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이제 조경의 대부분의 프로세스가 컴퓨터를 이용해 처리된다. 그러나 이러한 컴퓨터 작업이 불과 삼십 여년 전에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1990년대 초 국내 조경에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이전에는 대부분 조경의 프로세스가 손으로 이루어졌었다. 컴퓨터 도입 초반에는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충분히 발전되지 않아 조경의 분석과 설계 작업을 처리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존재했다면, 그간 컴퓨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제 조경의 여러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데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방해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조경가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기술의 발전 속도는 가파르다.
주목할 점은 근래에 국내와 해외에서 다시금 컴퓨터 관련 조경에 관한 담론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사실적인 조경 그래픽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면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조경 계획과 설계 과정에서 형태를 생성하는 창조적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Lee, 2013; Kullmann, 2014; M’Closkey, 2014; Lee and Pae, 2018; Lee, 2018a). 한편으로, 최근 주목할 현상의 하나는 다양하고 많은 양의 경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조경 계획과 설계에서 리서치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1). 결국, 합리적인 분석, 즉 과학으로서의 조경과 창의적인 설계, 즉 예술로서의 조경이 동시에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간 한국 조경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분석과 설계에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해 왔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컴퓨터가 한국 조경에 어떻게 도입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는지부터 시작하여, 삼십여 년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이 연구는 한국 조경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관련한 담론의 변화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 근래에 국내외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조경 설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러한 연구들은 조경이 다른 건조 환경 분야와 비교했을 때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창조적 디자인 도구로 활용하지 못해왔다고 진단하면서, 조경 설계의 전반적 과정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디자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상상적 도구로 이용되도록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Kullmann, 2014; M’Closkey, 2014; Walliss et al., 2014; Walliss and Rahmann, 2016; Lee and Pae, 2018). 그와 유사한 주장이 국내 조경 이론계에도 발표되었다. 이명준(Lee, 2013; Lee, 2017a; Lee, 2018a)은 컴퓨터가 조경에 도입되었을 초기에 주목하여, 조경에서 주로 이용되어 온 지도 중첩법, 모형 만들기, 몽타주와 콜라주라는 세 가지 시각화 테크닉을 처리하는 데 컴퓨터가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고, 조경 설계에서 바람직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다만, 위와 같은 국내외 논의들은 해외의 실무와 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외에도, 국내 조경에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도입된 이후 그동안의 흐름을 짚어보는 논의가 몇 차례 출판된 바 있고, 이러한 자료는 이 연구의 대상에 포함한다.
이 연구는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조경 분석과 설계에 활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는 점에서는 선행 연구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 연구는 한국 조경의 상황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한국 조경은 해외의 최신 실무와 이론을 즉시 도입하여 발전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이 연구는 그동안의 한국 조경이 해외 실무와 이론의 영향을 어떻게 받아왔는지를 부분적으로 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우선, 이 연구는 국내 조경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에 관한 담론의 변천을 다루기 전에 조경에서 컴퓨터에 관해 이해할 때 필요한 몇 가지 개념을 개관한다(Ⅱ장)2). 첫째, 조경의 전반적인 프로세스에서 컴퓨터가 담당하는 역할을 조경의 특성이기도 한 과학과 예술, 즉 도구성과 상상력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둘째, 컴퓨터에 대해 논의할 때 혼용되기도 하는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이라는 용어를 구별하여 이해한다. 이를 통해, 조경의 분석과 설계 매체로서 손과 컴퓨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이어서, 한국 조경에서 컴퓨터 관련 담론의 변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Ⅲ장). 이를 위해, 이 연구는 『한국조경학회지』와 『환경과조경』을 주요 리서치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조경학회지』는 1973년 출판되기 시작하여 한국 조경의 역사와 함께해 온 대표적인 조경 전문학술지인 만큼 한국 조경에서 컴퓨터와 관련한 학술적 논의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환경과조경』은 1982년에 국내 최초의 조경전문지로 창간되어 현재까지 우리나라 조경의 최신 실무와 담론을 다루고 있는 유력 전문지이기 때문에 컴퓨터와 관련한 조경 실무와 학계의 담론을 함께 검토할 수 있는 대상이다.3) 컴퓨터를 직접 주제로 다뤘거나, 컴퓨터와 관련된 논의가 발견되는 논문과 기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이 연구는 필요할 경우 조경 및 관련 국내외 학술지, 학술대회 논문집, 저서를 부분적으로 검토하였다. 시간적으로, 이 연구는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1990년대 전후를 시작으로 현재까지의 자료를 검토하였다4).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 조경과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관련하여 시대에 따라 주목할만한 특징과 쟁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여기서는 그러한 내용과 결과를 중심으로 논의를 정리하였다. 아울러, 그러한 담론이 당대와 현대의 조경에 주는 의의와 한계점을 균형적으로 도출하였다.
Ⅱ. 조경과 컴퓨터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조경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경의 기본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경은 태동할 무렵부터 현재까지도 과학과 예술의 특성을 모두 지닌 전문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Meyer, 2000; Lee et al., 2015). 경관의 여러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활동, 즉 도구성과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대상지를 예술적으로 디자인하는 행위, 즉 상상력은 조경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이다5). 조경에서 컴퓨터는 이와 같은 도구성과 상상력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조경에서 빈번히 이용되고 있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인 지리정보시스템(GIS)이 도구성을 대표한다면, 포토샵(Adobe Photoshop)이나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는 상상력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국내 조경에 컴퓨터가 도입되던 초기부터 조경가는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조경의 거의 모든 프로세스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설계에서는 CAD, 계획과 분석에서는 GIS, 공학과 적산에서는 스프레드시트, 이미지 프로세싱을 비롯한 그래픽은 포토샵이, 프리젠테이션에서는 파워포인트, 보고서는 워드프로세스가 활용된다고 보고 있다(Choi and Kim, 1989). 바꿔 말해, 도구성과 상상력의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컴퓨터를 논의할 때 혼동되는 개념어가 바로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이다. 이 두 어휘를 구별해서 이해해야 조경에서 컴퓨터의 활용을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technology) 가 물리적 도구, 예컨대 손, 컴퓨터, 연필, 물감, 마우스 등의 매체(medium)를 지칭한다면, 테크닉(technique)은 그러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처리하는 기법, 즉 맵핑, 다이어그램, 지도 중첩법 등의 분석 기법이나 드로잉 유형을 의미한다. (M’Closkey, 2014; Lee, 2018a). 즉, 컴퓨터는 조경의 여러 프로세스에서 구체적 테크닉을 처리하는 테크놀로지이다. 또한, 테크놀로지로서 컴퓨터는 전기 및 기계 장치인 하드웨어, 그러한 기계를 구동하는 프로그램인 소프트웨어로 구성된다.
손에서 컴퓨터로 조경의 매체가 변화했을 때, 조경가들은 손과 컴퓨터 중 어떤 매체가 우월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조경가들은 손이 대체로 상상력의 역할을 하고, 컴퓨터는 도구성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손이 조경 설계의 창조적 도구이며, 컴퓨터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6).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손과 컴퓨터는 매체, 즉 테크놀로지일 뿐, 그것으로 어떠한 기법, 즉 테크닉을 펼치느냐에 따라 도구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손과 컴퓨터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Lee, 2018a). 오히려, 조경의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을 말할 때 중요한 쟁점은 컴퓨터가 손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을 단순히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도구성의 역할을 하였는지, 손으로 할 수 없는 작업을 창의적으로 해내는 상상적 역할을 담당했는가이다.
Ⅲ. 컴퓨터 담론의 변천
컴퓨터가 한국 조경에서 본격적으로 실무, 교육, 이론에 이용된 것은 1990년대를 전후해서이다. 조경학과 졸업생들이 귀국하면서 당시 해외에서 부상하고 있던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조경을 국내에 소개했다. 이들은 조경의 모든 프로세스를 컴퓨터로 처리할 수 있다고 기대했고, 그와 관련하여 학술, 교육, 실무에서의 담론을 활발히 생성했다.
초기에 조경에서 컴퓨터의 이용이 활발해진 것은 컴퓨터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테크놀로지의 성능이 조경의 컴퓨터 활용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하드웨어의 성능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1990년대에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두 가지 혁신이 발견된다. 첫째, 1990년대 초반 컴퓨터가 소형화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었다. 덕택에 조경가 개인, 조경 사무실, 교육 기관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조경 프로세스를 처리하기 시작한다(Choi and Kim, 1989; Lee, 1991). 둘째, 1996년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조경 관련 데이터베이스의 구축과 활용, 공유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환경과조경』에는 1996년 1월부터 인터넷 주제의 연재를 실으면서, 인터넷의 개요, 인터넷을 통한 해외의 환경과 조경 관련 자료 검색법, 넷스케이프(Netscape Navigator 2.0) 이용 방법을 자세히 소개했다(Kim, 1996). 또한, 한국의 수목을 디지털화하여 수목도감 CD-ROM을 제작하는 등(CADCAMP, 1996) 당대의 사회적 현상이자 유행어이기도 했던 소위 정보화 사회에 대응하고자 한 노력이 발견된다.
주목할 점은 1990년대 조경가들은 직접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경에서 컴퓨터 담론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이미 존재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분석과 설계 등 조경의 전반적 프로세스에 활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러한 소프트웨어의 유틸리티를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는 주로 전자의 방식만을 탐구하지만, 당시 조경가들은 후자의 방식을 고민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당시 조경가들이 완전히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이미 널리 쓰이기 시작한 CAD나 GIS를 조경의설계와 분석 등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응용 유틸리티, 다시 말해 서드 파티 프로그램(third-party software component) 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식재 설계에 유용하도록 식재의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3D 시뮬레이션을 위한 캐드 프로그램이 개발되고(Yun and Kim, 1996), CAD를 이용해 벡터 공간 자료 위상 검출과 격자 도면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유틸리티가 만들어졌다(Cho and Im, 1999). 또한, GIS를 이용해 토양유실량의 지형 인자를 자동 계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Woo and Hwang, 1998), 조경 적산에 적합한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Laboratory for 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at Sungkyunkwan University, 1992; Lee and Hwang, 1992) (Figure 1 참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여러 분석과 설계 기법의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특히, 설계와 제도에 주로 이용되는 CAD와 분석의 도구로 사용되는 GIS 사이에 그러한 경향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CAD를 이용해 GIS가 처리하는 테크닉인 적지 분석을 하는 방법이 연구되었고(Kim, 1992), CAD의 모델링 기능(DVIEW)을 이용한 가시성 분석의 방법이 탐구되기도 했다(Cho, 1998). 반대로, GIS를 이용하여 계획과 설계하는 방법이 시도되기도 했다(Kim, E., 1994). 앞 장에서 설명했듯,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하나의 테크놀로지일 뿐 그것을 이용해 다양한 설계와 분석의 테크닉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조경가들은 조경 교육이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응용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조경에 적합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방법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Kim, S., 1994; Lee, 1991). 다시 말해,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양성하는 일도 조경 교육의 하나의 역할이었다.
1990년대 조경의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에 관한 담론의 의의는 예술과 과학, 설계와 계획이 상호 작용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환경과조경』 1993년 3월호에서 마련한 “컴퓨터 조경 설계” 특집에는 조경 계획, 설계, 식재 설계, 시공, 그래픽 등의 전 분야의 전문가가 컴퓨터를 활용한 조경 설계를 고민했고, 1997년 “조경컴퓨터응용연구회”가 편집한 『환경계획, 설계를 위한 컴퓨터 활용 기법』(A research group for computer application of landscape architecture, 1997)은 조경의 전 프로세스에서 컴퓨터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다양한 테크닉의 튜토리얼을 집대성하여 엮은 저서이다7). 또한, 앞에서 살펴보았듯, 하나의 소프트웨어를 특정 테크닉을 처리하는 도구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능도 수행할 수 있도록 탐구하였다.
다만, 컴퓨터가 조경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특히 설계 과정에서 창의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컴퓨터가 조경 프로세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성하거나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기보다는 단순히 손을 대체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3D 모델링의 경우 설계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물을 모델링하는 작업에 머물렀다(Figure 2 참조). 물론, 설계 과정에서 CAD와 GIS의 3D 모델링을 시뮬레이션 도구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간혹 발견되지만(Oh, 1994; Lee, 2000), 그러한 주장이 실제로 조경 실무와 교육에 적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2001년 발표된 “조경분야에서 컴퓨터 이용의 실태분석”(Huh, 2001)의 결과에 따르면, 조경 실무에서 CAD 소프트웨어가 일반화되었지만, 대체로 3D 시각화보다 2D 도면의 제작에 활용되고 있었고, 그러한 2D 작업을 CAD 소프트웨어의 주요 역할로 인식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손이 하던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기능을 주로 수행했다. 1990년대는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조경에 도입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손을 대신하는 도구로서의 컴퓨터의 역할이 우선시 되었다. 한편으로,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아직 조경의 프로세스를 안정적으로 처리하기 힘든 시기였기에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이 활발히 탐구된 것이다.
2000년대를 전후하면서 조경에서 컴퓨터 활용에 관한 담론의 내용이 변화한다.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조경의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데 테크놀로지의 성능이 크게 방해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주제로 한 논의보다 그러한 테크놀로지로 처리할 수 있는 분석과 설계 테크닉으로 담론의 중심이 전환된다.
흥미로운 현상은 특정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특정 테크닉을 처리하는 경향이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경관의 여러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는 GIS가, 도면을 작성할 때는 CAD가 주로 이용되며, 모델링을 위해서는 맥스, 스케치업, 라이노 등이, 그래픽 작업에는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가 이용되었다. 조경의 세부 영역이 전문화되고 관련 소프트웨어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컴퓨터 도입 초기부터 발견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하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여러 분석과 설계 기법에 이용될 가능성을 관련 유틸리티의 개발로 탐구되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그러한 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8). 대표적으로, 『환경과조경』에서, 2001년 3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쉽게 익히는 조경 설계 프로그램”이라는 연재가 실린다. 여기서 AutoCAD 2000, Photoshop 6.0, 정원 설계 프로그램인 LandDesigner 5.0, 사진 편집을 위한 PhotoLandDesigner 2.0,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PowerPoint가 순서대로 소개되었다(Jeong, 2001). 이러한 연재는 실제 조경 설계에 필요한 프로세스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함께 실습해보는 튜토리얼 형식으로 진행된다9).
테크놀로지에서 테크닉으로 담론의 내용이 변화할 때, 그 중심에는 조경 그래픽이 있었다. 2000년을 전후로 조경 중심의 프로젝트와 설계 공모전이 증가하면서 클라이언트와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프리젠테이션 드로잉, 소위 판넬의 중요성이 커졌다(Lee, 2006).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의 상용화로 이전에 손으로 그려지던 거의 모든 드로잉이 이제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제작된다.
구체적으로, 맵핑과 다이어그램 테크닉에 대한 탐구가 발견된다(Pae, 2006; Zoh, 2006; Lee, 2006; Lim, 2006). 맵핑과 다이어그램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조경 계획과 설계에서 부분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반부터 중요한 조경의 시각화 테크닉으로 자리매김한다(Lee, 2017b). 이러한 국내의 그래픽 테크닉에 대한 관심은 해외 조경 실무와 이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특히, 1999년에 개최된 다운스뷰 공원 국제설계공모(Downsview Park International Design Competition)와 2001년 개최된 프레쉬 킬스 공원 공모전(Fresh Kills Landfill Park Competition), 그와 관련된 설계 실천이자 이론적 논의인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빠르게 수용되었다10).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생태,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인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과 조성 과정를 설계하는 소위 프로세스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러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맵핑과 다이어그램과 같은 시각화 테크닉을 탐구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3D 모델링을 사진 합성 프로그램인 포토샵을 이용해 투시도를 제작하는 경향이다.
그래픽 디자인의 우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기 실무 사례가 바로 2003년 개최된 서울숲 공모전이다. 서울숲 공모전 당선작에서 설계 ‘전략’이라는 용어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장기적인 경관의 조성 과정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Pae, 2003; Lee, 2005; Lee, 2019). 당선작은 그러한 설계 전략, 예컨대 대상지의 개방 순서와 공원의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다이어그램과 맵핑을 활용하였다. 또한, 흡사 사진처럼 보이는 공원의 조감도와 투시도가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통해 제작된다(Figure 3 참조). 이후에도, 맵핑과 다이어그램과 같은 디지털 그래픽 테크닉은 한국의 대형 공원 및 오픈스페이스 계획과 설계를 다룬 논문에 자주 등장한다(Kim, A., 2005; Kim et al., 2006; So et al., 2013; Kim and Jeong, 2014).
앞서 논의했듯, 2000년 이후 조경 그래픽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사실적(realistic) 묘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조경의 궁극적인 결과물은 현실 공간에 조성된다는 점에서 관련 그래픽이 사실처럼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수목을 비롯한 자연환경의 경우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시각화가 쉽지 않았었다(Yun and Kim, 1996). 2000년을 전후로 포토샵이 상용화되면서 사진 이미지를 합성하여 마치 실제 공간을 찍은 사진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손쉽게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적인 그래픽은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수월하다는 점에서 조경 설계의 중요한 시각화 테크닉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사실처럼 보이는 그래픽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서울숲 공모전의 그래픽은 생동감이 결여된 “디지털 픽춰레스크”(Pae, 2003)로 평가되거나 디자인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을 묘사한 이미지라고 지적되기도 했다(Lee, 2006). 또한, 한국의 경우 외주 컴퓨터 그래픽 업체에서 투시도가 생산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이미지는 설계가의 아이디어와 개성이 결여된 표준화된 이미지라는 비판적 목소리도 나왔다(Kim, 2009). 사실적인 그래픽은 설계 과정이 아니라, 최종(finalized) 그래픽 작업에만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문제도 제기되기도 했다11).
사실적인 그래픽이 지배하면서 랜드폼과 시설물을 비롯한 형태 디자인의 실험이 줄어든 상황이 지적되었다(Lee, 2018a).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이어진 건축계의 디지털 담론이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복잡한 건축 형태의 실험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동안 조경계에서는 그러한 실험이 부족했다(Kim, Y. M., 2006). 바꿔 말해, 사실적 그래픽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설계 결과물을 도구적으로 묘사하는 데 이용되었을 뿐, 설계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생성하고 발전시키는 상상적인 매체로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근래에는 조경 계획과 설계를 시뮬레이션하는 테크놀로지로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등이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이전부터 조경을 비롯한 건조 경관의 설계 및 교육에 도입된 바 있지만(Son, 2008), 최근 유행처럼 번진 4차 산업혁명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관련 기술의 상용화에 힘입어 조경 테크놀로지 담론의 최전선에 있다. 이러한 기술은 조경 디자인에서 실제와 같은 경험을 가상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나아가 조경 설계의 대상을 가상의 현실로 확장하기도 한다(Kim et al., 2017; Kim, 2018; Deng et al., 2019)12).
또한, 동영상의 활용이 증가하는 현상도 주목할만하다. 조경이 다루는 경관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러한 경관의 움직임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18세기 말의 드로잉에도 나타났었다(Lee and Pae, 2015)13). 1990년대에는 경관의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가 널리 이용되지 않았고, 사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의 동영상 렌더링 시간은 점차 줄어들어 사용 빈도가 늘어나고 있고, 디자인 공모전에서 동영상을 제출하도록 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게임 엔진 기반의 트윈모션(Twinmotion)이나 루미온(Lumion)과 같은 실시간 렌더링 소프트웨어가 최근 조경, 건축, 인테리어 분야에 급속도로 퍼지면서 쉽고 빠른 3D 렌더링과 동영상 제작이 가능해졌다14). 이러한 현상은 최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대중의 동영상 콘텐츠 제작과 소비가 증가하는 현실에 대응하면서 이차원의 판넬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파악된다.
앞서 설명한 시뮬레이션 및 모델링 테크놀로지는 경관의 겉모습을 사실처럼 시각화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2000년대에 지배적이던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조경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조경가는 경관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경관의 여러 생태, 문화, 사회적 기능을 설계하는 전문 분야이기도 하다. 최근 조경 이론과 실무에서는 경관의 다양한 성능을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하여 경관의 형태를 생성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Lee, 2018a; Na, 2019).
조경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관련하여 국내외 조경 이론가는 오피스박김(PARKKIM)의 작업에 주목한다(Lee, 2017a; 2018a, Walliss and Rahmann, 2016). 박김은 머드인프라스트럭처(Mud Infrastructure)에서 라이노(Rhino) 모델을 이용하여 경관의 생태적 성능을 계속해서 테스트하면서 랜드폼의 모양을 다듬어갔다(Walliss and Rahmann, 2016; Lee, 2018a)15). 또한, 2013년 당인리 서울복합화력발전소 공원화 공모전 출품작인 더말 시티(Thermal City)에서는 열적 쾌적성(thermal comfort)을 시뮬레이션하여 대상지의 미기후를 조절가능한 랜드폼과 시설물을 디자인했다(Walliss and Rahmann, 2016; Lee, 2017a)16). 설계가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조경 디자인 담론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환경과조경』은 얼라이브어스(Aliveus) 의 나성진 소장의 연재물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를 마련하여 라이노와 그래스호퍼(Grasshopper)를 이용하여 손으로 만들기 힘든 형상의 정원 디자인 방법을 소개했다(Na, 2019) (Figure 4 참조). 나성진의 하이퍼볼릭 핑퐁 가든(Hyperbolic Pingpong Garden)은 바람을 시뮬레이션하여 유동적인 형태의 그늘막을 제안하였다(Aliveus, 2017). 이러한 작업은 변수를 이용하여 형태를 수정하고 변형할 수 있는 디자인, 소위 파라메트릭(parametric) 디자인을 응용하고 있다. 여기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경관의 성능을 시뮬레이션하는 도구성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형태를 생성하는 상상성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와 같은 최근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조경 담론의 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지닌다. 첫째,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경관과 시설물의 형태를 디자인한다. 한동안 프로세스 디자인이 두드러지면서 상대적으로 순수한 조형적 형태를 만들어내려는 디자인이 적었다면, 최근 국내외 일부 조경 이론가는 경관의 형태 디자인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Lee, 2018b; Treib, 2018)17). 앞서 설명한 작업은 이러한 형태 디자인 담론을 설명하는 사례가 된다. 둘째, 설계 과정으로서 모델링을 활용한다. 앞서 언급했듯,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도입되던 시기에도 3D 모델링은 설계 과정에서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곤 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동안 컴퓨터 모델링은 대체로 설계 결과를 시각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특히, 2000년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조경 그래픽이 우세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커졌었다. 최근 파라메트릭 조경 디자인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설계 과정에서 설계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18).
Ⅳ. 결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이 연구는 한국 조경에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활용되기 시작한 이래로 나타난 관련 담론의 변화 과정을 추적했다. 첫째, 1990년대를 전후로 컴퓨터가 조경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성장하던 시기에는 개인용 컴퓨터의 상용화와 인터넷 서비스 등장처럼 컴퓨터 하드웨어를 포함하는 테크놀로지가 중요했다.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국내에 도입한 선구적 조경가들은 조경에 적합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유틸리티를 개발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둘째,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특정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특정 테크닉을 처리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경관의 프로세스를 디자인하는 시각화 테크닉으로서 맵핑과 다이어그램을 탐구했고, 공모전이 증가하여 프리젠테이션 드로잉이 중요해지면서 포토샵과 같은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사실적인 투시도가 제작되는 경향이 발견되는 등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조경가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셋째, 최근 조경에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시뮬레이션에 활용하고, 실시간 렌더링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동영상 제작도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파라메트릭 모델링을 활용해 경관과 시설물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공간 디자이너의 역할이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조경가의 세 태도는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노출하고 있었다. 첫째, 1990년대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의 조경가는 하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다양한 분석과 설계 기법의 가능성을 탐구하였고, 식재 설계, 시공, 그래픽 등 여러 전문가가 모여 컴퓨터의 바람직한 활용을 논의하면서 생산적인 담론을 생산하였다. 다만, 당시 조경가들은 대체로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손으로 하던 조경 작업을 효율적으로 대신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데 머물렀다. 둘째, 2000년대의 그래픽 프로그래머로서의 조경가는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테크놀로지 자체보다 조경 분석, 계획, 설계에 필요한 구체적인 시각화 테크닉의 실험에 주력했다. 다만, 설계 결과물을 사실처럼 보이도록 하는 그래픽의 제작에 몰두하였고, 상대적으로 경관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경향이 적었다. 셋째, 근래의 공간 디자이너로서의 조경가는 경관의 여러 성능을 모델링하고, 파라메트릭 기능을 설계 과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일부 설계가와 이론가에게서만 발견되기에 현대 조경 디자인의 주요 흐름으로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로 보인다. 또한, 형태 생성을 위해 자연과 도시의 프로세스를 시뮬레이션한다는 점에서 앞 세대의 프로세스 디자인의 연장선에 위치시킬 수도 있다.
이 연구는 조경의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관련한 담론을 살펴보기 위해 『한국조경학회지』와 『환경과조경』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한 담론은 실무자, 이론가, 교육자 모두가 생산하였기에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기에는 적절했다고 판단되나, 관련 실무의 변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2000년 이후 조경 분야가 전문화되면서 위의 두 출판물 이외에도 여러 조경 관련 전문학술지가 발간되었고, 그러한 출판물의 내용을 검토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연구의 결과로 제시한 시대별 특징은 다소 일반화하여 논의하였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모든 시대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그래픽 디자이너, 공간 디자이너로서의 조경가가 늘 존재했고, 다만 특정 시기에 특별히 부각되는 역할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는 조경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현시점에서 조경가가 컴퓨터에 어떠한 기대를 걸었고, 어떻게 기능해 왔는지, 그러한 컴퓨터의 역할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무엇이었는지를 균형적으로 진단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연구는 조경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바람직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데도 실천적, 이론적, 교육적으로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