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 관광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도서 및 해양 지역에 대한 관심도 한층 높아졌다(Na, 2020; Ha, 2020). 본 연구의 대상지인 신안군 반월․박지도는 이러한 수요에 응답하듯 도라지와 꿀풀의 자연 자원이 연출한 보랏빛 경관을 장소마케팅의 전략으로 활용하였다1).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2019년 COVID-19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주말 기준 약 1,900명이 방문하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퍼플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경관을 만드는 생산자이자 향유자로서 새롭게 변한 경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주체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관광 사업은 전라남도와 신안군이 주도하였고, 반월․박지도를 보랏빛 경관으로 연출자는 신안군수의 아이디어 또한 전문가의 자문과 함께 실행되었다. 즉 보라색으로 변한 섬의 경관에는 외부자의 의도와 시선이 개입되어 있으며, 주민은 수용자이자 계획 단계의 타자로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경관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주체이자 삶터의 주인인 주민의 시선을 통해 경관의 변화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퍼플섬과 같이 도시 정체성과 장소성을 창조하는 데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색상이 활용된다(Jung and Kim, 2012). 이는 세계화의 흐름 및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맞물려 브랜딩을 통해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도시적 문화 코드를 생성하기 위한 것이다(Lee and Kyun, 2008). 도시와 국가 수준의 브랜드를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지구적 무대로 진출하는 작업을 수행(performance)한다고(Urry, 2007) 이해할 수 있다. 지역의 마케팅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놓고 각 주체가 서로 다른 의미체계를 형성하는데(Lee, 2006),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관광에 대한 성과나 파급력의 수치적 결과, 관광객의 반응 혹은 콘텐츠 자원에 집중해왔다(Ahn and Yoo, 2011; Go and Kwak, 2017; Lee et al., 2018; Jung, 2018; Ha, 2020). 그러나 관광개발로 가장 많이 영향받는 사람들은 거주민이기 때문에 중요한 주체로 인식하고 개발 단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Song, 2010; Hwang and Shim, 2014).
반월․박지도의 보라색 경관에 대한 73명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2)에 의하면 긍정적 의견은 57%, 부정적 의견은 22.3%로 긍정적인 반응이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시각 감각은 객관적이며 감각장이 넓은 반면 정서가 깊이 연관돼 있지 않다는 점(Tuan, 2011)에서 장소의 맥락 없이도 직관적인 판단이 용이하다. 근대 이후 관광과 사진이 긴밀히 결합되면서 ‘관광객의 시선(tourist gaze)’이 갖는 시각적 권능은 더욱 강화되었다(rry and Larsen, 2011; Jin, 2005). 퍼플섬의 컬러마케팅은 관광 상품으로서 시각적 권능에 강렬히 부합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매력도를 높인 사업이다. 미국의 경관계획이 자연 그대로의 섬 경관을 유지하면서 개발을 고려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서 지역의 경관 변화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Kim, 2011; 2019). 토지이용의 변화로 촉발된 경관 변화는 토지를 이용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의 변화(Kim, 2019 재인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퍼플섬을 필두로 시각적 감각에 의지한 관광 상품으로 변해가고 있는 신안 섬들의 경관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섬의 경관의 개념과 미래 방안을 논의한 Kim(2019)은 지속 가능한 경관 관리를 위해 거주자의 시각에서 경관을 바라볼 것, 삶의 터전으로서의 섬 경관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Kim(2000: 133-144)는 도시 경관을 해석할 때 쌍방향의 복합적 의미를 파악하고, 문화적 차원의 해석과 정치 경제적 맥락에 집중하며, 토착적이고 일상적인 경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Park and Pae, 2013 재인용). 따라서 본 연구는 정책적 사업하에 이루어진 섬 경관의 상품화를 주민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일상 경관 속에서 공존하는 보랏빛의 ‘스펙타클(spectacle) 경관’과의 공존 여부를 파악한다. 구체적으로는 퍼플섬 사업 전후로 나누어 보라색과 마을 경관에 대한 인식, 퍼플섬 사업 과정에 대한 인식 층위에서 결과를 도출한다.
본 연구는 신안군 안좌도의 부속 섬 반월․박지도이다. 두 섬은 과거로부터 하나의 생활권으로서 형제섬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두 섬 사이에 돌을 놓은 노두길3)을 통해 썰물 시 통행로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2008년 안좌도와 박지도 사이에 약 540m 지상 목교가 건설되어 물때와 상관없이 보도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2010년에는 반월-박지를 연결하는 900m의 구간의 목교가 완공되어 ‘천사의 다리’ 또는 ‘소망의 다리’라고 불렸다4).
신안군 통계 연보(2021)에 따르면 반월도는 57세대, 10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평균연령은 59.7세이다. 박지도는 19세대, 24명이 거주하며 평균연령 66.1세이다5). 2008년부터 2022년까지 신안군의 인구가 급감하고 있으나, 반월․박지도를 포함한 안좌면의 경우 2015년 이후부터 감소가 둔화․정체되다가 2022년에는 전년 대비 86명이 증가하였다(전라남도청 주민등록․추계인구, 2022).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은 비교 우위 자산인 해양자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매력적인 삶터이자 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2015년부터 시작되었다(김농오 등, 2016). 이와 더불어 신안군도 2016년부터 5개년 종합계획을 세우는 등 섬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펼치고 있다. 박우량 군수의 민선 8기 공약 5가지 사항 중 ‘세계적인 해양 생태 관광중심지 1004섬’은 1004섬을 정원화하는 의지로 시작되었다. 2018년부터 2023년 6월까지의 섬의 정원화와 관련한 공약 이행 사항은 1읍면 1특성화 공원사업 추진, 사계절 꽃피는 특색 있는 테마섬 조성, 사계절 꽃 축제 개발이다((www.shinan.go.kr/)). 보라색의 반월․박지도와 노란 수선화 중심의 선도, 튤립과 홍매화의 섬 임자도와 같이 섬별로 중심 초화류를 선정하여 일관된 색 경관을 연출해 지역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연구의 대상지인 반월․박지도의 퍼플섬은 2018년도부터 전라남도와 신안군에서 각각 20억을 투자해 조성된 정원화 사업의 결과물이다6).
반월․박지도는 2015년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어 2018년까지 등산로와 둘레길이 조성되고 식당,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의 관광 기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는 아스타, 버들마편초, 도라지꽃, 콜라비, 비트, 아네모네, 자색 고구마 등 보랏빛의 다양한 식물들로 그 종류가 확대되었다. 2019년부터는 각종 시설물과 지붕, 길, 목교 등을 보라색으로 칠해 지역 전체를 하나의 테마로 관광 상품화하는 본격적인 컬러마케팅이 시작되었다. 사업의 일환으로 모든 주민들에게 보라색의 옷과 속옷, 앞치마와 식기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보라색 경관을 연출한 두 섬은 점차 관광객과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보랏빛 경관이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시도’로 평가되면서 세계관광기구(UNWTO)7)가 선정한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8)이 되었다. CNN과 로이터 통신, 폭스뉴스 등 유수 언론에서 퍼플섬의 독창성을 집중 조명했으며, 2022년 12월에 개최된 제 24회 대한민국브랜드대상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동이 감소했던 2019-2020년 사이에 27만 명이 다녀갔으며, 2021년은 28만 명, 2022년은 38만 명까지 증가하였다(Choi, 2023). 2015년 3만 5천 명의 방문(Oh, 2022)에 비하면 2022년에는 10배가 넘는 관광객이 방문한 것이다.
연구는 문헌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반월 박지도 관련 기초조사 및 지자체 관련 사업은 홈페이지와 각종 통계 데이터, 기사 자료 등을 참고하였다.
인터뷰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질적 연구는 현장의 목소리를 풍부하고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목적과 부합한다. 인터뷰는 퍼플섬 사업 전후의 인식을 비교하는 방식과 주민 인식을 기록한 맵핑의 기초 데이터로 활용된다. 특별히 퍼플섬 사업에 대한 인식은 질적 연구의 하위 방법론인 근거이론(grounded theory)을 통해 분석한다.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참여자가 겪은 복잡다단한 현상과 경험을 통해 실제적인 사회현상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구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Ryu et al., 2018). 개인의 행동이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사회 과정에서 생각이 구조화되기 때문에 퍼플섬 사업을 둘러싼 주민 인식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입장 변화를 파악하는데 적합하다. 분석 시에는 녹취된 진술을 의미 단위로 코딩하고 개념을 범주화하였다.
반구조화된 인터뷰의 특성상 퍼플섬 사업 전반에 대한 의견을 수집할 수 있었고, 이를 퍼플섬 사업 전후로 나누어 재구조화하였다. ‘퍼플섬 전후 기억을 비교’한다는 의미를 보다 정확히 설명하면, ’기억․회상’과 ‘현재의 감상’에의 비교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9). ‘기억’이란 관련 경험이 완결되어 과거지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Assmann, 2011). 따라서 연구자는 인터뷰 참여자들의 구술 내용을 사건 및 시간 순으로 배열하여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포착하는 과정을 거쳤다. 경관 인식과 관련한 구체적인 인터뷰 항목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을 다룬 Kim and Lee(1993)와 Lee(1993)의 설문 항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해당 논문에서는 관광객의 경관 인식을 파악함에 있어 환경지각(본다)과 인지 및 가치판단(중요하다), 체험(기억한다)으로 나누어 구성10)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주민의 일상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인지와 체험의 구분이 불분명한 측면이 발견되어 두 영역을 통합하였다. 구체적인 인터뷰 항목은 다음과 같다.
- 환경지각
퍼플섬 사업 이전(이후)에는 반월․박지도의 어떤 장면이 그려지시나요? 어떤 소리가 들리시나요? 어떤 촉감이 느껴지시나요?
- 인지 및 체험
보라색으로 마을을 색칠할 때 동의하셨나요? 반월․박지도가 보라색 섬으로 바뀐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퍼플섬 사업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기도 하셨나요? 이 섬에서 중요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퍼플섬 이전과 이후에 차이가 있나요?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추억을 지닌 장소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는 어디이며,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2021년 7월 1차, 2022년 5월 2차로 총 3일에 걸쳐 반월․박지도 주민 14명을 인터뷰하였다. 한 사람당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소요되었으며, 눈덩이 표집(snowballing sampling)과 무작위 표집을 병행하였다. 눈덩이 표집의 경우 마을 이장이나, 사업 관련자,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하였고, 무작위 표집은 우연히 만난 주민에게 인터뷰의 취지를 설명한 뒤 동의를 얻어 진행하였다. 연구 참여자의 연령대는 40대 3명, 50대 1명, 60대 3명, 70대 5명, 80-90대 각 1명이다. 거주기간은 최소 2년에서 최대 75년으로 편차가 크지만, 평균 38.9년으로 반월․박지도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던 경험이 있으며, 퍼플섬 사업의 전후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었다. 청장년 시기에 타지로 떠났다가 귀향한 사람은 8명이며, 카페에 근무하거나 카트 대여를 하는 등 퍼플섬 관광 사업에 참여하는 주민은 8명이다(표 1 참조).
연구는 퍼플섬 사업의 전후로 변화한 주민 인식을 세 가지 층위에서 비교한다. 구체적으로 알아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섬의 주요 색상인 보라색에 대한 인식, 둘째는 섬의 전체 경관 및 개별 공간들에 대한 인식, 셋째는 퍼플섬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다. 때로는 참여자 스스로도 모호한 생각의 흐름을 전개하기 때문에 여러 층위에서 주민 인식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위 내용을 분석하는 환경 인식론적 틀은 환경지각, 인지 및 체험의 총체적 접근이다(그림 1 참조).
2. 이론적 배경 및 선행연구
본 논문은 퍼플섬에 나타난 경관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1980-90년대 신문화지리학에서 논의한 문화경관의 의미를 차용한다.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을 배경으로 태동한 신문화지리학은 문화의 개념을 재정의하고(Duncan, 1980), 경관에 담긴 상징적 의미와 기호화된 이데올로기 해석에 관심을 기울였다(Koo, 2005). Cosgrove and Jackson이 주장한 ‘텍스트로서의 경관(landscape as text)’은 Sauer를 중심으로 구축된 경관형태론(the morphology of landscape)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화가 생산한 상징적 의미를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Gregory and Ley(1988)가 정리한 문화의 세 영역11) 중 ‘스펙터클’은 소비양식의 변화와 미학적 생활양식 등을 포함한다는 점(Lee, 2005: 436)에서 퍼플섬으로 소비되는 경관적 현실과 닿아있다.
신문화지리학은 경관의 주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기존 연구에 도전했다. 전통적 문화경관에 내재된 엘리트주의적 관점, 지배자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일상성과 보편성을 띤 경관, 잊혀진 민중을 주목한 것이다(권용우 등, 2012). 내부자 중심의 문화경관을 연구한 Jackson(1986)은 일상생활의 장소, 반복되는 일상과 생활의 감각을 통해 형성된 경관을 토착 경관(vernacular landscape)이라 칭하며 그 가치의 중요성을 주목했다. Williams(1975)는 문화 유물론적 측면에서 토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적 배치의 일부로 경관을 인식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노동과 노동자를 주목했다(Jin, 2013). 심미적 풍경 뒤에 가려진 경관의 생산을 위한 노동을 주목한 Mitchell(1996) 또한 문화 형성과정의 주체를 주목함으로써 연구의 차별적 성과를 이끌었다.
경관의 생산과 소비의 주체인 실존적 내부자는 경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체이다(Park and Kim, 2014).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도시의 문화경관을 살펴보는 최근의 연구들은 경관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근대 산업도시 ‘장항’의 문화경관을 해석한 Park and Kim(2014)은 산업화를 경험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인터뷰하였고, 압구정․청담동 지역의 소비문화경관을 연구한 Han and Shim(2006)은 두 지역의 변화를 직접 경험한 관련자들로부터 의미있는 구술을 얻었다.
본 연구는 신문화지리학에서 주요하게 논의한 두 가지 측면, 관광 자원으로 재편된 경관의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내부자가 인식하는 경관의 의미를 해석한다. Daniels(1989)가 주장한 것처럼 보는 방식으로서의 엘리트주의적 경관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일상적 경관 사이의 혼재된 긴장 관계를 분석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더불어 신문화지리학에서 중요하게 논의했던 사회 유물론적 관점의 상징 해석을 넘어 주민이 만들어낸 파롤(Parole)12)차원의 미시적 경관을 통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현대 문화지리학의 비재현적(more-than-representational) 실천13)(Jin, 2013)을 시도하려 한다.
내부자는 단편적으로 상황을 인지하지 않고, 개인적 경험과 역사․문화적 맥락, 사회 구조의 복합적인 영향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Cosgrove가 내부자에게 있어 풍경과 자아, 대상과 주체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경관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본 것(Jin, 2013: 562)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내부자가 인식하는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방법론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인본주의 지리학과 신문화주의 지리학을 통합한 총체적 접근을 시도한다. 인본주의 지리학(humanistic geography)의 대표 학자인 Tuan은 추상적 공간(space)이 인간의 경험과 지식의 축적, 가치 부여를 통해 장소(place)로 탈바꿈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서만큼은 내부자로서의 시각을 가지고 정신과 사고, 감정의 복합을 통해 환경을 인지한다(Tuan, 1995). 전통 문화지리학을 비판하며 떠오른 신문화지리학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상징적 경관 인식에 걸맞는 연구 방법론을 논의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Cosgrove는 경관의 생산과 유지 시 주체가 담당하는 상징적 기여를 해석과 기호론적 접근으로 밝혀냈다. 결론적으로 두 학문은 지리학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펼치기는 하지만 환경 의미를 다중적(multichannel)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Kim and Lee, 1993)14). 최근의 환경 인식론 또한 실증적 접근에서 총체적 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Lorimer(2005; 2007)은 재현된 이미지나 이데올로기 해석보다는 육체 경험과 결부된 비재현적 지리학을 피력하였다. 시각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직접적인 경험과 체현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Jin, 2013). Jin(2013)은 신문화지리학의 경관 연구가 지니는 이분법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서 현상학적이고 실천 지향적 경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신문화지리학의 기호학이 갖는 일의적 상징의 한계를 보완한 해석학 중심의 인간주의적 관점을 혼합하고자 한다(표 2 참조).
자료: Kim and Lee(1993 :144, 154), Lee(1992)를 바탕으로 연구자 재구성
반월․박지도는 2016년 ‘가고 싶은 섬’ 사업의 평가 방식 변화를 다룬 Kim et al.(2016)을 시작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었다. 최근 2년 사이에는 반월․박지도를 관광지로 인식해 지역적 매력을 분석하거나 활성화 방안을 고찰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Do and Suh(2021)은 관광객의 경관 인식을 SNS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였는데 주요 방법은 텍스트마이닝과 경관 파악 모델, 색채분석이다. 섬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나타내는 키워드로 ‘가볼 만한 곳’, ‘좋다’, ‘아름답다’ ‘섬’, ‘연결’ 등이 도출되어 퍼플섬의 특색과 색채가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Jo et al.(2021)은 신안군의 섬 관광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면서 방문객의 요구에 맞는 컨텐츠 개발과 섬 자원의 재생, 주민들의 관광 산업 주체화와 역량 강화 등을 제안하였다. Hwang(2022)는 섬의 마을 공동사업을 통한 이익공유의 사례와 과제를 고찰하였다. 반월․박지도의 경우, 주민출자 조직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나 정책 사업 종료 후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이익공유 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외부 기관과의 협력 운영으로 전환된 한계가 발견되었다.
퍼플섬과 같이 색상을 브랜딩 및 마케팅 수단으로 본 연구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컬러마케팅의 방식과 범위, 대상에 변화가 생겼다. 초기에는 도시브랜드와 연계한 슬로건이나 상징, 사인물에 도입되는 색상을 중심으로 그 범위가 제한적이었다(Yoon, 2009; Jung, 2012). 그러나 최근 들어 극적인 경험 공간을 제안하는 방식으로까지 색상을 활용한다. 이는 Lee and Kyun(2008)이 통일된 시각 경관의 그리스 섬 산토리니와 산타페의 경관 경험과 같이 색을 통해 브랜드를 창출하고 지역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경관에 색상을 입히는 파격적인 시도는 2017년 전라남도 장성의 ‘옐로우시티 장성’15)을 시작으로 연구 대상지인 반월․박지도의 퍼플섬, 노란 수선화를 중심 색상으로 활용하는 신안군의 선도와 병풍도16)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3. 퍼플섬 사업 전후의 경관 인식 비교
퍼플섬 사업이 시행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개인적인 색상 선호나 취향을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육지와의 접촉이 쉽지 않은 부속 섬에서 농어업 중심의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도시 브랜딩이나 기타 문화사업에 노출될 일도 많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마을 경관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감이 멀었다고 진술한다. 퍼플섬으로 거듭나기 이전에도 섬 곳곳에 라벤더나 일부 보라색 야생화가 피어있었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남는 꽃은 노란색 유채나 붉은 양귀비 등 따뜻한 색상 계열이었고, 보라색 꽃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주민도 다수였다.
‘보라색을 원래 좋아했다’는 한 명의 응답자를 제외한 8명의 주민들은 ‘어울리기 힘든 색, 이상한 색, 조화가 어려운 색’이라고 생각했고, 5명은 ‘아무 생각 없었음’이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퍼플섬 사업 이후에는 모든 주민이 보라색을 독특하고 개성 넘치며 차별성 있는 색, 산뜻하고 윤기가 나는 색이라며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보라색으로 채색된 퍼플교의 야간 조명과 바다 안개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며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민L은 보라색을 ‘변화의 색, 힐링의 색, 건강의 색’으로 정의하며 사업 시행 과정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종합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기도 했다. 대체로 특정 색 선호에 대한 의견이 뚜렷하지 않았으나, 보라색의 상징적 의미를 배우며 새롭게 인지해 나가고 있었다.
“주민들이 처음에는 뭔 보라색을 할까… 그러고 생각했죠. 오로지 보라색만 군에서 강조했는데 해보니까 괜찮더라구요.” (주민 F)
“제가 기독교 신자인데요, 보라색 역사를 보면 이게 옛날에 로마 시대에는 선지자들만 입는 옷 색깔이었어. 그냥 평민이 입으면 이게 감옥 가고 그랬어요.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뭐냐면 보라색이 여행을 하면 정신이, 건강이 힐링이 되는… 이제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어요.” (주민 L)
주민의 대부분은 군청에서 확인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님에도 스스로 군에서 나누어준 보라색 옷을 입었고, 선박을 보라색으로 칠하는 등 주체적으로 개인 소유의 물건에 보라색을 칠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생활공간으로 깊숙이 들어온 낯선 색상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퍼플섬 조성 이전에는 환경을 지각하는 다섯 가지 지각 요소 중 미각을 제외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관련 진술이 다양하게 언급되었다. 반면 사업 이후에는 보라색 경관과 도시화된 풍경을 묘사하는 시각적 측면과 청각에 국한되었다.
과거의 시각 이미지는 ‘수풀에 덮인 비포장길, 오지 풍경, 사라진 유채밭의 기억, 나룻배를 타던 모습’이 언급되었다. 환경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자연 상태에 가까운 낙후된 섬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었고, 연륙(連陸)되지 않은 환경에서 나룻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던 모습을 묘사했다. 밤이 오거나 풍랑이 닥치면 꼼짝없이 섬에 갇혀있던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퍼플섬 사업 이후에는 깔끔하게 정비된 마을 환경의 이미지가 묘사되었다.
과거에는 ‘조용한 섬, 물살이 부딪히는 소리’를 떠올렸지만, 관광지로 변모하고 난 뒤에는 외부인의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린다고 구술하였다. 관광객의 소리에 대해서는 활기찬 이미지를 묘사하는 ‘시끌벅적’과 부정적 의미인 ‘시끄러움’이 함께 나타났다.
“도시 살 때 어떤 게 향수가 젖었냐면, 도시 사람들은 갯내라고 그러죠. 어릴 때 이쪽으로 휴가도 많이 오고 했었는데, 그 향이 그립더라고요. 목포까지만 오면 그 향이 나요. 모르시는 분들은 모르는데, 이쪽에 사시던 분들은 그걸 느껴요.” (주민 J)
과거의 반월․박지도는 고된 삶의 기억이 우세했지만 비교적 다양한 감각이 총체적으로 지각되었다. 그러나 사업 이후에는 보라색 혹은 정비된 환경이라는 시각 이미지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마을 전반에 걸친 경관 변화가 유발한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명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현재 주요 관광지점인 ‘라벤더 정원’은 과거 주민들에 의해 ‘바람의 언덕’으로 불렸다. 바람이 부는 장소라는 공감각적 경험이 보라색 라벤더라는 시각 이미지로 치환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발전한 마을에 대한 정서적 만족감이 정돈된 경관 변화와 결합하면서 시각 측면의 변화를 더욱 강렬하게 체감하는 것으로 보인다(표 3 참조).
과거의 반월․박지도는 ‘별것도 아닌, 보잘것없던 섬, 먹고 살려고 들어온 섬’으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계를 꾸리기 바빴던 삶의 터전이었다. ‘섬 중의 섬, 오지, 낙도, 낙후된 섬, 외로운 곳’이라는 표현에서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부속 섬으로서 불편한 생활을 해야만 했던 부정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퍼플섬 사업으로 전라남도와 신안군의 경제적․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비포장도로가 아스팔트로 깔리고 시설물이 정비되는 등 환경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멀쩡한 섬, 발전, 천지개벽, 관광지’라는 묘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 이전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각종 인프라의 부재로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던 거주지가 정상 범주에 들었다고 인식하였다.
“우리 마음대로 육지가 되게 하고, 가고 싶을 때 밤에도 갈 수 있고. 그 전에는요-주의보가 내리고 바람 불면 발이 딱 묶여. 못 나갔어요.” (주민 G)
“세상에 우리 부모님들은 고생만 겁나게 하고 이런 다리 한 번 못 건너보고 돌아가셨던 것 같아.” (주민 H)
그러나 개발로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가난하지만 정이 있던 마을’에서 ‘인정이 사라지고 각자 바쁜 삭막한 마을’로 변했다고 느낀 것이다(L, M)17). 현재의 모습을 지역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던 시점과 가장 대비되는 낯선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업 이전에는 반월․박지도의 중요한 장소로서 ‘당숲(68.75%)’이 압도적으로 언급되었다. 이곳은 온 주민이 참여하는 정월대보름 축제의 주 무대로서 팽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자 신화적 믿음과 관리 규율이 작동하는 장소였다. 평소에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자 휴식처로 기능하였다. 공간별로 기능이 분리되어있는 현대도시와는 다르게 다양한 연령대의 활동이 이루어지던 다기능적 장소이자(Lee et al., 2013), 집단 기억이 밀도 높게 응축된 장소이다. 박지도의 당은 할머니, 반월도의 두 개의 당은 할아버지와 딸의 역할이 부여되어 섬의 ‘당(堂) 이야기’를 만들어낸다18). 분리된 섬 주민들의 기억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 장소가 되었다. 시대적 변화와 인구 고령화에 의해 마을 행사는 줄어들었지만 퍼플섬 조성 이후에도 당 숲의 존재감과 상징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두 개의 당 외에 딸 당(12.5%)과 900년 우물(6.2%), 조상궤(6.2%)와 같이 마을 내 공통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장소가 중요한 장소로 언급되었다. 현재 천사의 다리(현, 퍼플교)는 1회(6.2%) 언급되었는데, 당시에는 육지로 나갈 수 있는 교각으로서 중요성을 인지했다.
사업 이후에도 당숲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35%로 우세했지만 이전에 비해 다양한 장소가 언급되었다. 퍼플교와 라벤더 정원은 과거 응답에 비해 13.75%, 20%가 증가하였고, 노인정(10%)과 해안도로(5%)가 새롭게 언급되었다. 퍼플교(20%)와 라벤더 정원(20%), 해안도로는 퍼플섬의 주요 사업대상지로서 보라색 경관 이미지와 관광 기능이 증가한 곳이다. 이 시기에는 일상의 무대로서 개별 장소를 평가하기보다 외부의 관심을 받는 자랑거리이면서 정돈된 풍경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과거에 천사의 다리로 불리던 퍼플교는 보라색으로 색칠된 뒤에 중요한 장소라고 인식하는 비율이 증가한 것이다. 노인정은 오롯이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자 교류의 장으로서 ‘우리만의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인식하게 했다.
퍼플섬 사업 이전에 중요하다고 언급된 장소들은 유년 시절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 기억과 마을 행사로 형성된 집단 기억이 공존한다. 따라서 장소에 얽힌 이야기가 풍성하고 구체적이며, 중요성에 대한 묵언의 합의가 존재한다. 반면 사업 이후의 장소 인식은 삶터보다는 관광지로서의 의미 부여가 우세하다.
그 외에 좋아하는 장소나 추억이 있는 장소는 퍼플섬 사업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기억과 유년시절의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를 꼽았다. 갯논이나 개를 팔던 궁몰, 남자 여자 수영장의 역할을 하던 해변가는 과거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 장소와 기능에 대한 필요성이 맞물려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점들이다. 따라서 중요한 장소라는 인식보다는 혼자 음미하는 방식에 머무르며, 섬 전체에 걸쳐 다양하게 분포한다. 또한 중요한 장소로 당 숲을 언급한 경우에는 박지당 숲과 반월당 숲을 묶어 ‘당 숲’이라고 표현했지만 좋아하는 장소나 추억이 있는 장소를 언급할 때는 개별 당 숲으로 설명한 것이다. 즉 중요한 장소로서의 당 숲은 개별 장소로 인지할 때보다 상징적 의미가 강화된다(그림 2, 표 4 참조).
4. 주민 인식과 지역적 맥락을 종합한 현상학적 이해
앞서 분석한 ‘보라색과 경관에 대한 인식 비교’ 관련 인터뷰와 문헌조사를 종합해 퍼플섬 사업을 둘러싼 주민 인식 변화를 근거이론19)으로 구조화하였다(그림 3 참조).
퍼플섬 사업은 관심 있는 일부 주민과 관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장과 일부 관계자를 포함한 2-3명의 주민이 공무원과 소통하며 사업을 이끌다 보니, 초기 경관 계획 및 사업 추진 단계에서 주민은 변두리에 있었다(B, D). 어업을중심으로 바쁘게 생활하는 40-50대의 젊은 세대는 섬의 새로운 변화에 더욱 무관심했고(M), 일부 주민은 사업에 부정적이기도 했다(B). 반면 도시 생활 후 중년이 되어 귀촌한 주민들은 관의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관광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을 보였다(A, B, C, D, M). 편히 쉬려고 들어온 고향이 낯설게 느껴지는 점은 피할 수 없었지만, 섬의 변화는 새로운 산업 창출의 기회이기도 했다(A, B, C).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행되면서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뜨게 되었고, 관광객의 긍정적인 반응이 신기했다(D, G, I, M, N). 변화를 체감하자 예산을 지원해준 관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고(E, I, M), 조용하던 섬에 찾아온 손님들이 반갑기도 했다(C, E, I).
그러나 잦은 언론의 취재와 인터뷰 동원, 관광객의 마을 환경 훼손은 점차 피로감을 주었다(D). 과거에는 섬을 내 집처럼 생각에 공터에 생활 쓰레기를 버리기도 했는데 외부인이 들어오면서 역으로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A). 생활공간인 집 근처까지 다가오는 외부인의 기척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집 앞 화단에 심어놓은 작물을 뽑아가는 외부인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A, E, H, J). 목교(木橋)인 퍼플교의 안전성 문제로 이륜 오토바이를 통제한 것에 대해 관광객이 아닌 주민 중심의 용도로 사용되어야 한다며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다(A). 관광객을 태우고 섬을 한 바퀴 도는 카트 사업의 경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일부 주민이 자원봉사 수준으로 일을 떠맡는 경우도 있었다(L, M). 담당 공무원의 잦은 교체 또한 사업 추진 시의 어려움으로 언급하였다(D, L, M).
해방 이후 반월․박지도는 지역 예산이 배정되지 않아 기초 인프라가 거의 없는 낙후된 섬이었다. 70년대에 이르러 청년 세대의 도시 이주가 많아지고, 섬에 남은 주민들은 고령화되어 유인도로서의 영속성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마을에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이를 타개할 현실적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사업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반월도는 인동 장씨, 박지도는 박씨 일가가 정착한 집성촌이다. 주민이 가족과 친인척 관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역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이해도가 높고 공유하는 기억이 많다. 이는 다양한 배경의 이해관계자가 밀도 높게 모인 도시에 비해 비교적 순탄하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된다. 경조사를 중심으로 한 공감대 형성은 쉬우나,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이전부터 존재하던 갈등 구조가 사업으로 연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새로운 안건에 있어서 특별히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상황을 수용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라도 보라색으로 통일하는 정도는 협조했다.
박지도는 돌과 칡넝쿨이 많은 땅이었지만 정원 사업을 통해 상태가 양호해지기도 했다. 환경 개선뿐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카트 대여, 카페 및 숙박 사업의 기회가 생기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식당, 카페는 일자리를 창출했고, 제초작업이나 쓰레기 줍기를 통해 소소하게 경제적 도움을 받는 주민들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귀촌하는 청년과 새롭게 이주하는 사례가 생긴 점은 섬의 큰 변화였다. 주민들은 관광을 지역의 새로운 산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태도는 섬이 관광지로 변하면서 발생하는 불편함을 받아들여 지속적으로 관광 산업을 추진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주민들은 마을에 생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 주체적인 아이디어와 적용을 꿈꾸고 있다. 보라색 섬에 대한 관광객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빛바랜 지붕 색을 더욱 진하게 칠했으면 좋겠다, 마을에 보이는 다양한 보라색을 하나의 색으로 통일했으면 좋겠다, 조형물을 더 설치하면 좋겠다’며 사업의 방향에 동조하거나 기존 방침을 강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서울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퇴직 후 귀촌한 한 주민은 ‘라벤더 정원의 담수 시설 확보, 주민 우선 채용 실시’와 같은 보완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 외에 ‘먹거리와 놀거리 확보, 바람의 정원에 짚라인 설치, 주차장 확보, 해안도로의 완성, 주민과 관광객과의 도로 분리, 관광 루트 변경’ 등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퍼플섬 사업을 비판하는 시각이 아니라, 사업의 성공을 위한 제안이다.
“관에서 생각하는 거하고 주민들이 생각하는 거하고는 굉장히 괴리가 있어요 사실은. 지금 현재 반월도로 들어와서 박지로 가서 요래 나가버려요. 그런데 이제 이분들(관광객)을 픽업해가지고 안마을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하면은 이구동성으로하는 얘기가 ‘야 마을이 예쁘다’. 군수님하고도 얘기했지만은 동네 메인은 여기(안마을)잖아요. 그러면은 관광지로 하면 동네도 이렇게 부분적으로 같이 개발을 시켜줘야 한다는 얘기예요.” (주민 M)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의견뿐 아니라 지역 자원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기도 한다. 조상궤나 사라진 유채밭 등 주민들만 아는 개별 장소의 이야기를 외부인에게 공유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당 장소를 관광 코스에 포함시키거나 관련 이야기를 팻말에 적어 세워놓기도 했다. 현재 라벤더 정원이 있는 바람의 언덕은 관광지의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과거 연을 날리기도 했던 주민의 기억을 살려 바람을 확인할 수 있는 대형 바람개비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박지당 숲 정상에 있는 귀바위에는 당산제를 설명하는 글이 다소 투박한 방식으로 적혀있다(그림 4 참조). ‘마을의 뿌리가 되는 곳, 관광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장소’ 등의 표현에서 지역의 이야기 장소와 자원에 대한 자랑스러운 감정을 엿볼 수 있다. 한 주민은 퍼플섬의 미래상을 ‘50-60년대 모습의 복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지역마다 지명이 있어요. 창고랑이 그런 여기 지역만에 의한 지명이 있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걸 좀 요즘 공무원들도 문장력 있고 한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한테 해서 이걸 팻말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몇 미터 가서 또 무슨 무슨 지형이 있다.” (주민 L)
“(당숲이) 옛날에 엄청 멋있었어요. 그래서 당 숲을 개발해야 돼 첫 번째로. 지금 많이 망가졌잖아요. (...) 계속 개발한다는 말은 얘기 했는데 개발을 한다기보다는 보존, 원형을 복원하고 이런 거지. 반드시 여기 오는 사람은 그거를 들리게끔···” (주민 B)
퍼플섬 사업은 실질적인 소득 연계가 취약하다는 점, 인력 부족, 출근길 혼잡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사업이 장기화되면서 반월도와 박지도 간의 미묘한 비교와 경쟁이 발동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C, M). 사업 아이디어를 냈던 반월도는 예산이 두 섬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쉽고, 박지도는 인력 부족으로 사업의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섬에 설치되는 조형물 하나로도 두 섬의 주민은 예민해진다.
풀어야 하는 많은 숙제가 놓여있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많은 관심을 받게 한 퍼플섬 사업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섬의 파격적인 경관 변화와 외부인의 유입은 ‘시대 변화’이기 때문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A, D, I). 다소 방관적으로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던 한 주민은 이왕 관광지가 된 김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친절하게 하자고 다짐한다(A). 평소에 농업에 종사하던 일부 주민은 주말이 되면 관광객을 상대로 재배 작물을 판매하는 등 관광객을 대상으로 수익의 기회를 늘린다. 코로나 팬데믹이 잠잠해지자 귀촌한 청년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마을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도록 셔틀버스로 마을 주변과 섬 외곽을 순환한다. 주민들은 점차 마을 사업에 적응하고 있었고, 아이디어를 내며 관광지로서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본 연구는 인터뷰를 중심으로 퍼플섬의 문화경관을 세 켜로 나누어 분석함으로써 주민 인식 변화를 파악하였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을 인지하는 감각 중 시각이 절대적으로 강화되는 반면 다른 감각 인식은 둔화되었다. 시각의 특권적 지위에 도전하는 신문화지리학의 경관론으로 보자면 아쉬운 결과이며, 강화된 시각 이미지가 지역 정체성을 대표하는 풍경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둘째, 삶터의 보랏빛 풍경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보라색은 지역 발전의 도구이자 매개, 고마운 색이자, 자부심의 색이다. 관광객의 긍정적인 반응 또한 보라색을 더욱 독특하고 차별성 있는 색으로 인식하게 했다. 다른 색상이 선정되었어도 그에 맞는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냈을 것이다. 즉 주민들에게 보라색과 보랏빛 경관은 독립적인 평가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을 통해 상징성을 획득한 ‘반월․박지도만의 보라색’이었다. 보랏빛 경관 이면에 내재된 신안군과 도 차원의 정책적 의도나 사회 구조적인 이데올로기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경관을 계획한 정책 결정자에 의해 ‘관리’되어 관광객의 시선을 받는 대상으로 변형(Cobin, 1994: 232)되기 쉽다. 중장기의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관광 사업이나 경관에 대한 주민들만의 판단과 담론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사회적이고 보편적 체계를 지닌 상징적 경관(langue)이 세분화 및 재편되었다. 퍼플섬이 범지구적 스케일의 관광지로 변했기 때문에 ‘외부인에게 소개할 만한 장소’를 기준으로 재평가한 것이다. 사업 이후 ‘바람의 언덕’은 시각 의미 중심의 ‘라벤더 정원’으로 치환되면서 존재감이 더해졌다. 새롭게 정비된 해안도로와 퍼플교의 사회적 발화는 관광 기능의 증가와 함께 강화되었다. 과거 마을 내부의 절대적 상징 공간이었던 당은 공동체 활동과 지역사회 내의 의미를 중심으로 선정되었으나, 현재는 지역의 이야기 자원 측면에서 가치를 획득하였다. 이로써 관광객이 이해 가능한 수준의 보편적 언어로 장소 경험의 공유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Forster가 말한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속에서 토지(land)가 경관(landscape)으로 변하는 스펙터클의 맥락과 닿아있다(Forster, 1931: 243; Urry, 2007: 463 재인용). 반면 개인적으로 장소와 조우하는 파롤적 경관20)인식은 양적, 질적으로도 증가하지 않았다.
넷째, 지역 자원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했고, 참여를 통해 새로운 문화경관을 형성하고자 한다. 주체자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섬이 지닌 경관적 특성과 역사․문화적 매력을 부각해 관광지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900년 우물이나 중노둣길, 조상궤는 기능을 상실하면서 존재감과 의미가 감소했다. 그러나 지역의 관광 자원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장소의 이야기가 부상하였고, 마을의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관광객이 지역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시선을 끌면서 내부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마을을 일체화하고, 반월․박지도의 주민이라는 정체성이 강화되기도 한다21). 이러한 움직임은 스펙타클에 맞서 고유한 지역성을 끌어내는 활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하향식 정책 실행에 대응하는 전략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면서 발생하는 미약한 상호작용에 머무른다는 한계를 지닌다.
다섯째, 퍼플섬 사업에 대한 반월․박지도의 입장 차는 두 섬의 관계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반월․박지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 숲과 분교 등 두 섬을 통합하는 섬만의 문화가 존재했지만 시대적 변화와 함께 체험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이 반월․박지도를 분리된 섬으로 인식하고 별도로 사업 예산을 지원함에 따라 긴장 관계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퍼플섬 사업이 두 섬 모두에게 통합적인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하며, 공공에서는 이를 고려해 정책을 계획해야 한다.
5. 결론
도시 경관은 경관을 만든 이의 의도와 보는 사람의 해석이 맞물려 복합적 의미의 텍스트를 만들어낸다(Park and Pae, 2013: 123). 이러한 설명은 도시경관뿐만 아니라 퍼플섬의 도서 경관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퍼플섬은 신안군의 성공적인 관광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면서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각 위주의 경관으로 재편되었다. 관 주도로 진행된 이 사업은 경관 변화뿐 아니라 주민들이 마을과 장소를 경험하고 인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경관의 변화가 섬에 미칠 영향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담론 형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론에서 소개한 경관 인식 설문처럼 경관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은 미학적이고 시각적이며 합리적․과학적이다. 그러나 주민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문화경관이자 삶의 공간은 다층적인 시간과 경험을 축적한다. 따라서 다양한 감각의 둔화와 장소에 대한 단편적 인식을 경계하기 위해 주민들의 지역 문화와 일상이 퍼플섬 위에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경관의 변화는 두 섬의 새로운 동력으로 받아들인 관광 산업으로 활용되어 ‘청년이 돌아오는 섬(B)’이 되기는 했지만, 보라색 옷을 입고 생활하며 외부인에게 경관의 대상이 되는 방식을 미래 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할 시점이기도 하다. 퍼플섬 경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거나22) 재정적 지원이 사라지는 시점에 자생력이 발동하지 못한다면 마을의 상징이었던 보라색이 관리되지 않는 흉물스러운 색으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장소에 대한 지식과 체험의 깊이가 남다른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공감각적 장소 경험과 역사적 이야기를 발굴해야 한다. 지역 정체성을 재발굴하는 주민의 의견이 경관 계획과 관리에 적극 반영되어 공공의 지원과도 적정한 합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방편으로 장기 거주를 통한 비제도화된 체류형 관광을 유도할 수 있다. 이는 관광객의 입장에서 퍼플섬의 경관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일회성 관광이 아닌 경험을 통해 장소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Jeong, 2017) 방식이다.
본 연구는 경관 인식의 주체로 내부자인 주민을 주목했다. 이는 체험과 만남으로 가치가 더해진 일상적 공간의 복잡다단한 구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의 경관 인식을 총체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경관에 대한 관광객의 행동과 개별 반응을 기반으로 한 실증․분리형 연구가 담아내지 못하는 다층적 현상을 시나리오로 구성하여 구체화한 것이다. 또한 Kim and Lee(1993)와 Lee(1988)가 추후 도시 경관 연구의 방향으로 제시했던 ‘다중적 관계성의 주목’을 실제 사례에 적용해 분석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도서 지역의 경관 활용 사업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도서․농촌 지역의 경관 계획 시 참고할 만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연구의 한계점은 코로나바이러스의 확대로 반월도 주민의 인터뷰를 많이 하지 못했다는 점, 관광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농․어업에만 종사하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수가 적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1960-90년대에 주요하게 논의되었던 신문화지리학과 인간주의 지리학의 틀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환경 인식의 관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연구자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평균적 사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