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흔히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라 하면 풍경식 정원이나 공원, 주택 정원과 같은 서구의 목가적 풍경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한국에서도 잔디밭은 현대 조경설계의 중요한 요소로 다양한 공간에 조성되고 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지점, 한국에서 목가적 풍경으로서의 잔디밭에 대한 인식과 선호가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한반도에는 ‘한국잔디(Korean lawn grass 또는 Zoysiagrass)’로 분류되는 잔디가 오래전부터 자생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잔디는 무덤에만 심는 풀로 여겨졌으며, 이로 인해 민가에 잔디를 심는 것은 일종의 금기로 인식되었다고 한다(전우용, 2015). 훼손된 봉분을 보수하거나 잔디를 새로 입히는 작업을 ‘사초(莎草)’라 명명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잔디는 묘지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식물이었으며 그 식재 또한 주로 무덤의 사초에 국한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잔디의 활용 범위가 묘지를 넘어 조경 공간과 각종 기관 시설의 잔디밭, 나아가 골프장, 축구장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장된 양상을 고려할 때, 잔디에 대한 인식과 활용 방식은 조선시대와 현재 사이에 뚜렷한 변화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문헌을 중심으로 잔디의 용어 표기와 이용 방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잔디를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였는지 구체적인 범위와 사용처를 밝힘으로써, 향후 한국의 잔디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국내에서는 잔디밭의 유지관리(김영선 등, 2019; 이상국, 2025), 잔디 생육환경(김경남, 2013; 장석원 등, 2020), 그리고 한국잔디 육종을 포함한 품종 개발(최준수와 양근모, 2013; 배은지 등, 2023; 배은지와 정재경, 2024) 등 잔디의 원예적 측면을 다루는 연구가 주로 진행되었다. 그 외에도 잔디밭 특성에 따른 시각적 선호도 분석(조동범과 염도의, 1985)과 잔디밭의 답압 수용 능력 분석(엄붕훈, 1992) 등 잔디밭의 활용과 관련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는 대부분 현대 시기의 잔디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역사적 문헌을 토대로 한 연구는 조선왕릉에서 사초의 쓰임을 고증한 연구(이창환과 김두규, 2017; 단국대학교 산학협력단, 2018) 정도로, 역사 기록에 기반한 잔디 연구는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실정이다.
중국, 일본, 미국에서는 역사 기록에 기반한 잔디 연구가 일부 진행되었다. 중국의 천즈이는 잔디의 기원과 개념을 추적하고 진화 양상을 밝혔다(Chen, 2001; 2002). 그는 중국에는 예로부터 천연 잔디와 재배 잔디가 있었음을 구분했다. 시대 고찰을 통해 초원의 한 유형으로서 잔디밭은 토양, 기후 등의 자연환경과 말과 양 등의 초식동물, 그리고 인간 노동의 조화로운 진화로 설명할 수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잔디밭은 아편전쟁 이후에 등장하여 19세기 중반부터 중국 전역에 퍼졌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경우, 교토대학 농학부 나카무라 마코토는 서구 유럽에서 잔디가 ‘매도우(meadow)’에서 ‘론(lawn)’으로 전개되는 발달사를 소개하고 일본에서 잔디를 조경 소재로 수용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Nakamura, 1979). 이후 2000년대에는 잔디를 문화사적으로 개괄한 기타무라 후미오의 연구(Kitamura, 2009a; 2009b)와 근대 도쿄 일본식 정원의 한 면모로서 잔디를 살핀 다카시 아와노의 연구(Awano, 2006)가 주목할 만하다. 특히 다카시 아와노는 화풍(和風)과 양풍(洋風) 정원이 충돌하는 지점에 잔디를 넣어 두 공간을 완만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잘 포착하였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북미를 중심으로 잔디밭 ‘론(lawn)’에 대한 문화사적, 역사적 고찰이 본격화되었다. 북미의 원예 산업 발달, 교외 개발, 스포츠 산업 성장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론 문화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고 미적 가치를 검토한 역사 연구(Jenkins, 1994; Teyssot, 1999; Steinberg, 2006)가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론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개념의 역사적 변화를 추적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론은 16세기에는 “숲속의 빈 공간[open space or glade in the woods],” 17세기에는 “풀로 덮인 경작되지 않은 땅[untilled ground covered with grass]”을 의미했다(Jenkins, 1994). 식민지 시대와 건국 초기의 론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깔끔하게 손질된 주택 앞뜰이 아니라, “낫질이나 방목으로 짧게 유지된, 씨를 뿌리거나 자연적으로 자란 풀밭 지역[a sown or natural area of grass, kept short by scything or grazing]”을 뜻했다(O’Malley, 1999: 67). 이후 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론은 “촘촘히 깎아서 관리된, 풀로 덮인 곳[land covered with grass kept closely mown]”이라는 의미로 정착되었다(Jenkins, 1994).
중국, 일본, 미국에서의 문화사적 측면의 잔디 연구는 조경 용어가 시대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그 의미와 용법이 변화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며, 특정 문화권의 조경 용어 연구에서 개념사적 접근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한국에서는 잔디를 주로 현대적 식물 소재로 다루는 연구가 중심을 이루어 왔으며, 역사적 사료에 기반한 잔디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조선 왕조의 기록뿐 아니라 민간 문헌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검토하기 위하여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https://db.itkc.or.kr/)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에서 조선시대(1392–1910년) 자료를 검색하여 진행하였다. 2024년 11월부터 2025년 2월까지, 한글 ‘잔디’와 ‘잔듸’로 검색하여 조선시대 문헌을 추출한 뒤, 해당 문헌의 원문을 분석하고 조선시대 잔디에 대한 인식과 공간에의 활용 특성을 고찰했다. 추출한 문헌자료는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에서 191건,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71건, 총 262건이었으며, 이 중에 한(漢)문헌은 250건, 영문헌은 12건이다.
‘잔디’의 용어 표기는 검색된 전체 문헌을 대상으로 분석하였으나, 이용 방식의 분석은 국내의 사용 양상을 살피기 위한 것이므로 영문헌 자료와 외국 경관을 묘사한 글은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2. ‘잔디’ 용어의 표기와 용례
원문과 국문 번역본을 함께 살펴본 결과, 조선시대에 잔디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사(莎)’, ‘초(草)’, ‘모(茅)’ 순으로 확인되었다. ‘사(莎)’가 159건의 문헌에 등장해 가장 많이 언급되었고, ‘사(莎)’와 ‘초(草)’가 결합된 ‘사초(莎草)’ 또는 ‘사초(莎艸)’는 52건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풀을 지칭하는 ‘초(草)’는 21건, 식물 ‘띠’를 뜻하는 ‘모(茅)’는 11건에서 잔디로 번역되었다. 이외에도 ‘띠’의 뜻을 가진 ‘모(茆)’, 사초과 식물인 ‘사초’를 가리키는 ‘번(薠)’, 초본식물 ‘명아주’를 뜻하는 ‘래(萊)’, 푸르고 거친 땅을 의미하는 ‘벽무(碧蕪)’, 전통 의학에서 약재로 사용한 ‘모싯대’의 ‘제니(薺苨)’, 들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을 뜻하는 ‘야초(野草)’, ‘지치’로 불리는 풀을 가리키는 ‘지(芝)’, 땔감을 의미하는 ‘초(樵)’ 등이 모두 잔디로 번역되었다.
잔디로 번역된 문헌자료의 맥락과 내용을 검토한 결과, 잔디와 무관한 전혀 다른 식물을 가리킴에도 불구하고 ‘잔디’로 통칭하여 번역된 경우가 있었으며, 잔디를 지칭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사(莎)‘, ‘초(草)’, ‘모(茅)’ 등의 관련 용어를 현재의 잔디와 동일한 것으로 무조건 판단해서는 안 되며, 사용된 장소와 맥락, 상황을 고려하여 살펴야 함을 확인했다.
문헌에 등장하는 잔디 관련 한자어의 쓰임새를 분석하고 그 용례를 표 1과 같이 정리하였다. 한자어 ‘사(莎)’는 주로 무덤 봉분에 잔디를 심는 것과 자연 속 잔디를 묘사했으며 각각 44건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중국과 일본 사행 중 현지 경관을 묘사한 경우가 15건, 무덤 외의 장소에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잔디를 소재로 이용한 사례 13건, 단(壇)을 만들고 그 가운데 잔디를 깐 사례 12건, 집 안 마당[庭]의 잔디를 묘사한 글 8건, 잔디 관리와 관련한 내용 7건, 잔디가 펼쳐진 활쏘기 장소에 대한 글 6건, 잔디 길에 대한 언급 4건, 옛 건물터에 자란 잔디를 묘사한 글 4건, 잔디를 심은 사계(莎階)에 대한 기록 2건 등이 확인되었다.
자료: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초(莎草)’ 또는 ‘사초(莎艸)’는 무덤에 관련된 용례가 34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중국과 일본의 경관을 묘사할 때도 6회 사용되었다. 그밖에 자연을 묘사한 기록 5건, 단에 잔디를 조성한 기록 3건, 잔디를 소재로 활용한 기록 3건 등이 있었다. ‘사초(莎草)’는 ‘사(莎)‘와 동일한 장소와 맥락에서 사용된 경우가 많아, 두 용어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함께 이해해도 무방한 것으로 판단된다.
‘초(草)’는 잔디를 지칭하지만, 일반적인 풀을 의미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연 속 풀밭을 묘사한 글에서 10건으로 가장 많이 확인되었으며, 무덤과 관련한 기록에서도 7건이 나타났다. 또, 집 안 마당, 잔디길 등을 언급할 때도 사용되었다. ‘초지’를 묘사할 때도 일반적으로 ‘초(草)’를 사용했다.
‘모(茅)’는 본래 띠를 의미하는 한자어지만, 잔디로 번역되기도 해서 정확한 지칭 대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37년에 간행된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에서는 띠는 ‘띄(삘기), 백모근(Imperata cylindrica Beauv. var. Koenigii Honda)’으로, 잔디는 ‘잔듸, 잔디(Zoysia japonica Steudel)’로 설명한다. 근대기 식물도감뿐만 아니라 1481년 간행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등과 같은 이전의 문헌에서도 ‘띠’와 ‘잔디’는 구분한다(조민제, 2021: 185-186, 225. 재인용).
용어의 쓰임으로 볼 때, 띠는 땅속줄기가 눈에 보이지 않고 땅속에 퍼져 있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잔디는 크기가 작은 띠에서 유래한 것으로 파악된다. 1870년 저술된 ⌜명물기략(名物紀略)⌟에서도 ‘사초는 작은 띠(沙草小茅也)’라고 하여 이와 유사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조민제, 2021: 225. 재인용). 오늘날의 식물도감에서도 띠는 벼과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30–80cm에 이르는 식물로 보고 있으며, 잔디는 같은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이나 10–20cm로 더 짧은 식물로 구분한다(https://bris.go.kr/#main).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띠와 잔디는 서로 다른 식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문 등의 문학작품에서는 두 식물을 구분하지 않고 쓰기도 하므로 글의 맥락으로 용례를 파악해야 한다.
“금잔디[黃茅]”, “한 줌의 잔디[茅]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 등의 경우에 ‘모(茅)’는 잔디를 지칭한다. 그러나 잔디로 번역된 12건의 ‘모(茅)’ 용례에서 6건은 오두막 지붕을 덮는 소재나 제사용품을 포장하는 소재를 지칭하는 등, 띠의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쓰고 있었다. ‘모야(茅野)’, ‘발모(拔茅)’ 등과 같이 잔디인지 띠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존재했다. 특히 ‘모(茅)’는 잔디나 띠의 뿌리가 서로 연결된 속성을 비유적으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주역(周易)⌟의 “서로 엉켜 있는 잔디 또는 띠의 뿌리를 뽑듯 어진 동류들과 함께 나아가니 길하다[拔茅茹以其彙征吉]”1)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잔디인지 띠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두 식물 모두 땅속줄기로 연결되는 속성을 빗대어 사람 간의 끈끈한 관계를 상징하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잔디로 보기 어려운 사례와 분류가 모호한 글을 제외하고 ‘잔디’로 판단되는 문헌을 검토한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용례는 무덤 봉분에 식재된 잔디로, 총 86건의 문헌에서 확인되었다. 그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것은 자연 속 잔디에 관한 내용으로, 61건의 문헌이 해당한다. 잔디를 ‘사초(莎草)’로 불렀던 점을 고려하면, 잔디는 무덤 잔디를 지칭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자연 속 잔디밭을 묘사한 사례도 다수 확인할 수 있어, 이러한 용례 역시 유의미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 외에도 잔디의 용례를 보다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는 사례들이 확인되어 흥미롭다. 하나는 잔디를 소재로 활용한 사례로, 국가의 중요한 토목사업에 사용된 경우이다. 또한 잔디를 구획된 영역 내에 식재하여 단(壇)이나 사계(莎階)를 조성한 기록도 발견되며, 가옥 내 뜰에 잔디를 식재한 사례도 찾을 수 있다. 각각의 구체적인 내용은 표 1과 같다.
3. ‘잔디’의 이용 방식
조선시대 문헌에서 잔디는 왕릉과 사대부 무덤의 봉분과 관련한 것이 가장 많다. 예컨대,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전집(星湖全集)⌟과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잔디의 기원과 종류, 특성, 사용 등을 정리해 놓았다. 그는, 무덤 봉분에 잔디[莎]를 심는 것이 언제부터 유래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뿌리 있는 잔디는 흙을 오래도록 지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므로 묘에 심기에 가장 좋다고 여겼다. 이때의 잔디는 줄기가 짧은 금잔디[金莎]라고 불리는 식물인데, 가을, 겨울에 잎이 말랐다가 봄이 되면 다시 푸르러지는 특성이 있어 맑은대쑥[莎薛]과는 다른 것이라고 구별하였다. 무덤을 보수할 때 잡풀과 이끼를 없애고 잔디를 더 빽빽하게 파종하고, 성묘할 때마다 잔디를 준비해 즉시 보수하는 등, 봉분에서 잔디를 쓰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특히 조선의 금잔디는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면 반드시 찾는 종자라고도 소개했다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잔디 활용법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있는데, 대부분 왕릉을 견고하게 축조하는데 잔디를 썼다는 기록이다. 특히 봉분을 사대석[병풍석]으로 감싸지 않고 난간석만 쓰도록 한 세조의 광릉(光陵) 이후부터는 왕릉에 잔디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흙을 지지하던 사대석이 사라지니 봉분이 무너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고 봉분을 좀 더 견고하게 수축할 공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졌으며, 사대석을 대신할 방법으로 잔디가 봉분에 잘 안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결론지었다.
능에 잔디를 심고 관리하는 것은 편전에서 논의되던 사안으로, 잔디가 잘 관리되고 있는지 점검했으며 보식하는 경우 식재 시기도 길일을 선택하여 신중하게 정했다. 잔디가 내려앉지 않게 유지하고, 잘 다듬으며, 말라 죽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왕릉 관리의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왕릉의 잔디 식재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특정 지역의 잔디가 선호되었다는 것인데, 바로 도성 돈의문 밖 모화관 앞 잔디이다. 모화관 앞 잔디는 조선시대에 품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졌다(그림 1 참조). 능 위[陵上]에는 모화관 잔디를, 정자각 전면과 후면은 능 주변 잔디를 떠다가 썼다고 했으니3), 품질 좋은 모화관 앞 잔디는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했을 것이 짐작된다. 모화관 앞 잔디를 활용한 사례는 실록 등의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정조 13년(1789년) 현륭원을 옮길 때 공사를 담당했던 천원도감(遷園都監)에서는 “모화관의 잔디를 떠내는 지역이 매우 좁아서 금번 원역에 필요한 수량을 확보하기 어렵다[慕華館浮莎處, 地方甚狹, 今當園役, 決難如數浮出]”4)고 고민하면서, 수원부 잔디를 살펴보니 모화관 잔디와 비교했을 때 우열이 없어 대체해도 괜찮겠다고 하였다.
조선후기 학자 이덕무(1741~1793)는 군사훈련의 중심지였던 훈련원과 외교의 상징인 모화관 일대의 경관을 묘사하면서 태평성대임을 빗대었는데, 여기서 잔디밭을 읊은 구절이 발견된다. “푸른 문[흥인지문] 안 연무장은 드넓고[演武場闊靑門內], 하얀 솔포에 화살이 별처럼 달려들어 정중앙을 꿰뚫는구나[粉帿星奔破的矢], 모화관의 금잔디는 깎아 놓은 듯 매끄럽고[金莎如剪慕華館], 영은문 앞길[의주로]도 숫돌처럼 잘 닦여 매끄럽네[延詔門路平於砥].”5) 이 글에서도 모화관 주변에 금잔디가 잘 관리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잔디는 필요한 곳에 씨앗을 뿌려 키우기보다는 일정 기간 자란 잔디를 뗏장으로 옮겨 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잔디를 떼어 옮기는 과정에는 상당한 공력이 필요했다. 산릉을 조성하거나 수리할 때 ‘사초군(莎草軍)’을 징발하여 별도로 운영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종 1년(1864년) 철종의 예릉(睿陵)을 조성할 때, “전례에 따르면 모화관 잔디를 뜰 사초군 1,500명과 능소 근처 잔디를 뜰 사초군 2,000명을 산릉도감(山陵都監)에 보내야 한다”6)고 할 정도였으니, 왕릉에 잔디를 떼어 와 입히는 것은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공사였다. 사초군은 사초장(莎草匠) 또는 사토장(莎土匠)으로 불리는 장인이 관리했으며 19세기 초가 되면 산릉도감의 삼물소 사토장과 보토소 사초장으로(장경희, 2013) 세분될 정도로 점차 전문화되었다.
뿌리가 옆으로 퍼져 흙과 단단히 결합하는 잔디의 특성을 활용해 봉분에 피복하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일이며,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특히 왕릉에서는 봉분의 형태와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잔디와 흙을 다루는 전문 장인을 따로 육성할 정도로 기술 관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신성한 공간에 사용하는 식물 소재인 만큼 양질의 잔디를 확보하는 일 또한 중요했으며, 많은 공력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자연 속 잔디밭을 묘사한 내용은 61개 문헌에서 확인된다. 문헌 속 잔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색상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푸른 잔디[綠莎, 靑莎, 碧莎]’, ‘금잔디[金莎]’, ‘누런 잔디[黃莎]’, ‘연녹색 잔디[軟綠莎]’ 등이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푸른 잔디’가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푸른 잔디 덮인 언덕[靑莎原]”7), “비 온 뒤 자란 푸른 잔디[靑莎雨後新]”8) 등의 문구는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밖에 “저자도 옛집 옥란사(玉蘭社)에는 푸른 잔디가 평화롭게 펼쳐져 있네[雲田故社 綠莎平衍]”9), “푸른 잔디에 새로 놓인 주춧돌 위로 아홉 층계 높다란 집이 솟아있구나[靑莎新礎九梯宮]”10) 등에서처럼 넓고 푸른 잔디는 경관을 긍정적으로 묘사할 때 자주 쓰였다. “버들개지 눈처럼 떨어져 푸른 잔디를 덮었구나[楊花雪落覆靑莎]”11), “동백꽃이 푸른 잔디 위로 떨어지니, 그 모습이 마치 푸른 비단에 붉은 주름이 잡힌 듯하구나[山茶花落綠莎縐]”12) 등의 글귀에서는 잔디를 다른 식물이나 지형물과 색상 대비를 이루거나 전원풍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표현하였다.
‘금잔디’에 대해 묘사한 “언덕 너머의 마을에 밭을 갈던 이가 돌미륵 한 좌를 발견하여 이내 산기슭의 금잔디에 받들어 모시고 그 위에 덤불을 덮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했다[臯之後洞耕田人 得石彌勒一坐 仍奉山足金莎 上覆以楚茨 使避風雨]”13)는 글에서는, 잔디밭을 특별히 귀한 장소로 여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채제공(1720–1799)은 ‘명덕동(明德洞)에 대한 기문’에서 “소나무 그늘이 미치지 못한 곳에는 금잔디가 땅을 따라 곱고 부드럽게 자라났으니 앉거나 누워 쉬기에 좋다[松陰之所不及 金莎隨地嫰軟 可坐可卧]”14)고 하였으며, 이덕무는 연경에 가는 길을 기문으로 남기면서 “여재(유득공)와 함께 가던 길에, 홍제원에 먼저 도착하여 동쪽 언덕 금잔디 위에 앉았노라니[與在先至弘濟院 坐東阜金莎之上]”15)라고 하였다. 이들 자료를 통해 옛사람들은 금잔디가 깔린 자리를 특별한 장소나 공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노란 잔디 언덕 위에 앉아서[黃莎岸頭坐]”16), “허연 갈대 누런 잔디 들판 길은 희미한데[白葦黃茅野逕微]”17), “연록색 잔디 돋아나고 노랑나비 날으니[軟綠莎抽黃蝶飛]”18) 등과 같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표현도 등장한다.
‘깨끗한 잔디[晴莎]’라는 표현도 나타나, “깨끗한 잔디에 오래 앉아 있자니 온돌보다 낫구나[久坐晴莎勝堗溫]”19), “거문고 연주를 멈추고 깨끗한 잔디 위에 앉으니[停琴坐愛晴莎㬉]”20), “깨끗한 잔디에 손님을 앉혀 대자리를 대신하네[晴莎坐客當桃笙]”21) 등의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깨끗한 잔디를 밟고 갔네[踏晴莎]”22), “작은 수레 타고 굽이굽이 깨끗한 잔디를 지르밟네[小輿逶迤踏晴莎]”23), 꿈속에서 고향을 그리며 “흰 돌과 깨끗한 잔디는 예전의 모습이요[白石晴莎前面目]”24) 등 총 아홉 개의 글에서 잔디의 섬세하고 정갈한 특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여러 글을 검토한바, 잔디밭은 단순히 감상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잔디밭 위에 자리 없이 앉거나, 지인과 함께 앉아 한참 시간을 보내며, 누워 한가히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회화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그림 2, 3 참조). 잔디가 깔린 비탈 위에 상을 놓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잔디밭에 차일(遮日)을 치고 술잔을 돌리며 즐기는 장면도 문헌에서 확인되었다. 경치 좋은 곳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여가 장소로 활용한 것에서는 좋은 잔디밭이 있는 장소를 찾아가 머물다 오는 선조들의 행락문화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또한, 서구에서는 잔디밭을 카펫(carpet) 또는 벨벳(velvet)으로 비유하며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의 미학을 강조하는데, 조선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잔디를 비단[錦], 융단[茵], 양탄자[氈] 등에 견주어 부드럽다고 표현한 기록을 통해 잔디밭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진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위 위는 지세가 평탄하고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어 수백 명은 족히 앉을 만하다[巖之上 地勢平坦 莎草如茵 可坐數百人]”25), “양탄자 같은 고운 잔디[細草如氈]”26), “푸른 잔디 씻은 비단 같네[靑莎濯錦絲]”27), “보천탄 강가에 비단처럼 펼쳐진 잔디밭[寶泉錦莎]”28) 등의 묘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헌에서 발견되는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누군가가 의도하여 조성한 경관이 아니라, 자연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초지를 가리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잔디는 무덤 봉분 외에 다양한 공역 사업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쓰였다. 예컨대 사제(莎堤)라고 하는 잔디 제방은 흙을 쌓고 그 위에 잔디를 덮는 것으로, 시내나 해안가에서 침수를 막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수로 붕괴된 도언(島堰)을 복구하며 길이가 도합 3만여 장(丈)이 되는 제방에 흙을 덮고 잔디를 입히는 일을 했다고 해29), 잔디가 제방을 안정화하는 데 주요하게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잔디 제방은 기능적인 면에서도 훌륭했지만, 미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했다. 김장생(1548–1631)의 ⌜사계전서(沙溪全書)⌟에서 성북동 돈암 숲속의 옛 정자를 묘사한 글을 보면, “복사꽃 핀 시내와 버들가지 늘어진 물가를 따라 잔디가 덮인 제방은 수백 보나 되며, 배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밤나무, 닥나무, 옻나무, 뽕나무, 산뽕나무가 좌우로 둘러싸여 있다[有桃蹊柳汀 而莎草 被堤者可數百步 梨棗柹栗楮漆桑柘 環繞左右]”30)고 하였다. 그 외에도 “성한 버들 깨끗한 잔디 제방 곧게 뻗었는데[暗柳晴莎一字堤]”31), “앞 둑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 갠 날 버선발로 걸어도 괜찮겠네[有前堤莎被土 不妨鞋襪步新晴]”32)와 같은 구절 등에서도 잔디 제방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잔디는 다리에 고정하거나 덮는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이산해(1538–1609) ‘죽붕기(竹棚記)’의 “대나무 시렁 왼편에 긴 다리를 만드는데 나무로 지탱하고 그 위에 잔디를 깔았으니 오르내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다[作長橋於棚之左 撑木而藉莎草 便上下也]”33)의 기록을 참고하면, 다리에 잔디를 까는 것이 공사의 한 방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의 행행(行幸)을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 기록에서는 잔디를 채취하고 운반하여 다리에 활용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척의 배를 판자로 고정하여 서로 연결한 다음, 그 위에 모래와 흙을 덮고 마지막에 잔디를 깔아 배다리를 완성하였다. 문헌에는, 잔디는 자라나는 데 5년이 걸리는데, 한 해에 쓸 잔디를 배다리에 모두 사용해버리면, 이후 공역에서는 먼 곳에서 잔디를 떼어 와야 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시의 공역 사업에 잔디 사용처가 적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배다리에 잔디를 까는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를 연결한 후에 잔디를 이동해 덮을 것이 아니라, 각 배에 미리 흙과 잔디를 실어둔 뒤 연결 후 각자의 배를 잔디로 덮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해서 효율적인 잔디 공법을 제안하기도 했다34). 완성된 배다리를 두고는 “대나무와 나무판자를 종횡으로 깔고[上鋪竹木密橫縱] 흙과 잔디를 입히니 평지처럼 평탄하다[莎土眞成平地坦]”35)고 묘사하였다.
그 밖에도 성곽을 쌓을 때 성곽 내부를 잔디와 흙으로 채워 단단히 하거나, 자연 지형을 보완해 흙을 덮고 잔디를 입혀 책성(柵城)의 일종인 산책(山柵)을 조성하는36) 등 조선시대에 잔디는 다양한 공역 사업에 사용된 중요한 식물 소재였다. 국가에서는 잔디를 훼손하거나 채취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대전통편(大典通編)⌟과 ⌜전율통보(典律通補)⌟에는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서 나무의 뿌리나 잔디 뿌리를 채취하면 처벌한다는 규정이 있으며, 궁성과 도성 안팎에서 소나 말을 고의로 풀어놓아 입혀놓은 잔디를 밟아 훼손한 자를 매달 순행하면서 검거하도록 했다37). 여러 이용에 대비해 잔디가 잘 자라고 있는 장소를 특별히 보호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왕릉 이외에도 잔디를 깔아야 했던 주요 장소는 제사처의 제단이었다. 제단 외에도 왕실 행사, 기념 목적 등 공적으로 단(壇)을 조성한 사례가 많으며, 단에 잔디를 입혔다는 기록 또한 다수 확인된다. 왕후가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친잠례를 행했던 친잠단(親蠶壇)이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해신제를 지내던 영가대(永嘉臺) 등에는 사단(莎壇)이라고 하는 잔디단을 설치했다. 성균관 앞 하련대(下輦臺)38)나 특정 장소를 기념하는 비각을 조성할 때도 단을 축조하고 흙을 돋운 뒤 잔디를 덮었다.
친잠례는 주로 창덕궁 후원에서 행해졌는데, 영조 43년(1767년)에는 경복궁에 친잠단을 조성하여 제례를 거행한 기록이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전한다(그림 4 참조). 당시에 친잠은 자주 열리는 의례가 아니어서, 제단 형태, 조성 방식, 행사 진행 방식 등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여러 논의 끝에 방안을 정했는데, 축조 과정에서 잔디 깔기의 공정을 살펴볼 수 있다. 친잠단 조성을 담당하는 경복궁 수리소는 의례 한 달 전쯤 단을 축조하고 잔디[莎]를 뜨며 흙을 가져와야 하는 등 일이 적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인력 지원과 빠른 착공을 요청하였다. 흙과 잔디를 모화관부터 가져와야 하므로, 한 달 동안 매일 150명의 군정 인력이 필요했고, 단을 잔디로 덮을지, 방전(方甎)으로 덮을지 논의가 있었으나, 전례대로 하라는 하교에 따라 잔디로 마감하였다39).
친잠단은 제단(祭壇)과 채상단(採桑壇)으로 구성된다. 제단은 사면(四面)을 흙담으로 둘러쌓았으며, 내부는 중앙단, 상단, 하단의 단차가 있는 세 개의 단으로 축조하고 단마다 잔디를 덮었다. 채상단은 제단 서쪽 뽕나무 아래에 조성되었으며, 이 또한 잔디를 심었다. 혜빈궁과 세손빈궁[정조의 비]의 채상단은 왕비의 채상단과 별개로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규모는 작지만 잔디를 사용하는 방식은 같았다40).
조선통신사는 부산 동래에서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에 영가대에 머물렀는데, 해신제를 위해 제단을 설치했다. 신유한(1681–1752)의 ⌜해유록(海游錄)⌟에 따르면, 부산진 절제사가 대(臺)의 중앙에 단을 두었는데 단에 흰 모래를 깔고 푸른 잔디[靑莎]를 입힌 다음 그 위에 신위(神位)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밖에 잔디 사용의 특별한 용례로서 언급할 수 있는 사례는 성균관 대성전 동무 동측에 있던 하련대다. 윤기(尹祁, 1741–1826)는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성균관 일대 경관을 묘사하면서, 하련대는 “돌을 쌓아 만들고 잔디를 깔았다[築之以石 種之以莎]”41)고 설명한 바 있다. ⌜태학계첩(太學契帖)⌟의 ‘반궁도(泮宮圖)’에서는 대성전 동삼문 앞 넓은 터에 하련대를 크게 그리고 풀로 덮인 방형의 단으로 묘사하였다(그림 5 참조). 하련대는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있어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도산서원 인근에 조성된 시사단(試士壇)에도 잔디를 깔았던 기록이 발견된다. 시사단은 지방에서 유일하게 별과 시험이 치러진 장소임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기념공간이다. 채제공(1720–1799)은 ⌜번암집(樊巖集)⌟에서 “단은 모두 3층으로, 상단은 돌로 빙 둘러싸고 잔디를 깔아서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할 것을 도모하였다. 중단에는 어제를 내걸었던 두 소나무를 중앙에 넣되 한 그루는 동쪽에 한 그루는 서쪽에 배치했다[璇題懸揭處築以壇 壇凡三層 上壇環以石鋪以莎 以圖樹碑建閣 中壇揭題兩松入其中 一東一西]”42)고 하여, 비각이 세워진 상단이 잔디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인 시사단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10m 축대를 쌓아 옮겨 지은 것이다.
잔디단은 국가시설뿐 아니라 개인 공간에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권필(1569–1612)은 “살구나무 아래 작은 단[小壇]을 만들어 두었는데 며칠 비가 내리더니 잔디[莎草]가 더부룩하게 자라 앉기 좋았다”는 시문을 남겼다. 그는 “작은 단 새로 만드니 손바닥처럼 평평해라[小壇新削平如掌], 게다가 비 온 뒤 자란 푸른 잔디 사랑스럽다[更愛靑莎雨後新]”43)고도 얘기했다. 채제공은 벗 권중범이 마포 강가에 만든 만어정(萬漁亭)을 방문한 뒤 그 뜰의 모습을 글로 상세히 남겼다. 만어정의 정 남쪽에 작은 담을 둘러 기이한 꽃과 진귀한 풀, 작은 소나무, 괴이한 형상의 돌을 보호하고, 뜰 한쪽에는 단을 쌓아 부드러운 잔디[軟莎]를 입혔다고 하였다. 담장 위아래로 배나무가 십여 그루 있는데 배꽃이 핀 것이 마치 백설과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44). 정약용(1762–1836)은 부친이 현감으로 있던 화순에 차군정(茶君亭)을 세우면서 “섬돌로[砌石] 단(壇)을 만들어 잔디를 깔았다”45)고 하였다. 개인의 시문 기록을 종합하면, 택원이나 누정 주변에 단을 만드는 일이 종종 있었고, 단에는 잔디를 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단의 용처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잔디단 자체가 하나의 정원 요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밖에 잔디로 덮은 ‘사계(莎階)’의 사례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창경궁 후원의 환취정(環翠亭)에 대한 기문이 있는데46), 김종직(1431–1492)이 1485년경에 작성한 글이다47). 그는 “환취정은 성종 14년(1483년)에 새로 지은 정자인데, 언덕에 만 그루 장송이 빙 둘러 있고, 그 틈새로 대나무 수천 그루를 빽빽하게 심어 정자를 위요한다[長松萬株 環擁而立 又植密竹數千挺 以補其隙]”고 하였다. 또 “수목으로 둘러싸인 곳 가까이에는 원앙새 비늘과 같은 기와지붕을 가진 궁궐 전각들이 들쭉날쭉하게 보이고 잔디가 덮인 섬돌[사계]과 이끼 낀 벽돌들이 서로 어우러져 푸른빛을 이룬다[前臨大內 結構參差 鴛鱗碧鏤 莎階苔甃 相助爲翠微之氣]”48)고 묘사하였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는 ‘방앗간[安碓]’을 만드는 방안을 설명하면서, 네 개의 못을 만드는데 가운데 섬과 합하여 중오(中五)의 수가 되게 하며, 여덟 면에는 세 단의 사계를 만들어 후천팔괘(後天八卦)를 이루도록 한다고49) 언급하였다. 그동안 조경 요소로서 ‘섬돌[階]’이라고 하면 대부분 ‘화계(花階)’를 지칭했는데, 섬돌에 잔디만 깔았다면 이것은 사계라고 칭해야 하며 화계와는 다른 시설로 봐야 한다는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문인들의 문집에는 집 안 마당과 뜰에 잔디를 심었다는 정황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여말의 대제학 이색(1328–1396)은 ⌜목은시고(牧隱詩稿)⌟에서는 “평상이 서늘하니 나무에서 바람이 이는구나[榻冷風生樹], 뜰이 텅 비어 있으니 참새만이 잔디를 밟고 있구나[庭空雀踏莎]”50)라고 읊었으며, 다른 글에서는 “봉은사 뜰 아래 잔디밭을 자리로 삼아서[奉恩庭下草爲茵] 노소가 둘러앉아 구경하니[老幼環觀]”51)라고 기록하였다. 여말선초의 문인인 변계량(1369–1430) 역시 “사선성[사조(謝朓, 464–499)]만큼이나 문장력이 뛰어난 태수라[文章太守謝宣城], 공주 공청에는 송사가 끊기니 관청 뜰 잔디가 절로 푸르게 자라네[訟斷公庭草自靑]”52)라고 하여 태평성대라 관청이 한가로워 잔디가 무성해진 모습을 빗대 묘사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의 서거정(1420–1488)은 “울타리 국화는 옮겨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라는 게 더딘데[籬菊移初晩], 뜰의 잔디는 깎을수록 많아지네[庭莎剪復多]”53)라고 표현했으며, 같은 시대의 성현(1439–1504)은 “뜰이 따사로워 잔디가 푸르고[庭暖莎交翠], 화분의 국화는 잘 자라서 노랗게 피었네[盆滋菊殿黃]”54), “버들솜이 하얗게 눈처럼 날리는데[楊白花雪飛] … 뜰 안 푸른 잔디에 떨어져 얼룩지는 걸 원치 않네[不願飄點庭中莎], 차라리 금송아지가 끄는 향기 나는 수레에 뿌려지길 바랄 뿐[願糝金犢油香車]”55)이라고 언급했다. 조선 중기 문신인 신흠(1566–1628) 역시 “밤이 되니 맑은 이슬이 뜰 잔디를 적시니[夜來淸露濕庭莎], 나막신 신고 함께 달빛을 밟으며 걸어본다[步屧相將踏月華]”56)고 기록했다.
앞서 언급한 잔디의 단(壇) 중에서도 뜰에 조성된 예가 있었다. 채제공은 ‘만어정’ 경관을 “뜰 한쪽에는 단을 쌓아 부드러운 잔디를 입혔다[庭際築壇一區 被以軟莎]”57)고 언급했으며, 김창협(1651~1708)도 “곁에다 띠를 엮어 집 한채를 세우고[結茅棟於旁側兮] … 푸른 잔디를 입혀 단을 쌓았다네[被靑莎而下築兮]”58)라고 초당 주변을 잔디 축대로 꾸민 정황을 전한다.
그밖에 주택 마당에도 잔디를 심고 베어 관리했다는 점도 “뜰의 잔디는 깎을수록 많아지네[庭莎剪復多]”59)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마당 전체를 잔디로 덮었던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편히 밟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잔디 공간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택에 잔디를 심는 방식은 근대기 서양이나 일본에서 도입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이번 문헌 고찰을 통해 조선시대에도 뜰에 잔디를 심는 경우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4. 결론
본 연구의 결과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시대 문헌에서 잔디를 지칭하는 한자어는 ‘사(莎)’, ‘사초(莎草)’, ‘초(草)’, ‘모(茅)’ 등으로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 가운데 ‘사’나 ‘사초’는 비교적 명확하게 잔디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지만, ‘초’나 ‘모’는 글의 맥락에 따라 잔디가 아닌 다른 식물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모’는 사전적으로 다른 식물을 지칭하는 만큼, 향후 문헌 해석에 있어 잔디로 단정하기보다는 사용 맥락을 중심으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조선시대 잔디의 가치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는 무덤 봉분과 관련된 기록이었다. 무덤 봉분의 형태를 유지하고 토사를 보호하기 위해 뗏장 잔디는 필수적인 소재였으며, 특히 왕릉은 좋은 잔디를 확보하고자 했기에 왕실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잔디 관리가 이루어졌다. 모화관 앞에서 잔디를 관리하고 필요 시 능소로 옮겨오는 체계는 잔디가 국가적 공역 사업에 필수적인 자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사초장 또는 사토장으로 불리는 전문 장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잔디 식재와 관리가 상당히 전문화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밖에도 잔디는 제방, 성곽, 다리 등의 축조 과정에서 흙을 지탱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된 기능적 소재였다. 이에 잔디를 훼손하거나 채취하는 행위는 엄격히 통제되었고, 이는 잔디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셋째, 조선시대에도 잔디밭은 심미적으로 경관을 묘사하는 요소로 자주 언급되었으며, 사람들이 앉아 시간을 보내거나 지인들과 교류하는 행락 장소로 사용되었다. 넓고 부드러운 잔디밭을 비단, 융단, 양탄자 등에 비유한 표현은, 서구에서 론(lawn)이 18세기 이전 자연적인 풀밭을 의미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잔디밭, 특히 자연 속 초지가 자연적이고 심미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제단, 기단, 단(壇), 대(臺), 계(階), 연못 경계와 같이 구획된 공간이나 개인 가옥의 뜰에 잔디를 식재한 사례가 발견되었다. 이번 연구에서는 구체적인 조성 방식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잔디가 조경 재료로서 다양한 공간에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문헌 연구에서 잔디는 구조적 안정화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식물 소재이자, 경관 감상과 공간 조성에서 조경 요소로 활용되었다. 특히 기단과 사계 등과 같은 공간에 잔디를 식재한 사례나 모화관 앞에서 잔디를 전략적으로 관리한 사례는, 조선시대 잔디가 차지했던 위상을 보다 복합적으로 재조명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고문헌에 나오는 잔디 이용 방식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향후에는 본 연구를 통해 도출된 특징적인 사례를 대상으로 조경 요소로서 잔디의 쓰임새를 심층 연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