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of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Article

1920~30년대 한국 주택정원 인식과 정원가꾸기 양상

길지혜*, 박희성**
Jihye Gil*, Hee-Soung Park**
*이코모스 한국위원회 상임간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Secretary, ICOMOS Korea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Seoul Studies, University of Seoul
Corresponding author: Hee-Soung Park,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Seoul Studies, University of Seoul, Seoul 02504, Korea, Tel.: +82-2-6490-5365, E-mail: janeha@naver.com

이 성과는 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o. 2019R1A2C1090850) / 2021년 한국조경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1920~30년대 주택정원의 형태와 특징에 관한 연구: 대중매체의 내용을 중심으로” 주제로 발표한 논문을 발전시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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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Feb 28, 2022; Revised: Mar 18, 2022; Accepted: Apr 12, 2022

Published Online: Apr 30, 2022

국문초록

1920~30년대는 한국 주택환경에 새로운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로 평가된다. 본 연구는 주거 형태와 유형이 변화하던 전환기 시기에 주택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하였다. 정원은 계속 변화하는 대상이기에 과거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지만, 1920~30년대에 발행된 대중잡지와 신문기사를 통해 당시 사회적으로 주택에서 정원이 어떻게 인식되었고, 거주자는 어떤 배경과 목적으로 정원 가꾸기를 실천하였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연구를 통해, 첫째, 경성에 인구가 밀집하기 시작한 도시화 과정에서 정원은 도시에 자연미를 부여하는 방안 중 하나로 주목하게 되었고, 주택마다 정원을 만드는 것을 장려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건축 분야에서 활발히 추진된 주택개량운동에서도 정원이 위생과 경관 측면에서 주거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임을 강조하였다. 셋째, 매체를 통해 원예 관련 정보가 활발히 제공된 데서 미루어 취미로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근대 교육을 받은 정원설계가, 원예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디자인된 정원’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게 되었다. 끝으로, 주택은 다양한 유형으로 분화되었으나 정원 형태는 건축 유형별로 차이가 있기보다는 그 시기 가장 좋게 여겨졌던 형태를 빠르게 도입하는 편이었다. 전통한옥에서도 서양식 정원 형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배치되며, 이국적 식물종을 식재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대중잡지나 기사에 수록된 정원이 지식인층에 한정되어 있지만, 매체의 대중성과 파급효과를 고려하면 일면의 대표성을 확보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의 의의는 1920~30년대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던 정원의 모습, 주거생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ABSTRACT

The 1920s and 1930s were when new trends became prominent in Korean housing architecture. This study began with a curiosity about the appearance of residential gardens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when housing types were changing. Since gardens are constantly evolving and living spaces, it is not easy to give a clear picture of their evolution. However, through popular magazines and newspaper articles published in the 1920-30s, this study investigated how people perceived the gardens socially and how they engaged in gardening.

First, the study of Gyeongseong’s urbanization process revealed that people perceived gardens as a way to give natural beauty to the urban environment. Therefore, the creation of a residential garden was strongly encouraged. Second, the housing improvement movement, which the architects actively discussed during this period, emphasized that a garden is a factor that can help improve the quality of the residential environment in terms of hygiene and landscape aesthetics. Third, since the media provided information on gardening, it was confirmed that the number of people engaged in gardening as a hobby increased. As designers and gardeners who had received a modern education became more active, the concept of "designed gardens" was formed. Lastly, although the houses were divided into various types, the shapes of the gardens did not show a significant difference according to the architecture type. They tended to embrace the time’s ideal garden design and style. Therefore, even in a traditional hanok, Western-style gardens were naturally harmonized into the overall architecture, and exotic plant species could be found.

Although the gardens found in media images were limited to those belonging to the homes of the intelligentsia, it can be seen that representativeness was secured, considering the popularity and ripple effect of the media. Therefore, this study contributes to the literature as it confirmed the ideal gardens and gardening methods in the 1920s and 30s.

Keywords: 가정탐방기; 근대잡지; 근대정원; 전원도시; 주택개량운동
Keywords: Family Report; Garden City; House Improvement Movement; Modern Garden; Modern Magazine

Ⅰ. 서론

1. 연구 배경 및 목적

개항 이후, 우리의 주거환경에는 급격한 변화가 나타난다. 10만~20만 명 내외로 유지되었던 서울 인구는 1920년대에는 25만 명, 1930년대가 되면 40만 명으로 증가하다가, 1940년대에는 10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Son, 1996). 인구변화는 주거환경의 변화를 견인하였고 주택 형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택에는 유리, 철, 콘크리트 등의 소재가 사용되었고, 외국의 주거문화가 유입되고 일부 지식인층의 해외 생활 경험도 늘어나면서 새로운 양식의 주택 유형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1920~30년대는 우리 주택환경에 있어 새로운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로 평가된다. 한국 건축사에서는 이 시기를 전통 건축과 구분하여 모더니즘 건축으로 변화하는, 절충적 경향이 시작한 시기로 의미를 둔다(Kim and Song, 1998). 또한, 근대화 차원에서 전통 한옥이 본격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기점이라고도 일컫는다(Yoo, 1996). ‘신여성’, ‘신가정’, ‘모던가정’, ‘스위트 홈’ 등의 단어에서 나타나듯이, 전체 사회문화 면에서도 대가족에서 부부 중심으로의 새로운 가정관이 도입된 시기(Paik, 2005)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서울 등 주요 도시에는 새로운 주택문화가 유입되고 융합되며 다양한 주택이 들어섰다. 인구가 밀집하면서 도시형 한옥, 일본식 주택, 서양식 주택, 아파트와 같은 주택 유형이 등장하였고 재래식 한옥을 개량한 주택, 문화주택, 절충식 주택 등, 다양한 양상이 나타났다.

이 전환기의 주택건축에 관해서는 다수의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건물을 제외한 주택 외부공간의 연구성과는 대체로 저조하다.

그 이유는 정원은 변화하고 살아있는(living) 존재이고 특히 주택정원은 거주하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쉽게 변화할 수 있기에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기 주택정원의 연구는 오늘날의 정원 인식과 형태의 원류가 되며 전근대에서 현대로의 형태적 전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본 연구는 주거 형태와 유형이 급격히 변화한 1920~30년대 주택정원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그리고 거주자에게 정원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찾아보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통해 주택의 건축적 형태가 많은 부분 변화하는 시기에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연구 동향

1920~30년대 주거환경과 관련한 연구는 도시사학, 건축학, 지역학 등의 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여러 연구에서 이 시기는 전통 건축의 전환기로 언급하는데, 변화의 요인을 위생과 서구화, 주택공급으로 보고 있다. 다수의 연구자가 환경 부문의 위생 담론이 주택개량론을 불러오고, 나아가 주택문화까지 이어졌다고 규명하였다(Kim, 2009b; Kim, 2009a; Lee, 2017). 이들 연구에서는 주거에서의 실내 환기, 채광, 방습, 화장실의 입지, 주거지의 입지 측면에서 위생 개념이 도입되며 주택 평면의 변화로 이어진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였다. 또, 서구의 생활 방식을 수용하면서 생활 전반을 개혁하고자 한 영향도 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Kim and Sim, 2002). 다른 차원에서는 당시의 극심한 주택난 속에 주택공급업자가 도시형 한옥을 개발하고 전파했음을 밝히기도 했다(Park and Jeon, 2002).

현존하는 가옥을 대상으로 당시의 새로운 특징을 분석하는 연구도 진행되었다. 1910년대 조성된 한상룡 가옥과 유진경 가옥(Park, 2013), 맥렐란 저택, 이준 저택, 테일러 저택 등 상류층의 서양식 주택(Huh, 2013), 1930년대 말 서양식 평면을 지향하며 건축된 서울의 양관(Huh and Woo, 2013) 등 건축적 양식을 규명함으로써 1920~30년대 주거공간의 특징을 파악하였다.

한편, 1920~30년대 연구 경향 중 눈에 띄는 점은 대중잡지를 활용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이 시기 잡지 종류와 발행 부수가 크게 증가하여(Kim, 1992) 잡지가 당대 생활문화를 밀착하여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ark(2006), Jun(2007)은 1920~30년대 잡지에 실린 가정방문기1)에 주목하였다. 잡지사 기자가 가정을 방문하고 묘사한 글을 통해 당대의 이상적인 주거공간의 모습과 가족관, 가정생활 등을 파악했다. Kim(2009a)은 잡지의 주거 담론과 연관된 글을 토대로 서구의 주거문화가 우리 주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정원은 주택의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20세기 초에 활동한 근대건축가의 시선으로 정원의 기능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관련 연구를 통해 1920~30년대 주택이 다양한 유형으로 건립되게 된 사회적, 환경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일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또는 대부분 현재는 사라진 과거 주택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만 이들 연구는 모두 건축 배치와 내부 공간구성, 건축 설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주택 외부공간에 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최근 주택정원에 대해 주목한 몇몇 연구를 찾아볼 수 있다. Lee and Chin(2016)은 서울 6개 가옥의 근대정원의 유형을 분석하여 정원의 기능을 파악하였다. 근대정원 연구를 처음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건물과의 관계 등 공간 구성에 초점을 두어 근대기 구체적 정원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Lee et al.(2021)은 서울지역 문화주택에서의 근대정원 형성과정과 특성을 조계지 근대정원과 비교해 파악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집중 심화로 서울지역 문화주택 정원은 조계지와는 다른 유형의 정원으로 변용하였음을 설명한다. 그 외 리키다케 별장, 벽수산장의 조영 특성 등의 사례 연구도 진행되었다(Kim, 2016; Jin and Shin, 2020).

기수행된 근대기 주택정원 연구는 대부분 건물과의 관계 속에서의 공간구성이나 정원의 물리적 시설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당시의 정원문화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본연구에서는 전통성, 근대성, 이국성 등 많은 변화와 다양성이 혼재하며 주택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한 1920~30년대에 중점을 두고, 이 시기의 주택정원이 가졌던 의미와 생활에서 실천한 정원가꾸기의 양상과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자 한다.

3. 연구 범위 및 방법

1920~30년대 주택정원의 인식과 그 실제를 파악하기 위해 당시에 작성된 대중잡지와 신문기사 중 정원과 관련한 글을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는다. 인쇄물은 근대에 대중의 여론과 문화를 대표하고 견인, 확산하는 근대의 속성을 대표하는 매체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

1920~30년대는 잡지의 양적·질적 발전이 있었던 시기로, 종합지, 문예지, 여성잡지, 아동잡지 등 다양한 독자층을 겨냥하여 간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주택과 가정, 대중문화를 다룬 잡지를 먼저 추렸다.『신가정』(동아일보사 발행, 1933~1936),『여성』(조선일보사 발행, 1936~1940),『우리집』(기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교육국 발행, 1931~1936),『가정지우(家庭之友)』(조선금융조합연합회 발행, 1936~1938),『가정의우(家庭의友)』(조선금융조합연합회 발행, 1938),『별건곤』(개벽사 발행, 1926~1934)을 전체열람하고 주택정원, 정원과 관련한 글을 선별하였다.

1920~30년대 신문은 조선인 간행의『동아일보』와『조선일보』를 선택하였고, ‘정원’과 ‘취미’, ‘정원’과 ‘주택’, ‘정원(庭園)’ 키워드로 검색하여 나온 기사를 선별하였다.

위의 과정으로 발췌한 정원 관련 글은 모두 118건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들 글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구분되었다.

첫째, 도시와의 관계에서 정원의 필요를 언급한 18건의 기사와 둘째, 주택개량에서 정원 조성을 언급한 20건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주택정원의 필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된 내용을 담고 있다.

셋째, 원예 교육과 관련한 글 48건이 추려진다. 넷째, 잡지사 기자가 특정 가옥을 방문하고 글을 남긴 ‘가정방문기’에서 정원이 언급된 글도 24건 찾아볼 수 있다. 다섯째, 해외 유명 정원에 대한 소개나 답사기가 8건 정도 있는데, 이들은 우리 주택정원과 직접 연관한 내용은 아니므로 연구 범위에서 제외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수집한 글 중, 도시와의 관계, 주택개량에서의 정원 조성, 원예교육 관련, 가정방문기의 총 네 가지 주제로 구분되는 글 110건을 토대로, 1920~30년대 주택에서 정원의 필요성이 강조된 배경과 실제 주거생활에서 정원이 가졌던 의미와 특징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Ⅱ. 주택에서 정원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1. 도시에서 요구하는 정원의 기능

일본은 1900년대에 도시환경 개선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어, 그 결과로서 전원도시(Garden City)론이 도입되었다.(Lee, 2019) 피상적인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되었다는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전원도시는 ‘도시와 농촌의 결합’, 아름다운 녹음과 신선한 공기가 있는 ‘농촌 같은 도시’, ‘건강한 중산층의 주택지’의 이미지로 정착되어 도시 건설에 주요 개념으로 수용되었다(Yum, 2015). 일본은 식민지 도시 건설에도 전원도시론을 활용하였는데, 1920~30년대 서울 남산의 남사면 일대의 문화주택 건설이 대표적이다.

꼭 일본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녹지와 자연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급진개화파는 도시에의 녹지조성의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 [해마다 나무를 심는다면] 몃아니 되야 사ᄅᆞᆷ마다 그 효혐을 볼터이니 셔울셔 우션 이일을 시쟉ᄒᆞ기를 ᄇᆞ라노라 산에 나무가 잇스면 샤태가 나지 안ᄒᆞ고 샤태가 아니난즉 산 밋 잇ᄂᆞᆫ 들이 셕비례와 모에 뭇치지 아니 ᄒᆞ야 농ᄉᆞ ᄒᆞᄂᆞᆫ 방가 업고  사ᄅᆞᆷ 사ᄂᆞᆫ 동리 근쳐에 슈목이잇슨즉 위에 로온 공긔를 이 나무들이 라 드리고  나무들이 위에 유죠ᄒᆞᆫ공긔를 내여 보내ᄂᆞᆫ 고로 이런 동리에ᄂᆞᆫ 젼렴ᄒᆞᄂᆞᆫ 병이 업셔지고  그런 그늘지고 셔늘ᄒᆞᆫ 곳이 잇스면 인민들이 죵일 더운 볏혜셔 일ᄒᆞ다가 이 원림에 드러가 안져쉬고 은 공긔를 마실터이니 가지로 각ᄒᆞ여도 우 유죠ᄒᆞᆫ 일이라…(중략)(「논설」 『독립신문』 1986.8.11.)

서구에서 근대문물을 일찍 접한 개화파는 도시 녹화의 산사태 방지와 도시의 공기 정화, 전염병 예방, 휴식처 제공 등의 효과를 주장하며 공론화한 바 있다. 이후 식민지 등의 어지러운 국내정세로 이러한 논의는 중지되었다가 서울에 인구가 밀집하는 1920~30년대가 되면, 도시환경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사안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다.

1920~30년대는 현실적인 상황에 대응하여, 교외 주택지 개발은 물론, 도시에 ‘자연’을 끌어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중 ‘정원’은 북적한 도시 생활 속에서 도시에 자연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도시 인구 증가로 발생한 여러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원이 유용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도시 차원에서 주택정원의 중요성을 논한 글들로는 “아동을위하야(基一) 아동보건문제에대하여”(『신가정』2(5)), “도시생활에 전원미를 加하는 方法”(『신가정』3(5)), “森林의機能과 人類生活과의 密接한關係”(『조선일보』 1931.1.11.), “대지와 친하자”(『가정지우』20), “趣味의 高踏派 殺伐한 都市生活의 餘白 休養의 塲所·庭園”(『조선일보』 1939.6.13.)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도시생활에 전원미를 加하는 方法”은 1935년 5월, 11명의 필진이 작성한『신가정』의 특집기사였는데, 당시의 도시환경이 공간적 여유 없이 열악했으며 주거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자연을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기고 글에는 작은 뜰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면 채소 농사를 지을 것, 아래의 글과 같이 수목과 화초를 키우는 개인의 정원을 만들 것, 정원을 시멘트 바닥 마감 대신 흙으로 만들 것 등을 제시한다. 주택의 일조와 공기 순환을 돕기 위해 주택에 정원을 포함하여 공간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며, 조성한 정원에는 나무와 화초를, 정원을 만들기 어려운 경우 화분이라도 놓는 것이 건강에 이롭고 도시 차원에서도 기능과 경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 (중략) 셋째로는 개인의 정원이다. 경제의 여유를 따라 수목과 화초를 재배할 것이다. 백일홍 봉선화며 조안 석안이며 조롱박 수색이의며 담쟁이 통속이며 회양목 동청 등 그 수가 많으며 외국수입품으로도 그 수가 많다. 우리들의 가정은 비교적 화초 재배에 적의하게 되여 있어 뜻만 있으면 재배할 수가 있다. 개인 개인이 화초 재배에 취미를 둘 뿐 아니라 개인의 큰 정원은 때때로 공개하야 시민으로 하여금 그 덕을 입게 할 것이다. (“도시생활에 전원미를 加하는 方法-전원도시를 건설하라”,『신가정』 1935.5.)

그뿐만 아니라 당시 도시의 쾌적성이 매우 낮다고 인식하며 도시에서 자연을 찾기는 실제 어려우니 교외로 산책을 하던지, 교외 주택지로 이사해 넓은 정원을 만들어 살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우리 도시들이 수목이 적어 경관상 좋지 않고 위생에도 취약해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고 언급하였다.

주택의 정원 조성은 아이들의 건강과 성장, 정서 함양에 도움을 준다고 그 긍정적 측면이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2). 당시의 매체 기사를 보면 어린이의 양육과 보건, 유희 등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주택의 정원이 외부활동을 좋아하는 아동 발육에도 좋고 채광과 공기 순환을 도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볕을 쬐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제시하고 있다. 또한, 자연을 사랑하는 아동의 정서를 키우고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습관을 키움으로 교육 측면에서도 효과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도시에서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창구로서 정원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다.

… (중략) 뜰에는 되도록 나무와 화초를 심어 아동으로 하여금 신선한 공긔를 마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조선집에는 나무나 화초를 능히 심을만한 뜰이 있는 집일지라도 그냥 비어 두는 것이 보통인 바 이것은 여간 아석한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만약 뜰이 없는 집이라 하면 초화 화분한두개 쯤은 마루곁이 나실내에 놓아 둘 수 있지 않을까요.(“아동보건문제에대하야”,『신가정』 1934.5.)

이 시기 주택에 정원을 만드는 것은 도시와 사회적 차원에서 여러 이점이 있다고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장려하는 사항이었다. 건강에 좋고, 정원을 가꾸는 취미로 가정을 단란하게 할 수 있으며, 채소를 경작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되고, 자연을 가까이함으로써 교육에도 효과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2. 주택개량운동에서의 정원 개량

1920~30년대에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주택개량에 대한 여러 주택 유형이 제안되었다. 재래식 한옥의 비능률적인 공간 구성과 동선의 제고, 채광, 통풍 등 위생적인 환경으로의 개선, 난방효율을 높일 수 있는 시설 설치 등 거주환경을 개선하려는 여러 해결책이 제시되었고, 주택개량의 필요성을 잡지, 신문, 라디오 등을 통해 적극 홍보하며 이상적인 주거 방식을 선도하고자 했다.

그중 주택개량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건축가 박길룡은 여러 기고한 글에서 주택에서 정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박길룡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서 수학한 건축가로 화신백화점 설계 등 당대 활발한 실무 활동을 하였다(Yun, 1996). 여러 글 중 “여름과 주택”(『신가정』2(7)), “실현가능한 개량주택의 일안”(『신가정』4(1)), “一般 朝鮮家屋도 建築樣式을 指定”(『조선일보』 1935.10.23.) 등의 글에서 정원 개량에 대한 부분을 함께 논하고 있다. 라디오에서도 1935년 5월 14일과 18일 가정강좌 프로그램에서 “주택과 정원”(『조선일보』 1935. 5.14.;『조선일보』 1935.5.18.) 주제로 강의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길룡은 도시형 한옥의 중정형(ㅁ자) 배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 주택 가운데 뜰을 남기고 빙 둘러 집을 건축하는 것은 병풍 한가운데 사는 것과 같다며, 우리나라 계절 여건상 중정형 배치가 여름철 더위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마당에 수목을 심지 않고 장독대를 배치하는 현재의 구조는, 한여름철 장독대가 달구어져 난로 같아지는 효과를 낸다고 분석했다. 그렇기에 주택 배치를 변경하고 뜰에는 정원을 조성할 것을 주장했다3).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배치는 주택을 가운데 놓고 정원을 주변에 두르는 집중식(集中式)4) 배치였다. 여러 방을 접하게 조성해 경제적이고 난방에도 유리한 겹집 구조가 되는 셈이었다. 또한, 주택 사방에 정원을 조성하면 여름철 더위를 피하고 공간을 이용하는 데에도 유리하고, 주택지 다른 집과의 관계에서도 위생상, 경관상으로도 좋다고 판단했다. 장독대를 주방 가까이 뒤편 정원에 배치하고, 전면 정원은 각 방에서 즐길 수 있게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5).

주택지에서 집중식 배치로의 전환은 지방에서는 당시 이미 변화한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6) 경성이 과밀한 도시 여건상 변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심 주택의 경우 여름철에는 집에 머물기 힘들 정도로 실내 기온이 높아지고 통풍도 전혀 되지 않아, 건물 배치에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러 전문가가 그 필요성을 설득하고자 했다.

또한, 건물 배치가 달라지면 정원에서의 휴식 기능과 실용 기능을 분리할 수 있고, 배치가 변하지 않더라도 정원에 식물을 가꿈으로써 위생, 문화, 기능, 경관 측면에서 거주환경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Ⅲ. 생활 속 정원문화의 출현과 정원가꾸기

1. 정원가꾸기에 관한 관심

이 시기 대중잡지와 신문에는 원예 관련 연재 및 특집기사가 집중적으로 실렸다. 원예 관련 글을 쓴 사람들은 분야별 전문가로 추정되며, 여러 편의 글을 시리즈로 연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고자 중 김봉식이란 인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는 일본 대판부립원예학교(大阪府立園藝學校)에서 공부한 뒤 귀국한 원예 전문가이다. “家庭園藝”, “庭園과 個人趣味”, “朝鮮庭園에 對 하야”, “生活斷想田園의 趣味” 등 정원의 기능, 정원의 유형, 주택 건물과의 관계, 정원의 역사 등 정원의 본질과 관련한 글을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또 다른 사람으로는 안충수란 이로, “원예강좌-수선화 기르는 법”, “가정취미-식충식물재배법”, “추국배양법”, “동계분재보호법”, “정원의 관리” 등 주택정원에서의 원예 관련한 기본 정보를 계절별, 식물별로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또한, 당시에는 정원 관련 직업군으로 전문원예가, 조원가, 정원설계사, 정원식수청부업자 등이 있었으며, 학문 분류에서도 이미 ‘정원설계’ 분야가 구분되어 있었다.

…(중략) 도회지에있어서귀중한 화초를 보호하기 어려울 때에는 전문원예가에게의탁하야 겨울동안의관리를 의뢰하는일도많으나…(중략) (“가정원예 동계분재보호법”,『신가정』2(11))

…(중략) 그런 故로 住宅을 지을 建築家도 庭園에 對한 硏究와 趣味가 잇서야 할 것이며 딸하서 造園家도 住宅에 關한 常識이 잇서야 할 것은 勿論이다 …(중략) (“庭園의 趣味 (一)”,『동아일보』 1932.9.22.)

년년히 증가되는 부민의 주택난으로 부내각처에는 신주택지가 설정되엿스며 따라서 신주택 건축공사에 이여 정원설게사(庭園設計師)와 정원식수청부업자가 세가 난다. …(중략) (“庭園築造의 請負로 數年間 巨額詐欺”,『조선일보』 1937.2.21.)

전문가 양성과 관련 학문의 등장은 여러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정원의 수요가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전문역할도 세분화하여 나타난 것이다. 열대식물을 대여해주는 사업이 주목받기도 했으며(Figure 1 참조), 당시 원예가가 열대식물 등 이국적 식물 재배를 통해 고소득을 얻을 수 있었던7) 직종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등 정원 관련 직종이 전도유망한 직업군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도 주택정원의 인식을 단면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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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Greenhouse business that rents potted tropical plants

Source:『Chosunilbo』 Mar 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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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는 가정주부를 대상으로 한 원예강좌 학원 수강생 모집 광고가 꾸준히 실렸고, 경성원예학원, 경성원예전수학원과 같은 대중적 교육기관도 있어8) 정원을 가꾸는 데 대한 관심을 간접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원예 관련 기사는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별로, 그리고 식물별로 정원 관리를 위해 시기별 준비해야 할 사항, 식물 종류에 따른 재배 방법, 화단 만드는 법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제공하는 정보의 수준은 상당히 전문적이다. “따리아꽃의 영리적재배법”(『신가정』 1(10))에서는 다알리아(따리아)의 꽃 특성과 ‘가구다쓰’, 피오니, 데코러티브(떼꼴라치푸), ‘쇼’, 폼폰(뽄뽄) 등 18개 다알리아 꽃의 종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원예강좌 수선화 기르는 법”(『신가정』 2(1))은 수선화의 원산지와 전파 과정, 전 세계 분포하는 재배종, ‘골든스파’, 그랜디플로라, 킹 알프레드, ‘지나 수선화’, 나팔 수선화(엠프레스) 등 여러 종에 대해 알려준다. 그 외에도 볕을 쬐는 법, 아름다운 꽃이 되게 하는 법, 좋은 열매 맺게 하는 법 등 전문 원예잡지에 수록할만한 내용이 정리되어 제공되었다. 소개하는 식물도 구근화초, 식충식물, 관상식물, 추국, 분재, 버섯(松茸) 등 다양한 유형의 식물에 대한 정보를 폭넓게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원예가들의 글에서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식물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래종 외에도 수입종, 개량종의 다양한 품종을 볼 수 있었고, 카탈로그를 통해 외국에서 종자를 수입했다는 기사를 통해 1920~30년대에 이미 많은 새로운 식물이 전파되어 식재되고 있었음을 그려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초화류 외에도 주택의 정원에서 과수, 채소의 재배를 중요하게 보았다. 식용 가능한 식물을 키움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익을 부각하며, “가정부업으로 본 과수재배의 지도”(『신가정』1(10)), “有望한 副業인 食用茸栽培法 十四”(『동아일보』1931.4.5.), “家庭에 適合한 副業 松茸人工栽培法”(『조선일보』1931.1.10.) 등의 기사에서도 언급되듯, 주변 공지나 뜰을 이용하여 채소와 과일을 수확해 가정에서 이용하고 나머지는 부업으로 판매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작은 정원이라도 실리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주택 미관도 더욱 좋아지고 심리적으로도 위안이 되며, 동네주민이나 가족친지에 선물하여 사회적으로 활용되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9).

대중잡지에는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실용적 정보를 알려주는 기사가 많았다면, 신문에서는 좀 더 이론적으로 원예의 정의, 주택과 정원 조화의 중요성, 정원의 의미와 가치, 한국정원의 역사 등 더 깊이 있게 정원을 통찰하고 향후 주거문화에서 정원이 가져야 할 발전적인 모습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기사를 주로 다루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정원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정원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있었다. 한 기사에서는 “조선의 정원은 자연을 축경한 것으로 못과 수목이 있는 부지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은 정원의 범주가 더 넓어졌다”고 얘기한다. 즉 주택 주변의 공터나 가정용 채원, 과수원, 주택정원, 토지를 아름답게 만든 장소 등을 모두 정원으로 포함할 수 있음을 말하며, 여기서 정원적 장식의 유무가 정원 여부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고 말한다10). 같은 텃밭이더라도 경작만을 고려한 곳은 밭이겠지만, 미적 관점을 고려해 조성한 텃밭은 정원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원 돌봄의 가치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오랜 경험이 쌓일수록 그 깊이가 깊어진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필요로 수목을 심는 데서 정원 가꾸기가 시작된다면, 한 발 더 나가 미적 관점에서 수목과 화목을 심게 되고, 다음 단계로는 화단, 잔디밭을 만들어보며 점점 정원을 문화생활로 즐기게 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정원은 가꾸는 사람의 안목이 중요한 만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정원 전체의 조화, 빛, 명암, 색채의 배합 등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하게 되며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취미의 정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11).

한 집안의 壁장 속을 보아 其 사람의 性質을 아는 것과 가티 庭園은 其 사람의 知識과 趣味의 程度를 表現하는 것이다. … 有産階級에 잇는 者는 多額의 金錢만 消費하면 조흔 庭園이 되는 줄로 認定하나 이것은 誤解이다. 庭園은 庭園의 主人과 設計하는 技術者의 意見이 一致相合되는 곳에 理想的 庭園이 設計될 것이다. … (“家庭園藝 庭園의 趣味【三】”,『동아일보』 1932.9.25.)

실제로 주택에 정원을 둔 사람들은 여가생활의 하나로 정원을 가꾸는 것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유학의 경험이 있는 박인덕 씨는 화초를 사랑하는 다른 민족의 생활이 좋아 보여 본인도 여가생활로 정원을 가꾸게 되었다고 했고(『여성』5(8)), “꽃 피는 우리집이 안락한 우리집-화단은 어떠케 꿈일까”, “단 한 평의 정원이 삭막한 생활을 미화” 등 여러 에세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생활 속에서 정원이 거주민에게 주는 만족감을 엿볼 수 있다.

자료를 통해, 1920~30년대에 정원은 도시 차원에서, 그리고 거주민의 차원에서,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도시에서 주택은 면적이 협소하고 그나마 있는 공지는 장독대 등의 생활시설을 배치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대중잡지, 신문 등의 매체에서는 정원이 주는 여러 효용을 들면서 정원 조성과 운영을 꾸준히 장려하였다.

정원을 다루는 전문가가 등장하게 된 점도 인상적이다. 이 시기에는 근대 원예교육을 받은 조원가, 정원설계가, 원예가 등이 나타났고, 주택 설계를 하는 데 건축가와 조원가가 서로의 분야에 대해 함께 이해하며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12).

대중적으로는 정원가꾸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 늘어갔는데, 정원이 개인에게 여가의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의 미감과 소양을 드러내는 역할도 해 아름다운 정원 가꾸기에 몰입하는 결과도 낳게 하였다.

2.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주택 방문기

1920~30년대 대중잡지에는 저명인사의 주택 또는 그 당시 좋은 집으로 소문이 난 주택을 방문해 거주민과 그들의 집을 소개하는 코너가 유행하였다. 잡지마다 가정방문기, 가정순례, 가정순방기, 가정태평기, 스윝홈순례, 가정풍경 등을 제목으로 하는 주택 탐방기가 실렸다.

이 코너에는 정원이 잘 되어있는 집을 기자가 수소문해 찾아간 일도 있으며, 주택을 설명하며 정원을 인상 깊게 기록한 경우도 있다. 주택정원이 특히 잘 꾸며진 집의 소유주는 대부분이 경제력이 있는 사업가이거나, 학자나 교육자 등 현재까지도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이 많다. 이들 대부분은 해외 유학을 다녀왔거나 해외로 장기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던 지식인층이었다. 때로는 자유연애로 국제결혼을 한 부부도 경우도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해외의 상황을 경험한 바가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 같은 가정 탐방기의 유행을 두고, 남성들이 기획한, 소위 여성 훈육을 목적의 산물로써 이상적인 주거공간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불어넣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Park, 2006). 실제로, 가정 탐방기는 대중에게 정원이 딸린 집을 소유하고픈 욕망과 주택정원에 대한 로망을 부추겼고, ‘정원 가꾸기=교양있는 삶의 형식’이라는 프레임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가정 탐방기의 인터뷰 대상은 상류층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의 일반 대중의 생활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즉, 이들 기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주택정원의 모습은 1920~30년대 모범적인 주택정원의 전형으로도 볼 수 있다.

여러 가정 탐방기 가운데 정원의 설명, 사진, 소유자의 인터뷰 등이 충실히 담긴 글로는, 소설가 이태준 씨와 음악가 이순옥 씨 주택, 은행가 김연수 씨 주택 등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李泰峻, 1904~?)은 박태원, 이효석, 정지용 등과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한 저명한 근대작가이다. 기자는 이태준 씨 가족이 시내에 새로 건립된 깨끗하고 넓은 기와집을 마다하고 외진 곳에 자리한 초가집으로 이사해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설명하며 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의 집에 남들이 보지 못한 예술미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이들의 집은 ‘나무와 꽃 속에 싸인 草屋’으로 묘사된다. 작은 마당에 샛노란 꽃이 산들거리고, 파초나무, 석류나무가 서 있고, 담장에는 한련, 봉선화, 다알리아가 소담하게 심겨져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 중 이순옥 씨는 꽃 설명을 하며, 다알리아는 일본에서 주문한 것으로 다른 다알리아와 다르게 곧게 서 있어 선택했다고 강조하고, 해바라기도 꽃 가운데 씨가 생기지 않고 바로 꽃잎이 나오는 종이어서 사다 심었다고 얘기한다.

집 울타리로는 담장 대신 나무를 둘러 심었고, 울타리를 따라 갓나무, 진달래, 채송화, 백일홍 모를 부어 놓았다. 정원 한 편에는 채소를 심고 가꾸는 텃밭을 조성하였다고 해,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가옥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Figure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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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View of Lee Tae Jun’s residential garden

Source:『Singajung』 1(6): 1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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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꽃을 심을지 선택하게 된 배경, 봄이 되자마자 이태준 씨가 씨앗을 사와 모를 만들었다는 얘기, 화초가 가득한 집으로 유명하다는 얘기 등에서 정원 가꾸는 것을 굉장히 즐겨하였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략)「소경이 아버지가 어떠케나 화초 화초하는지 겨울에도 화분 내다논것을보고 집들을 찾어온다우 밖에 또 화초를 심엇는데 나가 봅시다」

바로 뒷문밖 담장에 붙어서 한련 봉선화, 따리아를 소꿉질하듯이 심어 놓앗읍니다. 순옥씨는 차근차근 화초설명을 햇읍니다.

「이 따리아는 일본서 주문해왓는데 보통따리아는 꽃이 피면 무거워서 고개를 숙이지만 이것은 고대로 꼳꼳이 서잇다고 사왓서. 그리고 이 해바래기는 꽃가운데 씨가 생기지않고 가운데서부터 꽃잎이 족-연달아나와서 여간입부지를 않다는구먼. 그래서 불란서 어떤 유명한 미술가가 이꽃을보고 기가맥히게 감탄을하고 칭찬을 햇다고 사다심엇다우」(중략) (“나무와 꽃 속에 싸인 草屋”,『신가정』 1(6))

은행가 김연수 씨 가옥은 성북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기자가 “어듸 얌전하고도 그럴 뜻하게 꾸며논 정원이 없을까요” 유심히 찾아보아도 적당한 정원이 눈에 띄지 않다가 김연수 씨 댁을 추천받고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옥에 대한 첫인상은 주택을 둘러싼 정원이 성북동을 둘러싼 산림과 잘 조화를 이룬 것으로 그려진다. 주변에 자연이 좋으면 정원을 조성하기가 오히려 어려운데, 이 집의 경우 주변 풍광에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운 솜씨로 정원을 꾸몄다고 평하고 있다.

기자는 주택을 두른 담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고, 집을 가시줄로 빙 두르게 하고 푸른 전나무를 둘러 심은 것이 돋보인다고 얘기한다. 대문부터 집 사이의 공간에는 화단을 삼각형 혹은 사각형으로 만들어, 화단 안에는 일년초를 심고 밖에는 잔디를 넓게 덮었다. 사람 다니는 길에는 돌은 군데군데 깔고 그 외에는 잔디로 다 덮여있었다고 한다. 중간중간 단풍나무, 소나무를 심고, 조선식으로 집 앞에 넝쿨이 있는 등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집 뒤편 언덕에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돌과 바위를 배치하고 소나무, 전나무를 심고 뒷문 앞에도 등나무를 심어 해를 가리도록 했다고 전했다. 정원의 모습이 너무 인공적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자연적인 모습이어서 ‘花林’에 들어온 것 같아 보기 좋았다고 평가했다(Figure 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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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 View of Kim Yeon Soo’s residential garden

Source:『Singajung』 1(6):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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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절제되고 모던한 느낌의 중정을 가꾼 미술가 이옥순 씨 가옥(Figure 4 참조), 마당에 관목을 우거지게 키운 음악가 김원복, 홍성유 씨 가옥(Figure 4 참조), 마당에 포도, 딸기를 넓게 심은 미술가 정찬영 씨와 식물학자 도봉섭 씨의 가옥, 화분을 집 둘레 가득 키우다 겨울에는 방 안으로 옮겨 키우고 있는 미술가 임용연, 백남순 씨 부부의 가옥 등 마당이나 담 주변에 정성껏 정원을 가꾸고, 꽃들에 애정을 쏟아 계절에 따라 생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애쓰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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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View of Artists’ residential garden

Source:『Singajung』2(7):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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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류일한 씨 가옥과 크로웨(Crowe)와 김영순 씨 부부의 가옥은 서양식 주택으로 묘사된다. 류일한 씨 가옥은 흰색 돌로 지은 양옥이었는데, 마당을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른 잔디를 가득 깔고 잔디에 안락의자를 드문드문 놓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난 화분도 2층 테라스에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국제결혼을 한 크로웨 씨와 김영순 씨 가옥은 현재의 서대문 충정로 지역에 있었는데 3층 붉은 벽돌집으로 마당에 푸른 잔디를 꽉 차게 깔고 정원에 포도 넝쿨과 등나무 시렁을 만들고 진자줏빛의 맨드라미를 심은 것으로 묘사한다.

위의 글들이 정원 중심으로 기술한 글들은 아니어서 정원의 형태를 전부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정원이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대부분 ‘자연스러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산림과의 조화, 고목 가지가 창가에 늘어지게 한 배치, 주변 돌과 바위를 활용해 만든 석축 등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정원에 대해 높은 호감도를 보였다.

이들 가옥은 집중식 배치의 넓은 필지의 한옥, 문화주택, 서양식 주택과 중정형 배치를 띤 도시형 한옥 등 다양한 유형이었다. 집중식 주택의 정원이 전면부 넓은 정원과 채별 구획된 정원을 갖고 있었다면, 중정형 주택은 중정에 그치는 등 공간 구성에 차이가 있었다. 그 속에서도 정원 형태는 주택 유형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비슷한 형태를 띠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 한옥으로 조성된 김연수 씨 가옥 정원에서는 일부 서양식 자수화단이 있는 절충형의 특징을 가진다. 도시형 한옥인 이옥순 씨 가옥에는 잔디와 절제된 수목 식재로 현대적 느낌의 정원을 조성했다. 서양식 주택인 크로웨 씨 가옥에는 포도와 등나무 시렁을 배치하기도 했다.

공통적으로 담장이나 울타리 아래에는 다양한 초화류를 식재하고, 등나무 시렁을 곳곳에 조성하였다. 또한, 마당에는 화단을 만들어 수목과 초화류를 모아 식재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는 돌을 징검다리 형식으로 배치했다. 몇몇 가옥에는 바닥에 잔디를 넓게 심었다. 주택 유형에 따라 정원 유형을 구분하기보다는 연출하고자 하는 분위기에 따라 식재 유형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언급된 식물로는 고추나무, 단풍나무, 등나무, 석류나무, 소나무, 전나무, 파초나무, 포도나무 등의 수목과 달리아, 맨드라미, 무궁화, 백일홍, 봉선화, 진달래, 채송화, 한련, 해바라기 등의 초화류, 딸기, 옥수수 등의 채소류를 들 수 있다. 앞의 원예 기사에서 나온 식물 종류만큼 다양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해외에서 수입한 식물종도 몇몇 보였다. 외래종이 대중화되지는 않았으나 일부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잔디를 사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방문한 주택의 소유자들이 해외 경험이 많다는 것 또한 특징이다. 미술가 임용연과 백남순 씨 가정의 “재현된 자연미” 글을 보면, 임용연 씨의 경우 1922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1929년 졸업하며 장학금을 받고 유럽 여행을 떠나 약 1년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답사하였다고 하였다. 부인 백남순 씨는 1928년 프랑스 파리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갔고, 외국에서 결혼한 뒤 파리에서 결혼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귀국한 것으로 얘기한다. 그 외에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조각가 김복진, 동경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한 피아니스트 김원복 씨, 독일과 스위스에서 학위를 받은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씨 등, 당대의 지식인층의 주거생활을 대거 소개하였다.

이들 가옥은 계동, 통의동과 같은 성안 지역도 있었지만, 정원이 잘 가꾸어진 곳은 성북동, 서대문구 충정로, 북아현동, 행촌동, 사직동, 회기동, 연희동 등 성밖 지역인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많은 잡지가 주택 방문기를 기사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이 코너의 파급력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당대의 사회지도자, 문화 엘리트의 주거생활을 엿본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즉 지식인층이 교외 지역에서 정원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중매체는 정원을 가꾸고, 즐기는 문화를 전파하여 대중의 삶에 정원이 한층 가까워지는 역할을 하였다.

Ⅳ. 결론

1920~30년대는 주택 공간 구성의 측면에서 변화의 필요성이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지속하여 강조되어온 시기였다. 도시화의 상황 속에서 자연을 어떻게 도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이어져 온 시기이기도 하다.

때마침 주거환경에서도 개량된 주택과 정원이 짝이 되는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하는데, 주택정원은 도시환경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거주민의 측면에서도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관상의 이점, 실용적 목적, 정서적, 보건적 이유 등 다양한 측면에 정원의 장점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누구나 정원을 조성하고. 가꾸고 싶어 하였다.

도심지에 건설된 도시형 한옥의 경우, 전문가들이 주택개량과 함께 정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지만, 제한된 공간 때문에 정원을 도입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교외 지역은 상대적으로 필지를 여유 있게 확보하여 주택정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외 주택에는 경관적으로 아름다워 즐길 수 있는 정원과 실용적 기능의 채소밭을 함께 운영하는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당시 한옥, 문화주택, 서양식 주택, 도시형 한옥 등 다양한 주택 유형이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정원 형태도 건물 유형에 특별히 구애받지 않고 잔디정원, 화단이 있는 정원, 자수정원, 골목정원 등 여러 양상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등나무 시렁, 바닥돌, 돌 계단 등이 자주 나타났으며, 정원 식물로도 친숙한 종부터 새로운 식물종까지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1920~30년대는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국내에서 여러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예술가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외국 생활에서 경험한 정원 가꾸기를 자신의 주거공간에 그대로 실천하였다. 주택의 바깥은 빈 마당 대신 잔디밭이나 화단, 자수정원 등을 조성하였고 카탈로그를 보고 희망하는 외국 화훼종을 직접 선택하여 정원에 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원 식물종의 수요 창출은 희귀식물재배의 고소득을 견인하였고 관련 재배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정원설계라는 학문 분야가 별도로 만들어졌다. 건축설계와 함께 정원설계 분야가 존재했고, 근대교육체계에 포함되어 있었다. 원예가, 조원가, 정원설계가 직업군이 등장하여 대중에게 정원가꾸기 모범을 제안하고 다양한 정원 관련 지식을 전파하고자 했다. 이들은 정원 설계, 정원 및 식물 유지관리방법 교육, 새로운 식물 품종 지식 전파, 겨울철 관리 대행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 연구는 주택건축이 전환기에 이르렀던 시기 주택정원에도 분명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였고, 우리에게 익숙한 주택정원의 형태가 1920~30년대부터 비롯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더하여 이 시기 정원의 기능과 성격을 규정하고 취미로서 정원 이미지가 형성된 바를 규명하였다.

다만 대중잡지와 신문에 수록된 내용에 한정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공간의 형태나 유형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고 선별된 주택정원의 대표성도 검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매체의 파급력을 생각해볼 때, 이후 주택정원의 형태와 취미, 문화를 주도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한편, 주택정원에 사용된 식물은 잡지나 신문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기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가정원예 기사에서 언급한 수목, 초화류 등은 이름을 거론하는 데 그쳤다. 향후에는 이들 목록을 토대로. 주택정원 식물 종류의 다양성에 대한 심화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Notes

’가정탐방기’는 잡지사 기자가 유명인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가정생활을 인터뷰한 글로, 잡지마다 가정방문기, 가정순례, 가정순방기, 가정태평기, 스윝홈순례, 가정풍경 등의 다양한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아동을위하야(基一) 아동보건문제에대하여”,『신가정』2(5), “어린이와 어머니의 공원”,『우리집』5(4) 참조.

“여름과 주택”,『신가정』2(7) 참조.

‘집단식(集團式)’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一般朝鮮家屋도 建築樣式을 指定”,『조선일보』 1935.10.23. 기사 참조.

『신가정』2(7); 4(1) 참조.

“一般朝鮮家屋도 建築樣式을 指定”,『조선일보』 1935.10.23. 기사 참조.

“식물학에도 업는 돈 여는 나무 한 달 수확이 千圓!”,『조선일보』 1938.3.10. 기사 참조: 당시 가장 고소득자였던 변호사 월급이 이백원이었다고 하니,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볼 수 있다.

“家庭 蔬菜培養法 (一)”,『동아일보』 1935.7.31. 기사; “우리의 庭園을 가꾸자 "婦人園藝講座"”,『동아일보』 1936.6.21. 기사 참조.

“가정부업으로 본 과수재배의 지도”,『신가정』1(10) 참조.

“庭園의 趣味 (二)”,『동아일보』 1932.9.23. 참조.

“庭園의 趣味 (二)”,『동아일보』 1932.9.23. 참조.

“庭園의 趣味 (一)”,『동아일보』 1932.9.22. 참조.

Referenc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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