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최근 도시에서 근대 건축물을 비롯한 산업유산, 문화유산 등 기억의 경관(landscape of memory) 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경향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의 배경에는 근대 역사의 흔적을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역사적 관점의 등장, 기능을 다한 산업시설 및 인프라스트럭처의 효율적 재활용, 도시민을 위한 공공 공간의 필요성 증가 등이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뒤스부르크-노르트 파크(Duisburg-Nord Landscape Park)는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의 선구적 사례가 되었고(Braae, 2015: 10-12),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High Line) 은 도심의 거대 인프라를 활용한 새로운 오픈 스페이스로서 수많은 이슈를 낳는 영향력 있는 경관을 형성했다. 근대기 동양의 파리라 불렸던 중국 상하이는 20세기 초 제국주의에 의해 형성된 조계지역에 남겨진 식민 지배의 흔적과 구 사회주의 경관을 도시재생에 활용하기도 했다(Han, 2011). 국내에서는 최근 새로운 공공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는 서울역 고가공원, 세운상가, 마포문화비축기지 등을 관련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기억을 보존하는 공간 매체로서 경관1)은 산업유산, 근대 문화유산,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 근대 역사 경관 등 다양한 용어로 지칭된다. 여러 유형의 기억의 경관 중 근대 역사 경관(modern historic landscape) 은 역사적 관점에서, 특히 주로 민족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보존과 철거 사이의 극단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경관이다.2) 대부분 19∼20세기에 형성된 근대 역사 경관에는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와 침략, 분쟁, 국가 간 대규모 전쟁 등의 기억이 남아있는데, 오늘날 이러한 기억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더 큰 범주에서는 도덕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평가된다. 부정적 기억을 가진 특정 근대 역사 경관은 역사적으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곧 경관의 가시적 철거와 보존 간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대립 과정에서 부정적 기억을 담고 있는 근대 역사 경관을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철거할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논의와 담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오늘날 근대 역사 경관을 두고 벌어지는 보존과 철거 사이의 논쟁은 어떻게 촉발되었는가? 1990년대에 이르러 냉전 체제가 와해되고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등 세계적 영향력을 지녔던 기존 이데올로기 질서가 재편되었고,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을 이룬 근대 시기 제국주의 피지배 국가들의 식민지사 청산이 활성화되었다. 이 두 종류의 거대한 변화는 부정적인 역사로 인식된 기념물과 장소, 경관들의 적극적 철거로 이어졌다. 1989년 붕괴된 독일 베를린 장벽을 시작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던 레닌 동상들이 세계 곳곳에서 철거되었다. 1995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인 서울의 구 조선총독부가 철거되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유행처럼 조성된 다수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과 낙후된 시설을 활용하여 재활성화하는 도시재생 정책의 전개는 1990년대 이데올로기의 재편과 식민지사 청산에 기반한 기념물, 장소, 경관의 철거 대신 보존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웠다. 수많은 근대 역사 경관이 보존의 대상으로 부상했으며, 기존 역사 연구에서 소홀하게 여겨졌던 근대사와 일상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90년대 당시 적극적으로 철거되던 근대 역사 경관들의 일부가 “네거티브 헤리티지 (negative heritage)”로 보존되었다(Rico, 2008). 새로운 문화유산의 유형으로서 갈등과 트라우마, 재난조차도 기념의 대상으로 보는 “네거티브 헤리티지” 개념은 변화하고 있는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도덕적으로 판단되어야 할 부정적 기억을 담고 있는 근대 역사 경관은 그 부정적 속성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변화 가운데에도 여전히 철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3) 결국 오늘날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사이의 논쟁은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부정적 근대사의 잔재 철거와 근대 유산의 가치 제고에 따른 보존 경향의 충돌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근대 역사 경관은 도시재생의 주요 요소로 활용되며, 새로운 도시 경관을 형성하는 매체로 기능하기 때문에 조경․도시․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하는 대상이다. 특히 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이슈화되는 역사적 사실과 기억에 대한 논쟁은 반드시 연구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수많은 역사적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사이에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의 상징이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논쟁에 주목한다. 구 조선총독부는 근대 역사 경관 다수가 보존되는 최근의 경향과 달리 활발한 철거 논쟁이 벌어졌던 건물로 약 20년 전의 사례이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풍부하고 다양한 논쟁의 내용이 축적된 사례이며, 근대적 기억의 보존에 치우쳐 있는 최근의 관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적절한 대상이다. 또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북한산-경복궁-육조거리-남대문-남산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의 도시 축을 가로막고 조선총독부-경성부청-남산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적 공간 질서를 상징하는 대표적 경관(Kim, 2007) 의 중심 건물이라는 점에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논쟁을 다룰 수 있는 적절한 사례다. 본 연구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을 사례로 근대 역사 경관을 둘러싼 보존과 철거, 복원과 해체 사이의 쟁점을 결정짓는 사회적 배경과 가치 기준을 도출한다.
본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철거된 1995년을 중심으로 전후 약 10년간의 신문기사, 동영상, 관련 문헌 등을 중심으로 국내 여론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과 관련된 주요 사회적 배경과 가치 판단 기준을 도출하여 오늘날 근대 역사 경관의 가치 판단 양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주요 자료 중 신문기사의 경우 ‘조선총독부 철거’를 키워드로 검색한 1980∼ 1999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기사 중 철거 논쟁 및 사회적 배경과 관련 있는 기사 493건과 추가로 필요하다고 판단된 2000년 이후 관련 기사 6건을 참고하였다. 동영상 자료로는 1991년 KBS와 MBC에서 방영된 철거 논쟁 관련 토론 프로그램과 1995년 건물 철거 당시 뉴스 보도 자료를 참고하였다. 관련 문헌으로는 1990년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문제를 다룬 논문 및 저서와 200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연구 논문을 주로 참고하였다(Ⅱ장 2절 참조).
먼저 Ⅱ장에서는 본 연구의 대상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간략한 역사를 짚어보고,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철거 논쟁의 주요 전개 양상과 관련 연구를 살펴봄으로써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와 관련된 가치 판단 연구에서 이 사례가 갖는 적절성을 검토한다. Ⅲ장에서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가 정책적으로 결정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친 주요 쟁점과, 오늘날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논쟁 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시사점을 도출한다. Ⅲ장의 논의를 바탕으로 Ⅳ장에서는 보존과 철거 논쟁의 전개 과정에서 형성되는 근대 역사 경관의 주요 가치 판단 기준을 상징과 기능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그리고 논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근대 역사 경관의 상징적 가치와, 이를 보완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기능적 가치의 전개 양상에 대해 탐구한다.
II.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를 판단하는 주요 가치 기준과 사회적 배경을 탐구하기 위해 우선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의 상징적 경관인 구 조선총독부의 철거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한일합병과 동시에 세워진 일제강점기의 최고 식민통치기관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남산 왜성대에 위치한 통감부 건물을 총독부로 사용하였으나, 1926년 광화문 및 일부 전각들을 허물고 경복궁 앞으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Figure 1, 2 참조) 은 1945년 광복 이후 캐피탈 홀(Capital Hall) 이라 불리던 명칭을 번역하여 ‘중앙청’으로 불리며, 미 군정 및 대한민국 정부 기관의 주요 건물로 이용되었다. 19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때 폭파 및 해체가 시작되어 이듬해 말 완전히 철거되었다.
Source: Seoul History Archives ‘The Bird's-Eye View of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museum.seoul.kr/archive)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1945년 광복 직후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제기되었으나, 당시의 관공서 건물 부족 및 철거 비용 부담, 기술 부족 등을 이유로 건물 철거가 계속 미루어졌다(Lee, 1990). 입지와 규모 면에서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이 건물은 1945년 광복 직후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거행되는 등(Figure 3 참조)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로 자리잡게 된다.
Source: National Archives of Korea ‘Declaration Ceremon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1948.8.15.)(http://theme. archives.go.kr)
철거 논의가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1966년 개보수 후 정부청사 건물로 이용되다가(Figure 4 참조) 19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 시기 과거 경복궁의 원형 관련 자료들이 발견되면서 경복궁 복원 논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경복궁 복원이 결정된다면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조선총독부 건물의 존재는 복원될 경복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철거가 본격적인 정부 정책으로 논의되던 1990년대 초의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정책 추진 방향과 국민적 정서는 대체로 건물 철거로 기울었으나(Dong-A Ilbo, 1993. 8. 10), 철거 비용 문제,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문제, 건물을 통한 일제강점기 역사 보존 및 교육 주장 등에 기반한 반대 여론도 있어 지속적인 철거 찬반 논쟁 (Dong-A Ilbo, 1990. 12. 4; Hankyoreh, 1991. 6. 21; KBS, 1991. 3. 1; MBC, 1991. 3. 3; 1991. 8. 24)과 철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전 절차에 따른 총독부 선철거-박물관 선건립 논쟁 등이 우후죽순처럼 제기되었다.
당시 이 건물의 철거를 주장한 사람들은 철거를 통해 일제 잔재와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꼽았다면, 철거 반대 측은 막대한 철거 비용 및 박물관 신축 비용의 문제, 이 건물이 근대사의 주요 유물이라는 점 등을 반대 이유로 꼽았다. 당시 건축가 장세양은 조선총독부 건물의 향방에 대하여 “1. 현 위치 보존, 국립중앙박물관의 기능 유지, 2. 현 위치 보존, 일제 침략사관으로 활용, 3. 철거, 4. 이전”(Dong-A Ilbo, 1990. 12. 4) 을 꼽았는데, 이는 당시 사회에서 최대한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건물의 보존 및 철거 방향이라 볼 수 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과 관련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체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1995년 이전의 연구로, 이 건물의 철거 혹은 보존을 지지하거나 건물 이전 등 기타 대안을 제시한 연구들이다. 국사학자 이현희는 1990년대 초부터 신문 등 여러 언론을 통해 “몰골 사나운 식민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적극 지지했으며, 당시 대중들에게 속설처럼 알려져 있던 북악산-조선총독부-경성부청으로 이어지는 ‘대일본(大日本)’ 형상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태도를 비판했다(Lee, 1990). 또한 그는 1945년 광복 당시에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이 건물의 철거를 주장하였으나, 당시 관공서 건물 부족과 재정적․기술적 문제로 이를 철거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며 건물 철거를 민족적 과제로 제기하였다. 비슷한 시기 건축학자 주남철 또한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심으로 한 ‘대일본(大日本)’ 상징설, “악의적으로 계획된” 일제 식민 지배하의 도시 체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일본인 관광객 문제, 일본 메이지건축연구회의 건물 철거 반대 등을 근거로 들며, 이 건물의 철거를 적극 주장했다(Ju, 1991).
한편, 송민구는 건물의 위치를 주요 문제로 지적하면서 건물의 양식사적 중요성과 해외 유사 사례를 참고로 하여 철거 대신 이축을 제안하기도 했다(Song, 1991). 이상해는 건물의 즉각 철거를 반대하면서, 신중한 검토를 통한 건물의 활용 방안 논의가 필요함을 주장했다(Lee, 1991). 특히 당시 건축계와 미술계에서 철거 반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들의 주요 반대 논거는 건물의 건축 양식적 가치와 근현대사적 중요성, 국립중앙박물관의 졸속 이전에 따른 문화재 관리 문제 등이었다(Jeon, 1995).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후에도 동일한 이유로 건축계와 미술계의 비판은 지속되었다. 예컨대 양수현은 조선총독부 철거를 애국주의나 국가주의에 지나치게 매료되어 가치 있는 역사적 건축물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지 않고 무조건적 철거를 단행한 비판적 사례로 지적했다(Yang, 1998).
두 번째 유형으로는 건축, 경관, 도시, 역사,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조선총독부 철거를 사례로 살펴본 연구들을 들 수 있다. 먼저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이 본격화된 1990년대 초, 임창복은 총독부 건물 철거 및 경복궁 복원 이슈를 주제로 역사 도시와 경관을 논의하면서 문화재를 중심으로 경관이라는 총체를 해치지 않는 건축 및 도시 개발이 필요함을 역설했다(Yim, 1992). 총독부 철거 후 건축 분야에서는 장홍희가 경복궁 복원을 사례로 한국 전통 건축의 의미와 복원 방식에 대해 논의하였고(Chang, 1996), 박혜인․김현섭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계기로 근대 건축물과 장소성의 의미에 주목하게 된 한국 건축계의 의식 변화를 탐구했다(Park and Kim, 2010).
역사적 측면에서는 사회학자 김백영이 조선총독부 철거를 중심으로 조선신궁, 경성부청, 서대문형무소 등의 사례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도시 및 건축, 문화재 관련 계획을 검토하였다(Kim, 2007). 김백영은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 권력의 공간 정치를 피식민 대중의 민족적 반감을 회피하려 했던 성향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고, 이러한 일제의 도시 계획 전략이 해방 이후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형성된 집합적 복수의 정서로 인해 풍수적 단맥설 등 악의적이고 치밀한 민족 말살 및 공간 파괴의 전략으로 대중적으로 왜곡되어 인지되었다고 지적했다. 정치학 분야에서는 하상복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보존 및 철거 관련 이슈가 쟁점화되고, 체계 의제 (systemic agenda)를 거쳐 정부의 공식 의제 (formal agenda)로 진입하게 되는 의제 형성 (agenda- building) 과정에 대해 탐구했다(Ha, 2011).
이상의 관련 연구 검토를 통해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갈래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및 보존 관련 연구들은 철거 논쟁 과정에서 파생된 근대사, 건축사, 문화재, 도시계획, 이데올로기, 재정 문제 등 많은 가치 층위를 보여준다. 여러 학계에서 보존 및 철거에 대한 주요 논거를 제시하고 관련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는 점은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 관련 사안의 다학제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특히 조선총독부 철거 관련 논쟁은 약 20년 전의 일이지만, 여러 분야에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풍부하고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 및 철거 양상에 대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갈래의 연구들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사례가 오늘날에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조선총독부 철거와 경복궁 복원이라는 주제는 최근 도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근대 건축물의 보존과 복원, 그리고 이와 관련된 도시재생 및 문화 경관 등의 내용이 모두 포함된 주제다. 또한 관련 논쟁이 건축, 경관 및 도시 관련 연구에만 국한되지 않고, 철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폭넓은 분야에서 사례로 다루어졌다는 점은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에 내포된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가치 기준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음을 시사하며, 오히려 오늘날에는 논쟁 당시보다 더 객관적인 시선과 다양한 관점으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라는 주제를 검토해 볼 수 있다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III. 논쟁의 쟁점과 시사점
이 장에서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의 주요 주제를 쟁점별로 도출하였다. 도출된 주요 쟁점은 오늘날 보존과 철거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근대 역사 경관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시사점을 갖는다. 관련 자료(Ⅰ장 2절 참조) 분석을 통해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 및 가치를 쟁점별로 구분하면 Table 1과 같다.
1995년 건물 철거 이전까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구 조선총독부 건물) 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였다. 이 주소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위치한 자리가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위치였음을 보여준다. 약 500년간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일부를 헐고 그 자리에 세워진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상징성은 거대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현재도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세종대로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상징적인 가로이며, 또한 ‘국가상징거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치의 상징성은 철거론의 가장 중요한 논거로 작용했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서울의 주요 건물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이외에도 많다. 예를 들어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대표적인 건물만 살펴보더라도 구 서울역사 (사적 제284호), 구 서울특별시청사 (등록문화재 제52호),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구 대법원 청사 (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등록문화재 제237호), 구 제일은행 본점 (시도유형문화재 제71호), 구 서대문형무소 (사적 제324호) 등이 있다(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이 건물들 중 구 조선총독부는 명백히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1945년 광복 후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 중 구 조선총독부 건물만큼 뚜렷한 철거 주장이 제기된 경우가 없었으며, 신문에서 ‘일제 잔재’를 다룬 대부분의 기사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총독부 건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Jeong, 1995: 25).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광화문을 이전하고 경복궁 전면을 헐어낸 뒤 경복궁을 완전히 가리는 형태로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드러나는 일제강점기의 상징성을 부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건물 철거 직전인 1995년까지도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심으로 세종대로 일대에 형성된 일제강점기의 상징적 풍경은 건재했다. 한 신문기자는 1995년 조선총독부 철거 전 광화문 네거리에서 본 풍경을 기록하며, “위쪽으로는 조선총독부 건물, 아래쪽으로는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 경성부 청사 (당시 서울시청), 그리고 그 길로 쭉 가면 나타나는 경성역 (당시 서울역) 의 풍경은 일제강점기의 영화를 찍기 위한 세트장으로도 무리가 없으며, 광화문 네거리에 서면 죽은 글을 통한 역사 공부가 아닌 ‘날 것’의 역사 자료를 통한 현대사 공부가 가능할 것”(Jeong, 1995: 17) 이라 표현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상징성은 본 건물의 위치와 형태에 기반한 풍수지리적 논란으로도 연결된다. 1927년 일제가 발행한 <경성시가도(京城市街圖)>에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완성된 조선총독부(1926), 경성부청 (1926), 경성역사 (1925) 등의 배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완공된 조선신궁(1925)과 연결됨으로써, 조선총독부-경성부청-남대문-서울역-용산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시축의 형성과 기존 조선의 정신적 상징축이던 경복궁(북악)-국사당(남산) 축을 없애고 만든 조선총독부-조선신궁(남산) 이라는 새로운 축의 모습을 보여준다(Seoul Map Museum. <Gyeongseong Sigado>). 특히 이 상징축상에 위치한 건물 중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은 각각 한자로 ‘일 (日)’과 ‘본(本)’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하고 있어, ‘대(大)’를 상징하는 북악산과 합쳐져 순서대로 ‘대일본(大日本)’을 형상화한다는 비판을 거세게 받았다(Lee, 1990; Dong-A Ilbo, 1990. 12. 6; Kyunghyang Shinmun, 1993. 4. 9; Chosun Ilbo, 1993. 8. 23; City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Seoul, 2002: 19).4)
물론 최근 연구에 따르면 ‘쇠말뚝’ 논란과 더불어 조선총독부 건물이 조선의 기맥을 가로막고 있다는 풍수지리적 논란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부정적 정서 때문에 대중적으로 다소 왜곡되어 인지된 경향이 있다(Kim, 2007). 그러나 일제강점기 초기 경성 시구개정사업 (1912) 을 기점으로 진행된 도시계획은 기존의 전통적 도시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도시 축을 형성하는 것이었던 만큼,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풍수지리 논란은 완전히 오해나 루머로만은 볼 수 없다. 이처럼 근대 역사 경관의 상징적 위치는 경관의 존폐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 후반 과거 경복궁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이 발견되면서 경복궁 복원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1987년 말 처음으로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우기 전에 만든 <한국건축조사보고>가 발견되면서 경복궁 본래의 전경을 담은 사진과 관련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기사는 “1912년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착공하며, 광화문을 옮기고 흥례문, 금천교를 없앴음”을 지적했다(Dong-A Ilbo, 1987. 12. 7). 이로부터 1년 뒤인 1988년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제가 망친 경복궁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계획이 발표되었다(Hankyoreh, 1988. 9. 20). 이렇게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경복궁을 비롯한 옛 고궁 건물들의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지만(Dong-A Ilbo, 1991. 1. 28), 사실상 경복궁 복원 논의 초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본격적인 철거 계획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당시 “노태우 정부가 총독부 건물 철거에 대한 의지는 가지고 있었으나, 정권 중반기라는 불분명한 시점을 지나는 상태에서 철거에 대한 충분한 상징성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Ha, 2011: 159-160)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복궁 복원 사업이 구 조선총독부 철거의 당위성을 제시할 수 있는 기폭제임에는 분명했다. 1990년 국사학자 이현희 교수 등이 경복궁 복원과 더불어 다시금 구 총독부 청사의 적극적 철거를 제기하며 논쟁의 불씨를 지폈고(Kyunghyang Shinmun, 1990. 9. 5; Hankyoreh, 1990. 10. 25; 1990. 11. 6; Dong-A Ilbo, 1990. 10. 27), 1990년 말부터는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및 이전을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Dong-A Ilbo, 1990. 12. 6; Chosun Ilbo, 1991. 1. 22; Kyunghyang Shinmun, 1991. 1. 23).
1986년 이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상징적인 민족 문화 유산의 건물로 재개장되면서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었다. 먼저 중앙홀 벽에 그려진 벽화가 일제 침략을 미화하는 일본 민담 이야기를 담은 ‘내선일체 벽화’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벽화는 “겉보기에는 우리나라 금강산을 배경으로 하는 전래의 <나뭇군과 선녀>를 주제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본의 후지산 (富士山) 을 배경으로 전래되는 일본 <하고모로(羽衣)> 설화를 내용으로 그린 것”으로, “이 같은 수치스런 벽화가 해방 후 중앙청으로 사용할 때부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돼 개관된 후에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게 된 것이다(Dong-A Ilbo, 1986. 10. 18). 또한 앞 절에서 다룬 조선총독부 건물의 풍수지리적 논란과 더불어 북악산-조선총독부-경성부청 건물의 ‘대일본(大日本)’ 형상화 비판은 역사적 논란과 연계된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논의와 비판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을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장하며 “영욕의 현장을 영원한 민족의 교훈으로”(Kyunghyang Shinmun, 1982. 3. 16; Dong-A Ilbo, 1982. 3. 17; 1982. 3. 19) 삼겠다는 박물관 개장 당시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총독부 건물 철거와 박물관 이전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1994년이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정도 600년의 해”(Dong-A Ilbo, 1994. 1. 5) 이며, 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1995년이 “광복 50주년”(Chosun Ilbo, 1995. 8. 16) 이었다는 점에서 주요 역사적 과제들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에 해결하고 마무리하고자 한 당시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김영삼 정부는 대통령 취임 직후 1994년 초 ‘서울 정도 600년 사업’의 첫 단계로 “겨레혼 되찾는 경복궁 복원”을 꼽아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에 앞서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주요 정책으로 제시하면서 (Dong-A Ilbo, 1994. 1. 5) 역사적 중요성과 민족주의를 고취시킨다. 이듬해인 1995년 광복 50주년에는 당해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조선총독부 철거를 공포하며 3․1절 철거 선포식과 광복절 기념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식을 계획하고 시행함으로써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정권 과제 수행의 정점을 보여주었다(Dong-A Ilbo, 1995. 1. 1; 1995. 8. 16a; Kyung- hyang Shinmun 1995. 1. 1; 1995. 8. 16; Chosun Ilbo, 1995. 3. 2; 1995. 8. 16; Hankyoreh, 1995. 8. 16; MBC, 1995. 8. 15) (Figure 5 참조).
Source: National Archives of Korea ‘Remnants of the Old General Government Building in front of Gyeongbokgung Palace’(1996) (http:// theme.archives.go.kr)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과 관련하여 특히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얽혀있는 일본의 반응은 철거 논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198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란에 앞서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가 먼저 불거졌다. 1910년 총독부 건설 당시 광화문 철거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던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유종열)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문화훈장을 수여받은 학자로(Dong-A Ilbo, 1984. 9. 19), 일본 정부가 교과서에 실려 있던 그의 철거 반대 기고문인 “헐려짖는 광화문”을 일본 고교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침략 역사를 미화하면서 (Dong-A Ilbo, 1982. 4. 13; 1982. 7. 7) 역사 논쟁이 일어난다.
조선총독부 철거와 직접 관련된 일본의 개입 사건으로는 1991년 일본의 근대건축사연구회(메이지건축연구회)가 옛 총독부 건물의 보존을 한국 정부에 요청한 사건(Dong-A Ilbo, 1991. 6. 3; Hankyoreh, 1991. 6. 4) 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이 연구회의 총독부 건물 보존 요청은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이 아님에도 국민들의 상당한 공분을 샀다. 사설, 칼럼, 기고 등에서 즉각적으로 이 요청에 대한 거센 비판이 제기되었고(Dong-A Ilbo, 1991. 6. 4; 1991. 6. 16; Hankyoreh, 1991. 6. 15), 직후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일반 시민의 65%, 전문가의 77%가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거나 이전할 것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Maeil Business, 1991. 6. 14; Kyunghyang Shinmun, 1991. 6. 14).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인의 관광 명소이자 기념사진 촬영지라는 점 또한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일본인 관광객들이 총독부 건물을 찾아와 사진을 찍으며 흐뭇해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Hankyoreh, 1990. 11. 6), “자신들의 조상이 한반도를 통치하면서 식민지 지배 관청으로 썼던 웅장한 그 건물을 배경으로 해서 흐뭇한 표정으로 사진을 담아가는 일본인들을 볼 때면 씁쓸한 생각이 절로 든다”(Dong-A Ilbo, 1991. 6. 16), “입장객 1백만 돌파 기념 입장객이 일본인이라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Kyunghyang Shinmun, 1993. 5. 21) 등의 국민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심지어 철거를 며칠 앞두고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녀들과 함께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을 신문 기사에서 비판적 시선으로 다룬 것을 살펴보면(Dong-A Ilbo, 1995. 8. 4)(Figure 6 참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비판적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본격적인 건물 철거 시기가 다가오자 일본 주요 언론들 또한 철거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Kyunghyang Shinmun, 1994. 1. 27; Dong-A Ilbo, 1995. 8. 16b).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반응이 오히려 국내의 반일 감정을 더욱 부추기고 급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김백영은 이같이 일본의 개입과 반응에 민감하게 대립각을 세운 당시 국민들의 과열된 모습에 대하여 일부 왜곡과 오해에 의해 이루어진 “민족적 장소성의 재구성”이자 “집합기억의 발명”이었다는 비판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Kim, 2007: 188-191).
앞서 검토하였듯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은 해방 직후인 1945년 즈음에도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선례가 없는 거대한 석조 건물을 철거하는 비용과 기술을 충당할 수 없었던 당시의 열악한 경제 상황 때문에 잠정적으로 유보되었다(Lee, 1990). 1990년대에 이르러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조선총독부 철거 방침을 정하고, 이를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적 여건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정확한 비용을 추산하기는 어려우나 석조 건물을 철거하는 기술적 문제와 인접한 경복궁의 문화재 보호 문제로 인해 당시 비용으로 1백억∼1천억 원 가량의 철거 비용이 들 것이며,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신축하는 비용은 최소 1천억 원으로 추산되어 (Chosun Ilbo, 1993. 8. 11) 철거와 관련된 재정 부담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소요 비용은 조선총독부 철거 및 실측 조사․관련 교육 자료 제작비용 150억 원 (Ministry of Culture and Sports, 1993),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비용 4,100억 원 (Korean Economic Daily, 2005. 12. 25) 으로, 박물관 신축 비용의 경우 철거 전 추산한 비용을 훌쩍 넘어서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국민 모금 운동을 벌여서라도 건물 철거에 보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는 점이다. “옛 총독부 철거비용 모금운동을 크게 벌여 아직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옛날의 아픈 상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일본인들에게 보여주는 게 더 좋겠다”(Kyunghyang Shinmun, 1992. 10. 29), “철거에 드는 비용은 어려움이 많은 정부 예산에 기댈 것이 아니라, 직접 국민을 상대로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성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Hankyoreh, 1992. 12. 29) 등의 국민 의견이 제기된 것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는 모금을 통해서라도 이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음을 보여 준다.5)
1990∼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이 격화되던 시기 철거 반대론자들의 대표적 제안 중 하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일제침략역사관”, “일제침략사교육장” 등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Dong-A Ilbo, 1990. 12. 4; 1992. 12. 4; Hankyoreh, 1991. 6. 21). 보존론자들의 이와 같은 제안은 일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던 1986∼1995년에 일제강점기에 대한 전시가 운영된 적이 없으며, 또한 현재까지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전시실을 별도로 마련하고 있지 않다는 점 (National Museum of Korea 참조) 은 이 건물을 일제강점기 역사관으로 이용하자는 보존론자들의 제안이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안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박물관을 찾는 외국인 입장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간 1만 명의 일본인 입장객들의 주요 방문 이유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이해나 반성이 아니라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통해 경험하는 과거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일본의 민족적 자긍심 고취였다는 점에서, 이 건물이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충실히 설명하는 새로운 박물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을 것으로 짐작된다(Jeong, 1995: 26).
또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Figure 7 참조) 건물 철거 후 박물관 이전에 따른 국보급 문화재의 보관 및 이전 문제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Lee, 1993a; 1993b; 1993c; 1995; Hankyoreh, 1993. 11. 6).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선복 교수는 “과학의 발달로 박물관 소장품의 임시 보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국민을 호도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다”(Lee, 1993a: 72),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천사지 석탑을 비롯한 국보급 건조물과 지하수장고의 유물들이 폭파의 충격을 과연 견딜 수 있겠는가”(Lee, 1993b: 76), 또한 박물관 이전지로 거론된 용산가족공원에 대해서도 “하수도 역류로 인해 물바다가 된 곳으로서 해발고도가 12∼18m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 박물관을 짓는다면,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다 해도 유물 보존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Lee, 1993c: 80)며 거세게 비판하였다.
Source: National Archives of Korea ‘The Opening Ceremony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1986. 8. 21) (http://theme.archives. go.kr)
새 박물관 건물을 건립하기 전에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부터 추진하는 소위 ‘선철거-후건립’의 졸속 추진 또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후 새 박물관 건립은 1997년에야 시작되었으며, 실제 완공 및 개관은 2005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은 상당한 비판적 요인이었다. 실제로 “5천점 유물 5년간 셋방살이”(Hankyoreh, 1993. 11. 6), “부지 대책 없는 졸속추진 소나기 질타”(Hankyoreh, 1996. 10. 2) 등 박물관 유물 보관 및 이전 문제는 조선총독부 철거 사업을 전시 행정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이처럼 새 박물관 건물의 건립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총독부 건물 해체 이후에도 이에 관한 논란이 지속되었다. 용산 국립박물관 완공 이전까지 이용하던 경복궁 내 임시 박물관에는 비가 샜고(Chosun Ilbo, 1997. 5. 15), 유물 보존과 관련된 문제와 박물관 건립에만 치중할 뿐 학예사, 전시 유물 및 건립 과정에 참여하는 전문가가 부족한 문제 (Kyunghyang Shinmun, 1999. 6. 3)들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박물관 이전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졸속 추진이자 전시 행정”이라는 국민적 비난은 박물관이 완공된 2005년까지 계속되었다(Hankyoreh, 1996. 10. 2; Chosun Ilbo, 1997. 11. 27; Dong-A Ilbo, 2001. 9. 6).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이 전개되던 시기의 도시․역사․건축 정책 변화와 이에 따른 도시 공간의 재구성도 직간접적으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방침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역사 및 건축 관련 정책으로는 1980년대 후반 옛 고궁 건물 복원 정책 추진과 함께 진행된 일제강점기의 주요 건물 철거 작업을 들 수 있다. 먼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관사로 지어진 건물을 본관으로 사용하던 청와대는 대통령이 일제 총독의 관저를 집무실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대내외적으로 문제 어린 시선과 집무 공간 협소를 이유로(National Archives of Korea 참조) 이 건물을 철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대신할 새 본관을 준공한다(Dong-A Ilbo, 1991. 9. 4). 1992년 말에는 일본식 건물로 비판받던 창경궁의 장서각이 철거되었다. 장서각 철거 당시 동아일보는 “이로써 일제가 조선의 5대 궁을 훼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은 조선총독부 청사 (현 국립중앙박물관)만 남게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Dong-A Ilbo, 1992. 12. 30).
도시 관련 정책 변화로는 용산에 위치한 미 8군의 이전 계획 및 용산공원 건립 계획을 들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할 경우 그 위상에 걸맞은 지리적 위치와 충분한 부지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위치와 규모의 이점을 보완할 만한 부지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8년 용산 미군기지 이전 및 도시 공원화 계획이 발표되었고(Dong-A Ilbo, 1988. 8. 13)(Figure 8 참조), 관련 계획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철거된 후 이전할 만한 부지를 찾지 못하던 새 국립중앙박물관을 약 3만평 규모의 용산가족공원 부지로 입지시키는 방안이 제시되었다(Hankyoreh, 1993. 8. 11; Chosun Ilbo, 1993. 11. 6). 이에 따라 박물관 이전 부지 확보 문제가 해결된 구 총독부 건물 철거 계획이 더욱 본격화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실제로 새 박물관 건립 기간 동안 미군 기지의 이전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박물관 부지 확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현 용산가족공원 부지에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완공되었고, 이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완전히 이전하게 되었다.
IV. 근대 역사 경관의 형성과 가치 판단
Ⅲ장에서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을 쟁점별로 분류해 분석했다면, Ⅳ장에서는 도출된 주요 쟁점을 상징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으로 구분해(Table 1 참조), 이 두 가지 측면이 상호작용하며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 및 철거의 가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경관을 형성한 과정을 논의한다.
Ⅳ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전개된다. 먼저, 근대 역사 경관을 형성하고 보존 혹은 철거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징적 가치 간의 대립 양상을 살펴본다. 특히 근대 역사 경관은 ‘상징적’ 경관으로서 조선시대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 건축과 경관,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이라는 여러 상징적 가치 간의 대립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이 과정에서 동시대 사람들이 보다 선호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억은 곧 해당 경관의 상징적 가치가 된다. 다음으로 근대 역사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여러 비판에 대응하는 기능적 가치의 역할을 고찰한다. 근대 역사 경관에 담긴 많은 기억 중 중요한 기억들이 선별되고, 상징적 가치들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재정이나 건물의 용도와 같은 기능적 요소는 문제로 지적되어도 해결 가능하거나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기능적 가치는 근대 역사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하므로, 근대 역사 경관의 형성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항목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보호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유형문화재의 가치는 크게 역사적 가치, 예술적 가치, 학술적 가치로 구성되며(Cultural Properties Protection Law, No. 15065-2. Implementation in 27, Nov. 2017), 이외에 문화재 보존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추가적 요인으로 상징적 (또는 정서적) 가치와 사회경제적 가치를 들 수 있다(Lee, 2017: 50-61). 여기서 상징적 가치란 “특정한 사회적, 문화적, 시대적 상황 내에서 평가되는 가치로서 공동체적 또는 민족적 감정이나 국가적 정체성 등과 같이 해당 사회 구성원이 문화재를 통해 지니게 되는 물질적․정신적 연대감이나 공통된 정서와 감정”(Lee 2017: 57) 으로, 문화재가 특정 사회 구성원에게 제공하는 유형적․무형적 연대감을 일컫는다.
이 상징적 가치는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사이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근대 역사 경관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를 담고 있어 고대․중세 문화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역사적 가치와 학술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기 쉽다. 최근 1∼2세기 사이에 형성된 근대 역사 경관이 수백 년 이상 내려온 전통적 문화재보다 높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란 상당히 어려우며, 특히 만들어진 지 50년이 채 되지 않은 경우, 문화유산으로서 인정받는 것조차 쉽지 않다. 또한 경관이라는 유형적 특성 때문에 예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기에도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상징적 가치가 다른 가치들보다 중시되는 본질적 이유는 근대 역사 경관이 ‘근대’라는 시기의 기억을 담고 있는 기억의 경관(landscape of memory) 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근대 역사 경관이 담고 있는 근대의 기억은 현 세대가 직접 경험한 기억, 그리고 현 세대와 직접 관련이 있는 손윗 세대가 경험하고 전승된 기억이므로, 이러한 기억을 담고 있는 경관에는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평가가 이뤄지기 쉽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근대 역사 경관의 상징적 (정서적) 가치에는 시대 상황이 중요하게 반영되기도 한다. 즉, 이전에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기억이 오늘날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거나, 반대로 과거에는 사소하게 치부되었던 기억이 오늘날 상당히 주목을 받게 되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1995년 조선총독부 철거 당시만 하더라도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던 풍수지리 논란은 오늘날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또한 당시에는 근대 역사 경관 보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지 않았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공장이나 고가도로와 같은 산업 시설들까지도 보존의 대상으로 상정되는 경우가 많다.
구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에서도 상징적 가치의 중요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논쟁은 언뜻 보기에는 민족주의적 역사 복원 및 반일 정서로 대표되는 상징적 측면과 재정 부담 및 박물관 졸속 이전 등으로 대표되는 기능적 측면의 대립 논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조선총독부 건물의 보존과 철거를 판단하고 결정한 중요한 논쟁은 ‘상징’과 ‘상징’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옹호론자들의 주요 주장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고 경복궁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를 복원할 것, 그리고 이 건물이 표징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반일 정서가 주된 내용을 차지한다. 반면 철거 반대론자들은 이 건물에 담겨 있는 해방 이후 근대사의 역사적 가치와 건물의 양식적․건축사적 가치에 주목한다(Jeon, 1995). 건물의 철거 반대에 앞장섰던 건축계와 미술계 전문가 이외에 일반 국민들 중에서도 이 건물을 “치욕의 박물관으로 보존하자” (Dong-A Ilbo, 1992. 12. 4)는 의견이 있었으며, 이 건물이 철거되던 1995년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건물 철거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Chosun Ilbo, 1995. 7. 22),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접수” (Chosun Ilbo, 1995. 8. 15; Ministry of Culture and Sports and National Museum of Korea 1997: 367-368)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개진된 반대 의견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반대 의견 내에는 종합적으로 이 건물이 해방 이후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어 온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념물”(Chosun Ilbo, 1995. 8. 1) 이라는 상징적 측면이 반영되어 있다.
상징적 측면은 곧 상징적 가치라는 용어로도 대체할 수 있다. 이 측면은 결국 근대 역사 경관의 전체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징적 측면이 기능적 측면에 앞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를 결정지은 주요 요소라는 점은 명확하다. 하상복(Ha, 2011) 이 지적하였듯이,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모두 조선총독부 철거 및 이전 문제를 정책적 차원에서 논의하였으나,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볼 수 없던 적극적 관심 표명과 개입이 김영삼 정부 시대에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해당 사안의 성격 규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6) 즉, 노태우 정부에서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새로운 국립박물관 건립의 진행 절차와 재정 문제 논의에 치우쳐 이 계획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면, 김영삼 정부에서는 총독부 철거가 ‘신한국’과 ‘개혁’이라는 정권의 공식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역사적 당위성을 획득함으로써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Ha, 2011: 160).
이처럼 근대 역사 경관의 형성은 주로 상징적 가치에 의해 이루어지며, 특히 경관의 보존과 철거를 결정짓는 주요 논쟁은 사실상 상징과 상징의 가치 대립으로 나타난다. 처음 형성될 당시 이데올로기의 구현이나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에 의해 형성된 근대 역사 경관이 시간이 지나 보존 혹은 철거가 논의되는 새로운 시점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나 역사와 같은 상징적 측면에 의해 경관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 역사 경관이 보존 혹은 철거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어떤 상징적 가치가 다른 상징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는가를 나타낸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상징과 상징의 대립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역사와 역사의 대립이다. 여러 관련 문헌에서 볼 수 있듯이, 철거 찬성론자들은 해방 이전의 일제강점기 역사, 특히 이 시기에 파괴된 ‘조선시대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철거 반대론자들은 해방 이후 근현대사를 조선시대의 역사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결정은 곧 경복궁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역사가 해방 이후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이 표상하는 한국의 근대사보다 중요한 가치로 평가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의 비교와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만약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가 1995년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 논의되었다면, 이 건물은 완전히 철거되거나 없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적어도 일부를 남기거나 흔적을 남기는 등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의 전문가와 시민들은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던 약 20년 전보다 근대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건축과 경관의 대립이다. 이는 실제 학문 분야 간의 대립이라기보다 근대 시기의 건축물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경관 간의 대립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와 역사 간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조선총독부 철거 및 경복궁 복원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에 ‘경관’이 포함되어 있다. “주산인 백악을 배경으로 하여 광화문 앞으로 난 육조대로에서 볼 때 훌륭한 도시 경관을 이룬다”(Lee, 1991: 55)거나, “조선총독부가 헐리고 한 눈에 들어오게 될 경복궁”(Kyunghyang Shinmun, 1995. 1. 1) 의 전경을 기대하는 모습, 건물 철거가 완료되고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오게 된 모습에 주목하는 양상 (Kyunghyang Shinmun, 1996. 11. 10), 새 단장한 경복궁 앞 경관을 “전통미와 현대미의 조화”로 인식 (Dong-A Ilbo, 1996. 12. 3)하는 등 건물 철거 후 얻게 될 전통적인 도시 경관의 복원이라는 가치는 국민들의 마음에 해방감과 청량감을 주는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반면, 철거 반대론자들이 주장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근대사적 가치와 건축 양식적 가치는 국민적 동의를 얻는 지점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 철거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 건축계의 의식 변화를 연구한 박혜인․김현섭에 따르면, 이 건물의 철거 이후 건축인들은 식민지기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으며, 또한 비건축인들과 건축을 공유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Park and Kim, 2010).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들 수 있다. 물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냉전 체제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보다는 규모와 성격 면에서 다른 양상을 띤다. 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철거 추진의 기저에 있는 사고방식을 민족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배타적 애국주의인 소위 쇼비니즘 (chauvinism) 으로 볼 것인가 사이의 대립이다. 철거 반대론자들의 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쇼비니즘’이라는 단어는 신한국과 개혁이라는 정치적 표어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내세우는 김영삼 정부의 총독부 철거 정책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민족주의 혹은 쇼비니즘의 배타적 대상이 바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반일 정서와 결합되면서 자연스럽게 쇼비니즘보다는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민족정기의 복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가 ‘상징적 가치’를 통해 결정된다면, 보존과 철거 논쟁에서 나타난 기능적 가치의 역할은 무엇일까? 구 조선총독부 철거 사례에서 나타나는 기능적 측면의 항목들, 즉 비용 문제, 경관의 기존 이용 방식, 관련 정책 변화 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의 기능적 가치들은 근대 역사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의 해결 방안을 세우는 대응책으로 작용했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 당시 가장 먼저 제기된 막대한 철거 및 박물관 신축 비용 부담 문제의 경우, 이승만 정부 때와는 달리 이미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었으며, 역사적 당위성을 획득한 당시 상황에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총독부 철거 사업은 이미 충분한 해체 기술과 어느 정도의 재정적 안정을 확보한 상태에서 추진되었으며, 국민들 또한 일부에서는 비용을 모금해서라도 건물의 철거를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함으로써 재정적 부담과 관련된 갈등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의 유물 보관 문제 및 졸속 이전 문제 등은 철거 이후에도 해소되지 못한 문제였지만, 이 문제는 1990년대 초 철거 논쟁 당시만큼의 국민적 관심을 얻기는 어려웠다. 이는 1995년 철거 이후 이미 정부의 정책 결정과 실천까지 이루어진 철거 이슈의 생존 주기가 끝나게 되어 관련 사안이 논쟁의 영역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Ha, 2011: 173). 그러나 새 박물관이 완공되기까지 약 10년 가량의 기간 동안 꾸준히 언론에서 박물관 건립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점을 통해, 당시 제기된 박물관 이용 및 기능의 문제가 국민들의 지속적인 주목과 감시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 과정에서 상습적으로 침수가 일어나던 용산가족공원 일대 새 박물관 부지 문제 또한 부지에 대한 사전 조사 및 박물관 설계를 통해 보완되었다(Korea Cultural Policy Institute, 2001).
그러나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 혹은 철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경관의 기능적 가치들이 상징적 가치에 비해 도외시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비판적으로 재고될 여지가 많다. 보존과 철거 논쟁이 종지부를 찍는 과정에서 경관의 상징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기능적 측면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해결 방안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으며, 적절한 해결 방안이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을 받기 쉽다. 또한 보존 혹은 철거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논쟁 당시에는 검토되지 않았던 기능적 문제들이 발생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추가적 시간과 비용 문제도 상당하다. 구 조선총독부 철거 사례의 경우, 새 박물관 건립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을 철거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국보들을 임시 이전하면서 발생한 유물 보관 문제 (Chosun Ilbo, 1997. 5. 15)나 새 박물관의 규모에 적합한 운영 체계 구축 미흡 문제 (Kyunghyang Shinmun, 1999. 6. 3)를 비롯하여, 1990년대 초반 논쟁 당시 2000년으로 계획되어 있던 새 국립중앙박물관 건설 (Hankyoreh, 1993. 11. 6) 이 1990년대 말에는 2003년으로 늦춰졌고(Kyunghyang Shinmun, 1999. 6. 3), 실제로는 2005년 10월에 개관하게 되면서 국보를 비롯한 유물들이 약 10년간 임시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박물관 신축 비용 또한 1990년대 초 약 1천억 원으로 추산되었으나(Chosun Ilbo, 1993. 8. 11), 실제 신축 비용은 부지 매입비를 제외하고 약 4천 1백억 원으로(Maeil Buisness, 2005. 10. 20)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새 박물관 부지가 한강에 가까운 상습 침수지였던 탓에 유물 보존을 위해 대지를 3∼4m 가량 높이는 작업을 진행했고, 용산 미군부대 시설 이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새 박물관 공사 일정에 차질을 짓는 문제도 발생했다(Chosun Ilbo, 1997. 11. 27).
구 조선총독부 철거 사례를 참고할 때,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경관의 기능적 측면들은 반드시 적정 수준 이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경관의 차후 향방이 보존이든 철거이든 각 결과에 따라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를 미리 검토하고, 적절한 대응 방안과 필요한 규모를 미리 책정하는 것은 적절한 비용 및 시간 절감을 가져올 수 있으며, 졸속 추진이라는 논란과 비판을 최소화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또한 근대 역사 경관의 기능적 측면들이 적절한 검토를 통해 보완되고 대응되는 체계가 갖춰진다면, 이러한 기능적 가치들은 최근의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 사례, 특히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 최근 보존 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 좋은 설계 요소로 기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부지 가운데 중요한 산업사의 현장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근대 역사 경관의 경우,7) 공장 시설이나 철근 및 콘크리트처럼 경관에 남겨지는 다양한 시설과 재료가 설계 과정에서 경관의 물성을 구성하거나 프로그램을 형성하는 등 흥미로운 디자인 아이디어로 활용될 수 있다.
V 결론
본 연구는 근대 건축물, 산업 유산,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 등 여러 유형의 기억의 경관 중 전쟁, 테러, 제국주의, 재해 등 부정적 기억의 근대사에 대한 가치 대립으로 인해 보존과 철거 사이의 논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근대 역사 경관’의 가치 판단 기준과 형성 방식을 살펴보았다. 또한 보존과 철거 양방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쟁을 검토하고, 주요 쟁점을 도출하였다. 이를 통해 근대 역사 경관을 형성하며 경관의 보존과 철거를 결정짓는 판단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상징적 측면과, 새로운 근대 역사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보완하고 대응할 수 있는 해결 방안으로서 기능적 측면에 대해 고찰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근대 역사 경관을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철거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의 결과는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하지만, 근대 역사 경관의 향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여전히 상징적 또는 정서적 가치라는 점이다. 오늘날 대중에게 근대기란 급격한 경제 발전의 시기, 도시민에게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기, 또는 현재 세대의 직접적 토대를 만든 중요한 시기로 인식되고 있다. 근대기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가치만으로 이 시기의 외형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산업 경관이나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을 정당화할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상징적 가치가 중시되는 상황의 맹점은 어떤 경관을 왜 보존해야 하는지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이전에 사람들의 감정적 선호에 따라 또는 특정 기억을 담은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풍경을 구현해내야 한다는 감성적 의도에 따라 경관의 향방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배경의 일면에는 근대적 기억을 담은 경관의 특성이 있다. 근대라는 비교적 최근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경관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건축물, 기념물, 경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 경관은 예술 작품의 범주에서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 또한 어렵다. 이와 같은 가치 평가의 어려움 때문에 근대 역사 경관의 가치는 대부분 동시대의 도시민이 해당 경관에 대해 생각하는 상징적이고 정서적인 가치에 치우치기 쉽다. 근대 역사 경관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그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은 전통적인 문화재에 비해 난해하며, 경관의 낡고 오래된 외관이 마치 하나의 유행처럼 의미 없이 소비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의 몇 가지 성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근대적 기억의 경관들에 담긴 다양한 측면의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상징적, 사회경제적 가치를 발견하고 평가하는 연구들을 꼽을 수 있다. 최근 ‘근대’라는 시기는 다시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재인식되고 있으며, 근대기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적 연구들 또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현대 예술이 일상의 영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미술관 밖의 주변 환경과 경관에서도 예술적 가치를 찾아내고 경험하는 방식이 하나의 주류가 되고 있다. 근대 역사 경관의 사회경제적 가치의 경우 이미 충분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어, 오히려 문화유산의 상업화와 주변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본 연구는 약 20년 전의 논쟁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사례를 다루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적인 근대 역사 경관의 여러 가치를 평가하고, 그 배경이 되는 사회적 맥락을 재검토했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의의를 갖는다. 본 연구에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논쟁을 통해 도출한 쟁점은 추후 ‘기억의 경관’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선별되는 ‘남겨지는 기억’으로, 경관의 특성을 만들어내는 내러티브로, 또는 새로운 경관의 이용 프로그램으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주요 설계 대상지로 꼽히는 서울역 고가, 세운상가, 용산공원 등은 여전히 합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쟁점을 갖는 근대 역사 경관의 대표적 사례다. 또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논쟁은 국내 사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기를 겪으며 급격한 경제 발전과 함께 식민 지배, 전쟁, 침략, 내전 등 다양한 부침을 겪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는 역사의식의 변화와 국가적 상황에 따라 앞으로 보존과 철거 논쟁이 벌어지게 될 근대 역사 경관이 산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 경관의 형성과 쟁점에 관한 다층적인 후속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