 아스만은 ‘문화적 기억’이라 칭하며 현재 이 기억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기념시설이나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장소성이 재현되어야 존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Nora, 2010; Assmann, 2011).

3. 국내 연구 동향 및 분석의 틀

장소에 관한 국내 연구는 70년대 고도개발로 장소 상실을 경험하고 80년대에 장소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고, 90년대 신도시개발을 하며 장소 만들기가 필요하면서부터이다. 주로 투안, 슐츠, 메를 퐁티, 렐프 등의 이론을 통해 장소애, 장소감과 같은 현상학적 관점의 이론이 활발히 연구되었고, 장소성의 정의도 이루어졌다(Lee and Hwang, 1997). 2000년대에는 지구촌 경제가 현실화되면서 하비의 장소 지구화 이론이 다루어졌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소 상실을 경험하고, 복원하는 방법을 논하였다(Choi, 2002). 지방자치제도가 정착하면서 지역축제와 전통문화지구·문화특화지역 등의 장소성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며 장소 자산을 이용한 마케팅과 관광 차원에서 연구가 전개되었다(Choi and Kim, 2001; Baik, 2004; Uhr and Yuh, 2010; Han et a.l, 2008). 2010년대에는 역사문화지역이 상업화되면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대두되었고, 기존의 장소성이 변화하는 요인을 정량적으로 분석하거나 장소 산업적 접근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거세졌다(Jung, 2011; Kim and Choi, 2016).

최근에는 도시재생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내생적 발전, 지역 역량, 역사문화자산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연구 사례지가 다양해지고 있고 장소의 역사 경관, 장소기억을 통해 장소성을 재구성하는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Jeon, 2009; Choi, 2012; Im et al., 2014; Yu, 2018; Kim et al., 2017; Lee, 2019; Han, 2019). 특히,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 그리고 산업화로 급격히 파편화된 경관과 사라진 장소성을 복원하는 연구는 권력과 헤게모니 관점을 활용하여 공간정책의 의도나 배경을 밝히고 맥락을 드러냄으로써 가치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Han and Zoh, 2010; Park and Pae, 2013; Seo, 2015; Park, 2015; Na, 2019; Kim, 2020).

역사문화지역의 장소성 복원 연구뿐만 아니라 장소성을 재현하는 연구로는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는 방식이 다루어지고 있다. 2007년에 조성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장소성이 변화한 과정에 대한 생략과 랜드마크 식의 건축물로 재생한 점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 있고, 과거 동대문 운동장을 이용하지 않은 이용객들이 공원에 흥미를 느끼고 방문하여 역사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상징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Suh et al., 2012; The Seoul Shinmun, 2014). 2014년에 조성된 서소문 역사문화공원은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사업이 추진되어 서소문 일대에 벌어진 특정 집단의 역사만을 부각한 부분에 대해 비판적 의견과 특정 종교의 성지로 건축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공원 기능이 약화되었다는 관점도 있다(The Korea Construction Shinmun, 2014; Kim, 2016). 역사문화지역의 장소 재창조는 장소의 과거와 현재에 관련된 세력 관계, 집단의식 등이 논의되어야 현재 진행되는 담론과 가치판단에 근거가 되며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정된 정보로 인해 장소에 대한 가치판단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Figure 1과 같이 문화 헤게모니 관점으로 지역 외부의 사회적 관계와 지역 내부의 문화적 동화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송현동의 장소성이 변화한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는 중화주의, 대항해, 시민혁명, 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 대중예술, 신자유주의의 흐름으로 고찰한다. 주로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받아들인 새로운 지식인층이 공간정책, 문화 취향, 선진 기술 등을 송현동 지역에서 실천한 면에 초점을 둔다. 둘째, 장소성의 변화는 새로운 지식인층의 문화적 동화에 의해 새로운 장소성 형성요소가 발생하는 과정을 고찰한다. 자료에서 반복되는 특징적인 활동, 밀집된 유사 시설, 장소에 대한 구성원 간의 의미 공유를 검토하면서 사라진 물리적인 흔적을 재구성하고 계승해야 할 장소의 가치를 찾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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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An analysis framework of cultural hegemony and plac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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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송현동 일대의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

1. 조선의 신분제사회와 공간점유
1) 조선왕조 개국세력과 소나무숲

소나무 언덕이라는 의미의 송현은 조선왕조의 탄생에서 출발한다. 왕조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은 고려 말 공민왕이 중건한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 성균관 출신으로 유교적 이상 국가를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고공기와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종묘사직과 궁궐을 배치하고 도로와 산성을 지형 특성에 맞게 계획했다(Ko, 2007: 90-91). 송현은 북쪽의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맹현, 홍현과 연결되는 지맥이었다. 행정적인 위치는 경복궁의 동쪽에 인접한 관광방에 속했으며,조선 전기부터 소격서, 장생전, 종친부, 종부시, 사간원, 의정부, 장원서, 중학 등 중요한 관서들이 주변에 자리했던 곳이다(Chung, 2011: 19). 풍수지리 측면에서 내청룡인 낙산이 낮아서 비보(裨補)3)를 위해 소나무 숲이 조성되었다.

경복궁 왼쪽 산등성이의 소나무가 시들어 근방의 인가를 철거할 것을 명하였다(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4월 16일 임진,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Taejo 7: Apr 16, 1398). 경복궁은 백호가 높고 험준하나, 청룡이 낮고 미약하므로 가각고 북쪽 산의 내려온 맥에 소나무를 심어 길렀는데 …(중략)…청룡이 날로 쇠약해지니, 청컨대 표를 세워서 한계를 정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산맥을 비보하게 하소서(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4월 18일 병술,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Munjong 1: Apr 18, 1451).

당시 소나무는 병선이나 건축에 필요한 목재로 실용성 측면에서도 중요했고, 땅의 기운을 복 돋아주는 효능이 있다 하여 비보숲을 조성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다음 세종실록을 보면, 천년의 역사를 이어간 신라가 비보를 통해 땅을 다스렸던 방식을 재현함으로써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는 목적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왕업을 볼 때, 천여 년이나 된 것은 산만들기와 나무 심기를 가지고 공결한 곳을 메워 준 것이며 주부나 군현에서도 또한 모두 비보한 것이 있사오니 조산과 종목을 가지고 관활한 곳을 보충시킨 것입니다. …(중략)… 흙만 쌓아서 산을 만들어 보결하려면 성공하기가 어려우니, 나무를 심어서 숲을 이루어 가로막게 하면 작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 119권, 세종 30년 3월 8일 계사,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Sejong 30: Mar 8, 1448)

즉 산맥을 연결하여 궁궐이 북악산으로 연결되고, 다시 하늘로 이어지는 일체화된 경관을 추구함으로써 국왕의 위용과 권위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Lee, 2017). 조선경국전 우주론을 실현하고 신도팔경시에 나온 기전산하에서 인심을 얻으려는 방편을 실천함으로써 왕조의 정통성과 유교적 군주관을 드러내는 공간적 실천이라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신라의 박혁거세와 김알지가 소나무숲에서 탄생한 설화를 통해 조선 시대에도 솔은 으뜸, 신목, 생명수, 우주목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용상 뒤편에 걸린 일월오봉도 소나무 그림과 궁궐 건설에 사용된 소나무는 왕의 존엄을 상징했고 왕조의 지속적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Kang, 2013).

이러한 산과 땅에 대한 사상은 조선전기에 산림을 육성하고 산맥을 보호하는 사산금표제로 실현되었다. 사산 중 내청룡에 해당했던 송현에도 민가가 들어서는 것을 금하고 산줄기, 산등성이, 산기슭에서 경작을 금지하였다.4) 조선 초기 실록과 성종 시기 좌의정 윤필상이 올린 상소를 보면 송현의 구체적인 위치와 범위 그리고 사산금표제의 실행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Han, 1992: 28; Choi et al., 1993: 288; Kim, 2010: 477).

장원서 북참에서 중학까지는 바로 경복궁의 내청룡에 해당되는데 산세가 약하다고 하여 국초부터 나무를 가꾸어 지맥을 배양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 번 전교를 받아 산등성 마루의 안팎에다 각각 20척의 한계를 세워 금지시켰습니다(성종실록 125권, 성종 12년 1월 20일 을미,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Sungjong 12: Jan 20, 1481).

이를 보면 소나무숲의 범위는 경복궁의 좌측 장원서 북참인 현재 정독도서관 일대부터 지금의 수송동 일대에 해당하는 중학까지 길게 분포함을 알 수 있다(Figure 2 참조). 도성대지도에도 현재 송현동 부지 밖에 위치한 수송동에 송현의 명칭이 쓰여있고(Figure 3 참조), 수송동도 1914년 수동과 송현동이 합쳐진 이름이므로 송현의 지형이 중학까지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삼승조망도>에는 지금은 사라진 송현의 소나무 숲과 북악산에서 송현까지 산세를 대략 살펴볼 수 있다(Figure 4 참조). 경복과 삼청이라고 글자가 쓰여 있고 경복궁 너머로 삼청동 응봉에서 송현까지 그리고 송현 아래 중학동 일대와 수진방 일대 인가가 표현되어 있다(Choi, 2018: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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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The location of Songhyeon on Hanyangjeondo Source: Hanyangjeondo, 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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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 The location of Songhyeon on Doseongdaejido Source: Doseongdaejido, 1753-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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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Songhyeon on a picture of <Sam Seung Jo mang> Source: Gyeomjae Jeong Seon, Sam Seung Jo mang,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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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유교통치론과 풍수지리 사상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였던 사산금표제도는 송현을 비롯한 한양의 경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종 19년에 중국 사진 동월이 반조 정사로서 조선에 왔다가 우리나라의 산천, 풍속, 인물, 물산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가서 지은 조선부에도 소나무가 둘러싼 한양의 경관을 확인할 수 있다.

높고 험한 삼각산에 자리를 잡고,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 산세가 가장 높다. 왕궁이 그 산허리에 있어 산꼭대기를 훑어 바라보니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검푸른 수많은 소나무들로 그늘졌다(Dongyue, 2013:46).

한편, 아름다운 소나무 숲의 이면에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을 구분하는 집권층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 고려말 역성혁명을 통해 민본 정치를 구상했던 정도전은 송현동에서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온통 공을 들여서

책 속에 담긴 성현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 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놓은 업적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네(Jeong, 2009).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서 유교적 의례는 양반 우위의 사회 질서를 강고하게 유지하려는 헤게모니 전략이었다. 송현의 비보숲은 경관에 투영된 정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2) 북학의 시대와 경화세족의 정원문화

송현동은 경복궁 건춘문과 왕족들이 모이는 종친부와 인접하여 권문세가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북악산 지맥인 송현, 맹현, 홍현, 안현, 관현은 양지바르고 배수가 잘되어 한양 최고의 주거지로 꼽혔다. 조선 후기에는 송현도 권문세가의 주거지로 바뀌었다. 맹현과 홍현은 국유림을 유지하고 있다(Figure 5 참조). 성종실록을 보면 조선 초기와 달리 송현 주변으로 금산 정책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 상소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은 현재 공예박물관 자리로 송현 주변의 주거지 상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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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Residential districts divided according to social status Legend: jkila-50-1-33-inline1 Properties of the royal family a: Maeng hyeon jkila-50-1-33-inline2 Residential area for the powerful families b: Hong hyeon jkila-50-1-33-inline3 Residential area for the lower-level officials c: An hyeon jkila-50-1-33-inline4 Residential area for the business owners d: Gwan hyeon Source: Kim and Heo, 20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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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청룡은 장원서 북쪽 고개로부터 가각고에 이르는데 그 산등성이 너비가 20척쯤 됩니다. 전에는 나무를 심어서 산맥을 보호하였는데 지난날에 양정의 집이 그 곁에 있어서 침점하여 담을 쌓았고 영응대군의 집에서 또 산등성이를 파고 집을 지었으며, 기타 함부로 점거한 자가 또한 많습니다. 청컨대 금하고 옛날같이 나무를 심어서 산맥을 복돋우소서(성종실록 3권, 성종 1년 2월 12일 신유 5번째기사,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Sungjong 3: Feb 12, 1470).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된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송현의 숲에 대한 논의가 사라졌고, 한경지략에 따르면 송현동에 경화세족 심상규의 집이 들어섰다(Yu, 2020: 260-262). 경화세족은 임금이 사는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살아가던 양반층을 가리켰다. 조선 후기에는 이들이 연행을 통해 청나라 문물을 접하며 서적, 골동품, 서화를 수집하는 취미가 유행하였고, 북학은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Figure 6 참조). 심상규와 교유했던 남공철은 순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고동각이란 건물을 지어놓고 역대 고금의 서화와 골동품을 쌓아놓고 틈나는 대로 감상하며 즐겼다. 이러한 취향은 서가나 정원을 조성하는 공간적 실천으로 이어졌다(An, 2015; Jung,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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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6. The Ming·Qing Dynasty antiques and the collecting culture in the late Joseon period Source: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wan, http://www.artko.kr/~leein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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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규의 가성각은 청나라풍 붉은 벽돌로 지은 중첩된 누각에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옹방강의 편액을 걸고 4만 권의 서적과 명화를 진열한 북학의 상징물이었다. 이유원 <임하필기< 제34권 가성각 조에서 이 집은 우리나라 최고의 건물이라 평가하였고, 대사간 임존상은 상소를 올려 심상규의 사치와 호화스러운 저택을 비난했다. 홍한주 <지수염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성각의 위치와 내부 공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두실 심공은 서울 송항松巷(소나무 거리)의 북쪽에 집을 두었다. 바깥 행랑으로부터 굽어져 비스듬히 작은 방을 두었고, 이곳을 지나면 난간을 두른 정당이 있다. ‘가성각'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데 옹방강이 80세에 쓴 것이다. 가성각의 동쪽 기둥은 여러 번 중첩되어 있고, 북쪽은 모두 트인 누각의 2층 집이다. 서북쪽에는 붉은 담장이 있고, 비스듬히 벽돌을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 …(중략) … 가성각의 앞에는 몇 간의 작은 집을 만들어 이름난 꽃과 기이한 풀들을 늘어놓았고, 뜰에는 종려나무를 심었는데 그 키가 처마에 닿았다. 또 상아로 만든 탁자와 벽을 가득 채운 거울은 우리나라에 없는 것이다(Hong, 2013).

송현에 경화세족의 저택이 들어선 것은 두 가지 면을 보여준다. 첫째, 자연을 향유하는 방식이다. 송현의 동쪽은 안국동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삼청동천이 흐르는 북악산의 산줄기였다.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었다는 삼청동천은 한양 최고의 명승지였고, 심상규와 교유하였던 세도가 김조순의 삼청동 옥호정이 있었다(Seong, 2016; Hwang, 2009). 옥호정도는 송현동의 가성각과 함께 조선 후기 문화향유의 극단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주택 밖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주택 내의 경관 요소로 끌어들이는 조선 시대 정원의 차경수법을 엿볼 수 있다(Kim, 1997: Ahn, 2004; Kim, 2012; Figure 7 a 참조). 아래와 같이 이덕무의 성시전도시에도 한양에서 정원과 풍류 문화를 언급하였고, 조선에 표착했던 하멜의 표류기에도 <조선 왕국에 대한 기술> 중 가옥 부분에서 별채에 정원을 조성하였던 양반의 주거문화 풍조를 서술하여 18·19세기 한양에는 화려한 저택축조와 정원조성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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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7. A garden of the powerful family and a place for poetry gatherings of the lower-level officials Source: Seoul Museum of History, 20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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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정원 자랑하였으니

푸른 봄 한낮에 더욱 화려하네

시단의 고상한 모임은 성원의 객과 같고

필봉의 풍류는 동산기의 옛일을 따른 것이네(Lee, 1792)

귀족들은 집 전면에 항상 별채를 두어 친척이나 친구들을 맞이하는데, 때로 그 손님들은 밤새 머물기도 한다. 그들은 이 별채를 휴식처로 이용하기도 한다. 대체로 이 공간에서는 수많은 꽃과 희귀한 식물, 나무, 바위로 꾸민 연못과 정원이 딸린 커다란 안뜰을 조망할 수 있다(Hamel, 1668).

둘째, 조선 후기의 정원은 사대부가 아취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특권 층에만 허락된 문화 행위였다. 상상의 정원이 유행할 정도로 지식인 사이에서 자기만의 안식처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강했지만, 실제 별서를 경영하는 일은 정치권력을 넘어서는 문화권력의 상징이었다(Kim, 2018). 상류층은 아름다운 산수로 둘러싸인 누대나 별장에서 풍악과 음주를 동반한 시회를 베풀었고(Zoh and Seo, 2008), 국유지였던 산림은 권력을 가진 양반들이 사적으로 점유하기에 이르렀다(Kim, 1993).

하지만 당시 서구사회는 벨테브레와 하멜이 조선에 표착할 정도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였고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난학을 연구하며 문명개화에 매진하고 있었다. 삼청동과 송현 자락에서 경화세족이 담을 두른 정원을 가꾸고 관직을 세습하는 동안 탑동에 모인 박지원의 북학파 연암그룹은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다. 시사와 풍류방에서 신분의식을 넘어 소통하고, 서구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이지 법고창신과 실학사상을 논하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Seoul Museum of History, 2015; Figure 7 b 참조). 중인계층, 도시문화,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출현하면서 유교적 통치구조와 신분제는 와해하고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던 봉건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2. 근대 시민의 탄생과 전통문화경관 해체
1) 갑신정변과 학교설립 및 시민 공론장 형성

세계의 제국주의 열풍은 조선에도 개항을 요구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따라 개국한 조선에는 청국인, 항구에 거류지를 건설하는 일본인, 전차와 전기, 상수도 건설 기술을 가진 미국 기업가, 선교사, 프랑스, 영국, 러시아, 벨기에서 온 외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동 일대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송현동 주변은 개화사상을 가진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의 거주지와 인접하였다. 역관 오경석과 유대치의 권유로 재동 박규수의 집에서 홍영식, 박영교, 박영효, 유길준 등 북촌의 젊은이들은 모여서 연암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시대를 고민하였다(Figure 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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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8. The expansion of the west, Qing and Japanese in Hanyang and the emergence of the radical enlightenment in Bukchon Legend: jkila-50-1-33-inline5 The foreign legation jkila-50-1-33-inline6 The radical enlightenment party Source: Lee, 2015:31; Gale hayangdo,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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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급진개화파로 수신사, 조사시찰단, 보빙사 등 해외 시찰로 개화를 인식하였고, 일본 문명개화를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Jung, 2001: 83).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와 조공 허례, 신분제 폐지 등을 주장한 14개의 개혁 정강 발표하였다. 당시 유교 중심의 중화주의 사상에서 서양문명에 눈떠가는 모습을 애국계몽 운동가 신채호는 수필 <지동설의 효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박규수가 벽장 속의 지구의를 내어 한 번 돌리더니 김옥균에게 웃어 가뢰되, 오늘에 중국이 어데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찌 정한 중국이 있느냐? 하더라, 김옥균,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더라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Shin, 2016).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북촌과 종로 일대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몰수된 개화파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의 가옥에 근대교육시설인 경성제일고보, 중앙고보와 같은 학교가 만들어졌다(Figure 9 참조). 성리학이 나라의 국교이자 교육이고, 통치질서의 근간이었는데 갑신정변 10년 후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사회 근간이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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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9. The Bukchon where schools are concentrated Legend: jkila-50-1-33-inline7 The private school jkila-50-1-33-inline8 The public elementary school jkila-50-1-33-inline9 The government school jkila-50-1-33-inline10 The public secondary school jkila-50-1-33-inline11 The public primary school Source: Map of Educational Institutions in Seoul,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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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민중의 공론장과 신문의 출현이다.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던 갑신정변 실패로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만민공동회라는 민중의 공론장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의사로 조용히 살 수 있었지만, 시민 민주주의의 실현에 헌신한 이유를 독립신문 논설에 실었다. 아래의 독립신문 논설에서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급진적 변화에의 요구에 위험한 일을 실천했던 청년들의 숭고한 동기가 있었지만,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던 실수와 일본인들의 감언이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경험이 일천했고 순진했던 점이었다고 회고하였다(Seo, 1938; Lee, 2020). 민중의 지지에 대해 안타까움이 절절히 배어 나온다.

만약 한국 백성의 10%라도 개혁을 지원했다면 한국이 개혁되고 주권이 수호되었을 것이다.…중략 (Seo, 1938).

나라마다 공론을 가지고 백사를 하는데 대한은 공론하는 사람들이 없는 고로 정부에서 세상 공론이 어떠한지 알 수도 없고 또 공론이라 하는 것은 공변되어야 공론이거늘 그저 사랑에나 모여 한두 사람이 말하는 것은 공론이 아니라 그런 고로 나라마다 인민들이 모이는 처소가 있어 여럿이 규칙 있게 모여 정제하게 만사를 토론하여 좌우편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작정한 의논이 공론이라 이런 공론하는 인민들이 있을 것 같으면 정부에서 일하기도 쉽고 또 하는 일을 그르칠 이가 없는지라(The independent, Feb 24, 1898).

개화기에 만들어진 근대학교와 공론장의 출현은 후에 송현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1897년 당시 송현동의 가구 수는 150호였고 소유주가 다 달랐으나 윤덕영이 정치 권력을 이용해 소유하게 되었고, 대지를 합병하여 땅의 규모가 2,103평인 대규모 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Chung, 2011: 19). 하지만 운영할 재력이 없어 송현동 56번지는 4,817평에 해당하는 한옥을 여러 사람에게 빌려주어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송현동 앞 안국동 6거리는 아침 등교 시간이 되면 이 길을 거쳐 통학하는 조선 학생들로 붐벼 ‘학생 6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Kwon et al., 2002: 185). 그리고 송현동 34번지(현 덕성여중)에는 1910년 천도교 초기 교당이 들어왔다. 1919년 2월 24일 기독교계의 이승훈, 함태영이 최린과 함께 손병희를 방문하여 3.1운동을 위한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의 연합이 성립된 곳이다. 북촌에는 손병희 자택과 월보사, 개벽사 등의 기관과 다수의 천도교인이 분포하여 거주했다(Chang, 2003).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민족자결에 의한 독립선언이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고 나라를 잃은 조선도 민족자결원칙에 힘입어 독립선언서가 여러 단체에서 만들어졌다(Kwon, 2019: 39).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로 3.1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많은 학생이 북촌 최대 하숙집이었던 송현동 56번지와 천도교 중앙총부가 들어섰던 송현동 34번지와 주변 교회 등을 매개로 시위에 참여하였다(Figure 10 참조). 인쇄소와 학교가 밀집한 지역은 담론 형성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당시 학교 기숙사는 감시가 삼엄했지만, 하숙집은 비교적 자유롭게 계획을 모의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Joo, 2018; Seoul Museum of History, 2019: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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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0. Independence movement area Legend: jkila-50-1-33-inline12 Independence Movement Historic Sites jkila-50-1-33-inline13 Independence Activists Source: https://map.seoul.go.kr/smgis2/short/6L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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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동 하숙집에 기거하며 3.1 운동 시위에 참여하여 검거된 보성 고등보통학교 4년생 장채극 대표가 선언서 200부를 가지고 송현동 하숙집에 들러 동교생 6인과 함께 배포했고, 경성고등보통학교 3년생 박쾌인은 검거되었을 때 이 일대에 독립선언서 400부가 뿌려졌으며 인근 교회에서 관계망을 이루었고 송현동 하숙방에서 탑골공원으로 모이는 방법을 토의하였다고 진술하였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 History, 1988: 262-264). 다음은 탑골공원 후문으로 나간 시위대가 인사동길을 거쳐 송현동을 지나 조선보병대를 향할 때 현장을 담은 수기이다. 수기를 쓴 최은희 학생은 당시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간부였으며 후에 조선 최초의 여성 기자가 되었다.

3백여 명 전교생은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직원회 하는 틈을 타서 몽땅 거리로 빠져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골목길을 돌아 탑골공원 북편 문을 향해 달려가다가 벌써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마치고 물밀 듯이 밀려나오는 만세군중과 마주쳤다. 우리는 천도교 총본부를 향해 올라 오는 그 대열에 끼여 들어가서 우리학교(경성여자고등학교) 정문을 지나갔다. 재동 네거리에서 한 패는 창덕궁 쪽으로 넘어가고 한 패는 안국동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향하여 갔다.……군중은 송현 마루 턱을 지나서 육조 앞 광장으로 나왔다. 말을 탄 헌병과 순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선보병대 앞에는 총 끝에 칼을 낀 일본 병정들이 눈알이 뾰죽해서 금시라도 호령이 내리면 군중을 찔러 죽일 듯이 부동자세로 노리고 었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혈서를 쓰는 청년, 손가락을 깨물어서 태극기를 그리는 청년,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치고 열변을 토하는 청년들이 말머리를 들이대는 기마병들 틈에서 이리 번쩍 저리 번쩍했다(Choi, 1991: 112-113).

3.1 운동 시위대가 지나갔던 송현 마루턱은 1960년대 안국동 로터리가 되어 민정당사 앞에 양당 인사들의 집단 연좌데모의 성지로 불렸고, 1970–80년대의 학생운동과 현재 광화문에서 일어나는 집회 장소의 효시로 본다(Na, 2017).

2) 일제 강점기 문화통치와 서구식 문화주택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의 ‘문명화’를 위한 문화통치는 송현동 주변에 전람회, 박물관 같은 근대시설을 보급하여 문화의 기억을 지배하고자 했다.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근대 문물을 전시하는 조선 물산 공진회와 조선 미술전람회, 3차원으로 제작된 경성지도는 당시 기술의 변화를 보여주었다(Figure 11, 12 b 참조).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일제 식민권력을 상징하는 경성역, 경성부청,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운동장 같은 프로이센 스타일의 랜드마크 건축물들이 동시에 건립되었다(Kim, 2009; Jeon, 2015). 조선총독부는 공공공간을 재구성하여 일본의 근대성을 스펙터클화함으로써 조선인의 정신적, 물질적 동화를 끌어낼 것으로 생각했다(Todd,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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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1. The modern view of the Songhyeon area and the goverment general of Joseon in Gyungbok-gung place Source: Great Gyeongseong Map,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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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2. The modernization of the area of Songhyeon Source: Seoul Museum of Histor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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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복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장소 상실과 전통경관 해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이전하면서 일본의 북진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출퇴근하는 일본인과 관사 및 사택 거주자를 위해 송현동 앞과 안국동 사거리까지 북촌 전차 노선이 들어섰다(Figure 12 a 참조). 다음은 경복궁 주변에 일본으로부터 남작이나 공작 지위를 받은 이들과 일본인들이 일본식, 서양식 주택을 지으면서 변해가는 북촌의 경관에 상실감을 드러내고 있다.

“공진회는 경성전기회사의 배를 불려주었다. 그리하여 북촌에도 전차 바퀴 소리가 가까이 들리게 되었다. 그 덕에 해태는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Yeom, 1923).

”경복궁을 중심으로 청진동, 수송동, 중학동, 간동, 송현동, 광화문통과 다시 서편으로 당주동, 도렴동, 적선동, 통의동, 효자동, 궁정동 등지에는 날마다 일본인의 집이 한집 두집씩 늘어가는 대신에 조선사람의 집은 그만치 줄어들게 되는 것은 현저한 사실이라(The Dong-a Ilbo, Oct 26, 1923).

송현동에는 식민기관 사택이 1923년에 들어섰다. 2층에 유리창이 있고 베란다와 포치가 있는 서양식 주택이 들어섰다(Figure 12 c 참조). 문화주택의 시초였다. 1920년대 초의 일본 다이쇼 시대 문화 열풍은 서구식 문화주택을 확산시켰다(Tipton, 2000). 조선의 관사 건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래의 동아일보 기고를 보면 송현동을 친일파에 이어 조선 수탈 기관이었던 식산은행이 소유하게 된 점에 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주택은 조선인에게 부와 신분을 상징하는 근대식 고급주택 건축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Lee, 2019: 346).

송현동 일대는 식은 사택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조선인 경성의 몰락을 알 것이 아닙니까. 이 집은 전신은 부원군보다도 대갈 장군의 아우로 유명한 윤택영씨의 집이 되어 한참은 들썩들썩하였으나, 형제가 시새워 가면서 너무 과분하게 떠들고 지낸 까닭인지, 이 집을 지니지 못하고 학생 기숙관으로 세를 놓아먹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식산은행으로 들이밀고 말았습니다. 식은에서 이 집 부근의 8천 5백 평을 사서 헐고 미국에서 유행하는 근대식으로 서른 네 채의 굉장한 사택을 짓기에 3년의 세월과 70만 원의 금액이 들었다 합니다. 붉은 지붕만 보고 감옥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속에 들어가 보면 이상적으로 된 문화 주택이라고 합니다. …(The Donga Ilbo, Jun 29, 1924).

문화주택 붐은 주택을 상품화한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로 이어졌다. 일본은 한국 지배 초기부터 산림문제를 중시하여 1908년 산림법을 제정·공포하고 조사한 뒤 국유화되어 있던 왕조의 산림을 일본 소유로 변경하고 국유림을 불하하는 방식으로 도시개발을 시도했다(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6: 210-211). 조선 시대 사산금표제로 관리하던 수려한 녹지대였던 삼청동과 화동 일대 맹현 자락도 개발업자에게 불하되어 삼화원이라는 문화주택단지로 개발되었다(Lee, 2019). 다음은 불하될 당시 채석공사에 착수하자 주민들이 분개하며 신문사에 투고한 결의문이다.

시내 삼청동 근처의 맹현동산을 얼마 전에 시내 창성동 152번지 정희찬이라는 사람이 채석할 목적으로 총독부로부터 사가지고 최근에 와서 채석공사에 착수할 모양이라 하여 … 폭탄을 사용하여 채석하며 인접한 인가에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맹현 동산에는 예로 내려오는 삼청동문과 기타의 명승고적이 있고 근방 주민들의 유일한 공원이니 헐어버리지 말게 하여 달라 함이라더라(The Donga Ilbo, Jul 16, 1925).

문화주택 개발과 더불어 신식학교가 밀집하였던 북촌에는 근대교육을 받고자 하는 인구가 급증하여 대규모 도시형 한옥 개발붐이 일어났다(Na, 2019). 조선어학회와 조선물산장려회를 후원했던 정세권(건양사)은 전통한옥의 중정과 온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작은 대지에 맞게 배치한 도시형 한옥을 개발하여 조선인이 살 수 있는 대규모 한옥집단지구를 조성하였다(Kim, 2017: 54). 소나무숲과 북촌의 대갓집은 도시 한옥으로 변하였고, 정원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사라졌다. 하지만 송현동에서 시작된 서구의 문화주택 보급과 북촌으로 밀고 오는 일본인과의 문화전쟁 속에서 북촌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려는 전통문화의 숲이었다.

3. 현대 역사문화 보존정책과 소비문화
1) 미국대사관의 한국미술가 지원과 근현대미술의 태동

광복 이후 일본은 철수하였고 1945년 9월 19일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다. 일본이 남기고 간 토지와 건축물 중 을지로의 반도호텔은 미국대사관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송현동의 식산은행 사택은 미국대사관 직원의 숙소로 사용되었다5). 6.25 전쟁을 겪고 도시는 무질서와 불법과 혼란에 휩싸였고 중심 시가지의 소개도로와 내사산에 무허가 건물이 들어찼다(Kim et al., 2001; Figure 13 참조). 미국은 전후 복구를 원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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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3. The restoration plan after the Korean war Source: The transportation network planning map of Seoul, 1953 https://museum.seoul.go.kr/archive/NR_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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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대사관으로 사용된 을지로 반도호텔 1층에는 반도화랑이 있었다. 미국의 문화 원조 가운데 하나인 아시아 재단의 후원으로 운영된 비영리 기관으로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작품 판매를 통해 작가들을 지원하는 국내 유일의 상설 화랑이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 History, 2008). 미국인 고객이 많았고 송현동에 거주하는 미국대사관 직원 부인들도 주요 고객이었다. 여기서 일했던 박명자 대표는 동양화만 취급하던 인사동에서 1970년에 최초로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화랑을 설립하였고 1975년 송현동과 인접한 사간동으로 위치를 옮겨 화랑가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Kim, 2020).

미국대사관이 서구문화의 통로였다면 송현동 일대는 전통문화와 현대미술이 교차하는 근현대미술의 진원지였다. 송현동 앞 안국동 로터리 앞부터 인사동길에는 자유당과 민주당 당사, 국회의원 사무실, 고급요정과 한정식집부터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작업실, 골동품 상점, 표구점, 서점이 좌우에 퍼져 정치문화와 소비문화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북촌 명문 학교는 교육의 공간이자 새로운 문화가 전파되는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복개된 안국동천길은 종로부터 인사동길과 안국동천길을 연결했고 학생들의 등굣길이었다. 서구식 근대교육과 정치·소비문화를 경험한 학생들은 서울의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Na, 2019).

그리고 오세창과 같이 실학사상과 급진개화파 그리고 고미술의 명맥을 이어간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오세창은 박지원에게 청나라 신문물을 전해주었던 역관 오경석의 아들이고, 갑신정변에 관여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간송 전형필, 조선미술관을 건립한 오봉빈에게 영향을 주어 문화재 반출을 막았다. 아래의 글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광고문으로, 민족 예술에 대한 계승 정신을 담고 있다.

“조선은 오랜 예술국이지만 실제 유물과 역사서에서 증명할 것이 없으므로 나라 안팎에서 안타까웠으나 …위창 오세창 선생이 예원의 완숙한 원로로 일찍 이에 분발하여…역대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 미술가 일천 수백 인의 실제의 일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특기와 장점, 명작 등에 관한 남긴 글과 실기를 편찬한 것이 불후의 대 문헌인 <근역서화징> 인바,”(Kim, 2015).

또한 경성의 미술교육기관은 정동, 원서동, 을지로, 종로, 삼청동, 안국동, 중학동, 소공동 등 곳곳에 위치하였는데 주로 도제식 교육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CAS, 2018). 1960년대에는 인사동에 미술가들이 찾는 구하산방 같은 지필방이 모여있어 고미술 거리를 이루고 있었고, 미군과 유엔군이 찾으며 한때 메리의 거리(Mery’s alley)로 불렸다.

이렇게 축적된 문화 자본을 바탕으로 1970년대 현대화랑에서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도상봉, 천경자, 김기창, 김창렬 등의 전시가 이루어졌다(Figure 14 참조). 현대화랑을 시작으로 미술문화회관, 가나화랑, 선화랑 등 근대미술 창작의 네트워크와 미술시장이 만들어져서 미술의 현대화와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인사동은 57년부터 70년대 말까지 한국미술이 성장하는 발원지였고, 90년대에는 사간동에 금호갤러리, 아트선재센터 등이 들어서며 화랑가를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Kim et al., 2007; Gallery Hyundai,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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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4. Gallery Hyundai and Bukchon Hanok district in the 1970s Source: http://www.hyundaihwarang.com/?c=gallery, https://m.blog.naver.com/s5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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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동 주변에 변화를 가져온 또 다른 흐름은 박정희 정권의 통치이념이었던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였다. 조국 근대화의 하나로 1964년부터 10여 년간 인구분산정책과 산업·학교 입지 등을 억제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나던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취임하여 자동차 시대에 맞추어 ‘도시는 선이다’ 구호를 내걸고 불도저식으로 도로부터 정비했다(Figure 15 참조). 1969년 삼일대로와 낙원상가가 생기면서 북학파가 백탑 시사를 열고, 학생들이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탑골공원 일대와 인사동-송현동-삼청동으로 이어졌던 보행 연결성은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강북학교와 대기업 본사 및 행정기관의 강남 이전(1978) 정책으로 명문 학교라 불리던 북촌 일대의 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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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5. Changes of blocks after the construction of Samil-daero Source: Seoul Museum of History Archive, Chung-ang At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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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산업화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자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대두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민족주체성 회복, 민족중흥을 모토로 하는 국민교육헌장(1968), 문예중흥선언(1973) 등을 발표했다(Oh, 1998; Kwon et al., 2012). 전통문화보존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주거 형태로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한옥은 문화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북촌에 보존 정책이 펼쳐졌다(Ienaga, 2013). 1977년 최고고도지구 지정을 시작으로 1983년 집단미관지구로 지정하여 정부가 북촌의 한옥보존을 위해 모든 건축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당시 주민 인터뷰를 보면 콧대 높던 북촌 사람들의 자부심이 꺾이고 마을이 쇠락해가고, 명문 학교가 사라지면서 인재 네트워크도 희미해지는 변화를 알 수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북촌 땅 1평 팔면 강남에 3평 산다고 했어요. 그래도 팔고 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을 만큼 이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했죠. 특히 부근에 명문학교가 많아 자녀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은 일부러 이곳에 집을 마련했어요. 하지만 한옥보존정책으로 변했어요. 보존도 좋지만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줘야죠. 집수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막상 손을 대자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가난한 세입자들은 그냥 눌러살았어요(The Weekly Dong-a 321:46).

2000년 이후 북촌 가꾸기 종합대책 수립, 2001년 한옥 선언, 북촌 가꾸기 사업 시작, 2002년 한옥 지원조례 제정, 북촌 지구단위계획 수립, 2018년 북촌 도시 재생으로 이어지며 한옥마을은 송현동 일대 장소성 형성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2) 소비되는 역사문화와 전통의 재창조

미국대사관 사택이 있던 송현동은 1980년대 초 미국 대사관 부지로 거론되다가, 1995년에 미국 측이 15층 높이의 청사 건립을 위해 고도제한해제를 요구하자 한-미 관계의 불평등한 단면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당시 정치권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있었고, 1996년에 구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철거하고 역사문화도시를 지향하게 되었다.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자치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면서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요구와 논의가 이루어지고 시대적 가치와 의식이 변하고 있었다(Lim, 2014). 2000년대 들어 한양도성 내는 역사도심기본계획이 만들어졌다(Figure 16 참조). 미국대사관 사택이 있던 송현동은 북촌 인사동 돈화문 부문으로 설정되어 중요한 공공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Seoul,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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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6. The status of Songhyeon-dong in the historical city plan Source: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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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동에 대한 미국의 요구에 서울시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태도라며 강경하게 반대했고, 정부는 옛 덕수궁 터를 제안했다가 문화재 보존 이슈로 논란을 겪고 용산 캠프 코이너를 부지로 제안하였다. 미국으로부터 반환된 송현동은 빈 땅으로 남게 되었다. 1997년에 삼성생명이 1,400억 원에 매입하여 복합문화시설 건립을 계획했다가 경제위기로 무산되었고, 2009년에 대한항공에서 2,900억 원의 비용을 들여 토지 매입 후 문화복합시설을 포함한 7성급 한옥호텔을 제안했으나 학교보건법으로 무산되었다(The Seoul Shinmun, 2013).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계속 밀려드는 관광 인파에 질식사 직전이다. 대한항공이 호텔을 짓겠다고 나선 터는 이 지역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자 허파다. 공공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가져야 하는 공간이다(The Kookmin Ilbo, 2010). 서울의 심장 인근인 종로구 송현동 부지에 뉴욕 센트럴파크를 뛰어넘는 대형숲 공원을 만들면 좋겠습니다(Kim Youngjong, head of Jongno-gu; The Seoul Shinmun, 2019).

2010년부터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국가와 시가 나서서 송현동 땅을 매입한 뒤 공원과 주차장 및 문화시설을 조성하거나, 종로구청과 대한항공이 땅을 바꾸어 개발하는 것을 제안했다.

2014년에 대한항공은 다시 한번 호텔을 포함한 한국문화를 체험하는 복합 문화센터를 제안했으나 송현동 호텔 건립반대 시민모임의 반대로 사업을 철회했다(Figure 17 참조). 역사문화의 장소 가치를 상품화하여 대기업이 소비문화를 조장 할 수 있다는 점에 시민들의 반대가 컸다. 이후 종로구와 서울시는 송현동 부지의 공공성에 관해 주장을 키워갔다(주 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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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7. Korean Air’s hanok hotel proposal Source: 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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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공공의 역할, 시민참여와 담론이 도시계획에서 영향력이 커졌다. 또한 삶의 질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고 공공은 뉴욕의 센트럴파크 같은 시민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는데 정치적 목표를 두었다. 2019년 송현동 부지가 매물로 나오자, 송현동의 미래 모습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경합했다. 종로구에서 제안한 숲 조성은 2019년 11월 송현동 부지 국가 매입 운동의 일환으로 송현 숲·문화공원 조성 토론회가 있었고 서울시의 협조를 구했다(Mvoting, 2019).

예전부터 정치권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에서 국가가 나서서 매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근 기무사 부지가 국립현대미술관이 됐고, 풍문여고 자리에 공예박물관이 들어선다. 송현동은 여전히 금단의 땅으로 남아 있다. 대한항공이 매각하기로 한 현시점에서 공공이 매입하지 않는다면 송현동 부지는 영영 공적으로 활용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장소성 회복을 위해 시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The Hankook Ilbo, 2020).

2020년부터는 서울시가 공적 활용을 위해 매입을 시도했다. 팬데믹 사태로 대한항공이 경영난에 처하게 되어 송현동 부지 매각을 서둘렀으나 서울시가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열어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송현동 부지를 공원으로 결정했다. 공원화를 선언하여 공공기관만 토지를 매입할 수 있게 되자 대한항공의 민간재산권 침해 주장과 서울시의 공원화 선언은 대립하였으나 국민권익위원회의 중재로 합의에 이르렀다. 용도는 문화공원으로 지정하였고, 용지매입 방식은 LH공사가 개입하여 송현동 부지를 매입 후, 서울 시유지와 맞교환하도록 조정했다(The Seoul Shinmun, 2021).

역사문화공간을 조성하는 담론과 공공의 움직임은 활발하다. 송현동의 동 측과 서 측에 위치했던 국군기무사령부 터와 안동별궁 터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과 공예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은 화랑이 밀집되어 있던 경복궁 옆 사간동 일대를 문화거리로 만들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건립하자는 문화계 인사들 의견이 공론화되면서 추진된 일이다(Hankyoreh, 1996). 한옥마을의 전통공방, 국립고궁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서울 공예박물관과 벨트를 이루며 역사문화공간으로 빠르게 탈바꿈하고 있다(Figure 18 참조). 주변 지역이 문화공간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2021년 4월 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되었고, 송현동은 미술관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 100여 명은 다음과 같이 송현동에 근대미술관이 건립되어야 하는 의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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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8. The area of Songhyeon-dong where the Lee Kun-hee Donation Hall will be built Source: http://m.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2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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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는 지난 20여 년 전부터 근대미술이 현대미술관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기형적인 상황이 이어져 왔다. 국립 근대미술관은 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근대미술작품 2,000여 점과 삼성가 기증 근대미술품 1,000여 점을 기반으로 국립 근대미술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이 부지는 삼성생명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매입했던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선재미술관, 서울 공예미술관과 인사동을 연결하여 문화예술클러스터로 조성한다면 시너지가 대단히 클 것이다(The JoongAng Ilbo, 2021).

이러한 논의 속에서 2021년 11월 10일 문화체육부는 송현동에 이건희 기증관을 짓기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기증관의 정체성과 규모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미 소장처를 정해 기증한 유물, 작품들을 다시 모아 동서양과 시대, 분야 경계를 넘어서는 융·복합 문화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에 대한 반론이 있다. 기증관의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수장고의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역사문화지구인 송현동 부지의 수용 규모를 넘어선다는 의견이다. 숲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IV. 송현동 장소성 분석의 시사점

지금까지 송현동의 문화적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를 살펴보았다. 당대 최고의 문화가 발현되었던 북촌의 한 부분으로서 송현동에 얽힌 기록은 재창조할 수 있는 사실들이 담긴 풍성한 기억의 창고와 같다. 다만, 지역의 일부를 글로 묘사한 자료가 흩어져 있어서 지도 위에 조각들을 놓아 전체적인 맥락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문화가 공간정책을 통해 송현동을 비롯한 북촌의 대규모 필지에 미친 영향은 Table 1의 그림(a)∼(d)와 같이 시각화할 수 있다. 송현동뿐만 아니라 북촌 일대의 변화양상을 공간데이터로 살펴봄으로써, 장소성을 형성하는 요소인 반복되는 활동과 유사한 시설의 밀집 정도를 전체 맥락에서 검토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소나무숲의 위치와 범위가 어느 정도였고 지형은 어떠했는지, 3·1운동 역사유적지 가운데 송현동은 어디에 위치했으며, 북촌 일대의 화랑, 한옥, 문화시설과 남아 있는 옛길의 관계는 어떠한지 분석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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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Spatial changes of Songhyeon-dong and Bukchon according to the emergence of cultural hegemony

첫째, 북촌에는 송현을 비롯한 맹현, 홍현과 같은 사산의 소나무숲이 상징적인 경관이었다. 소나무숲의 사상적, 제도적 근거는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한양도성의 사산과 지맥을 보호하는 사산금표제였고, 송현은 내청룡의 지맥에 해당하기 때문에 신라부터 내려오는 비보 사상을 따라 땅의 기를 돋우어 주는 소나무 숲이 만들어졌다. 구체적인 위치와 범위는 Table 1의 (a)에서 장원서부터 북학으로 이어지는 십자 패턴 부분이다. 주변에는 북악산에서 이어지는 맹현, 홍현과 삼청동천이 흐르고 있고, 장원서, 사간원, 종친부, 종부시 같은 관청이 위치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경복궁 주변의 경계는 완화되었다. 송현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절경은 행락 문화와 정원문화로 향유되었다.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청나라 문화인 북학이 유행하여 송현동에는 심상규의 중국식 정원인 가성각이 들어섰고, 그와 교우했던 세도가 김조순의 삼청동 옥호정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원조영술은 정원의 근경과 소나무숲의 원경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성리학적 공간이자 한양 특유의 문화경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Table 1-(b)를 보면 개항과 함께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근대교육기관인 학교가 설치되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북촌의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의 가옥을 학교용지로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인구가 급증하여 Table 1-(c)와 같이 국유지였던 맹현, 홍현 같은 소나무숲이 주택건설사업자들에게 불하되어 도시형 한옥 주거단지로 개발되었다. 송현은 윤덕영이 토지를 병합하여 북촌에 설립된 신식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하숙집으로 운영했고, 문화통치기에는 조선 식산은행 사택인 대규모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서구 도시계획과 인구증가에 따른 개발압력, 율곡로 확장, 전차개설로 옛 송현의 모습은 사라졌다. 수진방과 일부 송현동이 수송동으로 통합되었고 남은 일부가 송현동이라는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사라진 소나무숲이 다시 공원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어떤 소나무숲이 되어야 할지 논의가 시작되는 시점에 조선 시대 소나무숲의 특성이 시사하는 바는 연속성을 갖는 조선 시대 녹지정책의 상징성이다. 땅을 인간의 이익을 위한 수단만으로 보지 않았으며, 함께 조화되어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으로 여겼다(Han, 1992). 산맥을 따라 선형적으로 녹지를 보존한 방식과 자연 속에 펼쳐진 것처럼 연속적인 정원을 조성한 조선 시대 정원문화의 진수를 재해석하고 현대화하는 데 의의가 있다. 아울러 향후 북악산, 삼청동천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생태적인 복원의 거점으로 가치를 확장할 수 있다.

둘째, 송현동의 안국동천길은 북촌-송현-인사동을 이어주는 길이다. Table 1의 (a)를 보면, 자연에 순응했던 물길이었고,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막내아들 임영대군의 처소가 생기며 개발되기 시작하여 심상규, 김병주 등 왕실관계자와 경화세족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한편, Table 1-(b)에서 안국동천길, 안국동길, 인사동길은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개화와 애국계몽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길이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을 비롯한 백탑파의 세거지와 연결되었던 길이며, 송현동 학생하숙집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과 그들의 행진이 기억되는 장소이자, 시민탄생과 민족의식의 태동, 학생문화의 전통성이 만들어진 역동적인 가로이다. 이 가로들은 Table 1-(c)를 보면 일제 강점기에 율곡로 건설로 한번 단절되었고, 1970년 김현옥 시장 재임 기간에 Table 1-(d)와 같이 삼일 대로 건설로 블록의 원형이 훼손되었고 탑골공원과 돈화문로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하지만 안국동천길과 인사동길만 옛길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고, 도시재생을 통해 보행로가 개선된 세종로, 돈화문로와는 규모와 상징적인 면에서 차별화된 휴먼스케일 보행로의 특성을 보인다.

역사의 흐름에서 송현동 일대의 보행로와 인사동길, 삼일대로, 종로는 시민탄생과 공론장의 씨앗이 뿌려진 사회적 공간이었고 근대 발아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근대의 정신, 시민이 탄생하고, 자아가 주체가 되는 공론장의 정신을 되새기고, 기념하며 오늘의 시대에 주체가 되어 살아갈 공간이 필요하다. 왕조 탄생부터 시민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공간이자 자연에 순응했던 공간구성원리는 자본화, 세계화 등으로 규격화되었고, 장소성을 상실해 갔다. 실학사상과 개화사상, 만민공동회, 3.1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던 구역의 연결과 재생은 정신적 공간을 연결한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다. 송현동은 역사 도심에서 광화문-북촌-인사동-돈화문으로 이어지는 보행 네트워크의 한 조각을 구성하는 지역으로, 안국동천길은 사회적 공간과 시민의 탄생을 기념하는 보행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송현동 일대는 왕실에서 도화서를 통해 주관하던 예술 분야가 민간으로 전승되고 전문 미술가가 출현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Table 1-(a)를 보면 송현동 주변은 궁궐 옆이기 때문에 주로 관청과 대갓집이 자리했다. Table 1-(c)를 보면, 인사동길에 고미술과 서점 등이 밀집하여 미술품 판매가 시작되었고, 광화문통과 함께 주요 거래처가 되었다. Table 1-(d)에서 미술 관련 시설들이 주요 경관을 형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군정이 시작되며 반도호텔의 미국대사관 내 반도화랑에 한국 현대화가의 작품을 거래하는 미술시장이 만들어졌다.

시대의 격변 속에서 현대화랑을 만든 박명자,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미술 세계를 만들어간 박수근 등 당대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관계망이 형성되었던 장소이다. 격동기를 거친 이들의 작품에는 당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인사동과 사간동 일대는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며 한국적 추상화와 근대미술이 태동했던 지역이다. Table 1-(d)에서 현대화랑, 금호갤러리, 국제갤러리를 필두로 90년대 사간동에 화랑이 밀집하게 되었고, 아트선재센터와 북촌한옥마을에 공예전시실이, 삼청동에는 소규모 공예상점이 밀집하게 되었다. 2010년대에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 의과대학이었던 기무사령부 터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시민에게 공개되었고, 안동별궁터에 서울 공예박물관이 오픈하면서 주변에 역사성을 띄고 있는 대규모 토지의 용도가 문화시설로 변화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소나무 띠로 둘러싸여 구별되고, 접근할 수 없었던 금단의 공간이 시민의 공간과 예술품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이건희 기증관이라는 새로운 장소 요소가 등장하여 변화할 예정이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문명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이 소비나 예술품에 심취하게 된다고 비판하지만, 예술작품의 직접적 원천은 인간의 사유능력이며 예술작품은 사유의 산물이다(Park, 2014: 122; Arendt, 2016: 227-228). 그리고 예술, 전시 공간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공원과 복합화하며 창조경제로 확장하고 있다. 송현동은 근현대 예술을 잇는 지역으로서 갤러리와 북촌한옥마을, 전통문화, 공예, 예술의 거점이다. 따라서 이건희 기증관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미술과 근대미술의 고뇌를 만나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고 서로 다른 경관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Benedict, 2018). 또한 메타버스 기술과 예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시민을 넘어 시민예술가의 탄생을 여는 새로운 초석이 될 것이다.

송현동의 변화는 외적인 힘과 정치적 사건들의 산물이었지만 주변 맥락 속에서 사료를 분석하고 의미지도를 작성함으로써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 소나무숲과 정원, 법고창신과 시민의식이 태동한 옛 가로, 전통공예와 현대미술을 잇는 근현대 문화예술인의 활동은 한국의 미를 향유하고 민족의 실존을 자각하는 정신적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V. 결론

본 연구는 송현동과 같이 기억의 터만 남은 역사문화지역에서 관련된 역사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역사 도심에서 비슷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다른 복원지역과 장소성 재현에 있어서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했다. 한정된 정보로 인해 표피적인 해석이나 획일적인 장소성 재현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송현동 일대가 역사이행과정에서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문화 권력과 혁신 주체가 형성되었던 점을 주목하여 장소성 변화의 요인을 폭넓게 조명해보고자 했다. 분석결과 송현동에 영향을 미친 문화 헤게모니는 ‘중화주의’, ‘대항해시대’, ‘시민혁명과 민족자결주의’, ‘제국주의’, ‘산업화와 민족주의’, ‘대중예술과 신자유주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은 문화적 동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계층을 만들었고, 이들이 지향하는 사상과 공간적 실천은 시대마다 다음과 같이 다른 장소성을 형성하였다(Figure 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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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9. An analysis diagram of placeness changes in Songhyeon-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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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중화주의에 따라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 신진사대부’는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와 신라 시대부터 전승되어온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도성을 관리하는 공간정책을 펼쳤다. 송현은 내사산의 지맥을 보호하여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고자 만든 비보숲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연행을 통해 서구의 대항해와 청의 문물을 접한 경화세족’이 송현동에 청나라풍의 정원을 조영하였고, 주변에는 북학파가 시대변화에 문제의식을 품고 대립하였다. 송현의 구체적인 위치와 규모 및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조선왕조실록, 겸재 정선의 그림, 문물을 묘사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소나무숲은 맹현, 홍현과 함께 북악산과 연결되어 주변의 정원문화와 함께 한양의 상징적인 경관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갑신정변부터 3·1운동 시기에 송현동 일대는 ‘실학을 추구하는 북학파-근대화와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급진개화파-학생들의 3·1운동 관계망-애국계몽결사체’로 이어지는 사상교류의 장소였다. 자료는 주로 인물 중심으로 김옥균, 서재필, 손병희 등의 활동을 조사하거나 송현동 하숙집에 거주하던 장채극, 박쾌인 학생의 3·1운동 판결문, 최은희 기자의 학생 시절 3·1운동 기록을 조사하여 정치 혼란 속에서 공론장을 만들어 시민사회를 실천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의 문화통치기와 전시체제기에는 ‘식민화 조직’ 인 조선식산은행의 서구식 문화주택이 들어서면서 전통문화경관 해체와 전통의 재창조가 대립하는 지역이었다.

셋째, 미군정 시기부터 현재까지 송현동 주변에서 활발한 활동은 ‘근현대미술의 출현과 미술시장의 형성’이다. 조선 후기의 고동서화 수집 열풍, 근대학교의 미술교육과 학교 주변에 사숙 형태의 미술교육기관 밀집, 일제 강점기의 미술전람회, 미국대사관의 한국 현대 미술가 지원 및 미술시장 형성은 문화 자본이 되어 근현대미술가들이 활동하는 장이 되었다. 현대에는 주로 신문기사와 정책보고서를 통해 역사문화 지역의 상업화에 대항하는 ‘시민 담론형성체’가 송현동의 장소 의미를 공유하고 역사성 보존을 공론화해가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층층이 쌓인 역사의 켜 속에서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고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역사의 매듭은 누군가 선두에서 시대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하는 창조 활동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집권계층의 독점과 세습으로 이어졌던 송현동 부지가 기억의 터에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이 시대의 지배적인 헤게모니가 무엇인지 진실을 논하고 미래방향을 이끌어갈 파레시아로서 담론형성체의 역할이 중요함을 상기시킨다. 특히, 해외 유명건축가의 파격적인 건축으로 재생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성소 건축이 중심이 된 서소문성지공원의 경험은 역사문화공원의 장소적 가치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문제를 던진다.

본 연구는 송현동에 조성될 숲은 점적인 공원이 아닌 산의 지맥을 보호하는 조선 시대 금산정책과 전통정원의 미학을 계승할 지역으로서 가치를 두었다. 안국동천길은 옛길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어 광화문-북촌-인사동-돈화문로를 연결하는 역사도심 보행 재생의 한 부분으로 의의를 지닌다. 이건희 기증관은 현재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논의 중 적합한 미술관으로 이미 보내진 작품을 다시 모아서 송현동에 거대한 기증관을 만드는 방향도 고려되고 있다. 하지만 수장고가 커질 경우 역사문화지역에서 문화재나 역사 흔적이 발굴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숲을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공원과 미술관의 관계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어 소나무숲과 전통 정원의 조형미가 조화롭게 재현될 수 있는 미술관의 건축 공간에 대한 논의도 통합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의는 송현동의 장소성이 변화한 과정을 시계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과거 장소성에 대한 해석과 앞으로 만들어질 장소성에 대한 시사점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다만, 각 시대를 세밀하게 분석하기에 지면과 역량에 한계가 있었다. 장소성에 근거한 재현 방식에 대한 연구는 향후의 과제로 남는다.

Notes

2014년 4월 16일 (수) 오후 4시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역사문화는 규제의 대상이 아닌 보호해야 할 가치라는 주제로「송현동 부지 호텔건립 저지를 위한 NGO 연대 토론회」가 있었다. (사)경실련도시개혁센터·문화연대·도시연대(2014) 역사문화ㆍ학습환경 훼손하는 호텔건립 바람직한가?

2018년 12월 3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8 간담회실에서 정세균 국회의원·박영선 대표·풀빛문화연대 주최로 송현의 역사성 인식과 공원화에 대한 주민설문조사결과에 대해 토론회가 있었다. 「송현동 숲공원화 및 발전방안 토론회」자료집.

2019년 10월 1일 민속박물관에서 정세균 국회의원의 주최로 종로 송현 숲 문화공원 조성 2차 토론회가 있었고, 참석한 시민을 대상으로 송현동 부지의 공원조성계획에 대한 현장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송현동에 숲 문화공원을 만드는 것에 87.5%가 찬성하였다. 원래 지형 복원 후 소나무를 심어 한국전통 자연경관 회복하고 시민의 공간을 만들자는 의견과 공원 조성 시 교통량 증가와 주차 및 대기오염,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종로 TV 송현 숲 문화공원 조성 2차 토론회.

송현동은 2021년 12월 22일 서울시의회 정례회 제5차 본회의에서 “서울을 대표하는 송현동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고자 대한항공소유의 토지를 서울의료원 등으로 사용 중인 시유지(강남구 삼성동 171-1)와 교환 처분한다”는 서울특별시 2022년 정기분 공유재산 관리계획안에 대한 수정안을 의결했다. 서울특별시 2022년도 정기분 공유재산 관리계획안(의안번호10-02901).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람을 채움, 산에 나무를 심어 산맥을 배양하는 것.

경복궁과 경덕궁의 뒷산[主山]과 거기서 뻗은 산줄기[來脈], 산등성이, 산기슭에서는 경각을 금지하며 도성 바깥 산인 경우에는 다만 산등성이에서만 경작을 금지한다.『경국대전』권6, 공전 재식.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1948년 9월 11일 미군정의 재산과 부채를 한국정부에 이양하는 내용의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Initial Financial and Property Settlement between R.O.K and U.S.A)이 체결되었으나, 송현동 식산은행 사택은 대한민국정부 출범 이후에도 미국이 사용하게 되었다. 한미 간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 재정 급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 조약 제1호 바 조항. 서울역사박물관(2019) 북촌 1863-1962, pp. 337-339 참조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49271925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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