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of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Article

『시경』과 『맹자』에 기록된 영대(靈臺) 원림의 특성과 조선시대 인식

임한솔
Hansol Lim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선임연구원
Researcher, Environmental Planning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1S1A5B5A17057987)

Corresponding author : Hansol Lim Researcher, Environmental Planning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Korea Tel.: +82-10-7360-1922 E-mail: hsollim@hanmail.net

© Copyright 2024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05, 2024; Revised: Aug 23, 2024; Accepted: Aug 23, 2024

Published Online: Aug 31, 2024

국문초록

본 연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원림 기록으로 꼽히는 『시경』의 「대아․영대」에 등장하고 『맹자』의 「양혜왕」 장에 언급된 영대(靈臺)․영유(靈囿)․영소(靈沼), 일명 영대 원림에 주목해 그 특성을 규명하고 조선시대 원림 실천과 관련된 인식의 양상을 논한다. 영대 원림은 유학에서 성인으로 꼽히는 주나라 문왕의 원림으로서 중국 최초의 황가원림이자 산과 물의 조합으로 구성된 역대 원림의 기본 형식으로 평가된다. 영대 원림의 특성은 『시경』과 『맹자』의 경전 본문과 주자 등이 서술한 주석, 『삼보황도』 등의 후대 문헌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다. 형식 측면에서는 높이 돋운 땅과 동물을 기르는 너른 영역, 물고기가 있는 못에 해당하는 세 공간 요소가 간결한 배치를 이루고, 기능 측면에서는 관측과 휴식이 복합되어 있으며, 상징 측면에서는 민심의 동반과 지도자의 무일(無逸)을 뜻한다는 점이 영대 원림의 특성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영대 원림은 주로 왕실과 관련된 사료에 등장하며 그 의미는 천체관측 기능의 관천대와 휴식․감상 기능의 원림 두 가지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주자 성리학을 경유하여 주나라와 같은 고대의 이상국가를 재현하고자 했던 조선의 인물들에게 영대 원림은 왕실의 원림 실천을 경계하는 제어 장치이자 그 존재의미를 선정(善政)으로 확장하는 상징 기제로 작용하였다.

ABSTRACT

Yeong-dae(靈臺), Yeong-yu(靈囿), and Yeong-so(靈沼) - so-called ‘Yeong-dae Garden’ – appear in the poem ‘Dae-ah(大雅)․Yeong-dae(靈臺)’ in Shijing(詩經) which is considered the record of the earliest garden in East Asia, in the chapter ‘Yanghyewang(梁惠王)’ of Mencius(孟子). Focusing on those records, this research clarifies their characteristics and discusses the aspects related to garden practices in the Joseon Dynasty. The Yeong-dae Garden is the garden of King Wen of the Zhou Dynasty, who is considered a sage of Confucianism. It is considered to be the first imperial garden in China, and the basic form of all gardens consists of mountains and water. The characteristics of Yeong-dae Garden can be specified through the texts of Shijing and Mencius, the comments written by Zhu Xi and others, and later literature, such as Sambohwangdo. The characteristics of Yeong-dae Garden are as follows: In terms of form, the three spatial elements corresponding to raised ground, a wide area for raising animals, and a pond with fish form a simple arrangement; in terms of function, it combines observation and rest; and in terms of symbolism, it signifies the companionship of the public sentiment and the leader’s sincerity. In literature from the Joseon Dynasty, Yeong-dae Garden mainly appear in historical materials related to the King, and its meaning shows an aspect of differentiation into two functions: an observatory for astronomical observation and a garden for rest and appreciation. For the intellectuals of Joseon who sought to restore an ancient ideal state like the Zhou Dynasty through Zhu Xi’s Neo-Confucianism, the Yeong-dae Garden served as a control device to warn against royal garden’s practices and a symbolic mechanism to expand its meaning of existence to good politics.

Keywords: 영유; 영소; 왕실 원림; 전통 조경; 한국조경사
Keywords: Yeong-yu; Yeong-so; Royal Garden; Tradi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History of Korean Landscape Architecture

1. 서론

1.1 연구 배경과 목적

동아시아의 문헌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원림 기록으로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영대(靈臺)」가 꼽힌다. 이 기록은 고대국가인 주(周, BC1046-BC771)의 기틀을 세웠으며 유학에서 칭송하는 성인(聖人)인 문왕(文王, BC1152-BC1056)의 건설 공사를 노래한 시이다. 이 시에는 영대(靈臺), 영유(靈囿), 영소(靈沼)라는 공간 요소가 등장한다. 세 공간 요소는 각각의 끝 글자에서 드러나듯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높은 곳[臺]과 동물을 기르는 너른 영역[囿], 물고기가 있는 못[沼]에 해당한다.

『시경』의 기록을 근거로 영대, 영소, 영유로 이루어진 원림(이하 영대 원림)이 중국에서 최초로 조성된 원림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영대 원림은 중국의 황가원림, 그리고 이름이 지어진 원림 중에서 최초라고 인정된다(Liu, 2015: 31). 무엇보다 영대 원림은 유학 경전에 기록된 성인의 원림으로서 위상이 특별하다. 문왕으로부터 약 7세기 뒤 인물인 맹자(孟子, BC372-BC289)는 『시경』에 함축되어 있는 영대 원림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내 그 가치와 중요성을 확대하였는데, 『시경』과 『맹자』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정립된 경전 본문에 각종 자연 현상과 자연 요소가 등장하나 이처럼 원림으로 볼 만한 공간 구성이 기록되고 그 함의까지 명시된 경우는 드물다. 영대와 영소의 조합은 산과 물의 모양을 배치하여 구성한 역대 원림의 기본 형식으로 평가된 바 있으며(Wang, 1990: 45), 영대 원림은 중국에서 쓰인 중국조경사 서적은 물론이고 국내에서 쓰인 중국조경사 서적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윤국병, 1978; 정동오, 1996; 한국전통조경학회, 2016).

국내에서 영대 원림에 관한 연구는 종교계와 동양철학, 중문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차선근(2023)의 연구는 대순진리회에서 신전의 이름으로 활용되는 ‘영대’의 기원으로 주 문왕의 영대를 제시하며 그 내력을 고찰하였다. 서정화(2016)의 연구는 고대 정치 활동의 중심 장소인 명당(明堂)과 교육․통치 장소인 벽옹(辟雍)을 다루며 영대를 벽옹 내부의 요소라 주장하였다. 이성초와 최영준(2023)의 연구는 중국 고전문학의 원천으로서 『시경』의 원림시(園林詩)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그 첫째로 「대아․영대」를 꼽았는데, 다른 두 시를 사가(私家)나 전원에서의 생활, 은거를 다룬 것으로 본 한편 「대아․영대」의 영대 원림을 황가원림의 최초 형식으로 지시하였다. 요컨대 국내에서 영대 원림은 종교, 통치, 문화 공간의 기원을 추적하는 종류의 연구에서 다루어져 왔다.

영대 원림의 문화적 의미와 역사적 중요성은 여러 분야에서 인정되지만, 국내의 조경과 건축 분야에서 영대 원림이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진 바는 없다. 그 까닭은 남아 있는 실체가 불분명한 데다 국내 공간 문화와의 영향 관계를 따지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영대 원림의 위치는 중국 현지에서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유적으로 두 곳이 꼽히나 현재의 모습은 모두 20세기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1). 문왕이 영대를 조성했던 기원전 11세기는 한국사에서 고조선에 해당하는데, 고조선의 조경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서 주나라의 원림을 원형 고증이나 비교사적 관점으로 다루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국조경사 연구에서 영대 원림을 다룰 만한 여지는 흥미롭게도 시대를 건너뛰어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된다. 영대, 영유, 영소라는 단어는 왕실 사료와 사대부 문집에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당시 문인들은 영대 원림의 실체를 본 적은 없었지만 『시경』과 『맹자』를 읽으며 그 존재와 의미를 마음에 새겼다. 이는 공부의 시작과 끝에 경전이 자리했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으로 볼 때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신유학 이상국가를 재현하고자 했던 조선의 문인이 그러한 표현을 썼다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여말선초의 신진 유학자들은 고대의 원시유학을 재정리해낸 송대의 주자성리학을 신봉하였으며, 유학에서 모범 삼는 고대의 이상국가인 하(夏)․상(商)․주(周) 삼대(三代) 중에서도 주나라의 제도를 중시하였다. 예컨대 정도전은 국가의 기본 법전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작성할 때 주나라의 예법서인 『주례(周禮)』를 모본으로 삼았으며,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할 때 앞서 그 국호를 썼던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았다고 특기했다. 조선의 도성과 궁궐 구조가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언급된 전조후시(前朝後市)와 좌묘우사(左廟右社), 삼문삼조(三門三朝)와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을 의식해 계획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고대 국가의 재현을 꿈꾸는 조선을 두고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한국만큼 중국 고대 제도를 재창조하겠다는 곳은 없었다(Deuchler, 1992).”라고 평한 바 있다2).

본 연구는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조경사의 초입에 국한되어 있는 영대 원림의 조경사학적 위상을 조선시대 조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전거(典據)로 옮겨와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영대 원림이 등장하는 경전인 『시경』과 『맹자』의 본문을 검토하고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그 함의를 정리한 뒤, 조선시대의 관련 문헌과 실례를 검토함으로써 당시 인물들이 영대 원림을 떠올리고 실제 공간과 연계했던 인식의 양상을 제시할 것이다.

1.2 연구의 범위와 방법

유학 경전을 연구 자료로 삼을 때는 경전의 본문 못지않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후대의 주석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경전의 본문과 조선시대 인식 양상의 사이를 매개하는 주석 중에서 조선시대 문인이 가장 우선시했던 주자의 주석을 중시한다. 이에 따라 『시경』의 경우 주자가 편집해 정리한 『시경집전(詩經集傳)』을, 『맹자』의 경우 역시 주자가 정리한 『맹자집주(孟子集註)』를 중심 텍스트로 삼는다. 경전과 그 주석은 고문헌 중에서도 번역이 쉽지 않고 중요성이 남다르다. 논문 내용의 일관성을 위해 두 경전의 현대 한국어 번역본은 박소동 역(2019)의 『시경집전』과 성백효 역(2005)의 『맹자집주』를 준용하였다.

영대, 영유, 영소를 언급한 조선시대 문헌 기록의 탐색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조선왕조실록DB(https://sillok.history.go.kr/)를 주로 활용하였다. 세 공간을 가리키는 한자 원문에 해당하는 靈臺, 靈囿, 靈沼를 우선 검색하였으며 靈, 臺, 囿, 沼와 文王이 하나의 글에서 함께 언급된 문헌도 살폈다.

선별하고 수집한 기초 자료를 바탕으로 본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구성하였다. II장에서는 『시경․대아․영대』와 『맹자․양혜왕』에서 영대 원림에 관한 내용이 담긴 구절의 전문을 제시하고 그 개요와 중심 내용을 정리하였다. III장에서는 『시경』과 『맹자』의 본문과 주석, 후대의 문헌을 바탕으로 영대 원림의 형식과 기능, 상징적 의미를 짚었다. IV장에서는 영대 원림에 관한 조선시대의 인식을 살피되, 먼저 천체관측 기능과 관련된 인식이 관천대로 분화된 양상을 제시한 뒤 원림과 관련된 사안을 경계의 근거로 작용했던 것과 선정(善政)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 둘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2. 영대 원림의 원전: 『시경』과 『맹자』

2.1 『시경․대아․영대』

『시경』은 고대 중국의 시가를 모아 엮은 경전이다. 현전하는 『시경』은 총 311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풍(風)․아(雅)․송(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풍(風)은 15개 지역에서 채집된 민간 시가이다. 아(雅)는 주로 귀족층이 지은 시가로 연회와 제사에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송(頌)은 종묘 제사에 썼던 악가이다. 「영대」는 총 111편의 시가 실린 아(雅) 중에서도 31편의 「대아(大雅)」에 포함되어 있다3).

「대아」의 내용은 문왕과 무왕, 그리고 주나라의 개국을 칭송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영대」의 내용 또한 문왕의 은덕을 기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영대」의 전문이다.

ⓢ-1 영대 계획하여 經始靈臺
터 잡고 설계하니 經之營之
백성들 달려와 일하여 庶民攻之
하루도 못되어 완성하네 不日成之
서두르지 말라 하시나 經始勿亟
백성들 부모일 돕듯 하였네 庶民子來
ⓢ-2 왕께서 영유에 계시니 王在靈囿
암사슴 엎드려 있네 麀鹿攸伏
암사슴은 살쪄 윤기 나는데 麀鹿濯濯
백조는 깨끗하여 빛이 나네 白鳥翯翯
왕께서 영소에 계시니 王在靈沼
아, 물고기들 가득 뛰어노네 於牣魚躍
ⓢ-3 종과 경쇠 매다는 틀엔 虡業維樅
큰 북과 종이 걸려 있네 賁鼓維鏞
아, 질서 있게 연주하니 於論鼓鍾
아, 즐거울사 천자의 학궁 於樂辟廱
ⓢ-4 아, 질서정연한 북과 종이여 於論鼓鍾
아, 즐거운 벽옹에서 연주하네 於樂辟廱
악어 북 둥둥 치니 鼉鼓逢逢
악사들 음악 연주하네 矇瞍奏公
Download Excel Table

이 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1에는 영대, ⓢ-2에는 영유와 영소가 등장하며 ⓢ-3과 ⓢ-4에는 벽옹(辟廱)이라는 곳이 등장한다. 영대는 문왕이 직접 터를 잡고[經] 설계하였으며[營]4), 그 공역을 백성이 자발적으로 수행해 빠르게 끝냈다. 영유, 영소와 관련해서 왕은 그곳에 있었을 뿐 주체적 행위가 서술되지는 않았다. 영유에는 암사슴과 백조가, 영소에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아름답고 건강한 상태로 묘사되었다. 벽옹은 주자의 주에 따르면 “천자의 학궁(學宮)이자 대사례(大射禮)를 행하는 곳이다. 물이 언덕을 벽옥(碧玉)처럼 둥그렇게 감돌아 구경하는 자를 제한하기 때문에 벽옹이라 한다.”5) 이는 한양의 성균관이나 북경의 국자감과 같이 국가 교육기관을 뜻하는 것이며, 「대아」에서는 이를 배경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광경이 묘사되었다.

2.2 『맹자․양혜왕』

『맹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인물인 맹자의 언행이 기록된 책으로 주자에 의해 경전의 반열이 오른 사서(四書)의 하나이다. 총 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첫 번째 편인 「양혜왕(梁惠王)」 장에 문왕의 영대, 영유, 영소에 관한 이야기가 두 군데에 걸쳐 실려 있다. 다음은 해당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1 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만나셨는데, 왕이 못가에 서 있다가 크고 작은 기러기와 크고 작은 사슴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현자(賢者)도 이런 것을 즐깁니까?”

ⓨ-2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현자인 뒤에야 이러한 것을 즐길 수 있으니, 현명하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러한 것을 소유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3 『시경(詩經)』 「영대(靈臺)」에 이르기를 ‘영대를 처음으로 계획하여 측량하고 재어보고 하자, 서민들이 와서 일하는지라 며칠 되지 않아서 완성되었도다. 측량하여 짓기 시작하자 문왕(文王)께서 급히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으나 서민들이 자식처럼 와서 도왔도다. 문왕께서 영유(靈囿)에 계시니, 사슴들이 그곳에 가만히 엎드려 있도다. 사슴들은 살찌고 백조는 깨끗하도다. 문왕께서 영소(靈沼)에 계시니, 아, 연못 가득 물고기들이 뛰노는구나!’ 하였습니다. 문왕께서 백성의 힘을 이용하여 대(臺)를 만들고 못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이 그것을 기뻐하고 즐겨 그 대를 영대(靈臺)라 부르고, 그 못을 영소(靈沼)라 하면서 문왕께서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를 소유하신 것을 좋아하였으니, 옛사람들은 백성과 함께 즐겼기[與民偕樂] 때문에 이러한 것을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서경(書經)』 「탕서(湯誓)」에 이르기를 ‘이 태양은 언제나 없어질꼬? 내 너와 함께 망하련다.’ 하였으니, 백성들이 임금을 미워하여 그와 함께 망하기를 바란다면, 비록 대와 연못과 새와 짐승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 혼자 즐길 수 있겠습니까?”6)

(중략)

ⓙ-1 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문왕(文王)의 동산[囿]이 사방 70리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옛 책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2 “그렇게 컸습니까?” “백성들은 오히려 작다고 여겼습니다.” “과인의 동산은 사방 40리에 불과한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크다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문왕의 동산은 사방 70리였으나 꼴 베고 나무하는 자들도 그곳에 가며, 꿩을 잡고 토끼를 잡는 자들도 그곳에 가서 백성과 함께 동산을 이용하셨으니, 백성들이 작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3 신(臣)이 처음 국경에 이르러 제나라에서 크게 금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은 뒤에야 감히 들어왔습니다. 신이 그때 들으니, 교외의 관문(關門) 안에 사방 40리 되는 동산이 있는데, 동산의 사슴을 죽인 자를 살인죄와 똑같이 처벌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는 나라 가운데에 사방 40리 되는 함정을 만들어놓은 것이니, 백성들이 크다고 여기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7)

ⓨ-1에서 ⓨ-4까지로 표기한 부분은 맹자가 양나라 혜왕과 못가에서 만나 『시경』의 「영대」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1에서 혜왕이 못과 동물들을 즐기는 취향에 대해 묻자 ⓨ-2에서 맹자는 오히려 현자가 아니면 소유할 뿐 즐길 수 없다고 답한다. ⓨ-3에서는 여기에 대한 근거로 앞 절에서 살핀 「영대」의 두 단락을 인용한다. 그런 후 해석하기를, 문왕과 같은 옛사람들은 백성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즐길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4는 반례를 들어 앞 문장의 내용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1에서 ⓙ-3까지는 맹자가 제나라 선왕과 문왕의 영유(靈囿)에 대해 나눈 내용이다. ⓙ-1과 ⓙ-2에서 선왕은 맹자에게 자신의 유(囿)는 사방 40리인데 백성들이 크다고 여기고 문왕의 유(囿)는 그보다 큰 사방 70리였는데 백성들이 작다고 여긴 까닭을 묻는다. 이에 맹자는 문왕은 왕과 백성이 유(囿)를 함께 이용한 반면(ⓙ-2), 당신은 백성이 유(囿)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3). 맹자가 제선왕과 나눈 ⓙ의 내용은 앞서 양혜왕과 나눈 ⓨ의 내용과 상통한다. 이 글에서 영대, 영유, 영소는 문왕이 전유하고 운영하되,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공성을 띤 원림으로 묘사된 것이다.

3. 영대 원림의 특성

3.1 형식적 측면: 규모와 배치

후한 시기의 저작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대(臺)는 “사방을 바라볼 수 있으며 높은 것”, 유(囿)는 “담으로 둘러싸인 동산”, 소(沼)는 “못물”이다8). 영대, 영유, 영소의 형식은 『설문해자』에 간명하게 쓰인 기초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되, 규모나 배치 관계가 드러나는 본문과 주석, 후대 기록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다.

먼저 영대의 형식이다. 『시경』과 『맹자』에는 그 높이나 너비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시경』의 “하루도 못되어 완성하네(ⓢ-2)”라는 구절이 그 규모가 컸음을 역설적 표현으로써 암시할 뿐이다. 영대의 규모와 관련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헌은 후한 말에 작성되었으며 진한시대 수도 일대의 공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삼보황도(三輔黃圖)』이다. 『삼보황도』에는 문왕의 영대 규모가 높이 2장(丈), 둘레 120보(步)라 기록돼 있다(송진 역, 2021: 231-232). 1장(丈)은 10척(尺) 1보(步)는 6척이며, 1척이 20cm 가량으로 환산되는 주척(周尺)으로 계산하면 책에 기록된 영대의 규모는 대략 높이 4미터 둘레 144미터 정도이다.

중국 고대 사회에서 통치자의 위상을 드러내고 제의나 천체관측 행위가 이루어졌던 ‘대(臺)’의 건축은 문왕의 영대를 비롯해 다수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삼보황도』의 대사(臺榭) 항목에는 문왕의 영대를 비롯해 한나라의 청대(淸臺), 영대(靈臺), 백량대(柏梁臺), 점대(漸臺), 신명대(神明臺), 통천대(通天臺), 양풍대(涼風臺), 진나라의 어지대(魚池臺)와 주지대(酒池臺) 등이 쓰여 있다(송진 역, 2021: 231-237). 또한 주나라 이전에도 하나라의 청대(淸臺), 상나라의 신대(神臺) 등이 있었다(김일권, 2010: 17). ‘영대(靈臺)’라는 명칭을 가진 경우가 문왕 외에도 확인이 되는데, 그 최초 여부에 관해 정약용의 『시경강의(詩經講義)』가 참고가 된다. 정조가 청나라의 고증학자 모기령(毛奇齡)을 인용하며 문왕 이전의 영대에 대해 묻자, 정약용은 기상을 관찰하는 제도, 즉 유사한 기능의 대가 문왕 이전에도 있었지만 문헌 기록의 순서와 신뢰도로 볼 때 영대라는 명칭은 『시경』에 쓰인 것이 처음이라고 답했다(실시학사경학연구회 역, 2008: 480-483). 문왕 이후의 영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BC5-57)의 영대이다. 이때의 영대는 벽옹(辟雍), 명당(明堂)과 함께 삼옹(三雍)의 제도를 이루는 것으로서 천체관측 기능이 더욱 분명해졌다9). 광무제의 영대는 1974-1975년 발굴조사가 시행되어 그 유적의 실체가 드러났다(그림 1 참조). 외곽 담장은 동서 220미터, 남북 200미터 규모로, 그 내부의 단은 동서 31미터, 남북 41미터, 높이 8미터 규모로 발굴되었다. 단은 상하 두 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상층부 위에는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조사되었다. 춘추전국 및 진한시대에는 ‘대’ 건축의 발전이 최고조에 달해 그 높이가 문왕과 광무제의 영대보다 높은 것들이 많았는데, 한대 이후로는 흙을 쌓아 대를 만들기보다 목구조를 통해 건축물을 높이는 방식이 선호되었다(Li, 1984: 97-102).

jkila-52-4-120-g1
그림 1. 동한 영대 유적의 발굴 도면과 현장 사진 자료: Luoyang Working Group of the Archaeology Institute in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1978: 55; 73
Download Original Figure

다음은 영소의 형식이다. 영대와 마찬가지로 영소의 규모나 배치에 관해서는 경전 본문에 별다른 정보가 없다. 주석과 후대 기록으로 볼 때 영소의 형식에서 관건은 영대․영유와의 배치 관계이다. 주자는 『시경집전』에서 구절 Ⓢ-1의 아래에 “영유(靈囿)는 대(臺)의 아래에 유(囿)가 있으니, 짐승을 기르는 구역이다 … 영소(靈沼)는 유(囿) 가운데 소(沼)가 있는 것이다.”10)라고 풀이를 남겼다. 이 주석에 따르면 주자는 영대와 영유가 근접해 있으며 영소는 영유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으로 세 요소의 배치 관계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자는 『맹자집주』의 Ⓨ-3 단락에 대한 주석에서 역시 “영유(靈囿)와 영소(靈沼)는 대(臺) 아래에 유(囿)가 있고, 유(囿) 가운데 소(沼)가 있었던 것이다.”11)라고 하여 같은 견해를 반복하였다.

한편 『회남자(淮南子)』 등 영대에 관한 후대의 사료들을 살핀 중국의 연구자 왕의(王毅)는 『시경』의 「영대」에서 Ⓢ-3과 Ⓢ-4에 등장하는 벽옹(辟雍)을 영대와 영소가 결합한 형태로 보았다. 즉 벽옹에서 가운데 있는 언덕을 영대로, 그 주변을 둘러싼 둥근 형태의 물을 영소로 본 것이다(Wang, 1990: 24-29). 왕의는 언덕과 물을 신성한 공간에 연계해 조성해온 오랜 전통을 중심으로 이러한 해석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주자의 견해와도 합치하지 않지만 경전 본문과도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영대」에서 영대-영유-영소로 이어지는 원문의 서술 순서, 그리고 여섯 구절로 이루어진 영대 원림 부분(Ⓢ-1, Ⓢ-2)과 네 구절로 이루어진 벽옹 부분(Ⓢ-3, Ⓢ-4) 간의 구성 차이를 고려할 때 영유의 존재를 배제한 왕의의 해석은 「대아」 본문보다는 ‘명당(明堂)’과 같은 연관 개념이나 일부의 후대 기록에 비중을 둔 해석으로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림 2는 명나라의 문인 장부(張溥, 1602-1641)가 편찬한 『시경주소대전합찬(詩經註疏大全合纂)』에 수록된 영대와 벽옹의 도판이다. 이 그림을 통해 명대 문인에게 영대와 벽옹은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됐음을 알 수 있다. 영대와 벽옹이 별개의 공간임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또한 논한 바 있다. 정약용에 따르면 영대=벽옹설은 일찍이 『좌씨전(左氏傳)』에 쓰였던 것인데, 양자는 서로 기능이 다르며 벽옹이 학교의 이름임이 분명하므로 오류라 판단하였다12).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인식과 영향을 살피는 데 목표를 두고 있으므로 경전 본문과 주자의 주석, 그리고 정약용의 해석을 고려해 영대와 벽옹을 별개의 공간으로 파악한다.

jkila-52-4-120-g2
그림 2. 영대와 벽옹의 그림[靈臺辟癰之圖], 『시경주소대전합찬(詩經註疏大全合纂)』 권1 수록. 자료: 하버드대학교 도서관(https://library.harvard.edu/)
Download Original Figure

끝으로 영유의 형식이다. 영대=벽옹설을 차치하고 주자의 주석을 따를 때 그 구체적 배치 관계, 특히 영유의 영역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맹자․양혜왕』의 ⓙ에서 볼 수 있듯 유(囿)에는 분명히 경계가 존재했다. 다만 영유의 크기가 사방 70리로 언급된 것으로 볼 때 이는 경계가 한눈에 들어올 만한 원(園)의 규모를 넘어 지역의 수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자는 『맹자집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囿)는 새와 짐승을 번식시키고 기르는 곳이다. 옛날에 사시(四時)의 사냥[田獵]을 모두 농한기에 해서 무예의 일을 익혔다. 그러나 곡식을 심는 장포(場圃)의 가운데에서 말을 달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가롭고 빈 땅을 헤아려 유(囿)를 만든 것이다.”13) 주자에 따르면 유(囿)는 농한기에 사냥으로써 식량을 마련하는 공간이었으며, 경작지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덧붙여 「영대」에 대하여 여조겸은 ⓢ-1과 ⓢ-2에 대해 “앞의 두 장은 문왕이 대지(臺池)와 조수(鳥獸)의 즐거움을 지닌 것을 즐거워한 것이고”14)라고 주석을 단 바 있다. 여조겸의 문장에서 영대와 영소는 ‘대지(臺池)’로 접합되고 유(囿)의 존재는 ‘조수(鳥獸)’로 지칭될 뿐이다. 요컨대 영유는 경작지와 구분되는 빈 땅이되 경관 감상보다는 식량 생산, 즉 사냥을 목적으로 마련된 넓은 영역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자의 말처럼 영대 아래 영유가 있었다면, 두 영역이 말끔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영유의 넓은 영역에 영대가 자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세 공간 요소의 배치 관계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대와 영유, 영소는 근접해 있었다. 둘째, 영유는 위상의 측면에서 영대를 포함하지 않았으나 지리의 측면에서 영대를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영유는 별도의 공간 형식을 갖추기보다 농한기의 너른 사냥터 개념에 가깝고, 따라서 영대와 영소의 형상이 문왕의 원림을 이루는 주요 공간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림 3은 종합한 논의를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한 것이다.

jkila-52-4-120-g3
그림 3. 영대-영유-영소의 배치 관계 다이어그램
Download Original Figure
3.2 기능적 측면: 관측과 휴식의 복합

후한 말의 학자 정현(鄭玄, 127-200)은 『모시정전(毛詩鄭箋)』의 「영대」 주석에서 영대의 설립 목적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천자가 영대를 가지는 것은 기상을 살펴 기운의 요망함과 상서로움을 관찰하려 함이다. 문왕이 천명을 받아 풍(豐)에 도읍을 만들고 영대를 세웠다. 『춘추전』에 “공이 이미 초하루 행사를 거행하고 나서, 드디어 관대(觀臺)에 올라 바라보았다. 운물(雲物)을 기록하는 것은 대비하려는 때문이다.”라고 하였다15)(이영식 역, 2016: 122).

주나라 당시에 이미 천체를 살펴 시간을 따지는 역법(曆法)이 발달했으며, 문왕이 『주역(周易)』의 괘(卦) 개념을 발전시킨 인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현에 따르면 문왕은 영대에 올라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이를 써서 남기기도 하였다. 이 주석을 통해 후한 시기의 학자가 영대의 기본적 기능을 천체관측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정현으로부터 약 1,000년 뒤 인물인 주자는 『시경집전』의 「영대」의 주석에서 영대를 포함한 대(臺)의 건립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나라에 대(臺)를 두는 것은 ⓐ 나쁜 기운과 좋은 기운을 바라보아 재앙과 상서를 살피고, ⓑ 때로 구경하고 놀아 수고로움을 조절하기 위해서이다16).

인용문에서 주자가 정리한 대의 건립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천문과 풍속을 살펴 길흉을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풍경을 감상하고 휴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목적에는 하늘의 뜻을 읽고 받드는 지도자인 동시에 늘 긴장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했던 고대 왕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높게 쌓아 올려진 건축 공간은 바깥-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권위와 우상의 경관으로 작용한다. 반면 안쪽-위에서 바깥-아래를 내려다보는 주체에게 높고 넓은 시야는 권력과 책임을 상기시키는 경관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권력의 비대칭성을 전제한 것이지만, 지도자의 태도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질 수 있었다. 맹자가 「양혜왕」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성과 임금이 서로의 소임을 다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을 보일 때 왕의 ‘대’는 정치와 의례 공간에 그치지 않고 왕과 백성의 동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주자는 영대만을 의식해 주석을 달았으나 이상의 관점은 영소나 영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맹자․등문공』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께서 별세하신 뒤에, 성인의 도가 쇠퇴하여 폭군이 대대로 나와서 백성들의 집을 파괴하여 웅덩이와 못[汙池]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편안히 쉴 곳이 없었고, 농지를 폐하여 동산[園囿]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이 의식(衣食)을 얻을 수 없었으며, 부정한 학설과 포악한 행실이 또 일어나고, 동산[園囿]과 늪지대[汙池]와 소택(沼澤)이 많아지자 금수(禽獸)가 이르렀는데, 폭군 주왕(紂王)의 대에 이르러서 천하가 또다시 크게 어지러워졌네17).

인용문에 따르면 주나라 문왕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은나라 주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폭군들이 백성의 공간을 침범하여 원유(園囿)와 못[汙池]을 만드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러한 건설공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터전과 농지, 생활 자원을 잃게 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글에서 동물이 쓰이는 방식이 「영대」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이다. 「영대」에서 영유와 영소에 있는 동물들은 아름답고 건강한 것으로, 행위의 주체가 아닌 감상의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위 글에서는 짐승이 많은 동시에 사람들에게 접근한다는 관점으로 서술되었다. 『중용(中庸)․군자지도비이은(君子之道費而隱)』에서는 『시경․대아․한록편(旱麓篇)』을 인용하며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도가 위와 아래에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18)라고 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동물은 재앙과 상서로움을 드러내는 지표이자 좋은 정치의 증거로 제시된다. 앞서 주자가 제시한 건립 목적과 맹자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지도자의 원림이 갖는 관측과 휴식의 복합 기능이 적절히 발휘되고 긍정적 효과를 내기 위한 조건은 원림의 형식이 아니라 지도자의 선정(善政)으로 정리할 수 있다.

3.3 상징적 측면: 민심의 동반과 지도자의 무일(無逸)

영대 원림을 다른 ‘대’ 또는 원림과 차별화하는 결정적 가치는 ‘영(靈)’ 자에 함축돼 있다. 신령스럽다는 뜻의 ‘영(靈)’ 자가 영대 원림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는 민심의 교화로 요약된다. 『시경』에 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모시정전(毛詩鄭箋)』에는 “「영대」는 백성들이 비로소 따르게 되었음을 노래한 것이다. 문왕이 천명을 받으니 백성들이 그가 영명한 덕을 지녀 새와 짐승, 곤충에게도 미침을 즐거워하였다.”19)라는 주석이 있다. 주자는 “영(靈)이라 말한 것은 순식간에 완성되어 마치 신령이 만든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20)라고 하였다. 빠른 시간에 공사가 이루어졌음은 공역에 대한 백성의 자발적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맹자가 「양혜왕」에서 강조하는 ‘자발성’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문왕의 원림이 민본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좋은 정치와 민심이 상응할 경우, 원림에 있어 규모나 공역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대 원림의 공사 과정과 그로 인한 교화 효과는 조선시대를 비롯한 후대 문인들이 시 「영대」를 즐겨 인용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시경강의』에서, 문왕 영대의 고유성을 묻는 정조의 질문에 대한 정약용의 답변 가운데에도 ‘영’의 상징성에 관한 부분이 있다. 정약용은 “영소와 영유에는 재이나 상서가 반드시 나타나는 신령함이 없는데도 또한 영(靈)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니 빨리 낙성된 것을 가리켜 영(靈)이라고 부른 것은 맹자의 말뿐 아니라 『시경』 본문 자체로도 확인됩니다.”21)라고 하였다. 이는 ‘영’ 자가 조성 공사와 관련된 것이고, 영소와 영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이 다른 영대들과 문왕의 영대가 갖는 본질적인 차이임을 짚은 것이다. 같은 글에서 정약용은 “위나라 군주가 자포에 영대를 세운 것은 술을 마시며 연회를 행하는 장소로 쓰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으니, 노나라 소공이 겨울에 낭유(郞囿)를 축성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22)라고 하였다. 하상주 삼대 시절부터 춘추전국․진한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상을 관측하는 대(臺)의 건축이 면면히 있었고 영대(靈臺)라는 명칭 또한 여러 사례가 존재했지만, ‘영(靈)’ 자가 조성 공사에 드러난 민심의 교화를 뜻하고 유(囿)와 소(沼)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미친 것은 문왕의 영대가 유일한 것이다.

원림이 제공하는 감상과 휴식의 기능은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가 빠지기 쉬운 사치 향락을 경계하는 심상으로 연계되곤 한다. 영대 원림의 주인인 문왕은 이러한 점에서도 후대의 귀감이 되는 전거로 경전에 기록돼 있다. 문왕의 아들이자 주나라의 창업 공신인 주공의 말이 기록된 『서경(書經)․무일(無逸)』편은 그가 후대 왕들에게 문왕이 “관찰과 안일과 유람과 사냥을 지나치게 하지 않으신 것”23)을 본받기를 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글만 보더라도 문왕 역시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유람과 사냥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치지 않았을 뿐, 완전히 금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행위들의 공간적 배경으로 영대 원림을 상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무일」편에 따르면 문왕은 스스로를 경계하며 휴식 또한 제도를 갖추어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고, 이는 민심의 교화와 더불어 후대의 왕과 문인들에게 중요한 전거로서 널리 인정받았다.

4. 영대 원림에 관한 조선시대의 인식 양상

4.1 천체관측 기능의 분화: 관천대

중국의 미학자 장파(張法)는 대(臺)라는 건축 유형이 원시 사유의 세속화에 따라 두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첫째는 신과의 소통이라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천단(天壇), 지단(地壇), 사직단(社稷壇) 등으로 발전한 것이고 둘째는 순수한 심미와 향락을 위한 장소로 발전한 것이다(Zhang, 2000: 81-82). 대(臺)의 기능과 형식이 ‘신과의 소통’과 ‘심미․향락’이라는 두 갈래로 분화되었다는 이 견해는 훗날 조선시대 문헌에서 영대가 다루어지는 양상과도 빗대어볼 여지가 있다. 실록이나 문집 등에서 영대가 언급되는 맥락은 천체관측 시설인 관천대에 관한 것과 위락 시설인 누정에 관한 것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앞에서 다루었듯 『시경』에 등장하는 영대의 기능은 관측과 휴식이 복합된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영대 원림의 상징적 의미는 왕실에서 운영했던 관천대 그리고 누정의 전거로서 각각 유효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파는 대(臺)가 담당했던 ‘신과의 소통’ 기능이 단묘 건축으로 발전되었다고 본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 영대는 단묘가 아닌 관천대의 전거로서 자주 쓰였다. 그 유력한 원인은 후한 광무제가 지었던 영대의 존재이다. 광무제의 영대는 유적이 발굴된 바 있으며 이에 관해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천체관측과 관련해 광무제의 영대가 특기되는 까닭은 전한 말 학자 왕망(王莽)이 유가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는 제도로서 제시한 삼옹(三雍)에 포함되어 천문․점성 시설로서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졌고 오랫동안 활용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후한대에 영대는 천체관측 기관으로서 41명의 관리가 배속되는 정식 조직으로 성립했다(김일권, 2010: 17-19).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천체관측 시설로서 영대는 기본적으로 후한대의 영대와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관천대로서 영대라는 전거를 끌어올 때 주 문왕의 영대가 배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이행의 문집에서 삼옹의 영대를 언급하며 『시경』의 영대 공사 장면을 끌어오는 등,24) 문왕의 영대는 광무제 영대의 기원이자 유사한 기능을 가졌던 제왕의 시설로서 서로 명백히 분리하기 어려운 전거로 받아들어졌다.

영대 원림이 제왕의 원림이었던 만큼 조선시대의 관련 문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수 확인된다. 태종 17년(1417) 예조는 “예전에 천자(天子)는 영대(靈臺)가 있어 천지를 측후(測候)하였고, 제후(諸侯)는 시대(時臺)가 있어 사시(四時)를 측후하고 요사한 기운을 관측하였으니, 마땅히 예전 제도에 따라 대(臺)를 쌓아 천문(天文)을 측후하소서”25)라며 관천대를 쌓기를 왕에게 요청하였다. 관천대는 이후 세종연간에 경회루 북쪽에 돌로 쌓아 높이 31척(약 9.4m), 길이 47척(약 14.2m), 넓이 32척(약 9.7m)의 규모로 건립되었으며26) 그 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인 간의(簡儀)와 방위를 표시하는 기구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이후에 실록 등의 관찬 사료에서 영대는 천체 담당 부서인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는 등, 천체관측과 직결되는 심상으로 빈번하게 쓰였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관천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경복궁 그림에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림 4(a) 상단에서 ‘간의대(簡儀臺)’를, 하단의 경회루 주변에서 유사한 ‘대’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림 4(b)의 좌측 하단에서 역시 유사한 형태의 시설물이 확인된다. 또한 현재 창경궁과 궁궐 밖 서운관(書雲觀)에 건립된 관천대가 남아 있어 구체적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그림 5 참조). 실물로 전하는 조선시대 관천대의 형태는 『삼보황도』에 기록된 문왕의 영대나 『세종실록』에 기록된 간의대보다 규모가 작다. 현전하는 관천대 유적의 크기는 창경궁 관천대의 경우 높이 2.2미터, 가로 2.4미터, 세로 2.3미터이고 계동의 현대사옥에 위치한 관상감(서운관) 관천대의 경우 높이 4.2미터, 가로 2.8미터, 세로 2.5미터이다. 관천대에는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창경궁 관천대에만 계단이 남아 있다. 관천대 상부에는 관측 기기인 소간의(小簡儀)를 놓도록 되어 있으며, 기기를 두고 나면 소수의 인원만 올라설 정도의 면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jkila-52-4-120-g4
그림 4. 고종 중건 이전 경회루와 간의대가 기록된 그림 자료 자료: a: 국립민속박물관(https://www.nfm.go.kr/); b: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 전시운영과와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부, 2002: 188
Download Original Figure
jkila-52-4-120-g5
그림 5. 실물로 전하는 조선시대 관천대 유적의 현황(2024.7.19. 촬영)
Download Original Figure

조선시대에 영대의 전거를 끌어왔던 관천대는 문왕의 영대와 비교했을 때 천체관측으로 기능이 제한되었다. 또한 못이나 유(囿)와의 배치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관천대를 지을 때 영대와 결부되어 있던 휴식과 감상 기능은 고려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즉 관천대는 ‘영대’ 자체의 재현이라기보다 하늘과 연결된 심상, 즉 천체관측 기능만을 발췌하여 최소한의 건축으로 구현된 시설물로 이해된다.

4.2 원림 경영에 관한 경계의 근거

관천대와 관련해 언급되는 사례를 제외한 나머지 경우에서 영대는 건설 공사나 누정, 원림의 경영과 관련해 언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영대가 갖추었던 신과의 소통 또는 천체관측 기능을 관천대가 전거로서 수용했다면 휴식과 감상에 해당하는 기능을 누정과 원림이 전거로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영대 원림은 왕의 원림이다. 따라서 왕이 직접 관여하는 원림에 대해서만 영대 원림의 전거를 끌어다 쓸 수 있었다. 조선시대 문헌 사례에도 예외가 없는데, 흥미로운 점은 영대 원림을 거론하는 주체가 왕보다는 신하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영대 원림은 왕의 여가 생활이나 공간 경영에 경종을 울리는 신하의 간언에서 건설 사업의 공역이나 의장의 사치스러움, 규모의 과함을 지적하는 근거로 인용되곤 하였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 개국 직전 공민왕의 노국공주 영전 건설 사업을 주 문왕의 영대가 아닌 폭군 걸의 토목 사업에 빗대어 풍자하는 노래를 지었다27).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성종이 창경궁에 새로 지은 환취정(環翠亭)의 기문에서 왕의 대정지사(臺亭池榭)와 원유(苑囿) 경영을 강하게 비판하고 영대의 건립 목적이 시절을 점치고 재변을 살핌으로써 백성을 위하는 것에 있었음을 강조했다28). 기문 속에서 서거정은 “정자를 짓는 것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때때로 구경하고 노닐며 수고롭고 편안한 정도를 조절하여 울적함과 답답함을 풀어내기 위해서입니다.”라며 그 쓰임의 명분을 전제하지만 “임금은 안에 구중궁궐을 장엄하게 갖추어 기거는 깊은 궁궐에서 하며 조회는 정전(正殿)에서 합니다. 누대나 정자나 연못 같은 것들은 원유(苑囿)의 경관을 사치스럽게 꾸며 거창하게 놀이나 하는 것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을 보존한들 정치에 무슨 보탬이 되겠으며 없앤들 국가에 무슨 손실이 되겠습니까?”라며 반대 의견을 병치한다. 이윽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여러 사례를 언급하며 “하나의 작은 정자로 인하여 이렇게 흥기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이를 반면교사 삼기를 권하며 “신은 정자의 훌륭한 경관에 대해서는 찬양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기문을 끝맺는다. 서거정은 기문을 통해 성종이 환취정을 지은 것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환취정기」에서 서거정의 비판 대상이 누정의 형식이라기보다 존재 자체였다고 한다면, 실록에서 유(囿)가 등장하는 경우에는 그 형식이나 운영의 구체적 양상을 두고 논의가 벌어지곤 했다. 특히 유(囿)에 대해서는 백성의 생활 공간을 침범하는 문제와 관련해 첨예한 논의가 오갔다. 1417년(태종 17) 태종은 문왕의 유(囿)를 언급하며 강무(講武), 즉 무예 강습으로 인해 백성이 원망을 일으키니 백성을 위해 강무하는 곳을 없애고 사적인 사냥을 허가할 것을 명했다29). 이는 왕 스스로가 경전의 문구를 상기하며 백성을 우선해 판단을 내린 경우라 할 수 있다. 반면 1451년(문종 1) 문종은 경연에서 『맹자』의 「양혜왕」을 읽던 중 강무장을 제외한 원유(園囿)를 줄이자는 박팽년의 간언에 앞으로 직접 살펴보겠다며 미온적으로 답하였다30). 성종 9년(1478)에는 왕이 아차산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그곳을 사냥터로 만들고자 하니 신하들이 이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문왕의 유(囿)가 언급되었다. 이 토론은 왕이 백성들의 원유(苑囿) 이용을 원래대로 금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에서 끝났다31). 왕명으로 세운 금표(禁標)가 성행하였던 연산군 대에는 왕이 문왕의 유(囿) 역시 사냥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며 백성들의 통행을 제한하고마는 적반하장의 장면이 기록되기도 하였다32).

이상으로 살폈듯 조선 전기 관찬 사료에서 문왕의 영대 원림은 『시경․대아․영대』와 『맹자․양혜왕』을 매개로 왕실 원림의 사치스러움과 왕의 안일함을 경계하는 근거로 인용되었다. 그 발언자는 신하이기도, 때로는 왕 자신이기도 하였으나 주로 신하인 경우가 많았다. 『시경』과 『맹자』 본문에서 왕과 백성은 등장하되 신하가 등장하지 않았떤 것을 상기하면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지도 계층이 주자성리학의 교양과 이상을 담지한 채 왕의 도덕성 함양과 신권의 견제를 제도화해나가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영대 원림은 신하가 왕을 경계하고 백성의 존재를 일깨우는 유력한 근거로서 정체화되었던 것이다.

4.3 선정(善政)의 장치로서 원림에 의미를 부여

영대 원림의 전거는 왕의 원림 경영을 경계하는 데만 쓰이지 않았다. 반대로 왕실 원림의 훌륭함을 찬양하고 선정(善政)의 장치로서 순기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 사례는 경복궁의 경회루다. 1423년(세종 5) 왕이 경회루에서 마련한 연회에 참석한 명나라 사신은 『시경』의 「영대』 중에서 “왕께서 영소에 계시니 아, 물고기들 가득 뛰어노네[王在靈沼, 於牣魚躍]”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그 아름다움과 덕을 칭송하였다33). 본국의 사신이 제후국의 왕을 고대의 성왕인 문왕에 빗댄 것은 다소 지나친 상찬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그만큼 경회루와 못의 규모가 인상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그림 6 참조). 조선 전기의 문인 최충성(崔忠成, 1458-1491)은 「경회루기」에서 문왕의 영유 70리와 영대를 언급하며 신하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경회루의 건축을 도왔다고 언급하였다34). 물론 이는 실제라기보다 수사적인 표현이며, 관직에 오른 적 없는 문인인 최충성이 기문에서 백성의 위상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썼다고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한 경복궁의 경회루를 상찬하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영대(靈臺)와 영소(靈沼)를 지음으로써 억만년토록 무궁할 복을 크게 열어 놓으셨습니다.”라고 표현하였다35). 김병학의 언급은 물론 공역의 성과와 제도의 성대함을 치하하려는 의도 아래 있겠지만, 고종연간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규모 공사가 벌어졌던 만큼 그 공역의 부담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jkila-52-4-120-g6
그림 6. 현재의 경회루 전경 자료: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https://royal.khs.go.kr/)
Download Original Figure

경회루는 최초에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연못의 확장과 함께 큰 규모로 중건되었고, 몇 차례의 수리와 임진왜란 때 소실을 겪은 후 1867년(고종 4) 다시 중건되었다. 현전하는 경복궁은 정면 7칸 측면 5칸에 하부 공간을 갖춘 중층 건물로 그 규모는 조선의 궁궐 내 건축물 중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조선 전기의 경복궁 역시 『한경지략(漢京之略)』과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 등으로 보았을 때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Lim, 2016). 단순한 형태이지만 그로 인해 넓고, 크고, 높다는 감상을 쉽게 이끌어내는 이 누정과 못의 계획 주체는 완공 이후 원림의 감상자가 영대 원림을 떠올릴 것이라 예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궁에 지어지는 사신의 접객 공간이라는 건립 목적, 역성 혁명을 일으키면서까지 주나라라는 고대의 이상 국가를 재현하고자 했던 당시 권력 주체의 의지와 배경 지식으로 볼 때, 명나라 사신이 경회루를 보고 영대 원림을 언급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초기 경회루 일곽에 관천대와 누정이 나란히 구현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세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관천대인 간의대(簡儀臺)는 1432년(세종 14) 경회루 북쪽에 처음 세워졌다가 1442년(세종 24)에 보다 북쪽으로 옮겨지며 그 자리에는 별궁(別宮)이 지어졌다. 1443년(세종 15)에는 경회루에서 떨어진 경복궁 서북쪽으로 이전됐는데(그림 4(a) 참조), 이때 세종이 간의대를 옮긴 까닭은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본인이 거처할 별궁을 가까이에 마련하려는 것과 더불어 중국 사신이 간의대를 보고 천자의 권한을 넘어섰음을 문제삼을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36). ‘영대’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이 일찍부터 관천대와 누정으로 나뉘어 있었고, 경복궁 내에서 관천대와 누정의 위치가 초기에는 붙어 있다가 훗날 떨어졌던 것은 그 인식의 분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회루 외에도 영대 원림의 재현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례가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충청도 직산현(稷山縣) 객사에 지어졌던 영소정(靈沼亭)을 들 수 있다. 영소정은 1665년(현종 6) 4월에서 5월 사이에 현종이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을 다니는 길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해 지은 누정이다. 현종이 묵었던 직산객사의 동헌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현종이 못에 연꽃을 심도록 명하고 얼마 뒤 큰 연잎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듬해인 1666년(현종 7) 현감 윤취은(尹就殷)이 누정을 창건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영소정이라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썼다. 충청남도 지리지에 해당하는 규장각 소장 『읍지』(1899년) 누정조에 영소정의 규모는 대헌(大軒) 4칸, 전영(前楹) 4칸, 누헌(樓軒) 4칸, 방(房) 2칸, 시녀방(侍女房) 4칸, 합하여 총 18칸으로 기록되었다. 단일 누정으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 마루와 누마루, 전퇴를 각각 4칸씩 갖추었으며 방을 포함한 부속공간도 6칸이나 갖추어 구성 또한 단순하지 않았다. 기문에서 송시열은 주 문왕의 고사를 언급하며 영소정을 지을 때도 늙은이와 젊은이 다수가 공사를 도와 10개월 내에 준공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붙였다고 썼다37). 또한 고을 원로의 말을 인용해 주나라 무왕, 주렴계, 주자 등을 언급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속되고 또 잘못된 길을 경계하기를 바랐다38). 말하자면 송시열이 고을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한 뒤 누정에 ‘영소’라는 이름을 붙이며 부여한 뜻에는 현재 왕의 선정(善政)에 대한 칭송 못지않게 앞으로의 선정을 바라는 경계의 마음이 강했던 것이다. 현종 이후 숙종은 1717년(숙종 43) 영소정에 와서 시를 짓고 현판에 새겨 걸었으며,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와서 숙종의 시에 차운하였다. 숙종 당시의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尹憲柱, 1661-1729)는 송시열의 기문과 숙종의 시를 포함해 신하들의 시 44수를 모아 『직산영소정어제시갱화첩(稷山靈沼亭御製詩賡和帖)』을 엮었으며, 현재 그중 34수가 포함된 책이 실물로 전한다(김백선 역, 2002). 영소정과 연못의 구체적 형상은 전하지 않지만 18-19세기 지도를 보면 객사 동쪽에 영소정과 연못이 간략히 그려져 있다. 연못은 19세기 말까지 남았으나 누정은 19세기 중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그림 7 참조).

jkila-52-4-120-g7
그림 7. 영소정과 연못이 그려진 지도 자료 자료: a: 국립중앙도서관(https://www.nl.go.kr/); b: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 c: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s://kyu.snu.ac.kr/)
Download Original Figure

이상의 사례는 왕실의 원림을 사신, 신하, 백성의 입장에서 영대 원림에 비유한 경우에 해당한다. 반면 영조는 동궐 후원의 누정들을 직접 영대 원림에 비유한 바 있다. 다음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훈계하기 위해 직접 쓴 교훈서인 『어제칙유원량(御製飭諭元良)』의 일부이다.

아! 대(臺)와 못[池]은 하나인데, 녹대(鹿臺)와 주지(酒池)는 은나라 주왕이 그 기업(基業)을 망친 원인이었고, 영대(靈臺)ㆍ영소(靈沼)는 주나라 문왕이 8백 리의 땅을 일으킨 원인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는 자기를 위하고 하나는 백성을 위하였던 때문이다. 맹자도 또한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하는 뜻을 말하지 아니하였던가?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한 것은 주나라 문왕이 한 일이요,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하지 않은 것은 은나라 주왕이 한 짓이었다. 어찌 그런 먼 데에서 본받을 것인가? 요임금과 순임금을 본받으려면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마땅하니, 어원(御苑)을 살펴보면 전당(殿堂)을 이름짓고 정자를 이름지은 것이 어찌 그 우연히 한 것이었겠는가? 이름을 ‘어수(魚水)’라고 붙인 것은 곧 바람과 구름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이요, 이름을 ‘낙민(樂民)’이라고 붙인 것은 곧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한다는 뜻이요, 이름을 ‘관풍(觀風)’이라고 붙인 것은 곧 백성들을 위하여 풍년을 빈다는 뜻이요, 이름을 ‘경성(慶成)’이라고 붙인 것은 곧 연사(年事)가 큰 풍년이 든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요, 이름을 ‘청심(淸心)’이라고 붙인 것은 곧 마음을 맑게 하여 일을 돌본다는 뜻이요, 이름을 ‘취규(聚奎)’라고 붙인 것은 곧 주돈이(周敦頥)ㆍ정호(程顥)ㆍ정이(程頥)를 추숭(追崇)하여 생각한다는 뜻이요, 이름을 ‘관덕(觀德)’이라고 붙인 것은 곧 활을 쏘면서 그 덕(德)을 본다는 뜻이요, 이름을 ‘열무(閱武)’라고 붙인 것은 곧 무더기로 난 뽕나무[苞桑]에 잡아맨다는 뜻이요, 이름을 ‘양심(養心)’이라고 붙인 것은 곧 존심(存心)하여 본성(本性)을 기른다는 뜻이요, 이름을 ‘낙선(樂善)’이라고 붙인 것은 곧 선(善)을 가장 즐긴다는 뜻이요, 이름을 ‘손지(遜志)’라고 붙인 것은 곧 마음을 겸손히 하여 학문에 힘쓴다는 뜻이요, 이름을 ‘함인(涵仁)’이라고 붙인 것은 곧 만물이 같이 봄을 즐긴다는 뜻이다. 어찌 오로지 그 이름만을 살펴보겠는가? 옛날에 어제(御製)하신 글 중에 「애련정기(愛蓮亭記)」ㆍ「낙민정기(樂民亭記)」에는 비록 연침(燕寢)의 한가한 때에 계실지라도 해가 기울도록 식사할 겨를이 없을 만큼 정사를 돌보는 성의(聖意)를 글 가운데에서 완연히 볼 수 있으니, 그것을 받들어 읽을 것 같으면 저절로 송구스러워진다. 아아! 왕세자가 이곳에서 놀고 이곳에서 쉬면서 그 이름을 붙인 뜻을 깊이 체험한다면 성현과 더불어 좋은 길로 같이 갈 것이요, 만약 혹시라도 소홀히 하면서 이곳에서 놀고 쉰다면 도리어 용렬(庸劣)하고 우매한 무리와 더불어 나쁜 길로 같이 갈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39)

이 글은 왕이 직접 왕세자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쓴 것이다. 게다가 서두에서 주나라 문왕의 영대 원림을 의미화하고자 폭군인 은나라 주왕의 녹대(鹿臺)와 주지(酒池)로부터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영조가 이 글에서 창덕궁 후원을 영대 원림에 비유한 까닭은 왕의 지위와 공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으로서 스스로 경계하고 민심을 돌봐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영조는 동궐 후원을 이루는 누정의 이름인 ‘어수(魚水)’, ‘낙민(樂民)’, ‘관풍(觀風)’, ‘경성(慶成)’, ‘청심(淸心)’, ‘취규(聚奎)’, ‘관덕(觀德)’, ‘열무(閱武)’, ‘양심(養心)’, ‘낙선(樂善)’, ‘손지(遜志)’, ‘함인(涵仁)’을 열거하고 각각 뜻풀이를 붙이며 원림을 경영하는 뜻이 현실 도피가 아닌 민심 동반과 양심 보존에 있음을 설명한다. 영조는 왕세자가 원림에서 휴식하되 건물에 붙인 이름의 뜻을 되새기며 문왕과 같은 성인의 길을 가기를 기원한다. 영조가 『어제칙유원량』에서 영대 원림을 전거로 소환한 방식은 『시경』과 『맹자』에 쓰였으며 후대 학자들이 계승하고 발전시킨 영대 원림의 상징적 의미가 왕실 원림의 인식과 활용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준다.

5. 결론

본 연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원림 기록으로 꼽히는 『시경』의 「대아․영대」에 등장하고 『맹자』의 「양혜왕」 장에 언급된 영대(靈臺)․영유(靈囿)․영소(靈沼), 일명 영대 원림에 주목해 그 특성을 규명하고 조선시대 원림 실천과 관련된 인식의 양상을 논하였다. 영대 원림은 유학에서 성인으로 꼽히는 주나라 문왕의 원림으로서 중국 최초의 황가원림이자 산과 물의 조합으로 구성된 역대 원림의 기본 형식으로 평가된다. 주자 성리학을 경유하여 주나라와 같은 고대의 이상국가를 재현하고자 했던 조선의 인물들에게 영대 원림은 유학에서 손꼽는 성인이자 제왕이었던 인물의 원림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시경』과 『맹자』의 경전 본문과 주자 등이 서술한 주석, 『삼보황도』 등의 후대 문헌을 통해 구체화한 영대 원림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 측면에서 높이 돋운 땅과 동물을 기르는 너른 영역, 물고기가 있는 못에 해당하는 세 공간 요소가 간결한 배치를 이룬다. 영대와 영소의 배치 관계와 관련해 영대를 영소 가운데 놓인 섬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주자의 주석이나 정약용의 저술로 볼 때 적어도 조선시대에 그러한 배치로 여겨졌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기능 측면에서 관측과 휴식이 복합되어 있다. 영대는 하늘의 별을 통해 시절을 살피는 천체관측과 더불어 왕이 풍경을 감상하고 휴식을 취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셋째, 상징 측면에서 민심의 동반과 지도자의 무일(無逸)을 뜻한다. 영대가 다른 대(臺)와 다른 결정적 요인은 건설 공사가 백성의 자발적 의지로 빠르게 수행되었다는 것과, 문왕이 늘 스스로를 경계하며 지나치게 휴식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2,500여년이 지난 조선시대까지 왕실 원림과 관련해 영대가 언급되게 한 핵심 사안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영대 원림은 주로 왕실과 관련된 사료에 등장하며 그 의미는 천체관측 기능의 관천대와 휴식․감상 기능의 원림 두 가지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영대를 기원으로 삼는 관천대는 문왕의 것과 비교할 때 천체관측만으로 기능이 제한돼 관측기기를 설치할만한 작은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못이나 유(囿)의 배치도 구현되지 않았다. 원림과 관련해 영대는 원림의 조성이나 지나친 경영을 우려하는 경계의 근거로 언급되는 한편, 원림이 왕의 선정(善政)을 기념하거나 강화하는 장치가 되도록 의미를 부여하는 비유적 장치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조경은 중국, 일본처럼 자연의 모방과 양식적 재현을 추구하기보다 누정과 못이 이루는 단순한 형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형태를 가꾸는 데 집중하기보다 관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의 왕실 인물과 문인들이 영대 원림의 전거를 끌어오며 형식보다는 상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원림 조성의 명분으로 여기기보다 경계와 수양의 근거로 여겼던 것이 그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원림의 내적 원리에 접근하고자 경전에 담긴 전거에 주목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전거와 현상 사이의 시기적 차이와 지역적 거리로 인한 한계를 확인하였다. 한편 문자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문화 특성상 문헌 속 전거가 제약이자 지향으로, 혹은 재현의 대상이자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해왔던 양상을 포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조경의 전거로서 영대 원림은 특히나 그 상징에 많은 비중이 쏠려 있는 사례라 볼 수 있으나, 형식적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례를 다룬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전거’에 관련된 문제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Notes

문왕의 영대가 있었다고 알려진 장소는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중앙에서 약 150㎞ 떨어진 감숙성(甘肅省) 평량시(平凉市) 영대현(靈臺縣)의 고영대(古靈臺) 유적과 서안시 중앙에서 서남쪽으로 약 22㎞ 떨어진 서주문왕영대(西周文王靈臺) 유적 두 곳이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고영대 유적의 정비 과정은 Cui et al.(2015)의 연구에 정리되어 있는데, 요컨대 1928년 군의 막사를 지으며 허물었다가 1934년 재건하였고, 1966년 문화혁명을 맞아 다시 허물었다가 1984년 다시 재건하였다. 고영대 유적은 현재 ‘영대현고영대‧형산삼림고원(灵台县古灵台‧荆山森林公园)’이라는 명칭의 국가4A급여유경구(国家AAAA级旅游景区)에 포함되어 있다. 서주문왕영대 유적은 평등사(平等寺)라는 사찰 내에 있으며, 이는 문왕의 영대 터에 당나라 때 평등사가 지어졌다는 지리지 기록에 의거해 후대에 마련된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신유학에는 사회정치적 개혁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 고대 중국에서 성인 군주들이 통치한 모범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아냈다. (중략) 그리하여 중국에서 11세기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이들의 정강(政綱)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개혁 시도가 되었다.”(Deuchler, 1992: 50).

본 단락에서 정리한 『시경』의 개요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간한 『시경집전』 상권의 해제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시경」 항목을 참고하였다.

“영대 계획하여 터 잡고 설계하니[經始靈臺, 經之營之]”라 국역된 부분에 대한 주자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經 度也 靈臺 文王所作 謂之靈者 言其焂然而成 如神靈之所爲也 營 表…(하략)[경(經)은 헤아림이다. 영대(靈臺)는 문왕이 만든 것이니, 영(靈)이라 말한 것은 순식간에 완성되어 마치 신령이 만든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영(營)은 <터를 잡아> 표시함이고… (하략)]”(박소동 역, 2019: 387) ‘경(經)’자는 주석의 ‘탁(度)’에 근거해 ‘측량하다’, ‘헤아리다’, ‘터잡다’ 등으로 번역하는데, 번역자는 이를 ‘계획’과 ‘터 잡기’로 썼다. ‘영(營)’자는 주석의 ‘표(表)’에 근거해 ‘표시하다’, ‘설계하다’, ‘짓다’ 등으로 번역하는데, 번역자는 이를 ‘설계하다’로 썼다.

“辟廱 天子之學 大射行禮之處也 水旋丘如璧 以節觀者 故曰辟壅” 『詩經集傳』, 「大雅․靈臺」.

“孟子 見梁惠王 王 立於沼上 顧鴻鴈麋鹿曰 賢者 亦樂此乎 / 孟子 對曰 賢者而後 樂此 不賢者 雖有此 不樂也 / 詩云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 王在靈囿 麀鹿攸伏 麀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 於牣魚躍 文王 以民力爲臺爲沼 而民 歡樂之 謂其臺曰靈臺 謂其沼曰靈沼 樂其有麋鹿魚鼈 古之人 與民偕樂 故 能樂也 / 湯誓 曰 時日 害喪 予及女 偕亡 民欲與之偕亡 雖有臺池鳥獸 豈能獨樂哉”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上」.

“齊宣王 問曰 文王之囿 方七十里 有諸 孟子 對曰 於傳 有之 / 曰 若是其大乎 曰 民 猶以爲小也 曰 寡人之囿 方四十里 民 猶以爲大 何也 曰 文王之囿 方七十里 芻蕘者 往焉 雉兎者 往焉 與民同之 民 以爲小 不亦宜乎 / 臣 始至於境 問國之大禁 然後 敢入 臣 聞郊關之內 有囿 方四十里 殺其麋鹿者 如殺人之罪 則是方四十里 爲阱於國中 民 以爲大 不亦宜乎”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下」.

“臺: 觀四方而高者” 『說文解字』 卷13, 至部; “囿: 苑有垣也” 『說文解字』 卷7, 囗部; “沼: 池水” 『說文解字』 卷12, 水部.

명당은 천지의 우주론적 상징성을 구현한 가장 이상적인 교화의 제도이고, 벽옹은 그 교화의 도덕을 유행케 하여 천하의 의칙을 선양하는 제도이며, 영대는 천문역법을 올바르게 함으로써 농사가 창성하고 의식이 구족되게 하여 교화의 펼쳐짐을 뒷받침하는 제도이다(김일권, 2007: 371-372).

“靈囿 臺之下有囿 所以域養禽獸也 麀 牝鹿也 伏 言安其所處 不驚擾也 濯濯 肥澤貌 翯翯 潔白貌 靈沼 囿之中有沼也 牣 滿也 魚滿而躍 言多而得其所也” 『詩經集傳』, 「大雅․靈臺」.

“靈囿, 靈沼 臺下有囿 囿中有沼也”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下」.

丁若鏞, 『茶山詩文集』, 券8, 對策, 十三經策.

“囿者 蕃育鳥獸之所 古者 四時之田 皆於農隙 以講武事 然 不欲馳騖於稼穡場圃之中 故 度閒曠之地 以爲囿” 『孟子集註』, 「滕文公章句 下」.

“前二章 樂文王有臺池鳥獸之樂也” 『詩經集傳』, 「大雅․靈臺」.

“天子有靈臺者, 所以觀祲象, 察氣之妖祥也. 文王受命, 而作邑于豐, 立靈臺. 春秋傳曰, 「公既視朔, 遂登觀臺以望」. 而書云物, 爲備故也.” 『毛詩鄭箋』, 「大雅․靈臺」, 箋.

“國之有臺 所以望氛祲, 察災祥 時觀游, 節勞佚也” 『詩經集傳』, 「大雅․靈臺」.

“堯舜 旣沒 聖人之道 衰 暴君 代作 壞宮室以爲汙池 民無所安息 棄田以爲園囿 使民不得衣食 邪說暴行 又作 園囿汙池 沛澤 多而禽獸 至 及紂之身 天下 又大亂” 『孟子集註』, 「滕文公章句 下」.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中庸』, 「君子之道費而隱」.

“靈臺, 民始附也. 文王受命, 而民樂其有靈德, 以及鳥獸昆蟲焉.” 『毛詩鄭箋』, 「大雅․靈臺」, 序.

“謂之靈者 言其焂然而成 如神靈之所爲也” 『詩經集傳』, 「大雅․靈臺」.

“且靈沼․靈囿, 無災祥必驗之靈, 而亦謂之靈, 則以速成而謂之靈者, 不特孟子之言, 卽詩之本文自證之.” 丁若鏞, 『詩經講義』, 「大雅․靈臺」.

“且衛候之靈臺藉圃, 不過爲飮酒行樂之所, 則與魯昭公之冬築郞囿無異.” 丁若鏞, 『詩經講義』, 「大雅․靈臺」.

“其無淫于觀于逸于遊于田” 『書經』, 「無逸」.

조선 전기의 문인 이행(李荇, 1478-1534)의 『용재집(容齋集)』에 실린 「삼옹(三雍)」이라는 글에서 해당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옛 제왕의 정치를 돌아보니, 한 시대마다 훌륭한 제도 있더라. 영대는 측후하는 곳이 되고, 명당은 정치 펴는 궁전이어라 … 영대의 제도를 보면, 덕을 쌓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인을 쌓음으로써 기반을 삼아, 하루도 못 되어 공사를 마쳤으니, 마치 하늘과 귀신이 도와준 듯, 이 대가 우뚝이 반공에 솟았으니, 섬돌 아래로 별들을 굽어보도다, 여기서 기상의 이변을 관찰하며, 여기서 정치의 득실을 징험하며, 여기서 때로 구경하고 노닐며, 여기서 노동과 휴식을 조절하지. … 이 셋을 합쳐서 삼옹이라 일컫나니, 이는 동한(東漢)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지.” 李荇, 『容齋集』, 容齋外集, 賦, 三雍.

『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1417) 9월 5일 정사 1번째기사.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1437) 4월 15일 갑술 3번째기사.

鄭道傳, 『三峯集』 券1, 遠遊歌.

徐居正, 『四佳集』 券3, 記類, 環翠亭記. 본 단락에서 인용한 번역문은 한국고전종합DB에서 전제하였다.

『태종실록』 권33, 태종 17년(1417) 3월 22일 무신 2번째기사.

『문종실록』 권10, 문종 1년(1451) 11월 26일 경신 3번째기사.

『성종실록』 권97, 성종 9년(1478) 10월 23일 신해 2번째기사.

『연산군일기』 권55, 연산 10년(1504) 8월 19일 병자 3번째기사.

『세종실록』 권20, 세종 5년(1423) 4월 19일 기사 2번째기사.

“茅茨可以興化。卑宮足以宣政。何必勞民以營樓觀哉。群臣百姓。咨嗟而言曰。周文興化。民感其德。七十之里。猶以爲小。靈臺之築。不以爲勞。況我聖上。德配文王。顧余小民。豈以一樓爲勞哉。” 崔忠成, 『山堂集』 券3, 別集, 慶會樓記.

『고종실록』 권5, 고종 5년(1868) 7월 25일 경자 1번째기사.

이상의 서술에서 간의대의 이동에 관한 논문으로 정연식(2010)의 연구를 참고하였다.

“名以靈沼可乎。蓋聞周之百姓。樂文王之德。而加美名於其沼。故文王亦得以享其樂。而詩人歌之。今者不名則已。名之則宜無以易此者也。且聞之。斯亭之作也。老少坌集。咸願出力。故不旬月而成焉。此實文王子來之民。則尤不可不以此名之也。雖然文王之所以使民歡樂者。” 宋時烈, 『宋子大全』 券141, 記, 稷山縣靈沼亭記.

“父老旣頌聖德。又相與祝曰願聖主臨沼。而戒武王毋溺人之訓。則唐宗載舟覆舟之言。猶可取也。愛蓮而思周子君子者之說。則朱子並刻圖書之意。可默契於聖心也。又咸曰願聖主愛民。而毋使如在沼之魚。遠色而痛絶於金蓮之戲。又言曰爲是者有本。夫沼有源頭之活水。故能淸瀅鑑空。而天雲光影。相與徘徊。願聖主常使此心虛明靜一。不亂於紛華波動之際。則萬事自理。萬民自安。而能使此沼長媲於周民之所樂也。其爲術豈外於文王敬止之一言乎。嗚呼。此雖至愚下賤。皆有願忠之心。而寓戒於頌如此。如有任采謠之責者。取以上聞則萬一有補於聖德。故賤臣者悉記其言。” 宋時烈, 『宋子大全』 券141, 記, 稷山縣靈沼亭記.

이 글은 장서각 해제에서 1744년(영조 20)을 전후해 쓰인 글로 추정되었으며, 1903년(광무 7) 고종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수록된 동일 글에는 1741년(영조 17)에 쓰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논문 본문에서 인용한 번역문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역주하고 발행한 『국역 증보문헌비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 1978)에서 발췌하였다.

References

1.

김백선 역(2002) 국역 직산영소정어제시갱화첩. 천안: 성환문화원.

2.

김일권(2007) 동양 천문사상, 인간의 역사. 서울: 예문서원.

3.

김일권(2010) 첨성대의 영대적 독법과 신라 왕경의 삼옹제도 관점. 신라사학보 18: 5-31.

4.

박소동 역(2019) 시경집전.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5.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 전시운영과,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부(2002) 서울, 하늘․땅․사람. 서울: 서울역사박물관․고려대학교 박물관.

6.

서정화(2016) 주대의 명당과 벽옹에 관한 소고: 선진시기 종묘의 본원적 기능에 대한 궁구 과정에서. 동양철학연구 87. 2016: 161-190.

7.

성백효 역(2005) 맹자집주.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8.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1978) (국역)증보문헌비고: 여지고 1-4.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9.

송진 역(2021) 삼보황도. 파주: 아카넷.

10.

실시학사경학연구회 역(2008) (역주) 시경강의 4. 서울: 사암.

11.

윤국병(1978) 조경사. 서울: 일조각.

12.

이성초, 최영준(2023) 论《诗经》园林诗发微. 중국학논총 79: 151-167.

13.

이영식 역(2016) 모시정전 역해. 서울: 퍼플.

14.

정동오(1996) 동양조경문화사. 광주: 전남대학교 출판부.

15.

정연식(2010) 조선시대 관천대와 일영대의 연혁: 창경궁 일영대와 관련하여. 한국문화 51: 265-298.

16.

차선근(2023) 물질종교 관점에서 본 영대: 물질 영대와 비물질 영대 가로지르기. 대순사상논총 44: 53-96.

17.

한국전통조경학회(2016) 최신 동양조경문화사. 고양: 대가.

18.

Cui, L., Y. Zhang, T. Zhang, and Y. Jiang(2015) The protection methods and ideas of the city heritage district in Lingtai reconstruction during the Republic of China. Architecture & Culture 2015(6): 36-41.

19.

Deuchler, M.(1992)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이훈상(역), 한국의 유교화 과정: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서울: 너머북스, 2013.

20.

Li, Y. H.(1984) Cathay’s Idea: Design Theory of Chinese Classical Architecture(華夏意匠: 中國古典建築設計原理分析). 이상해, 한동수, 이주행, 조인숙(역), 중국 고전건축의 원리. 서울: 시공사, 2000.

21.

Lim, H. S.(2016) Remains of Gyeongbokgung palace: from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until reconstruction by King Gojong in 1865. Proceedings of 11th International Symposium on Architectural Interchanges in Asia. Architectural Institute of Japan, Architectural Society of China,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22.

Liu, T.(2015) The Confucian Gene of Chinese Classical Gardens(中国古典园林的儒学基因). Tianjin: Tianjin University Press.

23.

Luoyang Working Group of the Archaeology Institute in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1978) Lingtai ruins in the southern suburbs of Luoyang City in the Han and Wei dynasties(汉魏洛阳城南郊的灵台遗址). Archaeology 1. 54-57: 73-75.

24.

Wang, Y.(1990) Garden and Chinese Culture(園林與中國文化). 김대원(역), 원림과 중국문화. 서울: 학고방, 2014.

25.

Zhang, F.(2000) The History of Chinese Aesthetics(中國美學史). 백승도(역), 장파 교수의 중국미학사: 살펴보다 맛보다 깨닫다. 파주: 푸른숲, 2012.

26.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https://royal.khs.go.kr/

27.

국립민속박물관. https://www.nfm.go.kr/

28.

국립중앙도서관. https://www.nl.go.kr/

29.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3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3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s://kyu.snu.ac.kr/)

32.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33.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https://library.harvard.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