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of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Article

대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에 나타난 고대 로마의 정원관 연구

황주영
Juyoung Hwang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객원연구원
Visiting Researcher, Environmental Planning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19S1A5B5A07091414).

Corresponding author : Juyoung Hwang, Visiting Researcher, Environmental Planning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Korea, Tel.: +82-2-880-5643, E-mail: jyhwang@snu.ac.kr

© Copyright 2023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ug 10, 2023; Revised: Aug 28, 2023; Accepted: Sep 18, 2023

Published Online: Oct 31, 2023

국문초록

본 연구는 대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속 정원 관련 문헌을 중심으로 고대 로마 시대의 정원관을 탐색함을 목표로 한다. 고대 로마 정원의 유형과 성격, 형태 등은 이후 서양 정원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플리니우스 등이 집필한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문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사』와 관련 문헌, 사료를 중심으로 진행된 본 연구에서는 로마 정원의 형태나 양식적 특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 문헌에 투영된 정원관을 탐색하였다. 『자연사』뿐 아니라 고대 로마 시대에 작성된 정원, 혹은 농업 이론서는 관념적인 자연이나 예술로서의 정원보다는 실용적인 생산 공간을 주로 다룬다는 특징이 있다. 『자연사』에서 정원 연구와 관련된 식물학 부분 또한 즐거움보다는 유용함을 위주로 기술되었고, 플리니우스 또한 실용적인 정원인 호르투스를 전제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정원은 실용적인 생산과 휴식의 공간일 뿐 아니라, 한 시대의 이상을 재현, 혹은 실천하는 장소였다.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의 지배세력과 지식인들은 그들이 지배하는 전 세계에 대한 앎을 포괄하고, 이를 통해 로마 대제국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하는 에피스테메를 공유했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사』를 통해 당대의 유용한 지식을 로마 제국이라는 방대한 문명 세계로 포괄하고자 했고, 정원은 그 이상을 실천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s the garden vision of the Ancient Rome, focusing on garden literature in the Natural History by Pliny the Elder. Ancient Roman garden’s types, character, and forms greatly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later Western gardens, to which the practical and professional texts of Pliny the Elder and others contributed. This study explores the garden visions projected in these texts, with an introduction of Roman garden forms and stylistic features. The Natural History and other garden and agricultural texts written during the Ancient Roman period are characterized by their focus on practical production spaces rather than abstract nature or garden art. In the Natural History, Pliny described botanics in terms of usefulness rather than pleasure, and his discussion is premised on the practical hortus. In ancient Roman society, gardens were not only spaces for practical production and relaxation, and places to reproduce or realize the ideals of Roman rulers and intellectuals, including Pliny. They shared the episteme that sought to encompass knowledge of the entire world they ruled and, in doing so, realize their vision of the Roman Empire. Through the Natural History, Pliny sought to embrace useful knowledges of his time into the vast civilized world of the Roman Empire, and the garden was an important place to practice this ideal.

Keywords: 호르투스; 로마 제국; 고대 정원; 시대의 이상; 에피스테메
Keywords: Hortus; Roman Empire; Ancient Garden; Ideals of the Ages; Episteme

1. 서론

1.1 연구 배경과 목적

본 연구는 로마제국 시기의 정치인, 군인이자 박물학자인 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이하 플리니우스로 약칭)의 『자연사(Naturalis Historia)』를 중심으로 고대 로마의 정원관을 탐색함을 목표로 한다. 고대 로마의 사회, 정치, 경제, 제도는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고대 로마의 건축 유형과 도시 구조, 그리고 정원의 유형과 특징에서 고대 로마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고대 로마는 정원의 양식적 발달뿐 아니라, 식물의 전파와 재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시기다. 또한 건축 형태에 따라 정원 유형이 세분화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정원 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 시기이다. 고대 로마의 정원은 크게 도시의 주택인 도무스 정원과 교외 빌라 정원, 개인, 특히 정치 지도자의 사유지를 대중에게 개방한 초기적 공공 정원의 세 유형으로 분류되고, 성격에 따라서는 실용적인 용도의 정원과 즐거움을 위한 정원으로 구분된다. 고대 로마 시대에 나타난 이러한 정원 유형은 이후 고대 문명의 재생, 부활을 목표로 삼은 르네상스 시기의 정원의 원형이 되었다.

고대 로마 정원 연구는 주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진행되었다. 도무스의 실내, 혹은 페리스틸리움 정원 주위의 벽에 그려진 정원을 주제로 하는 프레스코는 생생한 시각적 자료를 제공한다. 이러한 미술사적 연구가 정원의 형태와 유형 연구에서 중요하다면, 『자연사』를 비롯한 당대의 다양한 문헌은 당시의 정원 문화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이를 통해 정원의 의미와 가치를 탐색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나아가 다양한 성격의 정원 연구를 통해 도무스 내의 즐거움의 정원에 집중된 로마 정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환기한다는 점에서도 본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고대 로마, 특히 플리니우스가 활동한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 시기1)에는 정원, 혹은 농업과 관련된 문헌이 활발히 집필되었다. 그중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의 식물과 정원 항목은 이 시기 로마의 정원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자리매김했다. 정원 연구와 관련해서는 대개 그의 조카이자 양자인 소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의 『서한집(Epistulae)』을 다룬다. 여기에 묘사된 토스카나 빌라와 정원이 후대 르네상스 빌라 정원, 나아가 18세기 영국 풍경화식 양식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이보다 더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고대 로마 정원 문화의 전반적 이해에 있어 필수적인 문헌이다.

본 연구는 로마 정원의 형태와 구성 등을 소개할 뿐 아니라, 『자연사』 등의 문헌을 통해 이상적인 정원에 대한 고대 로마의 관점, 즉 정원관을 탐색하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는 서양 정원의 흐름을 문화사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통해 정원 예술의 담론을 확장하고자 하는 기획의 한 부분이다. 정원은 실용적인 생산과 휴식의 공간일 뿐 아니라, 한 시대의 이상을 재현, 혹은 실천하는 장소였다. 고대 로마의 정원은 그 중요성에 비해 국내 연구가 극히 미미한 부분이고, 연구의 부재는 르네상스는 물론 서양 근현대 조경 실천의 해석과 비평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본 연구는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잇고자 하는 시도이며, 후속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의의도 지닌다.

1.2 연구 대상과 방법

이론의 조사와 역사적 사실의 해석을 중심으로 하기에 본 연구는 관련 문헌과 사료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역사적 연구 방법을 기본으로 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문학, 미술사학, 조경학, 로마사 등의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종합적 해석을 시도한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받았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에는 발췌 요약본이 아니라 전권이 필사되었을 정도로 『자연사』는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지식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르네상스 시기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 기베르티 등은 『자연사』 속의 인문학적 주제를 다루었고, 여러 인문학자들이 『자연사』에 대한 주석본을 출간했다. 하지만 1492년 출판된 레온체노(Niccolo Leonceno)의 『플리니우스의 오류에 대하여(De Erroribus Plinni)』를 필두로 하여 『자연사』의 내용적 오류가 비판받기 시작했고, 『자연사』는 점차 과학적 권위를 상실했다(Turner, 1996). 하지만 오늘날 『자연사』는 당시 로마 사회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2)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높이 평가받는다.

본 연구는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중 식물과 관련된 다양한 사항들을 통해 정원 혹은 농업을 설명하는 12-27권을 중점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밖에 당대의 정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내용을 충실히 제시하며, 논지를 명확히 전개하기 위해 대 카토(Marcus Porcius Cato), 바르로(Marcus Terentius Varro)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등이 집필한 동시대의 관련 문헌도 참고한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의 판본은 여럿 전해지는데, 오늘날에는 라틴어 원전과 영어 번역이 병기된 하버드 로엡 고전 총서(Loeb Classical Library)가 가장 널리 쓰인다(Pliny, 1968-9, 이하 NH로 약칭)3). 국내 편역서로는 『(플리니우스) 박물지』가 있으나 정원 연구와 관련된 식물학과 농업, 원예학 부분은 수록되어 있지 않기에 본 연구에서는 참조하지 않는다(Pliny and White, 2021). 본 연구는 하버드 로엡본의 텍스트를 원문으로 삼고 필요에 따라 타 판본을 참고하였으며, 인용된 원문도 로엡본을 연구자가 번역하였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에 대한 연구는 로마 제국의 문화사와 관련된 연구가 주를 이루며(Beagon, 1992; Murphy, 2004; Lecocq, 2005; Doody, 2010; Gibson and Morello, 2011; Dewar, 2014), 『자연사』가 포괄하는 다양한 주제만큼이나 여러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본 연구와 관련해서는 근대 과학사의 흐름에서 플리니우스의 작업을 고찰하거나(Hall, 1960; French and Greenaway, 1986; Healy, 2005), 식물학의 역사에서의 플리니우스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연구를 선행 연구로 볼 수 있다(Stannard, 1965). 로마 정원에 대한 포괄적 연구에서는 플리니우스의 『자연사』가 빈번히 인용되고(Chambers, 1991; Bowe, 2004; Gleason, 2013), 근래에는 개별 정원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건축과 도시설계를 포괄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Von Stackelberg, 2009; Yegul, 2019). 상기 선행 연구는 고대 로마의 정원에 대한 귀중한 통찰과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나, 연구자가 탐색하고자 하는 로마 시대의 정원관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선행 연구에서 진행된 개별 정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기반으로 본 연구에서는 고대 로마 시대의 정원관을 탐색한다.

미술사 분야에서는 특히 빌라 정원의 벽화와 로마 시대의 경관관과 관련된 연구가 다수 진행되었다(MacDougall and Jsahemski, 1981; Conan, 1986; Jashemski, 1992; Kellum, 1994; Kuttner, 1999; Carroll, 2015). 이에 비해 『자연사』의 국내 연구는 제한적인데, 『자연사』의 34권에서 36권에 기록된 수록된 화가와 조각가들에 대한 번역 연구가 미술사 분야에서 시도되었다(Noh, 1999; Cho, 2012). 서양사 분야에서는 플리니우스의 생애를 통해 당대의 정치 상황을 탐색하였고, 사회적 맥락을 해석하는 연구를 하였다(Ahn, 2009). 한편 고대 로마 정원에 대한 국내 조경학 연구 논문은 전무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빌라에 대한 연구에서조차 논의되지 않았다(Choi and Kim, 2000). 서양 정원사의 주요 주제들들 다룬 연구는 『자연사』의 독해에 유용한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제공하나, 여기에서도 소 플리니우스의 빌라만 소개되었다(Go, 2018). 이렇게 고대 로마 정원에 대한 국내 연구는 선행 연구에 대한 고찰이 어려울 정도로 부족한 실정이지만, 원인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본 연구의 주제를 벗어난다. 본 연구에서는 『자연사』 및 관련 문헌을 통해 고대 로마 시대의 정원 문화를 탐색하고, 이를 통해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서양 정원사 연구의 단초를 모색하고자 한다.

2. 고대 로마 정원의 발달과 전개

정원사 연구는 다양한 학문이 관련된 다학제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하기에 고대 로마의 정원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양식적 특징은 물론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문학 등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영토의 확장과 식민지의 발달, 농업 문화, 노동(negotium)과 여가(otium)의 구분, 실용 정원과 위락 정원의 발달 등은 로마 시대 정원 문화의 주요한 배경이 된다. 또한 도시의 성장과 함께 교외의 빌라도 함께 발달했고, 이 과정에서 도심의 도무스 정원과 교외의 빌라 정원 유형이 나타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러한 정원 문화는 이후 르네상스에 다시 부활하여, 이후 서양 정원 문화에 큰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기존의 국내 조경사 문헌에서는 고대 로마의 정원을 도무스 내 페리스틸리움 정원과 교외의 빌라 정원으로 축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제국을 이룬 고대 로마에서 정원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이를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추후 과제로 두고, 본 연구에서는 플리니우스가 활동한 시대의 정원의 발달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유형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본다.

예술로서의 정원이 발달한 르네상스 이후에는 ‘정원’이라고 하면 대개 즐거움의 정원(pleasure garden)을 지칭하나, 로마 시대에 정원, 라틴어로 호르투스(hortus)는 주로 주택에 딸려 있는 텃밭 정원을 가리켰다. 공화정 시기 주택 정원은 주로 생산 공간이었고, 이후 제정으로 전환될 무렵에야 즐거움의 정원의 성격을 지닌 정원이 발달했다. 대규모의 저택에는 여가를 위한 즐거움의 정원과 생산의 정원을 포괄하는 정원이 여럿 조성되었으며, 동방의 파라다이스를 모방한 비리다리움(viridarium)이나 호르토룸(hortorum)이 조성되기도 했다. 또한 권력자나 위정자의 대규모 정원은 대중에게 개방되는 일종의 공공 정원(horti)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제정으로 정치 체제가 변화한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한 시기 로마에는 공공을 위한 건축 사업이 활발했고, 호르티, 혹은 포르티쿠스(porticus)를 비롯한 공공녹지 공간이 등장했다. 물론 고대 로마의 정원은 이렇게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그 형태도 다양했다. 하지만 “이익과 즐거움을 섞고, 방대한 영지를 단순하지만 우아하게 아름답게 꾸미는 이는 모든 것을 얻나니(utile qui miscenes, ingentia rura, simplex munditiis ornat, punctum hic tulit omne)”라는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시구처럼 즐거움과 유용함은 언제나 공존했다. 본 장에서는 『자연사』 문헌의 이해에 필수적인 로마 정원의 유형과 그 발달 과정을 살펴본다.

2.1 생산의 정원 호르투스

고대 로마의 정원은 전술한 바와 같이 형태적으로는 주택 정원과 빌라 정원, 그리고 공공 정원으로, 성격에 따라서는 실용적인 정원과 즐거움을 위한 정원으로 구분된다. 후대의 인식과 달리 대부분의 로마 정원은 주택에 딸린 실용적인 정원, 특히 푸성귀 따위를 가꾸는 호르투스였고, 이는 호르투스와 경작(cultura)이 결합된 말인 원예(horticulture)의 어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이후 제정 시기에야 과시적인 장식 정원이 등장한다. 이는 공화정 초기인 기원전 450년에 제정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Twelve Tables)의 제7표에 기재된 농장의 경계에 대한 항목에서 농지를 지칭할 때 빌라라는 건축물을 뜻하는 용어대신 호르투스를 사용했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2표법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빌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항상 이 의미로 ‘호르투스’가, 호르투스의 의미로는 ‘헤레디움(heredium, 세습지)’이 사용된다(In XII tab. ―nusquam nominatur villa, semper in significatione ea ‘hortus,’ in horti uero ‘heredium’.). (Choe, 1991)

즉 공화정 초기의 로마는 호르투스로 농지 전체를 대유할 정도로 농업 중심의 사회였고, 빌라 또한 시골의 농원을 지칭했다. 로마의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빌라는 점차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교외의 별장을 뜻하게 되었다. 공화정의 이상을 체화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 카토는 노년에 집필한 『농업에 대하여(De Agri Cultura)』에서 농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무엇보다 강조했으며, 검약을 중시했다. 그는 자연적으로 초원과 숲이 어우러진 땅이나 곡식을 키우고 가축을 먹일 땅은 사들였지만, 잔디에 물을 주고 길을 깨끗이 쓸어야 하는 정원은 사지 않았다는데(Plutarch, 2010), 이러한 기록을 통해 정원에 대한 공화정 시대의 인식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공화정 말기의 지식인 바르로도 『농업에 대하여(De re Rustica)』에서 소박하면서도 효율적이던 초기 로마의 시골 영지에 대한 선호를 강하게 드러냈다. 영지를 구입한 아내를 위한 안내서의 성격을 띤 이 책에서 그는 농부에게는 이익과 즐거움이라는 두 목표가 있는데 그중 이익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어 바르로는 농지의 관리와 생산을 위한 빌라의 이상적인 방의 방향과 배치를 열거하지만, 실용적인 정원과 즐거움의 정원을 엄격하게 구분하지는 않았다(Cato and Varro, 1998).

로마 시대 주택 텃밭 정원의 양식적 특성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생산을 주 목적으로 하기에 농경지처럼 정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자연사』에서 플리니우스가 물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정원사가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호르투스를 정형적인 형태로 만들고 이랑을 만들 것을 제안한 구절이나(NH 29.20), 콜루멜라(Lucius Iunius Columella)가 정형적인 형태가 잡초 제거에 용이하다고 부연한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후대로 가며 점차 정원의 장식적인 성격이 부각되었지만, 그럼에도 실용적인 호르투스는 로마 정원에서 필수 요소로 남았다.

주택 내에서의 호르투스의 위치는 주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지에서 발굴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79년 당시 로마인들의 주거 형태와 도시 구조, 일상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도무스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오늘날 전형적인 로마의 주택 정원으로 알려진 페리스틸리움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보편화되었고, 이전에는 호르투스가 주택 내 주요 정원이었다. 대개 호르투스(그림 1(c))는 아트리움(그림 1(a))에서 가장의 공간인 타블리눔(tablinum, 그림 1(b)), 페리스틸리움(그림 1(d))으로 이어지는 축을 벗어난 측면이나 후면에 위치했는데, 폼페이에서 발굴된 메난드로스의 도무스(House of Menander)에서 일례를 찾아볼 수 있다4). 페리스틸리움 정원 주변에는 다양한 벽화와 서재, 욕실 같은 문화 시설이 배치되어 이곳이 전원의 대저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설들을 그대로 축소해서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도무스에서는 주인의 생활공간과 하인의 작업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메난드로스의 집에서도 페리스틸리움 정원의 서쪽에서 도중에 꺾이는 긴 복도를 통해 부엌으로 갈 수 있고, 이 복도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허브나 채소를 기르는 호르투스가 나왔다.

jkila-51-5-57-g1
그림 1. 메난드로스의 집 범례: a: 아트리움, b: 타블리눔, c: 호르투스, d: 페리스틸리움 자료: Yegül, 2019의 도판을 필자 재가공
Download Original Figure

호르투스는 도시 내에서의 자급자족에 필수적이었고, 특히 하층민들의 생존에는 필수적이었다(NH 19.19). 플리니우스나 대 카토, 콜루멜라 등은 호르투스에서 재배하는 양배추와 상추, 양파, 콩뿐 아니라 아스파라거스나 오이, 근채류 등 당시 로마인들의 식단에서 식용 식물의 다양한 품종을 열거했다. 화훼 또한 초기에는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라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고, 장미와 제비꽃 등이 장식용으로 인기 있었다.

생산을 위한 정원에는 호르투스나 과수원도 있지만, 물고기나 새를 양식하거나 식물을 재배하는 곳도 있었다. 로마의 식민지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전 세계에서 다양한 동식물이 로마로 유입되었고, 이는 지식의 탐색과 권력의 과시 양쪽에서 모두 중요했다. 일례로 플리니우스는 당대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안토니우스 카스토르(Antonius Castor)의 정원을 방문했는데, 이곳에는 그가 재배하는 수많은 표본이 있었다고 『자연사』에 기록했다(NH 25.5).바르로는 사치스러운 정원으로 유명한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가 투스클룸에 지은 사육장인 비바리움(vivarium)을 언급했다. 루쿨루스는 한 지붕 아래에 새장과 식당을 두어 호화로운 식사와 요리, 새 사육을 동시에 즐기고자 했으나 새똥의 악취를 감내하며 즐길 만큼의 시각적 즐거움을 주지는 못했다고 한다(Cato and Varro, 1998). 플리니우스도 이곳을 『자연사』에 기록했는데, 이런 사육장은 페르시아의 왕실 수렵장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로마에서는 리피누스(Fulvius Lippinus)가 처음으로 고안하여 야생돼지와 다른 사냥감들을 사육했고, 이를 루쿨루스와 호르텐시우스(Quintus Hortensius)가 모방했다고 한다(NH 8.211).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대 로마 정원의 다양한 양상을 엿보고, 후대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다.

2.2 즐거움의 정원: 호르투스에서 비리다리움으로

실용적인 생산의 공간이었던 로마의 주택 정원은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 점차 즐거움과 과시의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에 따라 도무스의 중정 역할을 하는 페리스틸리움의 정원이 더욱 더 부각되었고, 후원의 역할을 하는 포르티쿠스 정원이나 페리스틸리움이 추가로 조성되기도 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살루스트(Sallust)의 집은 로마 도무스의 형태와 기능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Yegul, 2019). 공화정 시기인 기원전 3세기경 집이 건축되었을 때는 중앙의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방들이 배치되고, 상점이 늘어선 면을 제외한 세 면이 방대한 호르투스로 둘러싸여 있었다(그림 2(c)). 이후 점차 소유자의 부가 증대함에 따라 주택도 변화했고, 베수비오 화산이 폼페이를 덮기 전인 1세기 무렵에는 손님을 접객하는 공간인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그림 2(e))을 포함한 생활공간이 기존 호르투스가 있던 곳에 증축되었고, 호르투스는 사라졌다. 가장의 공간, 혹은 응접실 역할을 하는 타블리눔(그림 2(b)) 뒤로는 열주가 늘어선 장식적인 포르티쿠스 정원(그림 2(f))이 배치되었고, 정원을 향해 뚫린 창이 확대되었다. 현관과 아트리움(그림 2(a)), 타블리눔, 정원은 하나의 축선상에 배치되어 깊이감을 연출하고, 장식적인 식재와 벽화, 조각으로 장식되었으며, 호르투스가 있던 측면에는 장식적인 정원인 페리스틸리움(그림 2(d))이 추가되었다.

jkila-51-5-57-g2
그림 2. 살루스트의 집 범례: a: 아트리움, b: 타블리눔, c: 호르투스, d: 페리스틸리움, e: 트리클리니움, f: 포르티쿠스 정원 자료: Yegül, 2019의 도판을 필자 재가공
Download Original Figure

벽화를 그려 넣고, 페리스틸리움에 정원을 조성한 시내의 도무스는 상류층의 전원주택인 빌라를 모방한 것이었다(Carroll, 2003). 보다 부유한 이들은 교외 빌라에서 너른 집과 정원, 주변의 너른 경관을 즐겼고, 때로는 계절별로 다른 빌라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치스러운 빌라는 제정 시기에 더욱 증가했는데, 과거 공화정 시기에는 각 로마 시민에게 균등하게 토지가 약 2에이커씩 배분되었으나,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부가 집중되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의 화려한 정원(viridiarium)이 조성되었다는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NH 19.2). 공화정 초기의 시골 장원인 헤레디움, 혹은 도시 텃밭인 호르투스는 제정 전환기에 들어 화려하고 과시적인 정원이나 비리다리움으로 전환되었다.

로마의 귀족 중에는 페르시아나 헬레니즘 시기의 그리스의 왕이 소유한 왕실 정원과 수렵지를 절충적으로 모방하거나, 정원을 사치품을 전시하는 장소로도 활용하는 이도 있었다. 일례로 기원전 1세기의 동방 원정으로 명망 높은 루쿨루스는 원정에서 축적한 부를 그림과 조각상 수집과 정원 조성에 아낌없이 썼고, 나폴리 해안가에 값비싼 건물과 산책시설, 목욕시설을 갖춘 사치스러운 빌라와 정원을 조성했다. 그의 정원에는 넓은 굴 위로 쌓은 언덕, 집 주변에 바닷물을 가두어 놓은 개인 해변, 물고기를 키우는 못 등이 있었고, 이를 본 스토아 학자는 그를 페르시아의 황제에 빗대어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칭하기도 했다(Plutarch, 2010).

이런 즐거움을 위한 정원은 화려한 연회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지적인 즐거움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로마의 귀족들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정원을 모방하여 정원을 조성하고, 이곳에서 철학과 문학, 예술을 논했다. 키케로는 투스쿨룸 인근에 조성한 자신의 빌라를 아카데미아(Academia)라고 불렀고, 아카데미아와 부속 김나지움에 설치한 그리스의 조각상을 서한에서 언급하기도 했다(Cicero, 1919). 전술한 루쿨루스의 빌라는 훌륭한 도서관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수집한 책들을 모은 도서관을 설립했고, 이를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그는 모든 철학 이론을 귀중하게 여겼고 모든 학파에 대해 우호적이고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집은 로마로 온 헬라스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모임 공간이 되었다(Plutarch, 2010).

플리니우스의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의 빌라 또한 이 시대의 빌라의 전형적인 사례로 전해진다. 소 플리니우스의 빌라의 모습은 그의 서한문을 통해 전해지고, 이후 수많은 연구자와 고고학 애호가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McEwen, 1995). 생산적인 정원을 강조한 플리니우스와 달리 소 플리니우스는 빌라에서의 농업의 중요성을 축소했다. 바닷가와 산비탈에 위치한 빌라를 묘사한 서한에서 그는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고, 숙고하며, 철학을 논할 수 있는 시골 생활의 고요함을 높게 평가했고, 코모 호숫가 빌라의 빛도 소리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정신적인 일에 집중하는 일을 즐겼다(Yegül, 2019).

부유한 로마인들의 개인 빌라는 소유자가 사망한 뒤 로마 시민에게 공공 정원으로 개방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는 황제의 소유가 되었다. 황제의 빌라와 정원은 규모와 디자인, 소장품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났고, 이러한 정원은 황실의 부와 지위, 권력을 상징했다(Carroll, 2003). 네로 황제가 64년의 로마 대화재를 활용하여 마련한 부지에 지은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에 딸린 방대한 정원에는 수렵지와 포도밭, 초지, 숲, 인공 호수 등이 펼쳐졌다(Suetonius, 2009). 하지만 로마인들은 화려한 부의 과시에 부정적이었고, 네로가 암살당한 뒤 새로 왕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영지를 몰수하고 이를 공공 자산으로 전환했다.

2.3 공공 정원 호르티

고대 로마에는 현대적 개념의 도시 공공 공원은 없었으나,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녹지 공간이 있었다. 라틴어 호르투스(hortus)는 단수형일 때는 개인이 소유, 관리하는 정원을 뜻하나, 복수형인 호르티(horti)로 표기될 때는 주로 로마 경계에 조성된 대규모의 녹지 공간을 지칭했다. 이러한 호르티는 성스러운 숲이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영묘 주변 녹지, 혹은 부유한 이들이 사후 로마 시민에게 유증한 개인 정원이 대부분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살당하기 전 작성한 유언장에서 테베레 강 인근에 있는 자신의 정원을 로마 시민에게 유원지로 남겼는데, 이는 이후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에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산책로 전부요. 테베레 이쪽의 개인 정자와 새로 심은 과수원을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에 영구히 남기셨소. 걸으며 기운을 회복하는 공동의 놀이터를요. 이런 분이 시저셨소! 이런 분이 또 있겠소? (Shakespeare, 1599, 3막 2장)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인 아그리파 또한 숲과 목욕탕, 수경 요소로 유명한 아그리파의 호르티(Horti Agrippae)를 유증했고,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또한 그의 사후 로마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던 기원전 1세기 중엽에는 황제뿐 아니라 부유한 로마의 귀족들도 경쟁적으로 공공 녹지를 조성했다. 이들은 그리스의 아고라를 모방한 포룸 등의 다양한 건축물을 짓고, 그 주변에 넓은 공공 공원과 나무가 열식된 광장을 조성했다. 부유한 귀족이자 군인인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Pompey the Great)의 포르티코가 시초라고 알려졌는데, 그는 기원전 55년에 숲과 극장, 바실리카와 시장을 로마 중심부에 조성했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포르티코(Porticus Pompeia)라고 알려진 이곳에는 콜로네이드와 분수, 플라타너스 나무가 줄지어 심겨 녹음을 드리우는 가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늘이 드리워진 열주가 있는 폼페이우스의 포르티코에는 웅장한 금빛 캐노피와 고르게 심겨진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물이 잠든 마로[바쿠스의 추종자]에서 쏟아지고, 트리톤의 입에서 갑자기 뿜어 나오는데, 그럴 때 수반 가장자리에서 님프들이 속삭이는 물은 시시해 보인다. (Propertius, 2016)

폼페이우스는 원정을 간 다른 로마의 장군들처럼 동방과 헬레니즘 그리스의 도시에 있는 숲과 궁, 공공건물을 보았고, 조각상 등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왔다. 그는 그리스의 건축과 예술을 모방한 공간을 조성하여 자신의 위신을 높일 뿐 아니라, 이 장소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헬레니즘 그리스와 연결시키고자 했다(Carroll, 2003). 하지만 위대한 철학자들은 폼페이우스의 포르티코와 같이 과시적인 곳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공공을 위해서는 성벽, 부두, 하구, 수로와 같은 곳에 돈을 쓰는 것이 보다 유용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인 키케로처럼 사치스러운 공공 녹지를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Cicero, 1913).

공공 건물 주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식재한 공공 정원 및 산책로는 로마의 주요 도시 요소로 자리매김했고, 이는 대개 황제가 치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플리니우스와 동시대의 인물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기둥들이 늘어선 광장 양쪽으로 나무들이 세 줄 열식된 포룸 파시스(Forum Pacis)를 조성했고, 이후 트라야누스 황제도 이와 비슷한 포룸을 로마 시내에 조성했다(Carroll, 2003). 이렇게 로마의 정원 문화는 농원부터 공공 정원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고, 생산의 정원은 물론, 위락과 휴식, 사교와 학문의 장의 성격을 띠었다.

플리니우스는 로마 정원이 생산적인 정원 중심에서 다양한 즐거움의 정원으로 이행하고, 식민지 개척을 통해 다양한 동식물이 로마 제국으로 유입되던 시기를 살았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직접 목격했고, 또 기록으로 남겼다. 우리는 플리니우스가 어떤 정원을 소유하거나 선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사』에 수록된 일화들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의 정원의 양상,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원관을 탐색할 수 있다.

3.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3.1 저자의 생애와 저술 배경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AD 23-79)는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기에 이탈리아 북부의 코뭄(Comum, 오늘날의 코모[Como])에서 기사 계급(ordo equester)으로 태어났다. 명성에 비해 생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살던 시대의 위인들을 포괄적으로 기록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도 플리니우스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자연사』의 구절 혹은 그의 조카이자 양자인 소 플리니우스가 쓴 서한의 구절 등을 통해 그의 생애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Pliny the Younger, 1957).

플리니우스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23세부터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아 나갔다. 게르마니아 속주에서 12년간 근무하며 전술에 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57년경 당시 황제였던 네로와의 불화로 장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레토릭과 문법, 법을 연구했고, 69년에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면서 다시 군대에 복귀했다. 플리니우스는 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등지의 속주에서 징세관(procurator)으로 근무하며 황실의 재정을 관리했다. 말년에는 로마로 돌아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황제에게 조언자 역할을 했고, 미세눔(Misenum)의 함대를 이끌었다(Bergmann, 2000).

플리니우스는 로마 제국의 다양한 곳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당시 기사 신분의 인물이 경력을 쌓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로마 제국의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군사와 재정과 같은 실용적인 지식뿐 아니라, 식물학, 철학, 수사학, 법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정보를 습득했다. 이 경력은 이후 『자연사』와 같은 저서를 집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플리니우스의 죽음 또한 업무와 지적 탐색을 병행하던 중 일어났는데, 그는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분출했을 때 구조와 관찰을 병행하러 스타비아이(Stabiae) 지역에 갔다가 질식사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 또한 소 플리니우스가 친구 타키투스(Tacitus)에게 보낸 서한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Pliny the Younger, 1957).

다독 다작하는 저술가인 플리니우스는 『자연사』 외에도 총 31권으로 된 역사서와, 레토릭 교육서, 언어학 관련서, 군사전술서, 전기 등 총 7종 102권에 달하는 다양한 책을 집필했으나 후대에는 『자연사』만 전해진다. 50년대 집필을 시작해 77년에 출간된 『자연사』는 이후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티투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둘은 일찍이 플리니우스가 게르마니아 속주에서 근무하던 시기부터 친분을 맺었고, 티투스는 플리니우스의 보호자(patronus) 역할을 하며 그를 후원했다(Reynold, 1986).

플리니우스가 속한 기사 계급은 실용적인 전문 지식을 중시했고, 정원을 포함한 농업이나 재정과 관련된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성격의 책을 저술했다. 가령 콜루멜라는 『농업론(Rei Rusticae)』의 제5권에서 자신의 입장을 가능한 많은 사냥감을 잡고자 하는 사냥꾼에 비유하며, 농업의 실무에서 필요한 여러 지식을 정리하고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Columella, 1987). 당대의 명망 높은 정치가인 세네카도 기사 계급 출신이었고, 원로원에 들어간 후에도 농업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다. 이런 세네카에 대해 플리니우스는 “결코 헛된 것을 좇지 않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NH 14.51).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어 산문으로 알려진 대 카토의 『농업에 대하여』를 필두로 하여 바르로의 『농업에 대하여』,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 콜루멜라의 『농업론』과 『나무에 대하여(De Arboribus)』 등의 농업서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의 『건축론(De Architectura)』 등이 고대 로마의 정원관, 혹은 자연관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문헌이다. 기사 계급 출신의 전문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책이 자신이 맡고 있는 공직상의 임무와 상보 관계에 있다고 보았고, 플리니우스 또한 티투스에게 헌정된 『자연사』 서문에서 자신이 낮에는 공무에 충실하고, 집필은 밤에만 한다며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을 부각한다(NH pref. 18). 그런데 후대 르네상스 시대의 정원 이론서와 달리 이들의 책에서는 예술로서의 정원을 다루지 않는다.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정원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공간인 호르투스였고, 당대 로마인들의 삶 속에서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3.2 『자연사』의 구성 체계

『자연사(Naturalis historia)』는 『박물지(博物志)』라는 또 다른 번역 제목이 암시하듯 우주부터 곤충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백과사전적 책이다. 소 플리니우스 또한 서한에서 『자연사』가 “자연 그 자체만큼이나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는 포괄적이고 학구적인 작업”이라 소개하며 이러한 성격을 강조한다(Pliny the Younger, 1957). 원제의 Naturalis는 ‘자연에 대한’ 혹은 ‘자연이 내놓은 것의’라는 뜻이고, 이와 결합된 라틴어 historia에는 ‘역사’, ‘연대기’라는 뜻뿐 아니라, ‘서술’, ‘해설’이라는 의미도 있다. 즉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통칭되듯 자연사(自然史)이기도 하지만 그가 서문에서 이 책이 “자연에 대한 해설의 책(libros naturalis historiae)”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자연사(自然辭)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플리니우스가 『자연사』를 통해 해설하고자 하는 ‘자연’은 무엇인가? 그는 이를 티투스에게 바치는 헌정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주제는 재미없는 것입니다. 이는 사물의 자연, 즉 달리 말하자면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sterilis materia, rerum natura, hoc est vita, narratur). 그것은 가장 덜 고상한 영역에서, 촌스럽거나 이국적인, 아니 야만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고, 그리하여 사과의 말과 함께 이야기해야 할 지경입니다. (…) 게다가 이 길은 다른 저술가들이 닦은 길이 아니고, 마음이 기꺼이 다니고자 하는 길도 아닙니다. 우리 로마인들 가운데 이런 모험을 한 이가 없거니와 그리스인들도 한 사람의 문장으로 이 모든 분야를 다루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쉬운 학문 분야를 추구하고, 반면에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분야는 연구대상의 깊은 어둠에 가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분야는 그리스인들이 ‘백과 수양’이라 불렀던 주제에 포함됩니다. (NH pref.13-14)

플리니우스가 자신의 글을 “재미없는(sterilis)”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사』가 문학적 상상이나 수사법을 활용한 미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농부와 장인들, 그리고 달리 할 일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쓴 생활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다(NH Preface 6). 이는 새로이 로마 제국에 복속된 식민지를 인식하여 통제하고자 하는 로마 제국의 특성뿐 아니라, 전문적이고 실제 적용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는 실용적 성격을 띠는 책들이 다수 출판된 당대 분위기를 반영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 작성된 정원, 혹은 농업 이론서는 대부분 실질적인 지식을 다루고 있는 안내서의 성격이 강하다.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등의 전원 문학에서는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누리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예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문헌은 특성과 재배법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리고 고대 로마인들이 전거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문헌과의 차이인데, 많은 경우 고대 그리스인들은 관념적 성향을 보인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지(Historia Animalium)』에서 500여 종에 이르는 동물을 분류하고, 형태와 생리, 내외부 기관, 번식 방법, 생태 등을 기록하여 세계를 탐색하였으나, 이는 근본적으로는 개념적이고 철학적이다. 반면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인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관념적 세계보다 주거, 경작, 음식, 의약, 식목, 목축, 양봉 등의 실용적인 분야의 지식의 종합과 사실을 추구했다.

『자연사』를 집필하기 위해 플리니우스는 100명의 저자가 쓴 책에서 20,000편의 주목할 만한 항목을 수집했다고 한다(NH pref 17).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이의 글을 참고했으며, 방대한 문헌뿐 아니라 자신이 경험했거나 전해들은 정보와 사건을 『자연사』에 기록했다. 각 권의 도입부에서 플리니우스는 다양한 인용을 곁들여 해당 권에서 다루는 내용을 소개하나, 분량이나 형식이 일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 권별로 주로 다루는 이야기 간에는 나름의 내적인 질서가 있어 주의 깊은 독서가 필요하다. 『자연사』를 내용을 기준으로 정리하면 헌사와 전체 목차, 문헌 소개(1권)에 이어 천문학과 기상학(2권), 지질학(3-6권), 인류학(7권), 동물학(8-11권), 식물학(12-19권), 식물 의학(20-27권), 동물 의학(28-32권), 광물학(33-37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제12권부터 제27권의 식물학과 식물 의학 부분에서 농업과 원예를 다루면서 정원에 대한 내용이 전개된다. 총 37권 중 식물과 관련된 내용이 16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중을 통해서도 당대 로마 사회에서 식물, 특히 식용 작물 및 이를 재배하는 실용적인 성격의 정원, 즉 호르투스가 중요했으리라 추정된다.

3.3 『자연사』와 로마 정원

플리니우스가 『자연사』에서 정원과 관련된 글을 쓸 때 염두에 둔 정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대 로마 정원 연구에서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중요한 문헌으로 언급되나, 정작 『자연사』 속에서는 정원에 대한 애정 어린 글, 혹은 정원 조성을 집중적으로 다룬 부분은 찾기 어렵다. 우리는 그의 기록을 통해 나무를 전정하여 모양을 내는 토피어리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구이자 기사 계급에 속했던 마티우스(Gaius Matius)에 의해 고안되었고(NH 12.13), 회양목이 장식적인 정원술(topiario opere)에서 높게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NH 16.70). 그러나 플리니우스는 이 이상의 조원 기법이나 정원 양식을 논하지 않고, 각 식물의 유래와 특성, 그리고 용도를 주로 소개한다. 그가 다루는 정원은 식량이나 유용한 부산물을 생산하는 호르투스이며, 식물 또한 이러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소개된다. 그러하기에 후대의 정원 이론서와 달리 그의 문헌만을 통해서는 형태나 양식, 규모, 구성 요소 등을 반영한 로마 정원의 모습을 명확히 그려볼 수 없으며, 이상적인, 혹은 바람직한 정원에 대한 관점, 즉 정원관을 추론해 낼 수 있을 따름이다. 즉 플리니우스는 식물을 통해 로마 정원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으나, 정원의 이론을 집대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연사』에 수록된 기록을 통해 로마 정원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형성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자연사』중 정원과 관련된 식물학 분야는 이국적인 식물과 수생 식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후 포도와 올리브 나무 등의 유용한 수목을 다루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이어 상록수를 소개하고, 과일 나무와 식재 방식을 논한다. 그런 후에 농장 경영에 한 장을 할애해고, 그곳에서 키우는 작물, 아마나 다양한 채소 같은 실용적인 식물들을 소개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꽃을 다루고, 이어 염료로 활용되는 식물과 약용 식물과 새로 전파된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플리니우스는 각 식물마다의 형태와 고유한 성질, 관련된 일화와 상징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이는 수많은 문헌과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거로 삼고 있으며, 그가 직접 목격하거나 관찰한 것도 등장한다. 영국의 과학사가 홀(A. R. Hall)은『자연사』의 내용이 플리니우스의 독창적인 연구가 아니라, 기존의 문헌을 표절한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으나(Hall, 1960), 이는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은 해석이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의 고유성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독창성이 평가의 기준이 아니었다. 우리는 당대의 지식을 얼마나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큐레이션했는가를 기준으로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플리니우스는 다른 이들의 글을 참조했으나, 이를 맹목적으로 옮겨 쓰지 않았고, 상세히 관찰하여 기록하고, 의심하는 부분은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박하는 여름에는 푸르지만, 가을에는 노랗게 변한다”(NH 19.159)처럼 기초적인 관찰의 기록도 있지만, 이탈리아에서 야생으로도 자라는 갯는쟁이(Atriplex spp.)를 재배하기 어렵다고 한 스미르나의 솔론(Solon of Smyrna)의 문헌에 이의를 제기하는 구절을 남기기도 하는 등 실증적 관찰을 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NH 20.220).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빌라 생활의 즐거움을 예찬한 조카의 글과 달리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건조한 문체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매뉴얼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실무적인 내용만 기계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으며, 빈번히 자연을 예찬하며, 고전을 인용하고, 다양한 지식과 이에 대한 의견을 함께 제시한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 본격적인 정원 이론서가 부지 선정과 설계 원리를 먼저 정의하고, 이어 식물의 종류와 식재 및 관리 방법 등을 논하는 것과 비교하면 『자연사』의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사』가 작성된 시대적 맥락을 고려해야 하며, 또한 『자연사』가 고대의 문헌 중 최초로 목차가 있는, 즉 구조를 가시적으로 드러낸 서적이었음도 주목해야 한다. 즉 『자연사』는 후대에 중시된 예술로서의 정원 조성, 혹은 화훼의 완상과는 다른 태도와 목적을 가지고 쓰인 책이다.

『자연사』에는 수많은 동식물을 비롯해 광물과 우주, 의학 등 당시의 로마의 지식인들이 인식한 지식의 전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플리니우스는 이를 무작위로 기록하지 않았고, 이 대상이 언제 로마에 처음 등장했고, 로마 제국에서의 “사물의 자연, 즉 삶”에서 어떻게 쓰였으며, 이것들의 활용과 보급이 로마 제국에 의한 평화와 번영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반복하여 역설한다(Naas, 2011). 식물의 사례를 보더라도 폼페이우스의 시대부터 전리품과 노예뿐 아니라 나무들도 개선행진에 전시되었고, 로마의 장군들이 체리나 복숭아, 살구, 피스타치오 등을 식민지에서 가지고 왔다고 『자연사』에 기록되어 있다(NH 12.54; NH 15.14). 그리고 “인류의 안녕을 위해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온 식물들은 로마 제국의 평화의 무한한 웅장함 덕분”이라며 다시 한 번 제국의 업적을 부각시킨다(NH 27.3).

이런 이국적인 동식물은 앎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공동체들의 특별한 부모의 나라”인 로마 제국의 부와 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다(NH 14.1).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로마인은 건국 초기부터 지녔던 소박한 농부의 덕목을 상실했지만, 그 대신 전 세계가 결합되었다. “로마 제국의 지상권(至上權)”을 통해 전 세계의 물자뿐 아니라 정보도 유통되었고, “축복과 평화 속에 사람들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삶이 향상되고 이전에는 감추어졌던 모든 것이 모든 이에게 알려지게” 된 것 또한 로마 제국의 업적이었다(NH 14.2). 이렇게 앎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자연사』처럼 전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통합하는 책의 저술이 가능해졌고, 또 로마 제국인의 삶을 위해 필요해졌다. 플리니우스가 서문에서 『자연사』의 주제라고 밝힌 “사물의 자연, 즉 삶”은 곧 인간의 삶에 필요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앎의 대상으로 포착한 자연은 인간의 삶과 관계있고, 인간에게 유용한, 인간을 위한 자연이었다(French, 1986). 그리고 그 인간은 “모든 종족을 정복한 인민”인 로마인(NH 10.70), 로마 제국의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는 교양 있는 로마인이었다(Ahn, 2009).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에서 세계는 로마라는 중심부와 주변 지역으로 구분되고, 지식의 세계 또한 체계를 갖추고 조직되었다. 이를 통해 플리니우스는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에피스테메를 『자연사』에서 형성했다. 세상의 유용한 모든 지식을 로마 제국이라는 방대한 문명 세계로 포괄하는 것이 로마 제국의 기사인 플리니우스의 목표였고(Hwang, 2021),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사』를 보아야 한다.

고대 로마, 특히 플리니우스가 활동한 제정 초기의 로마인들에게 정원은 생산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또한 여가와 휴식, 지적 탐색과 사교, 그리고 과시와 쾌락의 공간이었다. 또한 이러한 정원은 당대의 이상을 재현, 혹은 실천하는 장소였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연사』에서 플리니우스는 동시대 기사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같이 실용적인 호르투스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또한 그의 앎의 추구는 식민지를 통해 로마로 유입된, 즐거움의 정원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한 다양한 식물로 확장된다. 플리니우스에게 “세계의 가장 작은 조각이자 세계의 총체”(Foucault, 1994)인 정원은 로마 제국의 앎과 삶을 포괄하는 곳이었으며, 이것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정원의 모습, 그의 정원관일 것이다.

4. 결론: 플리니우스의 정원관과 고대 로마 사회의 에피스테메

본 연구에서는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를 통해 고대 로마 시대의 정원관, 즉 당대의 정원에 투영된 이상을 탐색하고자 했다. 고대 로마 시대 정원은 개인의 주거지에 딸려 있는 생산의 공간에서 시작했고, 때로는 식물원이나 도서관,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산책로 등을 통해 지식을 추구하는 곳이자 즐거움의 공간이기도 했다. 제국이 발전함에 따라 정원은 과시와 쾌락의 장소가 되었고, 때로는 공공을 위한 도시 녹지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형태와 규모, 성격에 관계없이 로마의 정원은 당대의 이상을 담고 있었고, 플리니우스가 활동한 제정 초기의 정원은 로마 제국의 확장과 번영, 지식이 총망라된 곳이었다.

근대적 학문 체계가 성립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자연사』는 정원 이론서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연사』를 비롯한 동시대의 문헌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정원 문화를 보다 심도 있게 인식할 수 있으며, 이것이 없었다면 고대 로마의 정원 문화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규정된 피상적인 이미지로만 전해졌을 것이다. 『자연사』가 다루고자 한 “사물의 자연, 즉 삶”의 다양한 양상은 순수한 과학적 탐구보다는 로마 제국에서의 쓰임을 위한 것이었다. 『자연사』에 수록된 정원 연구와 관련된 식물학과 농업, 원예학적 지식 또한 예술로서의 정원, 즐거움을 위한 정원보다는 실용적인 정원과 농원과 관련되었다. 플리니우스는 수많은 자원이 제국의 확장을 통해 로마로 유입되었고, 이는 로마인들의 앎과 삶을 모두 풍요롭게 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로마 제국의 지배 질서를 옹호한다. 따라서 로마 제국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쓰인 『자연사』에 나타난 플리니우스의 관점은 당대 로마 제국의 지배 담론을 드러내는 에피스테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공간도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원 또한 그것이 조성된 사회의 양상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본 연구에서는 로마 정원의 전개에서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로 대표되는 동시대 정원 문헌이 지식과 담론을 형성하여 당대의 정원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았다. 또한 개별 고대 로마 정원의 양식과 형태 연구를 벗어나,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등의 문헌을 통해 로마인들의 정원관을 보다 심도 있게 탐구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 충분히 다루어지 않았던 분야의 연구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정원 예술에 대한 담론에도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이번 연구에서는 『자연사』의 문헌에 나타난 요소를 실제의 사례에 면밀히 적용시켜 보지 못했고 이름을 거론하는데 그쳤으나, 이는 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후속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Notes

고대 로마는 정치 형태의 변화에 따라 로마 왕국기(기원전 753-509), 로마 공화국기(기원전 509-27), 로마 제국기(기원전 27-기원후 395)로 구분된다. 플리니우스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재위기(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에 태어나 티베리우스(재위 14-37), 칼리굴라(재위 37-41),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 네로 황제(재위 54-68)로 이어지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에서 티투스(재위 79-81)로 이어지는 플라비우스 왕조로 이행되는 시대를 살았다.

에피스테메는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작에서 인용한 개념으로 한 시대의 인식론적 배치,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 기초를 뜻한다.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을 필두로 한 논의해서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상호 작용을 탐구했고, 담론을 통해 권력이 각 사회의 고유한 에피스테메를 형성한다고 보았다(Foucault, 2012). 한 시대의 사유와 지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가능 조건, 즉 에피스테메를 배경으로 하며, 플리니우스가 살았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로마 제국이라고 볼 수 있다.

로엡본 『자연사』는 국내 여러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디지털 도서관(loebclassics.com)에서도 원문을 확인할 수 있으나, 연구자 소속기관 도서관에서는 구독하지 않는다. 국외 여러 연구 기관의 사이트에서도 텍스트를 제공하나 라틴어 원문(penelope.uchicago.edu 등) 혹은 영문 번역문(perseus.tufts.edu, gutenberg.org 등)만을 제공한다.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소장한 로엡본 『자연사』를 주요 자료로 활용했다.

이 도무스의 소유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리스의 극작가인 메난드로스(Menandros)의 초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유명한 프레스코의 이름에서 도무스의 명칭이 유래한다.

References

1.

Ahn, H. D.(2009) ‘Roman Cultural Revolution’ and Pliny the Elder’s Natural History. The Western History Review 102: 41-67.

2.

Beagon, M.(1992) Roman Nature: The Thought of Pliny the Elder. Oxford: Clarendon Press.

3.

Bergmann, B.(2000) Pliny. In Turner, J. S., ed., The Grove Dictionary of Art. London: Macmillan Reference.

4.

Bowe, P.(2004) Gardens of the Roman World. Los Angeles: Getty Publications.

5.

Carroll, M.(2015) Contextualizing Roman Art and Nature. In Borg, B. E., ed., A Companion to Roman Art. New Jersey: John Wiley & Sons.

6.

Cato and Varro(1998) On Agriculture (Hooper, W. D. and H. B. Ash, Tra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7.

Choi, J. H. and Y. K. Kim(2000) A study on the background of the building and the actual condition of Italian Villa Gardens in 15th and 16th century. Journal of Korean Institute of Tradi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18(4): 30-38.

8.

Chambers, D.(1991) The translation of antiquity: Virgil, Pliny, and the landscape garden. University of Toronto Quarterly 60(3): 354-373.

9.

Cho, E. J.(2012) Pliny’s Polykleitos and Myron: The romans’ view of greek sculpture style. Journal of the Association of Western Art History 36: 203-230.

10.

Choe, B. J.(1991) Twelve tables. Seoul Law Journal 32(1/2): 157-176.

11.

Cicero, M. T.(1913) De Officiis (Miller, W. Tra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2.

Cicero, M. T.(1919) Letters to Atticus I (Winstedt, E. O. Trans.). Available at: https://www.gutenberg.org/cache/epub/58418/pg58418-images.html

13.

Columella, L. J. M.(1987) On Agriculture (Boyd, H. Tra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14.

Conan, M.(1986) Nature into art: Gardens and landscapes in everyday life of ancient Rome. Journal of Garden History 6(4): 348-356.

15.

Dewar, M.(2014) Leisured Resistance: Villas, Literature and Politics in the Roman World. London: Bloomsbury.

16.

Foucault, M.(1994) Dits et écrits 1954-1988, IV., 1980-1988. Paris: Gallimard.

17.

Foucault, M.(2012) Les Mots et Les Choses (Lee, G. H. Trans.). Seoul: Minumsa.

18.

French, R. K. and F. Greenaway(1986) Science in the Early Roman Empire: Pliny the Elder, His Sources and Influences. New Jersey: Barnes & Noble Books.

19.

Gibson, R. K. and R. Morello(2011) Pliny the Elder: Themes and Contexts. Leiden: Brill.

20.

Gleason, K.(2013) A Cultural History of Gardens in Antiquity. London: Bloomsbury.

21.

Go, J. H.(2018) 100 Scenes in Garden History. Seoul: Hansoop.

22.

Hall, A. R.(1960) The Scientific Revolution, 1500-1800. The Formation of the Modern Scientific Attitude. Boston: The Beacon Press.

23.

Healy, J. F.(2005) Pliny the Elder on Science and Techn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4.

Jashemski, W. F.(1992) The gardens of Pompeii, Herculaneum, and the villas destroyed by Vesuvius. Journal of Garden History 12(2): 102-125.

25.

Hwang, J.(2021). Knowledge for power, Pliny’s Natural History. Lak 404: 118-119.

26.

Kellum, B. A.(1994) The construction of landscape in augustan Rome: The garden room at the Villa ad Gallinas. The Art Bulletin 76(2): 211-224.

27.

Kuttner, A.(1999) Looking outside inside: Ancient roman garden rooms.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19(1): 7-35.

28.

Lecocq, F.(2005) Sens et essence du jardin à Rome. In Brenot, A. M. and C. Bernard eds., Le Jardin: Figures et Métamorphoses. Dijon: Editions Universitaire de Dijon.

29.

MacDougall, E. B. and W. Jashemski(1981) Ancient Roman Gardens. Boston: Dumbarton Oarks Trustees for Harvard University.

30.

McEwen, I. K.(1995) Housing fame: In the Tuscan Villa of Pliny the Younger. RES: Anthropology and Aesthetics 27: 11-24.

31.

Murphy, T.(2004) Pliny the Elder’s Natural Hist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32.

Naas, V.(2011) Imperialism, mirabilia and knowledge: Some paradoxes in the naturalis historia. In Gibson, R. K. and R. Morello, eds., Pliny the Elder: Themes and Contexts. Leiden: Brill.

33.

Noh, S. D.(1999) Pliny’s the Natural History, book 34, 35 and 36. Korean Bulletin of Art History 12: 113-136.

34.

Pagán, V. E.(2007) Rome and the Literature of Gardens. Bristol: Bristol Classical Press.

35.

Pliny, G. P. S.(1968-9) Natural History (Rackham, H. Tra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36.

Pliny, Y.(1957) Letters (Radice, B. Tra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37.

Pliny, G. P. S. and J. S. White(2021) The Boys’ and Girls’ Pliny (Seo, K. J. Trans.). Goyang: Nomade.

38.

Plutarch(2010)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2 (Lee, D. H. Trans.). Seoul: Human & Books.

39.

Shakespeare, W.(1599) Julius Caesar. Available at: https://www.folger.edu/explore/shakespeares-works/julius-caesar/read/3/2/

40.

Stannard, J.(1965) Pliny and roman botany. Isis 56(4): 420-425.

41.

Suetonius, G. T.(2009) The Twelve Caesars (Jo, Y. J. Trans.). Seoul: Darunsesang.

42.

Syme, R.(2002) The Roman Revolu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43.

Von Stackelberg, K. T.(2009) The Roman Garden: Space, Sense, and Society. New York: Routledge.

44.

Yegül, F.(2019) Roman Architecture and Urbanism: From the Origin to Late Antiqu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