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용산공원 프로젝트는 서울 중심에 위치한 주한미군기지의 평택 이전 후 반환되는 약 300헥타르의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대규모 국책 사업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되었으나 지금껏 부지의 일부가 대한민국 정부로 반환되었을 뿐, 공원 조성은 여전히 계획 및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반환받은 부지를 순차적으로 개방하여 공원 조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장으로 삼고자 했으며 2020년 7월, 그 첫걸음으로 미군기지의 동남단에 위치한 장교숙소 5단지를 공개했다. 당시 정부는 장교숙소 5단지의 개방이 용산미군기지의 일부가 대중에게 공개된 첫 사례로 보았으며 이러한 내용을 시민들에게 홍보하였다(국토교통부 보도자료, 2020).
그러나 서울기록원에 보관된 공원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90년 한미 협상에 따라 기지의 일부(미8군 골프장 부지)가 이미 대한민국 정부로 반환된 바 있으며 1992년 이곳에 용산가족공원이 조성되었다. 기록물을 통해 장교숙소 5단지의 개방이 반환된 용산미군기지가 대중에게 공개되는 두 번째 사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반환된 기지를 원상태 그대로 개방한 장교숙소 5단지와 비교하여 용산가족공원은 용산미군기지를 공원의 형태로 조성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용산가족공원이야말로 용산공원 조성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022년 5월,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 국방부 청사 내로 이전하면서 용산공원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다. 정부는 반환받은 부지의 일부를 도시의 공공 공간으로 임시 개장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용산가족공원 또한 임시 공원으로 개장된 점에 주목하며, 서울시 공공 기록물을 통해 용산가족공원의 조성 과정을 살펴 향후 용산공원 조성 시 참고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고자 본 연구를 시작하였다.
연구의 목적은 서울시 공공 기록물을 분석하여 용산공원 조성 사업에서 용산가족공원이 가지는 위상과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용산공원 조성 사업을 위한 시사점을 도출하고 장기간 지속되는 공원 조성 사업에서 공원 아카이빙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을 세부 목적으로 삼는다.
연구의 범위는 용산공원 및 용산가족공원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1989년 말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으로 용산가족공원의 면적이 축소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된 1997년까지다. 이 사이 생산된 서울시 공공 기록물 중 2020년 4월 기준, 서울기록원에 이관된 공공 기록물 가운데 제목에 ‘공원’이 들어간 기록물 759,836건을 우선 확보하였다. 이 중 ‘용산공원’과 ‘용산가족공원’의 키워드로 검색되는 301개의 기록건(기록철 28개)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주요기록물 53건을 최종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하였다.
본 연구는 서울기록원의 기록물을 살펴 용산가족공원 조성 과정을 재구성하여 중요한 변곡점을 기준으로 장을 구분하였다. 2장은 미8군 이전적지의 공원화 사업이 시작되어 공원 초기 계획이 수립된 시점까지, 3장은 본격적인 용산가족공원의 설계 과정에 대해, 4장은 용산가족공원이 임시공원으로 개장되고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상당 부분 자리를 내어주게 된 연유를 다루었다. 5장 결론 및 시사점에서는 앞서 살펴본 여러 조성 단계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용산공원과의 관계 속에서 용산가족공원의 의미를 찾고, 용산가족공원의 조성 과정을 통해 현 시점의 용산공원에 줄 수 있는 교훈을 파악하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기록물의 중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시사점을 이끌어 냈다.
선행연구는 크게 용산공원 관련 연구1)와 공원 아카이빙 연구로 나뉜다. 최혜영(2022)에 따르면 용산공원 관련 연구는 1990년 이후로 찾아볼 수 있다. 초기에는 공원의 비전 및 성격에 관한 연구, 용산기지의 계획 및 설계를 위한 기지 환경에 대한 연구 또는 기지를 대상으로 하는 설계형 논문 등이 주를 이루었다면, 2012년 설계 국제공모 이후에는 공모 출품작을 다양한 틀로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 본격적으로 공원 설계 과정이 시작된 2012년부터는 용산공원 조성 과정의 문제점을 살피고 대안을 제시하는 여러 연구가 발표되었다. 공원 아카이브에 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상황이다. 미국 조경 아카이브의 구축 동향을 살펴 한국에 적용가능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 연구(이명준 등, 2019), 서울기록원에 보관된 공원 관련 기록물을 살펴 서울시의 공원 정책 변화를 분석한 연구(심지수 와 이명준, 2021), 영국, 미국, 일본의 사례를 통해 역사적 도시공원을 보존함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그 방식을 살펴본 연구(길지혜 와 박희성, 2020), 공원사 관점에서 남산공원 연구를 추진하기 위해 서울시 공공기록물을 고찰한 연구(김정화 등, 2022)가 공원 아카이브 주제를 다룬 몇 안 되는 대표적 연구다. 본 연구는 용산가족공원에 대한 첫 번째 연구이자 특정 공원 사례의 기록물 분석을 통해 공원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차별성이 있다.2)
2. 용산 미8군 이전적지의 공원화 계획과 용산가족공원의 기본 구상
용산 미8군 이적지의 공원화 계획은 1988년 12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용산 미8군 기지를 포함한 주한미군의 이전과 전시작전권 환수를 내세운 바 있다(최혜영, 2020). 용산기지의 공원화 계획은 기지 이전 후 활용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 대통령의 명에 따라3) 서울시는 전문가 3인 —오휘영 한양대학교 대학원장(조경), 황기원 서울대 환경대학원(조경), 여홍구 한양대 공과대학(도시설계)—에게 의뢰해 기본 구상안을 작성하였고, 1989년 5월 11일 대중에게 공개했다. 당시 서울시의 보도 자료를 살펴보면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 용산기지뿐만 아니라 육군본부 자리까지 포함하여 서울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세계 제일의 휴식 공간”을 조성할 것, 둘째, 전문가로 하여금 해외의 유명한 공원을 둘러보고 참고하여 공원 계획을 작성하게 할 것, 셋째, 이용의 편의성을 위해 도로 및 주차시설, 녹지 공간, 휴게시설 등을 충분히 확보할 것, 넷째, 공원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동작대교와 후암동의 연결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했다(서울특별시, 1989a).
전문 계획단에 의해 도출된 1차안으로서 서울시의 기본 구상안은 이를 충실히 반영하였다. 공원 조성의 기본 방향은 휴식 공간의 기능을 담으면서 민족자존의 회복이란 상징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공원 전체는 비원과 같은 한국식 정원과 자연림 등 인공 시설을 최소화하고 숲과 산책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되, 중앙(현 이태원로 상부)에는 민주, 자주이념, 통일의지를 구현하는 민족공원임을 드러내기 위해 기념 시설을 도입하고자 했다(김윤순, 1989; 서울특별시, 1989a)(Figure 1 참조).

주목할 점은 기지 내 미8군 골프장지역(현재 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 자리)의 공원화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발표된 미8군 이적지 공원화를 위한 전체 부지는 미8군 부지 3,050,000제곱미터, 국방부 및 육군본부청사 300,000제곱미터, 조달본부 140,000제곱미터를 합친 총 3,490,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이었다. 이 중 미8군 골프장 부지의 면적은 396,000제곱미터(약 12만 평)로 전체 부지 면적의 약 13%에 달하는 꽤 비중 있는 규모였다.
규모뿐 아니라 1989년 5월 2일, 미8군 골프장이 전체 기지 중 가장 먼저 반환되는 것으로 한미 간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1단계 사업지로서 중요도가 높아졌다(서울특별시, 1989a). 전체 기지가 반환되려면 1990년대 중반은 되어야 했기에 단기간에 300헥타르에 달하는 기지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따라서 미8군 골프장은 미8군 이적지의 공원화 계획을 빠른 시간 내 구현하여 대중에게 개방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서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골프장 지역의 공원화를 지시하면서 “짜집기식이 아니라 전체 계획과 조화를 이뤄 건설할 것”을 주문하였다(서울특별시, 1989a). 이렇듯 전체 공원 계획뿐 아니라 그 일부인 골프장의 공원화 계획 또한 중요하게 다뤄졌으며, 동시에 계획 수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전체 공원에서 내세우고 있는 기본 구상의 방향에 맞춰 골프장의 공원화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1989년 당시 1차안으로 공개된 구성안에서 이곳의 명칭은 “용산시민공원”이었다(Figure 2, Figure 3 참조).


3. 용산가족공원 설계 공모 및 기본 계획 수립
1989년 11월 10일, 서울시는 ‘용산 군이적지 활용방안과 일대 기본계획 수립 및 골프장부지 조경기본계획’4) 수립을 위한 적격 업체 선정 평가를 실시했다(서울특별시, 1990a)5). 이를 통해 1989년 12월, ㈜삼안건설기술공사가 과업수행자로 1990년 12월 20일까지 과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서울특별시, 1990a). 과업의 명칭대로 두 개의 과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중 골프장부지의 공원화 계획은 공청회 등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1990년 5월 30일 이전 조기에 제출하도록 요구되었다(서울특별시, 1990a)6). 골프장부지의 공원화가 시급하게 추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1989년 4월 26일 발행된 국방부 관재 22400-424호에 따르면, 국방부는 1990년 하반기에 미8군 골프장을 반환받아 그 부지를 매각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서울시에 공원조성을 위해 미8군 골프장 전체 면적인 약 12만 평(119,500평)의 부지를 매입할 수 있는 예산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서울특별시, 1989b). 이는 한미 간 합의에 따른 것으로, 한국정부는 미군 측에 대체 골프장을 1990년까지 제공하고 미군은 용산 미8군 골프장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기로 하였다(서울특별시, 1989c). 1990년까지 대체 골프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한국정부에서 1989년부터 예산을 확보하여 대체 부지 마련 및 공사에 착공해야 했다. 서울시와 육군본부는 1990년 6월 18일 미8군 골프장 부지 일부에 대해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육군본부는 6월 23일 매매계약서를 발부했다(서울특별시, 1990b). 서울시는 용산 미8군 골프장 부지 중 일부—기본구상안에 따르면 진입광장 영역인 31,806.35제곱미터(9,261평)—를 우선 200억 3천 8백만 원에 매입했다(서울특별시, 1990c).
부지 반환, 매입 절차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서울시 도시계획국은 미8군 골프장 공원조성 기본계획 공모전(‘용산가족공원(가칭) 기본계획 현성설계 공모’)을 개최하였다7). 이때 전체 공원 구상이 어느 정도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원 구상안은 1989년 5월 초기안에서 용산시민공원으로 명명되었던 골프장 부지를 ‘가족공원’으로 표기하였다(Figure 4 참조). 부지는 가족공원뿐 아니라 풍치공원, 체육공원, 과학공원, 식물공원 등 영역별로 다양한 주제가 부여되었다(Figure 5 참조).


1990년 9월 1일에서 9월 2일 양일간 두 개의 일간지에 공고를 내 9월 6일에서 9월 8일까지 3일간 응모신청을 받았으며(61건), 10월 26일에서 10월 27일 이틀 동안 23개의 응모작품이 접수되었다. 심사는 11월 7일에 실시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용산군이적지 공원 구상안을 작성했던 3인, 기본계획을 담당하고 있는 ㈜삼안건설기술공사의 대표 또한 포함되었다. 그 결과 한림환경엔지니어링이 당선되었다(서울특별시, 1990d). 당선팀에게는 실시설계권이 부여되었다(서울특별시, 1990e). 1990년 11월 6일, 시상 및 작품발표회가 진행되었다8). 당선안에 대해 심사위원, 도시계획위원, 100인 위원회가 토론을 하여 종합의견서를 작성한 뒤, 이에 의거 당선작을 보완하여 공원의 기본계획을 확정하고자 했으며 1990년 12월 15일 용산가족공원 기본계획이 최종 확정되었다(서울특별시, 1990f)(Figure 6 참조).

당선작은 공원의 목적을 “일반 대중의 여가 활동에 맞는 가족놀이 동산 공원”으로 삼고 있으며 “큰 뜻을 가진 큰 공원의 시작”, “큰 공원의 남측 진입 공원”을 공원의 의의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미래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수용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설계”를 지향하고, “융통성과 다목적성”이 있는, “소박하고 친밀한” 공간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용자가 자유롭게 공간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상징이며, 수직적이고 수동적인 구조물을 지양하고 “자연 속에서 수평적 기념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공원의 경험은 한국의 다양한 풍경을 경험할 수 있는 삼천리로와 전통놀이 마당과 피크닉장, 운동장 등을 연결하는 십이지상로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다(서울특별시, 1990d).
4. 용산가족공원의 임시 공원화
설계 공모 이후 가족공원의 실시설계는 빠르게 추진되었다9). 골프장의 이전이 1991년 5월 30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춰 착공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이다. 1990년 12월 28일, 용산가족공원의 실시설계용역 계약이 체결되었다(서울특별시, 1990g). 기술용역 발주 계획서에 명시된 사업의 목적은 “용산 기지의 전체 공원화 계획의 일부인 가족공원이 독자적 개성과 영역을 가지면서 전체 공원화 계획과 조화를 이루며 전체공원의 성공을 이끌어갈 시금석이 될 수 있도록 실시설계의 수립”이었다(서울특별시, 1990f). 1990년 내 조속히 시작하기 위해 12월 28일 일단 계약을 체결한 뒤 해가 넘어가기 전인 12월 31일 준공기한을 연기하는 방식까지 동원되었다(서울특별시, 1990g)10). 그만큼 서둘러 진행하던 사업이었지만 1991년 초 기조의 변화가 생겼다. 몇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용산기지의 국가공원화가 결정되었다. 1991년 4월 9일, 국무회의에서 용산 군이적지 공원화 사업 주체를 국가로 결정했다(서울특별시, 1991b). 즉, 국가 소유 및 주도의 공원 조성이 새로운 방향이 된 것이다(서울특별시, 1991b). 이어 1991년 7월 19일, 총리실 외 8개 국가기관과 서울시가 모인 용산계획 실무위원회에서 공원 조성은 국비로 하되 사업은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서울시가 이미 부지대금으로 지급한 200억 원 등의 비용은 추후 주관부처가 결정되면 그 부처에 서울시가 청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서울특별시, 1991b). 이후 건설부가 주관부서를 맡되 서울시에서 계속 공원 조성 및 관리를 해 나가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이에 대한 실무협의만 이루어졌을 뿐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서울시는 비록 설계 공모를 통해 가족공원의 계획안을 마련했지만 더 이상 공원 조성의 주관부서가 아닌 상황에서 서울시 도시계획국 단독으로 계획안을 확정하고 이에 따라 공원을 조성하는 데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둘째, 미8군 골프장 내 일부 미군 시설이 잔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미8군 골프장은 18홀의 골프코스와 클럽하우스뿐 아니라 야구장, 헬기장, 하수처리장, AFKN 안테나가 함께 있는 약 396,000제곱미터(12만 평)의 부지였다. 1991년 5월 30일, 미8군 골프장은 성남의 대체 골프장으로 이전해 가면서 6월 1일 부로 폐쇄되었는데, 여전히 부지는 미군의 소유인 상태였다. 미군은 12만 평 전체를 반환한다는 기존 방침을 바꿔 야구장과 클럽하우스 영역 등 3만 평을 환수대상에서 제외했다(서울특별시, 1991c)(Figure 7 참조)11). 또한 1991년 5월 29일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있었던 국방부, 미8군, 서울시 공원과가 함께한 회의에서 미군 측은 부지 내 헬기장과 오수처리장의 기능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했다(서울특별시, 1991b).

셋째, 미군 잔류시설로 인한 비용이 발생되었다. 미군은 헬기장과 오수처리장의 경우 공원 조성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지만 이 경우 한국 정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전과 별개로 미군 시설에 대한 출입 통제를 위해 이들 시설과 공원을 나누는 담장의 설치가 필요하며, 이 마저 한국 측에서 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서울특별시, 1991a; 1991b). 국가공원화가 결정되면서 1992년도 공원 조성 예산 반영도 불확실했다. 국가의 주관부서가 지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산을 누가 확보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공원 계획대로라면 1단계 9만 평 조성에 대한 총 소요예산은 99억 원인데, 서울시가 확보한 1991년도 예산은 59억 원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1992년 공사를 위해서는 1991년 11월 10일까지 조달청에 발주를 의뢰하여야 계약이 가능한데, 짧은 기간 동안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서울특별시, 1991a).
결국 서울시는 오수처리장은 현 위치 그대로 사용하고 헬기장은 공원의 진입광장 아래쪽으로 위치시켜 공원에 미치는 소음의 영향을 낮추고 예산도 절감하고자 했다(서울특별시, 1991a). 특히 공원을 간이 공원의 형태로 조성, 개장하기로 결정했다(서울특별시, 1991a). 용산 미8군 골프장 부지 용산가족공원 조성에 대한 정책회의(1991년 10월 30일), 서울시장 방침 결정(1991년 11월 5일)에 따라 1991년 가족공원 조성에 착공하는 것을 유보하고 1992년 5억 원의 예산으로 출입구, 간이화장실, 간이사무실, 산책로 등 최소한의 편의시설만 설치한 임시 공원 형태로 개장하기로 결정하였다(서울특별시, 1991a). 1991년 10월 2일에만 하더라도 서울시 공원과는 가족공원 실시설계안을 기술심의에 상정하였으나 12월 10일 간이 공원 조성 공사안으로 변경하여 건설기술 심의에 재상정했다(서울특별시, 1991d). 간이공사는 1991년 12월에서 1992년 8월까지 진행되는 것으로 총 공사비 4억 9천 8백만 원, 조성 면적은 297,000제곱미터, 산책로(3,700미터), 의자(220개), 간이공중변소(8개), 음수대(4개) 등을 설치하는 것이었다(서울특별시, 1991c)(Figure 8, 9 참조).


서울시는 1991년 12월 27일,(주)한수종합조경과 용산가족공원 간이 공사 계약을 체결하였고, 공사시행은 종합건설본부(환경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1992년 1월에는 미군골프장 환수부지 경계가 확정되었다. 미군이 골프장 부지 일부를 골프 연습장, 스포츠 필드 등으로 계속 사용하기로 하여 공원 면적은 현상공모 시행 당시보다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결국 297,000제곱미터(약 9만 평)의 용산가족공원은 1992년 11월 5일에(임시) 개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임시 개장한 공원은 정식 공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12). 1993년 8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지시하였다. 자연스레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었다. 1993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자문위원회는 용산가족공원을 박물관 부지로 선정하였다. 당시 서울시는 서울 인근 10여 개의 박물관 후보지를 조사하여 장단점을 비교하여 보고했는데13) 용산가족공원이 접근성이나 부지 소유 관계가 용이하다고 판단되면서 1993년 11월, 용산계획 실무위원회 및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 국립 국립중앙박물관 신규 건립부지로 용산가족공원 부지가 확정되었다(서울특별시, 1996).
박물관은 초기 45,000평(약 149,000제곱미터)의 규모로 확정되었으나 1994년 11월, 박물관 건립자문위원회는 부지면적을 103,579평으로 확대 요청했다. 제6차 박물관 건립자문위원회뿐 아니라 박물관 기본계획 수립 용역 결과에서도 기협의된 45,000평으로는 33,000평에 달하는 박물관의 적절한 배치가 어려우므로 “공원 속의 박물관”으로 계획하기 위해서는 가족공원 전체로 박물관 건립 부지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서울특별시, 1996). 1994년 4월부터 실시된 새 박물관 건립 기본계획 수립14), 1994년 12월부터 실시된 박물관의 국제설계공모 및 당선안의 발전15) 등을 통해 박물관 영역의 면적은 늘어났고, 결국 용산가족공원 면적은 약 23,000평으로 축소되었다.
서울시는 1997년 7월 2일, 시장방침으로 용산가족공원 내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동의하였다(서울특별시, 1997a)16). 서울시는 1997년 9월 23일, 용산가족공원에 문화체육부가 새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하게 됨에 따라 1997년 10월 21일부터 공원이용 일부를 제한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서울특별시, 1997b). 전체 90,000평 중 박물관이 67,000평을 가져가고, 가족공원은 23,000평만 남게 되었다. 더욱이 개방면적 23,000평 중 서울시 소유는 11,000평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12,000평은 문체부가 소유한 국유지였다. 다만 서울시는 시민들이 이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고 박물관이 완공되면 67,000평의 박물관 부지 또한 시민이용공간으로 개방할 것임을 강조했다(서울특별시, 1997b)(Figure 10 참조).

5. 결론 및 시사점
모든 장소에는 역사가 있다. 공원 조성 사업도 마찬가지다.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이 기록될 때, 이것이 후대에 역사로 남는다. 특히 한 세대를 넘어 장기적으로 조성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용산공원 사업처럼 다양한 이해관계자나 부지의 소유권이 나뉘어져 있을 때, 즉 사업의 성격이 매우 복잡할 때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면, 또는 남아있더라도 이를 엮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지혜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이전 사업과 현 시대의 사업 간 연계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중요한 흐름을 놓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시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 연구에서는 1989년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용산공원 조성 사업의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용산공원과 용산가족공원에 관련된 서울시 공공 기록물을 살펴 두 공원의 연계성과 위상에 대해 밝혔다. 연구를 통해 세 가지 시사점을 도출했다.
첫째, 용산가족공원은 용산공원 1단계 사업의 시작이자 전체 공원의 일부다. 용산 군이적지 전체 활용 계획과 용산 미8군 골프장 부지의 공원화 계획이 조화를 이루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설계 공모가 시행되었다. 그 결과 용산공원 전체 계획에서 언급한 사항들(가령 동작대교의 지하화)들을 반영한 설계안이 도출되었다. 비록 임시 공원으로 개장하였지만 용산가족공원은 용산공원을 조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군기지를 반환받아 시민들에게 돌려준 첫 번째 사례로서 그 위상을 인정받았다.
둘째, 빈 땅으로 인식되면서 시설에 영역을 잠식당한 사례를 통해 공원 조성 절차에 대한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도출했다. 용산 미8군 기지 전체의 공원화 과정에서 첫 번째로 개장된 공원이라는 상징성과 위상에도 불구하고, 용산가족공원은 조성 당시나 이후 과정에서 도시계획 시설로서의 공원으로 지정되지 못한 채 도시의 자연녹지지역으로 남겨졌다. 이는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설 부지를 물색했을 때, 도시의 유휴공간으로 인식되며 박물관 건립의 적지로 낙점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임시 공원으로 개장되었을 당시의 면적(297,000제곱미터)에서 약 25%만 현재의 용산가족공원으로 남겨졌다.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 미군 기지를 공원으로 조성할 법적 근거는 확보했지만 ‘임시 공원’, ‘임시 개장’의 상태는 여러 단체나 이익 집단이 이곳을 손쉽게 점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케 한다. 지금까지 정치권, 민간단체, 정부부처를 막론하고 임대주택 조성, 야구장 건설, 박물관 콤플렉스 조성 계획 등 공간 점유에 대한 요청과 이로 인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장기적 시각을 바탕으로 공원 조성 과정에 대한 정교한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셋째, 공원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이는 용산공원 조성 사업과 같이 장기간 진행되는 프로젝트에서 더욱 요구된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부, 관련 부서, 실무자, 전문가는 모두 세대교체 되었다. 따라서 조성 과정의 기록이 소실되었거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면 과거에 발생했던 오류를 알 수 없으며, 특히 사회정치적으로 복잡한 사업에서 이를 답습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조성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다면 현재의 조성 과정에 적용할 수 있는 정보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원 아카이빙을 통해 기록된 공원 조성, 관리 운영상의 자료, 시대적 가치를 담고 있는 공원 설계안의 변화상 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물은 그 자체로 공원의 콘텐츠가 된다17). 역사적 기록들을 바탕으로 도시 공원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다.
용산가족공원 조성 과정은 서울시가 대통령 지시를 받아 주도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서울시 기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대통령기록물, 국방부, 국토교통부 등 관련 정부 부처의 기록물을 함께 살피지 못한 점은 본 연구의 한계라 할 수 있다. 공원 조성 과정의 특성상 전문가나 전문 업체 등 민간의 영역이 공기관 등 공공의 영역과 협업하여 사업을 이끌어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산가족공원 조성과 관련된 민간 생산 자료를 살피지 못한 점 또한 본 연구의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기록원에 소장된 용산가족공원 관련 서울시 공공 기록물의 전수 조사를 통해 용산가족공원 조성 과정에서 논의된 도시계획의 중요 이슈를 발굴한 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용산가족공원과 용산공원의 연계성을 살폈다는 점, 현재 진행 중인 용산공원 조성 사업 과정에서 공원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