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조선 시대 뚝섬은 한양의 경계에 위치한 왕실과 연관된 공간이었다. 한강 앞의 대평야였던 이곳은 왕의 목장지이자 사냥터였으며, 왕실에 필요한 채소와 과수를 생산하던 곳이기도 했다. 도회지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였던 뚝섬은 오늘날 확장된 서울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한강 연안의 아름다운 풍광 덕택에 왕의 행락 공간이었던 이곳은 뚝섬한강공원과 서울숲 등 공원이 자리한 시민들의 일상적 여가 활동 공간으로 변모했다.
현재 뚝섬한강공원 자리는 일제 식민지기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지금은 식민지기 유원지의 물리적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뚝섬유원지역’이라는 지하철 역명은 이 일대가 유원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식민지기 뚝섬에는 무슨 이유로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이후 어떻게 공공에서 관리하는 공원으로 변화했을까. 유원지에서 공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경관이나 운영 방식, 이용행태 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본 연구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식민지기에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면서 철도역이 있는 지역에는 온천이나 해수욕장, 유원지 등이 조성되었다. 철도 회사는 새롭게 조성한 시설과 기존의 명승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승객 유치를 꾀했다1).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철도 회사의 마케팅 방식은 철도 승객 유치를 위해 철도 연선에 유원지를 운영했던 일본 사설 철도의 경영 방식과 유사하다. 뚝섬유원지 역시 경성의 교외선 부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많은 경우, 식민지기 조성된 여러 행락 공간은 현재까지도 유원지, 공원, 관광지 등의 장소성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뚝섬유원지는 철도의 부설과 도시의 변화, 이에 따른 여가 공간의 재편을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본 연구는 뚝섬유원지가 어떠한 도시․사회적 맥락 속에서 조성되었는지 살펴보고 그 결과, 조성된 유원지의 경관과 문화적 특성을 도출한다. 그리고 광복 이후의 변화를 추적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유원지가 광복 이후에 어떻게 변형되고 이용되었는지를 파악한다.
이러한 통시적 연구는 유원지의 물리적 특성과 문화적 속성을 이해하고, 공원과 유원지 그리고 여러 위락 공간이 분화되어 정착되는 과정에서 공간을 만들고 이용하는 관성에 유원지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해석하는데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서구에서 도입된 유원지와 공원이 명확하게 분화되기 전 과도기에 유원지가 도시 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 조성된 뚝섬유원지는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원지로 기능했다.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뚝섬 일대의 경관 변화가 시작되는 1910년대부터 한강종합정비사업으로 뚝섬한강공원이 조성되는 1980년대 초반까지로 한정한다.
연구는 유원지의 운영 주체가 변화하는 광복을 기점으로 식민지기(Ⅲ장)와 광복 이후(Ⅳ장)로 시기를 크게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는 조성과 문화로 나누어 고찰한다.
조성 부분에서는 유원지가 만들어지고 변화하게 되는 도시(계획)적․정치적 맥락을 검토하고, 구체적인 조성 주체와 조성 의도, 조성 모습 등을 파악한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조성된 유원지가 당시 이용자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갔으며, 실제 유원지가 어떻게 운영되고 이용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역사적으로 유원지는 당대 대중의 ‘낙원’으로 묘사되었는데, 유원지의 실체를 추적하는 연구를 통해 이러한 낙원이 어떤 경관으로 구현되었으며, 이용자들은 이를 어떤 이미지로 인식하고 경험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는 주로 문헌과 지도, 사진 분석을 통해 진행한다. 한강에 맞닿은 뚝섬 일대는 조선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관이 극적으로 변화했으므로, 시기별 지도와 문헌을 함께 검토해 경관 변화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식민지기 문헌의 경우, 광복 이후 서울에 편입되는 뚝섬 일대에 관해 주요하게 다뤄진 기록은 찾기 어렵다. 경성부에서 발간한 경성부사(京城府史)나 식민지기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와 경제 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일련의 조사로 간행된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 조선의 임수(朝鮮の林藪) 등에서 뚝섬 일대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밖에 구체적으로 유원지가 조성되는 과정과 시설, 운영 및 이용 등에 관해서는 조선철도협회회지(朝鮮鐵道協會會誌)에 수록된 ‘경성궤도연선안내(京城軌道沿線案內)’를 비롯해 「매일신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삼천리 등 대중매체에서 확인한다(Table 1 참조).
Title | Publisher | Year |
---|---|---|
Gyeongseongbusa (京城府史) 3 | Gyeongseongbu (京城府) | 1941 |
Villages of Joseon (朝鮮の聚落) | Joseonchongdokbu (朝鮮總督府) | 1933 |
Joseon Civil Engineering Records (朝鮮土木事業誌) | Joseon Civil Engineering Association (朝鮮土木建築協會) | 1937 |
Statement of Reasons for Gyeongseong City Plan (京城市街地計劃(區域, 街路網, 土地區劃整理地區)決定理由書) | Joseonchongdokbu Home Office (朝鮮總督府內務局) | 1937 |
Forest of Joseon (朝鮮の林藪) | Joseonchongdokbu forestry experiment station (朝鮮總督府林業試驗場) | 1938 |
Guhanmal-Hanbando Topographical Maps (舊韓末 韓半島 地形圖) | Japanese army | 1895~1896 |
Riparian land occupancy: Gyeongseonggyooegwedo (京城郊外軌道株式會社) - Attached drawing | Joseonchongdokbu's record (Source: National Archives of Korea) | 1931 |
Gyeongseongbu gwannaedo (京城府管內圖) | Unknown (Source: Seoul Museum of History, 2006) | Late 1930s |
Journal of the Joseon Railway Association (朝鮮鐵道協會會誌) | Joseon Railway Association | 1927~1942 |
Gyeongseong Ilbo (京城日報) | Joseonchongdokbu's organ | 1906∼1945 |
Maeil Shinbo(每日申(新)報) | Joseonchongdokbu's organ | 1910~1945 |
The Dong-A Ilbo(東亞日報) | Newspaper published by Korean | 1920~present |
The Chosun Ilbo(朝鮮日報) | Newspaper published by Korean | 1920~present |
Samcheonri (三千里) | Magazine published by Korean | 1929∼1942 |
뚝섬 관련 연구는 경관 변화에 대한 연구가 있다.
Hong (2006)은 뚝섬․장안평 지역이 한강의 범람원이었던 조선 시대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뚝섬을 과수원과 채소밭으로 활용했던 식민지기, 그리고 1960년대 이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뚝섬 일대가 거대 도시 서울의 시가지 경관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펴본다. 이 연구는 조선 시대 살곶이목장과 내농포의 실체를 규명하고, 뚝섬과 장안평 지역의 경관 변화를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Kang (1971)의 연구는 서울의 도시화 과정을 5단계로 구분하고, 시기별․요소별(주거, 학원, 공장, 유락시설 등)․토지이용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춰 뚝섬 지역이 농촌적 촌락 사회에서 현대적 도시화기에 접어드는 과정을 분석한다.
Lee (2009)의 연구는 시기별 지도를 비교 검토하며, 뚝섬 일대의 변화를 서울 교외 지역의 도시화 과정으로 파악했다. 조선 시대의 전통은 지명 속에 남아 일부 계승되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했는데, 뚝섬은 이제 서울 전체의 경관과 함께 변화하여 서울 동쪽의 신개발지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뚝섬의 경관 변화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유원지를 도시화의 여러 요인 중 하나로 간략하게 다루고 있어 뚝섬유원지 자체에 대해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광복 이후 뚝섬의 공원화에 대한 연구도 있다.
Park (2002)은 1884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의 도시공원의 역사를 정책과 물리적 변화에 초점을 두고 연구했는데, 광복 이후 뚝섬 일대의 공원 지정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Yang (1985)의 연구는 뚝섬지구가 공원화되기 직전 당시 유원지로 사용되고 있는 뚝섬의 공원 계획을 기능과 물리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유락적 기능을 배제하고 근린공원으로서 휴식 공간의 역할을 부여하도록 유도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상과 같이 뚝섬의 도시화 혹은 공원화에 대한 연구는 있으나, 도시화 과정에서 도시의 기본적 시설로서 유원지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맥락과 유원지 자체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찾기 어렵다. 특히 뚝섬유원지가 식민지기에 만들어져서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인 여가 공간으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전 뚝섬유원지에 대한 연구는 드물다. 따라서 본 연구는 유원지 혹은 공공 오픈스페이스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에 집중하고자 한다.
II. 유원지의 정의와 역사적 전개
유원지(遊園地)라는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유원은 놀다․즐기다․떠돌다․여행하다․사귀다 등을 의미하는 ‘遊’자와 동산․뜰․밭․구역․능․사원․별장․담 등을 의미하는 ‘園’자가 결합한 단어다. 즉, 유원지란 돌아다니거나 놀이를 위한 정원과 같은 공간을 의미한다. 사전적 의미는 “돌아다니며 구경하거나 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설비를 갖춘 곳”이다. 사전적 의미로만 본다면 유원지는 공원(公園) 즉, “국가나 지방 공공 단체가 공중의 보건․휴양․놀이 따위를 위하여 마련한 정원, 유원지, 동산 등의 사회 시설”과 유사하며(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유원지를 공원의 일종으로 볼 수 있어 사실상 그 구별이 모호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에서 유원지란 단어는 언제부터 쓰였을까. 고전에서 유원지란 표현을 찾아보면 보통명사로서 ‘유원(지)’란 표현은 찾기 어렵다.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수신사로 처음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기록한 책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유원’이란 표현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2). 유길준은 서구의 근대 문물을 보고 쓴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에서 지금의 유원지와 유사한 의미로 유정(遊亭), 유보장(遊步場), 유게장(遊憩場), 유연장(遊衍場)과 같은 표현을 쓴다(Kim, 2010: 276-277). ‘遊園地’는 일본이 근대에 서양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일 때 신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창제한 한자 어휘이며, 한국은 개항기에 일본으로부터 이 단어를 받아들여 쓰기 시작한 것이다(Kiyoji, 1996: 984).
유원지는 서구의 문물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휘이니, 서구에서 논의된 놀이의 의미를 이해해 본다면 ‘유원지’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했던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놀이는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호모 루덴스는 놀이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illusion)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Huizinga, 1964: 41-49; Noh, 2011: 58-62). 오리코스트(Isabelle Auricoste)는 일상을 영위하는 곳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은 낙원을 환기한다고 시사했다. 둘러싸여 한정된 영역인 정원이나 공원은 다른 세상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낙원(樂園)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왔다. 오락(diversion/ divertere, 기분전환)은 의미상 (현실을) 외면하는 행동이다(Auricoste, 1992: 483). 따라서 유원지란 놀이 혹은 오락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일상에서 벗어나 열광할 수 있는 ‘환상’을 제공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유원지의 상업적 속성은 오락을 지향하는 대중적 공간 유형의 다양한 진화의 동력이 되었다. 오리코스트는 유원지의 기획자들이 수익을 내려는 욕구로 인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았고, 19세기에 어뮤즈먼트 파크(amusement park)라는 특별한 분야를 성장시킨 창조적 에너지가 되었다고 설명한다(Auricoste, 1992: 489). 헌트(John Dixon Hunt)는 이러한 인기 있는 장소가 19세기와 20세기의 공원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또한, 공원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오락을 위한 장소가 여전히 필요했음을 설명하고 있다(Hunt, 2012: 22-39).
근대 일본에서 ‘유원’이라는 표현은 개념적으로 ‘공원’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메이지 일본(1867~1912)은 근대 국가 수립 과정에서 서구의 공원 제도를 빠르게 도입했다. 에도 시대부터 놀이나 유흥을 위한 ‘유관(遊観)의 장’이었던 신사와 절 경내의 실체와 사회적 역할을 ‘공원’이라는 제도로 보전하고 계승하려고 했다3). 메이지 중기 이후에는 근대 도시 공간의 시설로 공원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위생’적 목적을 강조했으며, 그 전에 공원을 칭하던 ‘유원’이란 표현 대신 ‘공원’이란 표현으로 통칭하게 되었다4).
메이지 20년경(1887) 오사카에는 ‘유원’, ‘유원지’ 등으로 불리는 개인 운영의 정원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유료였고, 주로 어른들의 유흥지로 활용되었다. ‘공원’과 ‘유원’이 분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 게다가 행정이 ‘공원’을 충분히 정비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민영’ 유원지는 도시 주민의 행락지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유원지는 근세 도시의 놀이의 정원과 유원지의 전통에 공원이라는 도시 시설의 요소가 더해지고, 거기에 유희기계가 도입되면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정원이 유원이 되고 공원과의 차이를 명확히 하면서 근대적 유원지로 바뀌는 과정은 서구에서 플레저 가든(pleasure garden)의 변화와 비슷하다. 왕과 귀족의 놀이의 장이었던 정원이 대중화되면서 근대적인 유원지(pleasure ground, amusement park)로 변화해가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한 궤적을 그린다(Hashizume, 2000: 36-44). 일본의 근대적 유원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을 창출하고 충족시키며, 이윤을 추구하는 유원지 본연의 성격을 추구하면서 당시 위생 등 도시 시설로서의 목적이 중요하고, 공공에 의해 운영되는 공원과 차이를 만들어간다.
유원지의 발달은 철도의 발달과 상관관계가 있다. 현대적인 해변 휴양지(seaside resort)는 19세기 초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해변이 있는 지역에 철도가 놓이면서 많은 도시민들이 당일치기로 휴양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화물 수송과 일부 특권층의 사치스러운 과시적 여행을 위해서 만들어진 철도를 대중적인 여가 활동 수단으로 조직화한 것은 토마스 쿡(Thomas Cook)이었다. 토마스 쿡은 1841년에 버밍엄과 해변 휴양지를 운행하는 열차를 전세 내서 노동자들이 당일치기로 여행할 수 있도록 할인 여행권을 판매함으로써 대중 관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여가 활동을 조직화했다. 새로운 교통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신기술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하고, 근대 세계를 문화적으로 상징할 수 있게 한 조직 혁신, 곧 여행의 사회적 조직화였다(Lash and Urry, 1994: 371-408).
19세기 후반 영국의 유명한 해변 휴양지에는 오락 공원도 만들어졌다. 일례로 블랙풀에는 1890년대에 야외 오락 공간(fairground)이 만들어졌고, 1895년 뉴욕에 조성되기 시작한 코니아일랜드(Coney Island)로 대표되는 미국 어뮤즈먼트 파크(amusement park)의 영향이 더해져서 1904년에는 대형 놀이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이 오락 공간은 1906년부터 플레저 비치(Pleasure Beach)란 이름으로 불리며, 1909년까지 영국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어뮤즈먼트 파크가 되었다(Pearson, 2008: 36-37; Kane, 2013: 216-245).
한편, 일본에서는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와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신흥 부르주아의 발흥을 배경으로, 소위 다이쇼(大正, 1912~1926) 문화가 성립한다. 메이지 시대와 비교해 개인주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교양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풍이 탄생했다. 또한, 공장 노동자와 소위 말하는 화이트칼라 등 도시에 새롭게 이주한 사람들이 증가했으며, 이와 동시에 소비 산업의 발달로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해갔다. 신문과 잡지 등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활동사진, 유행가, 양장의 보급 등 대중문화에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미 구미의 문화는 동시대의 것이 유입되었고, 대중매체를 통해 모던 보이, 모던 걸로 대표되는 모더니스트가 휩쓴다(Hashizume, 2000: 72).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도심뿐만 아니라, 철도 연선의 교외에 새로운 형태의 유원지가 탄생한다. 모델은 도심과 전차로 이어진 해변 휴양지인 뉴욕의 코니아일랜드였다. 노동자들이 분진 가득한 도시를 탈출, 가족과 휴일을 보내는 일상 속의 ‘낙원 섬‘에 갔다. 교외 전차라는 존재가 휴일을 지내는 새로운 방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교외에 유원지가 조성됨으로써 새로운 승객들이 생기고, 나아가서는 연선의 개발을 유도하는 상승효과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방법론을 일본의 철도 회사와 개발 회사가 주목했다(Hashizume, 2000: 72-73). 즉, 영국의 해변 휴양지처럼 여가 상품의 조직에 민간 철도 회사가 주체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 대부분의 민영 철도 회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관광과 유원 시설, 교외 개발과 같은 부동산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Ogawa, 1998: 28). 그 과정에서 해변이나 온천지의 작은 마을들이 휴양지나 유원지가 되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오사카의 다카라즈카 신온센(宝塚新温泉)이다5). 식민지기 재조선 일본인들은 다카라즈카 신온센과 같이 성공적인 유원지를 거론하여 모범으로 삼고자 했으며, 서구와 일본의 문화를 접했던 일부 조선인들도 그러한 유원지가 도시의 필수 시설이라며 조성을 희망하기도 했다.
III. 일제 식민지기 뚝섬 개발과 유원지 조성
조선 시대 뚝섬은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쪽 끝에 자리한 곳이었다6). 뚝섬은 현재 한강시민공원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축소되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성수동, 화양동, 자양동 일대를 총칭해 뚝도(纛島)라 불렀으며, 살곶이벌(箭串坪)7), 동교(東郊) 등으로도 칭했다.
1678년 간행된 목장지도(牧場地圖)는 조선 시대 전국의 목장을 상세히 그린 지도첩으로, 여기에는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지도인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가 수록되어 있다(Figure 1 참조). 이 지도를 보면 목장의 경계는 아차산 마루에서 중랑포 답십리, 살곶이다리에 이르고, 그 안의 뚝섬을 볼 수 있다. 목장과 뚝섬, 자마장, 신천, 광진 사이에는 버드나무가 열식되어 있다. 1818년 간행된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따르면 유수가 버드나무 수십만 그루를 목책 주위에 심어서 안팎의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간행된 조선의 임수(朝鮮の林藪)에 이 일대에 버드나무 170그루가 같은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버드나무는 식민지기 중반까지 인상적인 경관으로 남았다(Joseonchongdokbu forestry experiment station, 1938: 366-369).
조선 시대 뚝섬 일대는 한강의 범람으로 인해 수해를 자주 입는 곳이었다. 식민지기 총독부는 한강변에 제방을 쌓아 홍수의 피해를 막고, 뚝섬과 살곶이벌 일대를 농경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1913년 총독부 식산과(殖産課)에서는 뚝섬 일대의 땅을 구획정리하기를 위해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해 한강으로 흐르는 전관천(箭串川, 전곶천) 일대를 따라 약 7,090.2m 길이의 제방을 축조하여 460여 정보(町步)의 논을 만들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불하했다. 그러나 을축년(1925) 대홍수로 축조된 제방 전부가 붕괴되어 농작물은 유실되고, 300여 정보의 논도 침수되고 말았다. 이후 뚝섬 방면은 뚝섬수원지에서 한강 연안을 따라 전관천, 면목동까지의 총연장 5,719m의 방수제 공사를 함으로써 뚝섬 일대의 농경지가 침수되는 것을 방지했다(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1985: 502;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2: 950). 한강변 제방에는 연장 2,778m의 장석호안(張石護岸)을 설치하고, 동뚝섬 제방 전면에는 567m 상당의 물양장(物揚場)을 축조했다. 그리고 제방에 연해서는 포플러를 심어 방수 및 방풍과 함께 제방의 유실을 방지하고자 했다(Joseonchongdokbu, 1937a; 316; Hong, 2006: 124). 이때 식재한 한강변의 포플러는 1960~70년대까지 뚝섬의 대표적 경관이었다.
구한말의 지도(Figure 2 참조)와 1931년 지도(Figure 3 참조)를 비교해 보면, 과거 저습지였던 부분이 1931년 지도에서는 농경지로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뚝섬과 동뚝섬 일대 취락 지역도 확대되었으며, 그 북쪽으로는 넓게 과수원이 만들어져 있다. 동뚝섬 동쪽, 한강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자마장리 쪽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후에 이 모래사장에 유원지가 조성된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에서는 뚝섬 취락 지역을 “북쪽은 모두가 밭이며, 사과밭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과수원이 있고, 채소가 재배되어 땔감과 더불어 경성 시가지로 공급됨으로써 대도회지에 이웃한 취락으로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취락 지역의 서쪽에는 수도수원지가, 북쪽 과수원 사이에는 권업모범지장이 있었다(Joseonchongdokbu, 1933: 211-212; Gwangjingu, 1997: 118-119).
1920년대에는 일본 각지에서 도시계획 붐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식민지 조선에도 도시계획에 대한 요구와 정책적 시도가 활발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경성과 경성부 인접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Kim, 2009: 386-433), 왕십리와 뚝섬 일대의 교외 도시화 계획이나 뚝섬 일대를 경성부에 포함해달라는 요청이 나오기 시작했다8). 그러나 1936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경성시가지계획령(京城市街地計劃令)’에 따르면 뚝섬 일대는 당시 경성시구확장(京城市區擴張)에서 제외되었고, “지형상 경성부와 관계 깊은 소위 전원도시”로 고려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Joseonchongdokbu, 1937b: 6). 이에 관해 총독부 관계자는 “동 지대는 당분간 경성부의 채소 공급지로 방임하여 두었다가 어느 시기에 가서 그를 경공업지대로 소용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9). 결국 식민지기 내내 뚝섬 일대는 경성의 배후지로서 농업이 중요한 곳으로 남았다.
뚝섬유원지는 1930년대 중반 사설 철도인 경성궤도주식회사(京城軋道株式會社, 약칭 경성궤도)에 의해 조성된다. 경성궤도는 동대문에서 왕십리를 거쳐 뚝섬까지 연결되는 교외 철도로, 경성 동부 지역에서 늘어가는 교통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부설되었다. 경성궤도의 노선은 1927년 3월 뚝섬궤도주식회사(纛島軋道株式會社)가 당시 시외였던 왕십리부터 뚝섬 사이의 궤도 부설 인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이 회사는 명칭을 경성교외궤도회사(京城郊外軌道會社)로 변경했는데,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었고, 1932년에는 해당 노선을 경성궤도에 양도한다10). 당시 경성궤도의 사장이었던 이와사키 마사오(岩崎眞雄)는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와 함평철도주식회사(咸平鐵道株式會社)를 운영했던 세력가인데, 그가 적자 경영임에도 불구하고, 이 궤도선을 부설 및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사철에 보조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경성궤도의 동대문-뚝섬, 동대문-광나루선은 그 연선 일대와 그 대안(對岸)으로부터의 승객수송, 땔감, 채소 등의 물자수송, 자갈채취와 그 운반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식민 당국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철의 경영을 보조하는 정책을 편 것은 식민 본국의 자본, 인력, 기술을 도입해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Gwangjingu, 1997: 493-495). 193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서는 이와사키 마사오가 운영하고 있는 경성궤도의 업적에 대해, 곧 대경성11) 지역에 포용될 예정인 동대문 밖과 한강 연안의 뚝섬을 연결해 지역을 부흥시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Abe ed., 1935, 1987: 425).
경성궤도는 1933~1934년 뚝섬에 수영장 등 유원지 시설을 조성하는데, 새로운 시설은 궤도의 운영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1933년 뚝섬 수영장의 개장을 맞아 동대문역-동뚝섬(동독도리)역까지의 왕복 요금을 할인해 주거나 운행 시간을 연장하기도 했다12). 1934년 동뚝섬에 수영장, 아동 유희장, 매점 등을 갖춘 유원지를 조성한 뒤에는 유원지역까지 궤도 노선을 확장하고13), 궤도차 이용자들에게는 유원지의 입장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
유원지 - 유원지역전(遊園地驛前). 한강 강안 1만여 평의 광활한 땅에 자리한 본사 직영의 유원지에는 청례한 구슬 같은 어린이 수영장, 낚시 못, 분수탑, 각종 운동 기구, 정원, 운동장, 식당 등의 설비가 갖춰져 가족이 함께 놀러가기에 더없는 명랑한 유원지다. 특히 흰 돛단배가 오가는 한강의 전망은 더할 나위 없다. 입장료는 5전. 동대문 및 왕십리부터 유원지까지 왕복 승차권 소지자는 무료 입장(Joseon Railway Association, 1936: 60-62)
위의 인용 문구는 1936년 조선철도협회회지(朝鮮鐵道協會會誌)에 수록된 ‘경성궤도연선안내(京城軌道沿線案內)’에서 뚝섬유원지에 관한 내용으로, 뚝섬유원지의 시설과 풍경, 입장 요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은 뚝섬유원지를 비롯해 동대문에서 뚝섬유원지 간의 궤도선과 동대문에서 광장역으로 이어지는 광장선 주변의 대표적 행락지를 소개하고 있다. 선로의 주변에는 동묘, 경마장, 금강산전철변전소(金剛山電鐵變電所-마장역 앞), 살곶이다리(箭串橋-살곶이다리에서 3丁), 뚝섬평야(纛島平野), 골프장(화양역 앞), 고대인 유적(구의역 앞), 광진교(광장역 앞), 광장산성지(광장역에서 7丁), 풍납리토성(광장 대안 하류에서 10丁), 남한산성(광장 혹은 유원지에서 3里), 과수원(서독도역 앞), 유원지, 봉은사(유원지 대안), 대청황제공덕비(유원지에서 1里), 추정백제왕릉(유원지에서 1里) 등이 있었다. 또한 이 두 노선을 이용한 동대문-남한산, 동대문-봉은사 코스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Figure 4 참조).
Source: Gyeongseongbugwannaedo (京城府管內圖). Seoul Museum of History, 2006
이러한 코스는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에서 경성궤도와 나룻배를 이용한 하이킹 코스로 소개되곤 했다14). 경성과 뚝섬 간의 교통을 독점하고 있었던 경성궤도는 경성 시민들이 뚝섬유원지를 많이 찾는 더운 여름철 최고의 수입을 올리곤 했다15).
일본의 철도 회사는 일본에서 교외 철도의 행선지에 ‘전원도시’라는 이름으로 베드타운을 건설하고, 그 주변에 유원지나 공원을 조성해 열차 승객을 늘리거나, 연선에 유원지를 조성함으로써 연선의 개발을 꾀하는 등의 경영 방법을 활용했다16). 일본인이 운영했던 조선의 경성궤도 역시 이러한 경영 모델을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930년대 뚝섬유원지는 경성의 도시화에 따른 교외 개발, 교통의 발달에 따른 이익 창출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13년 조선총독부에서 뚝섬 일대의 땅을 농경지로 개간한 이후, 1920년대 뚝섬의 대표적인 풍경은 농작물이 자라는 넓은 들판과 한강, 그리고 조각배가 떠다니며 낚시를 하는 모습이었다.
수만 정보의 넓은 들에는 보리와 밀이 하늘을 뚫을 듯이 무성하여 화풍에 바람을 좆아 이편으로 몰리고 저편으로 몰리는 잔잔한 물결이 순풍을 좆는 것 같아 ○○○○(麥浪) 하던 ○○의 경치를 보겠으며, 앞면에는 ○고 청아하며 잔잔한 ○도 오리알빛 같은 한강물이 활동같이 둘러있고, 오르고 내리는 상선은 삼삼오오 작반하여 순풍에 돛을 달고 어이 갈거나 어이 갈거나 한가이 안적 잇난 것도 또한 뚝도에 한 경치를 자랑할 만하며 한가한 어부들은 주나라 때에 강태공에 ○○되어 시절을 낚듯이 조그마한 조각배에 술도 싣고 밥도 싣고 길고 빠른 낚싯대를 깊고 깊은 물속에 집어 넣고 안적한 가흥을 자랑하는 것도 또한 뚝섬의 한 경치라 하겠다17).
‘경성궤도연선안내’에서는 궤도차를 타고 유원지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 장소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뚝섬평야와 과수원 등 농업 경관을 아름다운 경치로 묘사하고 있다.
뚝섬평야. 상후원, 화양의 중간에 있으면 뚝섬 평야 전체를 바라보기에 좋다. 차창에서 멀리 자수정을 세운 듯한 북한의 수봉과 톱니를 늘어놓은 듯이 보이는 도봉(道峯)의 연산(連山)을 바라볼 수 있다. 본 궤도와 병행하여 달리는 이천가도의 버드나무 가로수길 구역은 가까이서나, 혹은 멀리서나 그 경치가 특히 좋다.
과수원 - 서뚝섬역전. 역은 경성사범학교 농장 외에 각 농장의 중앙에 있다.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 가을에는 포도, 배, 사과 등 4계절 내내 과일이 풍부하여 항상 이 과일로 담근 좋은 술의 향이 차창을 통하여 흘러들어온다(Joseon Railway Association, 1936: 60-61).
근대의 기차는 “객실 창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panoramatischen) 전망”이라는 새로운 풍경에 대한 감수성을 만들어낸다. 농촌의 풍경처럼 “단조로운 풍경이 열차로 인해 처음으로 미적으로 매혹적인 시점에 놓이게 된다. 열차는 하나의 새로운 풍경을 연출한다(Schivelbusch, 1977: 81-83)”.뚝섬으로 가는 길에 있는 원예모범장(이후 권업모범지장으로 이름 변경)이나 과수원은 새로운 볼거리였다. 뚝섬의 원예모범장에서는 새로운 과일을 시범 재배한 덕택에 ‘뚝섬 포도 파티’와 같이 새로 도입된 과일을 이용한 활동도 보이며18), “뚝섬 모범장의 가지가지 원예를 구경할 수 있었다”19). 1937년경 12개에 달했던 포도원과 일대의 채소밭은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목가적인 ‘전원 풍경’으로 묘사되었다20).
1930년대 신문지상에서 경성에 대한 주된 묘사는 “살풍경한 도회의 더위”나 “매연에 찌든 하늘 굉음이 소용돌이치는 거리, 견직의 뒷면처럼 혼잡한” 곳이다. 이와는 대비되는 뚝섬 일대의 전원적 풍경은 볼거리로 부각되었다. 특히 경성궤도가 놓이고 유원지가 만들어지면서 신문 등의 매체는 도시 생활에 지친 경성 시민에게 궤도차를 타고 쉽게 갈 수 있는 “지상 천국”인 뚝섬유원지행을 권유한다21). 한강의 모래사장에 마련된 수영장과 제방에 식재된 포플러가 유원지의 대표적 풍경이었다.
그전에는 왕십리를 거쳐 도보로 다녔지마는 수년전부터 동대문턱에서부터 장난감 같은 차나마 궤도차가 삼십분만큼 왕복하여 갑자기 경성과의 연락이 편리하게 되었다. 강변 수천 평의 방수림에는 수만 본의 ‘포푸라’ 나무가 무르녹어 살풍경한 도회의 더위에 시달린 머리를 시원케 하는 우에 수영장은 물이 깨끗하고 깊지 않고 ‘모래강변’은 넓고 보니 소위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아직 물이 찬 탓인지 수영장에는 어린애 몇 명이 텀부덩 대고 있을 뿐이었다. 방수림 옆에는 유원지가 금년 여름부터 새로이 등장할 양으로 지금 공사 중인데 유원지 안에는 아동수영장 유희장에 매점까지 설비하는 중이며, 또 지금부터도 세주는 ‘뽀트‘까지 떠 있으니 강 아랫목에 지지 않을 것이다22).
1938년 문학가 임화(林和)는 화가 구본웅 등과 함께 뚝섬유원지에 취재 여행을 다녀와 「동아일보」에 ‘경궤연선(京軌沿線)’이란 제목의 산문을 기고했다. ‘경성궤도연선안내’에서 유원지의 다양한 시설이 가족 동반의 행락에 적절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반면, 임화 일행은 유원지 풍경을 황량하게 받아들인다.
아직 꽃도 잎도 안 핀 유원지는 즐길 아무것도 없고 황량 그것이었으나 역시 작하(昨夏)의 영화에 지친 듯한 일종 버리기 어려운 정취가 있었다. 유원지를 들어가는 길녘에 높다란 방수 제방을 지나면 긴 포플러 숲이 나오는데 이곳이 하절엔 캠프촌이라 한다. 캠프촌이 되었을 때 풍경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날 우리의 행락 중 그중 정취 깊은 곳이 나에겐 이 숲이었다. 아직 잎도 안 피고 긴 줄기들만 거의 한 평에 한줄기씩이나 들어박힌 한가운대로 내깔린 궤도는 영화에서 보는 삼림철도 그것 같았다. 우리는 차를 나려서도 몇 번 이곳을 거닐어 보고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E군 같은 사람은 백화림(白樺林)같다고 찬미한다. 유원지는 그리 호화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강안에 닿아 있고 근처 풍경이 좋은 곳이라 여름 하루 소일엔 훌륭한 곳이었다. … 나는 오늘날의 청년들이 어째서 이런 황량한 풍경에 마음을 주는지 제 마음이 한개 비극 같아서... 23).
이 글에 따르면 유원지 자체의 시설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그 풍경은 “황량하지만 버리기 어려운 정취”가 있으며,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이러한 풍경에 매료되고 있다고 표현하여 뚝섬 일대에 대한 도시민의 인상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나,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함께 수록된 구본웅의 삽화(Figure 5 참조)를 보면 철로와 하늘로 곧게 뻗은 포플러의 모습이 매혹적인 풍경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뚝섬유원지의 경험은 궤도차를 타고 그 노선에 따라 새로운 경관과 이미지, 장소를 만나는 총체적인 것을 의미했다.
Source: “Gyeonggweyeonseon Part II”, The Dong-A Ilbo, April 17, 1938
한강은 경성 부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한강에서의 물놀이가 자유로운 놀이였다면, 식민지기 한강의 물놀이는 유원지라는 근대적 시설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경성부에 의해 그 시기와 구역, 허용되는 행위 등이 관리되었다.
한강에서는 익사 사고가 많았다. 이에 체육으로서 수영을 권장했던 경성부와 관할 경찰서에서는 여름이면 한강에 안전지대를 만들고 수영장을 개설하곤 했다24). 주로 한강철교와 인도교 부근이 주로 서민들이 수영과 보트놀이를 하는 곳이었는데, 해마다 수영하다 익사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1930년대에는 경성부에서 시설한 수영장 이외에 한강에서의 수영을 금지하기도 한다25). 특히 아동 수영에 관해서는 한강철교 밑, 서빙고, 뚝섬 등으로 수영장을 한정하기도 했다26). 뚝섬의 경우, 관할 경찰서에서 안전한 지역을 골라 수영장의 경계를 표시하고, 뚝섬유원지의 운영자인 경성궤도에게 구호선 등을 마련하게 했다27). 따라서 뚝섬유원지는 경성의 시민들이 가깝고 저렴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수영장과 유선장을 구분하고 감시원을 두기도 하고, 수상 음주를 금지하는 등 놀이 문화의 계도 장소이기도 했다28). 이는 경성부라는 공공 기관이 안전과 치안이라는 행정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기도 하고, 운동을 통해 국민의 신체를 교정하고 계몽하려는 일본인들의 위생론(Ono, 2003: 46-47)이 식민지 조선인들의 여가 활동과 문화를 계도하려는 태도로 드러나 대중적 오픈스페이스의 이용 방식을 형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IV 광복 이후 뚝섬의 도시화와 유원지의 변화
식민지기 경기도에 속해 있던 뚝섬 일대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1949년 도시행정구역 확장 때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52년 전재복구를 위한 대대적인 시가지 계획 재정비가 이루어졌으나, 서울시의 재정 형편상 뚝섬 일대까지 계획할 여력은 없었다29). 한편,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동부 지역이 급진적으로 팽창하면서 1958년 뚝섬유원지는 공원으로 지정된다. 식민지기 경성궤도라는 민간 기업이 조성해 운영했던 뚝섬유원지는 어떻게 공원이 되었을까.
광복이 되자 일본인이 경영했던 경성궤도는 귀속재산이 되어서 한인 종업원 대표였던 강양기(姜鍚麒)가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운영하게 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큰 피해를 입는다. 그 복구는 민간 기업이 수행하기 어려웠고, 시민의 일상생활과 직결된 교통 시설이었기에 1953년 서울특별시에서 인수해 경영하기로 결정하고, 시장 김태선이 관리인으로 취임했다. 1954년 4월 1일부터는 그 명칭도 ‘서울특별시 궤도사업관리청’으로 변경해 서울특별시가 정식 운영 주체가 되었다(Gwangjingu, 1997: 494-501). 즉, 민간 기업이었던 경성궤도를 공공기관화하면서 유원지도 공공의 관리 대상이 된다. 당시 서울시는 경성궤도를 토대로 시내 교통망과 도시계획을 확장할 구상을 했으며, 뚝섬에는 경마장과 유원지를, 광장리에는 낚시터와 골프장 등을 설치할 계획이었다30). 1954년 서울시는 뚝섬유원지를 개수하면서 수영장을 수리하고, 유원지 내에 골프장, 풀, 아동용 그네, 보트, 배구장, 탁구장, 정구장, 식당, 매점 등 각종 오락 시설을 마련했다31). 이후 1957년 올림픽운동장 조성 후보지로 중곡동과 광장동 일대가 결정되면서 1958년 인근의 용마자연공원과 함께 뚝섬 일대는 뚝도공원으로 지정된다32).
뚝도평야와 한강, 잠실도 등을 포함했던 뚝도 지구는 서울시에 편입된 후 10여 년이 지난 1962년에 이르러서야 시가지 건설 계획을 세우고 도시화된다33). 이 시점부터 뚝섬 일대의 도시화와 맞물려 대규모 종합 유원지 개발 계획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1962년에는 뚝섬유원지를 사계절 이용할 수 있는 종합공원으로 확장할 계획이 세워진다. 당시 2만 8천 평 넓이의 유원지를 거의 두 배에 가까운 5만여 평으로 확장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이 계획 가운데 기존 유원지의 풍치림인 버드나무와 포플러가 해마다 홍수에 쓸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호안에 축대를 시설하는 공사에 착수해34) 같은 해 11월 완공된다35).
1957년 제작된 ‘서울특별시지도(Figure 6 참조)’에서는 유원지 일대 한강의 백사장과 뚝섬을 감싸고 있는 제방을 확인할 수 있다. 붉게 칠해진 부분이 주택 등 건물이 들어선 곳으로 아직 많은 지역이 농경지로 도시화되기 이전 뚝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밖에 1954년 신설동에서 이전한 경마장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통해 뚝섬 일대는 1960년대에 접어들기까지 식민지기의 전원적인 풍경을 유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뚝섬 일대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66년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된 김현옥은 뚝섬 일대의 구획정리사업36)과 주택대단지․경공업단지 조성을 추진했다. 1970년대까지 대규모 도시계획사업이 시행되고, 강변도로37) 건설이 진행되면서 서울에 채소를 공급하던 농업 지역이던 뚝섬 일대는 시가지로 변화해 갔다.
1970년 발행된 ‘새서울약도(Figure 7 참조)’는 김현옥 서울시장이 재직 중에 제시한 각종 개발 프로젝트를 한 곳에 모아놓은 지도다. 이 지도를 보면 한강변 뚝섬유원지 일대는 여전히 백사장으로 남아 있지만, 주변은 구획정리가 되어 시가지화가 상당히 진행된 모습이며, 강변6로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경성궤도선도 철거된 상태다38). 식민지기 경성골프구락부 소속 골프장 자리에 1954년 개장한 능동골프장과 1962년 준공된 워커힐 호텔 등도 보인다.
1968년에는 김현옥 서울시장이 일부 민간 자본을 유치해 뚝섬 일대 20만 평을 개발해 1969년 5월까지 근대화된 유원지로 발전시킬 계획을 발표한다. 4m 높이의 제방을 쌓고, 제방도로를 신설하는 한편, 수영장과 주차장, 보트장 등의 시설을 갖출 계획이었다(Figure 8 참조)39).
그러나 이 계획도 실현되지 못한 채 1970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한 번 유원지 계획이 발표된다. 이번에는 20~30만 명이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종합 유원지 시설을 민간 자본을 유치해 1971년까지 마련하는 계획이었다40). 1971년 1월 서울시가 발표한 뚝섬종합유원지 개발 계획에 따르면, 뚝섬 남쪽의 모래밭에 강변도로를 겸한 길이 2.5km의 둑을 쌓아 강변4로와 연결시키고, 그 안에 12만 5천 2백 평의 ‘매머드 유원지’를 1972년 말까지 건설한다. 서울시는 둑은 시비로, 시설비는 민간 자본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서울시는 둑을 쌓아 당시만 해도 강물이 불면 물에 잠기던 뚝섬 일대의 30만 평이 택지 등으로 쓰이게 돼 뚝섬 개발이 촉진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 유원지에는 모노레일, 어린이 놀이터, 구기장, 피크닉장, 골프 연습장, 승마장, 호텔 방갈로 전망대, 수목 전시장, 수영장, 각종 오락장, 동․식물원 및 양어장 낚시터, 유수지 펌프시설 등을 갖출 계획이었으며, 유원지 밑의 고수부지 16만 5천 평엔 유료 캠프 시설을 갖춰 물이 불지 않을 때는 어린이와 어른이 캠프를 치고 놀 수 있게 할 계획이었다41). 그러나 뚝섬에 대규모 유원지를 만들려던 박정희 대통령과 서울시의 계획은 홍수 때의 한강 유량 조절을 위한 하폭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않는다42).
1971년 3월 2일 서울도시계획공원이었던 뚝도공원(2,446,900 m2)의 일부는 유원지(809,910m2)로 변경된다43). 이로써 뚝섬공원은 도시계획시설로서 유원지가 되지만 1980년까지 뚝섬유원지는 예전과 같이 수영장이 주요 시설인 유원지로 운영된다(Kang, 1980: 66-67).
이렇듯 1960~1970년대 민간 자본을 유치해서 대규모 유원지를 만들고, 이를 통해 도시개발을 촉진하려던 지속적인 시도는 구현되지 않으나,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6년 10월 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가 조성된다. 이때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 배구장, 롤러스케이트장, 수영장 등의 운동시설, 산책로 등 기반 시설, 어린이놀이터, 공연장, 자연초지(잔디), 주차장 등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이 갖춰졌다(Gwangjingu, 1997: 427), 한강종합개발사업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강 좌우 강안을 정비하여 한강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도시녹지 체계를 정비하고, 오늘날 서울시 전역을 아우르는 동서 간선망(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을 구축해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제1, 2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강남 지역이 서울에 실질적으로 편입되고, 한강의 위상은 ‘경계하천’에서 ‘관통하천’으로 변모하게 된다(Yang, 1985: 15; Kim, 2017: 84-88). 이렇게 서울의 도시 구조가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뚝섬유원지는 서울의 공원녹지 체계에 완전히 편입되어 공원이 된다.
공간 변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광복 이후 공원 혹은 유원지로 지정된 면적은 점차 늘어났으나,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구불구불했던 한강이 직선화되면서 유원지의 배경이 되었던 넓은 백사장은 사라졌고, 사실상 현재 시민들이 향유하는 오픈스페이스의 면적은 과거에 비하면 줄어든 셈이다. 또한, 뚝섬 일대가 완전히 도시화되면서 과거의 전원적 풍경도 사라졌다(Figure 9 참조).
Source: a: Nam ed., 1996, b: National Archives of Korea, c: Seoul Museum of History, 2006, d: 2015ㆍ2016 topographic map. Rearranged by author
현재 뚝섬한강시민공원은 한강의 둔치 즉, 하천부지를 점용해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2009년 ‘한강르네상스 기본계획’에 따라 리노베이션되었다. 과거 유원지의 기억은 “뚝섬유원지의 성격을 살린 어린이 테마 공간” 등 현재 공원 설계의 주요 콘셉트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결과, 수영장 시설, 놀이시설, 그리고 수상스포츠 공간 등이 계획․조성되었다(Yooshin and Isan, 2008: 59).
1950년대 뚝섬유원지의 풍경은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지옥화’(Shin, 1958)는 1950년대 전후 서울의 실제 풍경과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식으로 촬영해 기록적 가치가 높은 영화다44). 영화의 두 주인공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람을 쐬러 나가는 장소가 뚝섬유원지다. 영화 속에서 택시를 타고 유원지로 가는 길에는 궤도차가 다니고 있다(Figure 10 참조). 뚝섬유원지에 도착하면 한강에는 배들이 떠 있고 포플러 숲에는 천막으로 만든 휴게 시설과 간이매점이 곳곳에 차려져 있으며, 그 사이를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다(Figure 11 참조). 한강 앞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을 속삭인다. 영화 속에서 뚝섬유원지는 일상에서 벗어난 휴양지로 묘사되고 있어, 1950년대 후반 뚝섬 일대 교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60년대 초반까지 뚝섬 일대는 포플러와 버드나무, 한강의 백사장이 대표적인 경관이었으며, 주변에는 과수원과 채소밭이 펼쳐져 있었다(Figure 12〜14 참조).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뚝섬 일대가 도시화되면서 포플러숲, 모래사장, 과수원 등 주변의 전원적 요소도 점차 사라지고, 버스가 대중화되면서 경성궤도의 노선도 철거된다. 그럼에도 1960년대 뚝섬유원지는 “비교적 깨끗한 물과 넓은 놀이터에 시원한 나무그늘”과 베이비골프장, 탁구장, 당구장, 실내축구장 등 “각종 시설이 갖춰져 있어 여름철 서민층에 가장 인기 있는 곳”이었다(Figure 15 참조). 또한, 보트를 대여할 수 있으며, 여전히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봉은사에 갈 수도 있었다45). 한강의 다른 구역에 비해 물이 깊지 않아서 1970년대까지 ‘안전 유원지’로 불리기도 했다46).
1970년대까지 뚝섬유원지가 지도와 단속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식민지기 공공의 관리 방식은 광복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영장에서의 남녀학생 간에 벌어지는 문란한 풍기를 막고 학생들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여학생 수영장을 마련하거나47), “불량배들이 날뛰지 못하고 명랑한48) 놀이터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형사를 배치하기도 했다49). 여름이면 여름 경찰서가 설치되었고, 위생 및 풍기문란과 폭력 등이 주요 단속 대상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개발로 인한 수질 오염으로 한강의 수영장이 하나 둘씩 폐쇄되고 뚝섬이 유일한 수영 허가 지역으로 남게 되지만 점차 뚝섬마저도 외면받기 시작한다.
여름경찰서 앞 길이 1km 폭 30m의 강변에 허가된 이 수영지역은 “그래도 한강에서는 깨끗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금속에 오염된 기형어가 잡히는 등 한강 전체가 안고 있는 심각한 공해와는 절대 무관할 수 없는 곳.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너무나 더러워” 찾지 않는 뚝섬이지만 유료 수영장을 찾아갈 수 없는 서민들에게는 별 부담 없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작년 8월 한참 무더울 때는 하루 10만여 명씩 붐볐다. 그나마 올해 개장될 수 있었다는 것만도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50).
뚝섬유원지는 1980년대 중반 한강에서 수영이 금지되기 전까지 서울 시민의 놀이터 역할을 했다. 또한, 뚝섬유원지는 공중도덕과 안전을 교육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공공이나 시민들이나 공원의 공공성을 경험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강종합개발로 한강 둔치가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면서 뚝섬유원지도 한강시민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어 개장한다. 한강변의 모래사장은 사라졌지만, 노천 수영장, 캠핑장, 보트놀이 등 과 거의 시설과 행위들은 현재까지도 공원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있다.
뚝섬 일대의 도시화가 일단락되면서, 과거 뚝섬유원지가 제공했던 ‘전원’ 즉, 가벼운 마음으로 도시를 벗어나 교외의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는 유원지의 매력, ‘환상’도 상실한다. 과거 뚝섬유원지에서 제공했던 동적 레크리에이션은 공원에서 일상적으로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뚝섬유원지에서 뚝섬한강공원으로의 변화는 서울의 도시화 과정의 산물인 동시에, 유원지와 공원의 습합 과정을 보여준다. 뚝섬유원지에서 시민들이 경험했던 주요 프로그램은 오늘날 공원 등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레크리에이션의 일종이다. 도시의 공원녹지가 정비되어 그 양이 증가하고, 공공이 운영하는 공원에서 동적 레크리에이션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시점, 민간 유원지의 경향도 변화한다. 이 시기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유원지는 유기 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어뮤즈먼트 파크 형태로 변모해 간다. 경기도 과천의 서울대공원(1984), 서울랜드(1988), 강북구 번동의 드림랜드(1987), 그리고 복합 문화 소비 공간인 송파구 잠실의 롯데월드(1989) 등이 이후 대표적인 시민들의 도시 오락 공간으로 역할을 했다.
V. 결론
본 연구는 뚝섬유원지가 어떠한 도시․사회적 맥락 속에서 조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결과 조성된 유원지의 경관과 문화적 특성을 알아보았다. 더불어 광복 이후의 변화를 추적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유원지가 광복 이후에 어떻게 변형되고 이용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의 동쪽 바깥에 있던 뚝섬 일대는 국마를 기르던 목장과 진상용 채소를 기르던 내농포가 있던 곳이다. 국유지가 대부분이었던 한적한 교외인 뚝섬 일대에 유원지가 조성된 시점은 1930년대 중반이다. 1913년부터 조선총독부는 한강의 범람원이었던 이곳에 제방을 쌓아 넓은 농경지를 만들고 과수원 등으로 활용했다. 1930년대 경성이 팽창하면서 왕십리와 뚝섬을 연결하는 노선을 운영하던 사설 철도인 경성궤도는 1933~1934년 뚝섬에 수영장과 부대시설 등을 갖춘 유원지를 조성한다. 뚝섬유원지 조성은 철도 주변에 유원지와 전원주택을 개발했던 일본의 민간 철도 회사의 경영 방법을 모범으로 하고 있다.
당시 뚝섬유원지의 경관은 넓은 들판과 한강의 모래사장, 제방의 포플러 숲 등으로 대표된다. 뚝섬유원지의 경험은 궤도차를 타고 일련의 풍경을 감상하며, 새로운 경관과 이미지, 장소를 만나는 총체적인 것이었다. 특히 뚝섬 일대의 농업 경관은 대중매체를 통해 도시와 대비되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으로 묘사되었다.
수영과 보트놀이가 주요 프로그램이었던 뚝섬유원지는 경성 서민들의 대표적인 여름 피서지로 떠올랐다. 조선 시대 한강에서의 물놀이가 자유로운 놀이였다면, 식민지기 한강의 물놀이는 유원지라는 근대적 시설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유원지는 경성궤도라는 민간 기업이 운영했지만, 경성부에 의해 그 시기와 구역, 허용되는 행위 등이 관리되는 계도의 장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뚝섬 일대는 서울의 행정 구역 안에 편입된다. 일본인이 운영했던 경성궤도가 서울시에 귀속되면서 뚝섬유원지 역시 서울시에서 운영하게 되고, 1958년 뚝섬유원지는 공원으로 지정된다. 1960년대부터 뚝섬 일대가 도시화되면서 지속적으로 뚝섬유원지를 종합공원화하거나 대규모 유원지로 개발할 계획이 수립되지만 구현되지 못하다가 1971년 뚝섬(뚝도)공원은 도시계획시설로서 유원지로 지정된다. 구획정리사업과 강변도로 건설, 한강종합개발사업의 결과, 뚝섬유원지는 1980년대 한강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한다.
광복 이후에도 뚝섬유원지는 식민지기의 운영과 이용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서민들의 수영장으로 이용되었던 뚝섬유원지는 공중도덕과 안전을 교육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공공이나 시민들이나 공원의 공공성을 경험하는 공간이었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완료된 1980년대 후반 시민공원으로 재탄생한 뚝섬유원지는 한강변의 모래사장은 사라졌지만, 노천 수영장, 캠핑장, 보트놀이 등 과거의 시설과 주요 활동들이 현재까지도 주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있다.
뚝섬은 유원지로 불렸지만 광복 이후에는 사실상 공원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뚝섬유원지는 광복 이후 관리 주체가 민간에서 관으로 넘어가고, 뚝섬 일대에 대한 도시계획이 시작되면서 공원화된다. 민간이 운영하는 시설이었지만, 공공의 관리를 받던 공간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공원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으며, 서울의 교외이자 이후 도시를 관통하는 한강 변이라는 지리적 위상이 공공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 뚝섬유원지의 주요 프로그램은 오늘날 공원 등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레크리에이션의 일종이다. 그 이전 자연보호와 보건, 휴양에 초점을 맞췄던 공원이 점차 동적 레크리에이션의 장이 되어 가고, 유원지가 제공하던 ‘환상’이 사라짐에 따라 뚝섬유원지도 자연스럽게 공원화된 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뚝섬유원지는 행정력이 갖춰지지 못했을 때 민간에서 만들어진 유원지가 공원의 프로그램 확대로 인해 공원이 되는 과정도 보여준다. 공원이 양적으로 증가하고 프로그램이 확대되는 시점에 도시 속의 유원지도 어뮤즈먼트 파크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과거 뚝섬유원지가 제공했던 ‘전원’ 즉,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을 벗어나 교외의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는 강변이나 계곡 등의 장소에 대한 욕구는 이후 미사리나 양수리, 청평유원지 등에서 충족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으며,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좀 더 원거리의 장소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교통과 여가 공간의 재편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는 향후 연구과제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