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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최근 몇 년 새 국내에서 식물원 조성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서울식물원이 문을 열었으며, 이 외에도 여러 식물원이 계획 혹은 조성 단계에 있다. 바야흐로 식물원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식물원의 존재 의의를 재고하고 미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식물원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일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본 연구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Thomas Jefferson (1743∼1826, Figure 1 참조)이 1826년에 착수했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조성 계획을 살핀다. 비록 완성되지 못했으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식물원 계획은 주목을 요한다. 첫째,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유럽의 식물원들이 약용 식물원에서 식물원으로 진화한 때인데(O’Malley, 1992; Johnson, 2011; Hickman, 2018), 당시 제퍼슨은 변화가 지속되고 있었던 파리 왕립식물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Spary, 2000). 둘째, 19세기 초는 미국에서 공공식물원 조성이 본격화된 여명기였으며, 제퍼슨은 이러한 움직임을 이끈 주요 인물이었다(O’Malley, 1996). 미국립식물원(United States Botanic Garden) 설립을 추진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O’Malley, 1996), 뉴욕식물원의 전신인 엘긴식물원(Elgin Botanic Garden)과 하버드대학교 식물원 등에 씨앗과 식물을 제공하며 그 탄생에 기여하였다(Fox-Bruguiere, 2012).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제퍼슨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계획은 19세기 전후 미국과 유럽 식물원의 동향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적절한 사례이다.
Source: Wikimedia Commons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제퍼슨이 버지니아대학교에 식물원을 조성하려 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제퍼슨이 구상했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의 모습은 어떠했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과 19세기 전후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토머스 제퍼슨이 버지니아대학교에 식물원을 설립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간 큰 조명을 받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토머스 제퍼슨의 조경가로서의 면모를 밝힌 Nichols and Griswold (1978)의 Thomas Jefferson, Landscape Architect와 버지니아대학교 캠퍼스 계획을 소개한 Thomas Jefferson's Academical Village은 식물원 계획을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버지니아대학교의 식물원 계획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과 미국 내 식물원을 과학 탐구와 픽처레스크 미학의 융합으로 논한 O’Malley (1992)의 연구에서 간략히 소개된 바 있다. O’Malley (1992: 293- 294)는 제퍼슨의 식물원 계획을 과학과 자연식 정원에 대한 미적 관점이 동시에 반영된 19세기 초 미국의 여러 식물원과 같은 경향을 지닌 사례로 규정했다1). 그러나 제퍼슨의 글을 짧게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어 동시대 식물원과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계획의 유사성을 주장하기에 한계를 보였다.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계획은 Fox-Bruguiere (2010; 2012)의 연구를 통해 자세히 밝혀졌다. 그는 제퍼슨의 식물학과 식물원에 대한 관심과 관련 활동을 검토하며 식물원의 계획 배경을 고찰하고, 1820년대에 작성된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안 문서와 제퍼슨의 편지를 살펴 식물원 계획 내용을 드러냈다. 또한 1826년 제퍼슨의 서신을 조사하여 식물원 조성 과정을 정리하였다. 그는 식물원 설립 배경이 식물학 교육과 연구가 과학 수준을 앞당기고 국가의 진보를 견인하는 열쇠라는 제퍼슨의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제퍼슨이 저명한 식물학자 José Correia da Serra (1750∼1823)에게 요청하여 식물원 구상안을 마련하였고, 박물학 교수 John Patton Emmet (1796∼1842)를 통해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는 등의 사실을 밝히며 미완의 유산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는 제퍼슨의 식물원 계획을 제퍼슨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과 활동 속에서 살폈을 뿐, 동시대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의 경향과 비교하지 않았다. 또한 계획 수립 과정에서 조경가로서 제퍼슨의 역할을 다루지 않았다.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계획을 “독창적이지도 특별하지도 않다(Fox-Bruguiere, 2012: 308)”라고 평하며, 버지니아대학교 설립과 국가 진보에 대한 제퍼슨의 교육적․경제적․국가적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에 한정했다.
본 연구는 19세기 전후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 동향을 고찰하여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이 동시대 식물원사에서 지니는 특징을 드러내고, 코레아와 제퍼슨의 식물원 구상안을 비교하여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계획에 담긴 제퍼슨의 역할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앞선 연구와 차별성을 갖는다.
연구 과정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퍼슨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이 동시대 식물원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 동향을 개괄하였다. 특히 주요 식물원을 중심으로 역할과 공간 구성 방식의 변화와 특징을 파악하였다. 유럽 사례 중 제퍼슨이 크게 영향을 받았던 파리식물원과 18세기 후반 유럽 식물원의 진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인 에든버러식물원을 검토하였고, 미국 사례 중 초기 계획안과 식물 목록이 전해지며 제퍼슨이 식물을 제공하기도 했던 하버드대학교 식물원을 검토하였다. 둘째,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하여 식물학 및 식물원에 대한 제퍼슨의 생각과 입장을 파악하였다. 토머스 제퍼슨의 도서 목록(Catalogue of the Library of Thomas Jefferson)2)에 기록된 식물학 관련 서적과 그의 버지니아 주에 대한 비망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3) 중 식물에 대한 서술과 제퍼슨이 지인과 주고받은 서신 중 식물원이 언급된 자료를 검토하였다. 이와 함께 본 연구는 Fox-Bruguiere (2012)가 다루지 않은 제퍼슨과 임용 담당자 Francis Walker Gilmer (1790∼1826)4)가 주고받은 서신을 분석하며 차후 식물원 조성책임을 맡는 박물학 교수 임용 과정을 조사하였다. 셋째,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 내용에서 공간적 특징을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버지니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코레아의 식물원 구상안5)과 미국회도서관에 소장된 1826년 4월 27일 제퍼슨이 작성한 식물원 설립 제안 서신6)을 살펴, 같은 시기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과 유사점 및 차이점을 찾고자 하였다.
II. 18∼19세기 식물원의 동향
1543년에 설립된 피사대학교의 식물원을 시작으로 16∼17세기 유럽의 여러 의과대학은 약물학(materia medica) 연구와 교육을 위해 약용 식물원을 조성하였다(Johnson, 2011; Hunt, 2012).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식물원에 변화를 일으킬 저변이 형성되었다.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 실용 식물의 발견과 유입으로 식물 수집 대상이 약용 식물에서 실용 작물로 확장되었으며, 1751년 린네의 식물철학(Philosophia Botanica) 발표 이후 식물 탐구는 의약학에서 박물학 혹은 식물학으로 분리 발전되었다(Findlen, 1994).
이러한 변화는 영국의 여러 식물원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에든버러 식물원은 1761년 에든버러대학교의 의학교수이자 왕의 식물학자로 부임한 John Hope (1725∼1786)의 주도 아래 새 식물원을 계획하고 조성했다. 의과대학 옆 기하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6개의 직사각형 토지에 종과 속 그리고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식물을 배열했던 이전의 약용 식물원(Doyle, 2008)과 달리, 호프는 약용 식물 교육 공간(Schola Botanica)은 작게 구성함과 동시에 교목 연구와 교육 공간(Sylva Botanica)을 크게 마련하고 온실을 건축했다. 특히 당대 픽처레스크 미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교목 정원을 곡선형 길과 비정형적인 소정원들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계획하였다(Lausen-Higgins, 2015). 케임브리지대학교 식물원도 1825년에 부임한 John Stevens Henslow (1796∼1861) 교수를 중심으로 약용 식물원에서 식물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교목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헨슬로우 역시 정원을 곡선형의 유기적 형태로 계획하며 당대 정원 미학을 반영했다(Parker, 2006).
파리의 약용 식물원(Jardin du Roi) 역시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변화를 도모했다. 먼저 1739년 박물학자 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이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식물원의 주 관심사가 약용 식물에서 교목, 특히 프랑스 기후에 적용할 수 있는 북미 교목으로 이동하였다. 그 결과, 1788년에 이르러 식물원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은 교목 재배지가 되었다(Spary, 2000: 132-137; Figure 2-a, 2-b 참조).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혁명 후에도 지속되어 André Thouin (1747∼1824)이 원장으로 임명된 시기에는 투인과 그의 형제이자 조경가였던 Gabriel Thouin (1754∼1829)에 의해 확장 계획이 수립되었고(Figure 2-c 참조), 식물학, 광물학, 동물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자연과학 기관으로 거듭났다(Petersen, 2001).
Source: a, b: http://www.ctgpublishing.com, c: Wikimedia Commons
19세기 초 미국의 식물학 연구는 시작 단계에 있었다. 1813년 미국에 첫 발을 들인 코레아는 미국의 식물학 연구 수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미국의 식물학은 아직까지 초기 단계로, 일부 아마추어들이 대륙 전체에 흩어져 있고 일부 유럽인들은 식물학자라기보다 여행하는 정원가로서 돈 많은 유럽 사람의 정원이나 식물 재배지를 위해 식물, 관목, 나무를 수집하고 있다7).
1800년 이전까지 미국의 식물 수집과 탐구를 주도한 집단은 학자가 아닌 식물 애호가들이었다(Hedrick, 1950). 식물원을 조성한 사람들 역시 개인적인 관심 혹은 원예 사업 차 ‘신세계’ 미국을 탐험하며 식물을 채집하던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1728년 필라델피아에 조성된 미국의 첫 식물원은 평생 미국을 여행하며 식물을 수집하고 30여 년간 첼시 약용 식물원의 Peter Collinson (1694∼1768)과 서신과 씨앗을 주고받았던 식물 애호가 John Bartram (1699∼1777)의 정원이었다(Hill, 1915; Bailey, 1935).
미국의 식물 수집과 탐구는 1800년대에 이르러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860년대까지 상당량의 이국 식물이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많은 식물원이 설립되었다(Hedrick, 1950). 특히 식물학이 미 대륙 내 실용 작물을 발견하여 국가 경제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동시에 유럽에 대한 미 대륙 자연의 풍부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미 건국기 사회 리더들의 생각은 공립 식물원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O’Malley, 1996). 신호탄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George Washington (1732∼1799)이 1796년에 작성한 청원서로, 그는 워싱턴 DC 도시계획에 식물원을 포함할 것을 요청하며 미국립식물원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Solit, 1993; Fallen, 2007).
19세기 초에는 여러 대학기관도 식물원 설립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첫 20여 년 동안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사우스 캐롤리나,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등이 부설 식물원을 설치했다(O’Malley, 1992). 이 중 1807년에 식물원을 조성한 하버드대학교의 사례를 살펴보면 식물원 둘레로 곡선형의 동선을 따라 교목과 관목 전시 공간이 배치되었고, 중심에 온실과 교육 공간(Garden of Arrangement on Botanic School)이 기하학적 구조로 배치되었다(Figure 3 참조). 1818년에 발간된 식물목록에 따르면 하버드대학교 식물원은 국내외에서 수집한 실용 식물과 약용 식물을 비롯해 장식용 식물까지 수집하여 총 1,039종에 이르는 식물을 보유하고 있었다8).
Source: Courtesy of the Botany Libraries, Harvard University
정리하면, 제퍼슨이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설립에 착수하던 시기 전후로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들은 각각 전환기와 여명기에 놓여 있었다. 18세기 말 유럽의 식물원들은 의학 탐구 정원에서 식물학 연구 기관으로 진화하면서 실용 식물, 특히 교목을 적극 수집하고 배열하였고, 19세기 초 미국의 식물원들은 의학과 박물학의 경계에서 식물학 연구와 교육을 시작하며 대학의 부설 기관으로 출발했다.
III. 제퍼슨의 식물학과 식물원에 대한 관점
제퍼슨은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의 정원과 Philip Miller (1691∼1771)의 정원사의 사전(Gardener's Dictionary), 그리고 린네의 책 등은 그의 식물학 지식의 원천이 되었다(Ewan, 1976). 토머스 제퍼슨의 도서 목록 중 식물학 관련 서적은 Pedanius Dioskorides, Jean Jacques Rousseau, Erasmus Darwin, Mark Catesby, Carl von Linnaeus 등이 저술한 총 36권으로, 제퍼슨은 고대 그리스의 약학서부터 동시대 저명한 학자의 박물학서까지 소장하고 있었다9).
그의 식물학 지식은 호기심을 넘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지니아 주에 대한 비망록에서 학명을 사용해 버지니아의 식물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의 박물학, 식물학 지식수준을 엿볼 수 있다10). 이외에도 Bernard Jussieu (1688∼ 1777)의 분류 체계보다 린네의 식물 분류법이 보다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 그의 편지(Ewan, 1976), 미국의 첫 식물학 교과서 저자 Benjamin Smith Barton (1766∼1815)이 제퍼슨의 박물학 지식을 높이 평가하며, 새로 발견한 식물에 그의 이름을 붙인 이야기(Betts, 1999: 172-173) 등 제퍼슨의 식물학 수준의 깊이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784년부터 1789년까지 외교관으로서 프랑스에 거주하며 쌓은 유럽 식물학자들과의 친교 관계는 제퍼슨이 19세기 전후 세계 식물 네트워크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토대가 되었다(Rice, 1976). 1811년 저명한 과학자 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는 버지니아 산 담배 씨앗과 메릴랜드 산 담배를 요청하기 위해 제퍼슨에게 서신을 보냈으며(Andress, 2017), 파리 왕립식물원 원장 투인과 제퍼슨의 관계는 곧 미국과 프랑스 간 식물 교환 통로로 작용했다(Spary, 2000).
제퍼슨에게 식물학은 개인의 지적 호기심이나 취미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미 건국기의 사회 리더로서 그는 식물학을 “가장 귀중한 과학”11) 혹은 국가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일”12)로 규정했다. 이러한 태도는 제퍼슨이 조지 워싱턴과 같이 실용성에 주목하여 식물학이 국가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중요한 과학 분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자 공공의 자원으로서 식물원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식물학 네트워크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제퍼슨은 국외 주요 식물원을 방문하거나 소식을 접했다. 특히 1784년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 공사로서 파리에 거주하던 때에는 뷔퐁의 감독 아래 교목 수집과 공간 확장 등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던 파리식물원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쌓았으며,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꾸준히 파리식물원으로부터 씨앗을 전해 받았다(Spary, 2000). 1809년에는 당시 갓 개원한 리버풀식물원의 연설문(Address at the Opening of the Botanic Garden of Liverpool)과 식물 목록(A Catalogue of Plants in the Botanic Garden, at Liverpool)을 전해 받기도 했다(Ewan, 1976). 이외에도 제퍼슨은 파리에 거주하던 시기 옥스퍼드와 큐를 비롯한 영국의 여러 도시와 정원을 여행했는데, 그가 남긴 글에서 식물원에 대한 의견은 보이지 않는다. 큐 정원을 방문하기는 했으나 그는 식물원이 아닌 물을 적극 활용한 정원으로 인식했다(Wilson and Stanton, 1999: 64-69). 이러한 일련의 예들은 그가 식물원을 해외 식물을 확보할 수 있는 장소로 여기고 있었으며, 여러 식물원들 중에서도 영국의 식물원들보다 파리식물원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가리킨다.
식물원의 방향성에 대한 제퍼슨의 생각은 앞서 살핀 18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난 식물원의 변신, 약용 식물원에서 자연과학 기관으로의 발전과 접점을 이루고 있었다. 버지니아 주에 대한 비망록에서 나타난 식물 구분법을 보아도 기본적으로 그는 식물을 약용에 한정하지 않고, 약용, 식용, 장식용, 실용 식물로 구분했다13). 차후 식물원 조성책임을 맡는 박물학 교수를 임용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엿보인다. 제퍼슨이 자신을 대신하여 버지니아대학교 교수 채용을 담당했던 길머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의학과 박물학(natural history) 각각 교수를 채용하려 했던 사실은 그가 이 둘을 별개의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었고14), 박물학을 화학을 비롯해 지질학, 동물학, 식물학을 아우르는 자연과학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15).
IV.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의 계획과 추진과정
제퍼슨은 1812년 박물학자 John Bradbury (1768∼1823)의 워싱턴시 식물원 설립 소식에 대한 편지에 “과학에 흥미를 지닌 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16)이라고 답하며, 식물원 설립에 뜻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그러나 그가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설립에 착수한 때는 1820년대에 들어서였다.
1826년 제퍼슨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을 논하기에 앞서 세 건의 문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1817년과 1819년 그리고 1820년경, 각자 다른 세 사람이 제퍼슨에게 버지니아대학교 내에 식물원을 조성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모두 계획도면이 없는 서신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제안은 시기적으로 제퍼슨의 식물원 계획에 앞서기에 차후 그의 계획안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817년 제퍼슨의 벗이자 미국회의사당 건축가로 알려진 William Thornton (1759∼1828)이 대학교 내 식물원 조성을 제안하였다. 손턴은 그 이전에도 제퍼슨과 워싱턴의 국립식물원 설립에 관해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공공 식물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했던 인물이다(Fox-Bruguiere, 2010). 1817년 당시 손턴은 제퍼슨과 아카데미컬 빌리지와 파빌리온 구상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당해 5월 27일의 편지에서 파빌리온 설계에 대한 의견을 서술한 뒤, 분수, 숲, 운동 공간 등 학교에 필요한 몇 가지 시설을 추가로 제시하며, “식물원이 있어야 한다”17)고 말했다. 그러나 손턴의 식물원 조성 제안에 대한 제퍼슨의 답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1819년 6월, 버지니아대학교의 아카데미컬 빌리지 건설이 착수되고 마당(Lawn)과 정원 계획이 본격화되던 때(Wilson et al., 2009), 제퍼슨은 또 다른 이로부터 식물원 조성 제안을 받았다. 버지니아대학교의 화학 및 광물학 담당 교수로 예정되었던 Thomas Cooper (1759∼1839)였다. 6월 21일 쿠퍼는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과 운영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밝히며, 파리식물원에서 매년 보내는 씨앗을 직접 탐구할 수 있도록 식물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하고 식물학자를 추천하기까지 했다18). 이에 대한 제퍼슨의 답장에서 쿠퍼가 추천한 식물학자에 대한 관심은 보이나, 식물원에 대한 의견은 보이지 않는다19). 이후 쿠퍼가 버지니아대학교에 임용되지 못하였고, 이와 함께 그의 제안도 구체화되지 못했다.
버지니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문서 ｢가장 실용적이며 저렴한, 공립학교를 위한 식물원 계획(Plan for a Botanic Garden for a Public School, on the Most Useful, and Least Expensive Plan)｣은 작성일 미상이다. 그러나 Fox-Bruguiere (2012)는 1820년 코레아가 미국을 떠나기 전 제퍼슨의 몬티첼로를 방문했을 때 제퍼슨의 요청으로 이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경위로 미루어 보아 제퍼슨은 쿠퍼가 식물원 설립을 제안한 때부터 코레아가 몬티첼로에 방문했던 시기 사이에 버지니아대학교 내 식물원 설립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식물원의 역할이다. 식물 목록 증대와 수집 자체에 혈안이 된 동시대 식물원을 비판하며, 코레아는 식물원의 초점은 식물 교육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둘째, 이어서 그는 식물원의 교육과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과학으로서 식물 해부학 및 생리학, 린네의 분류 체계를 따른 식물 분류학(distinguishing plants), 프랑스 혁명 정신과 상통하는 진정한 과학으로서 식물 체계화(grouping), 가장 유용한 학문으로서 식물 활용 연구 그리고 식물 문헌학 등 다섯 가지였다. 셋째, 식물 유형으로 그는 교육과 연구 취지에 적합한 식물을 도입할 것을 권하였다. 1,500종의 식물로 이루어진 4에이커 규모의 정원과 교목으로 이루어진 2에이커 규모의 부지를 설정하고, 미국 내 식물 확산을 위해 식물원의 식물과 교목은 모두 버지니아 비자생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0).
정리하면, 식물원의 부지 규모를 언급한 것 이외 공간 계획에 관한 생각이 엿보이지 않기에 그의 구상안은 식물원의 비전과 미션 제시에 초점을 둔 제안서라 할 수 있다. 제안 방향은 자연과학 교육에 충실한 식물학 수업의 실습장이자 미국에 유용한 식물을 확산시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장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제퍼슨이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설립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때는 1826년이다. 제퍼슨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4월 27일 버지니아대학교의 박물학장 에머트에게 식물원 설립 계획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버지니아대학교가 개원한 지 1년이 되어 가는 때이자, 에머트가 교수로 부임한 지 1년이 되는 때였다21).
편지는 크게 네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식물원 설립에 착수하길 요청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제 우리 대학에 식물학과의 도입을 생각할 때”22)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두 번째는 코레아의 식물원 구상안 소개로, 구상안 요청 배경과 요청 내용도 함께 설명하였다. 세 번째는 식물원 설립을 위한 네 가지 과제로, 그는 번호를 붙여가며 부지 선정, 담장 조성, 지형 그리고 식물 목록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네 번째로 식물 종류와 수급 방안을 서술하였다.
제퍼슨은 코레아의 교육과 연구 기능에 충실한 온실 도입을 배제하고, 탐닉적이지 않은 ‘절제적인 관점’에 만족감을 표하며23), 코레아의 제안 대부분을 수용했다. 코레아의 제안대로 식물로 이루어진 4에이커의 정원과 교목으로 구성된 2에이커 규모의 식물원을 구상했고, 식물 종류에 있어서도 코레아의 의견대로 식물학 탐구에 충실한 식물을 수급하고, 국가에 이익이 되는 비자생 교목을 도입할 것을 강조하였다24).
물론 제퍼슨이 코레아의 제안을 절대적으로 따르기는 했으나, 에머트에게 제시한 네 가지 과제를 살펴보면 건축과 조경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코레아의 제안을 실행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구상안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코레아가 제시한 규모 이외에 토양, 급수, 거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캠퍼스 상단 도로변 토지를 식물원 부지로 선정하였다. 아카데미컬 빌리지에 구현한 바 있는 구불구불한 벽돌담(serpentine wall; Figure 4 참조)을 쌓아 공간을 위요시키려는 구상은 오로지 그의 생각으로, 제퍼슨은 담장의 높이, 벽돌의 양과 재료비까지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경사진 언덕을 화단과 소로로 이루어진 테라스 지형으로 조성할 것을 제시한 부분에서 토목 계획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파리식물원의 씨앗을 식물 수급 방안으로 언급하거나, 도입할 교목으로 낙엽송․굴참나무․마로니에 등 특정 수종을 열거하고, 각 수종을 구할 수 있는 경로를 제시하는 등 제퍼슨은 자신의 식물학 네트워크와 지식을 바탕으로 실행 가능한 식물 수집 방안을 모색하였다25). 이러한 내용은 제퍼슨이 답사, 실측, 계산 등의 과정을 통해 현장에 구상안을 앉히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가리킨다.
에머트에게 보낸 제퍼슨의 서신은 식물원에 대한 기초 구상으로, 공간 구조에 대한 상세한 생각이나 식물 배열 방안에 대한 의견은 담겨있지 않다. 초본과 교목 정원을 구분하여 각각 평지와 언덕에 배치하고, 언덕은 화단과 소로를 계획할 수 있도록 계단 형태로 만들 것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쳤다26). 이처럼 초본과 교목을 각각 별도로 배열하는 방식은 제퍼슨의 파리 거주 시절 보았던 파리식물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하버드대학교 식물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버드대학교 식물원을 비롯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 자연풍경식 정원 양식에 영향을 받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식물원들에서 나타나는 구불구불한 길과 비정형적인 정원 구조(O’Malley, 1992; Johnson, 2011)는 확인할 수 없다.
제퍼슨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바로 다음 날인 1826년 4월 28일 에머트는 그에게 식물원 조성 제안에 동의하지만, 식물학이 자신의 주 전공분야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감독직에 대한 책임을 완곡히 거절하는 답변27)을 보냈다.
에머트가 ‘마지못해’ 식물원 조성 감독직을 담당하는 동안, 제퍼슨은 특히 1826년 6월 한 달 동안 다음과 같이 식물원 설립을 위해 주변 여건을 마련하였다. 첫째, 그는 주변의 벗과 전문가로부터 조언과 도움을 구하였다. 미국 네 번째 대통령이자 지역 농업협회장을 역임했던 자신의 벗 James Madison (1751∼ 1836)과 학교 설립 지원자 중 한 사람인 John Hartwell Cocke (1780∼1866)에게 식물원 설립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고28), 둘째, 앙드레 투인의 사망 후 그간 파리식물원의 씨앗이 버지니아 지역 농업협회로 전달되었음을 알게 된 제퍼슨29)은 농업협회장 James Barbour (1775∼1842)에게 서신을 보내 씨앗의 신속한 배송을 요청했다30). 이외에도 버지니아대학교 조성공사 감독인 Arthur Brockenbrough (1780∼1832)에게 모든 여유시간 동안 식물원 조성에 힘을 쏟을 것을 주문하는 작업 지시 노트를 보냈다31).
그러나 제퍼슨이 사망하고 몇 달 뒤인 10월 1일, 에머트는 이사회에 보낸 서신32)에서 다시 한 번 식물학이 자신의 주 전공분야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사임의 뜻을 밝히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Fox-Bruguiere (2010)의 연구에 따르면 이후 대학교 이사회는 1831년 7월 다시 식물원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식물원 계획이 수립되었던 부지는 오늘날 테니스장과 잔디마당으로 활용되고 있다(Figure 5 참조).
Source: Photo by author in March 2018
V. 결론
제퍼슨의 버지니아대학교를 위한 식물원 계획 배경은 연구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대두된 자연과학으로서 식물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국가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식물학의 효용성에 대한 동시대 미국에서의 믿음이다. 둘째, 제퍼슨의 식물학 및 식물 네트워크이다. 여러 식물학자와 탐험대로부터 수집한 식물과 씨앗은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설립의 당위성과 실현 가능성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제퍼슨이 주변 인물들의 제안 후에 학교 내 식물원 설립을 구상하기 시작한 사실과 식물원의 방향에 대한 코레아의 생각을 수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식물학 네트워크가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조성 착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동시대 구미에서 식물학의 사회적 위상과 제퍼슨의 네트워크와 같은 조건이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설립의 배경이었다 하더라도, 계획 실행은 제퍼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머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드러나듯, 현장답사와 측량, 재료 계산, 공간 구상, 식물 수급 계획 등을 수립하고 실시한 자는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이 1826년 5월 한 달 동안 추진력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19세기 초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식물학의 가치를 읽어내는 통찰력, 식물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열정, 네트워크 그리고 정원에 대한 그의 경험과 지식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담장으로 식물원을 위요한다거나, 비탈진 언덕을 계단형으로 조성하려는 생각, 부지 선정 시 거리와 물 공급을 고려하는 부분이 이를 뒷받침한다.
19세기 전후 유럽과 미국의 주요 식물원들과 비교해볼 때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이 보이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본 이외에 교목 정원을 별도로 구성하고 의학이 아닌 박물학의 일부분으로서 식물학 연구와 교육을 강조했던 측면에서 18세기 후반 유럽 식물원들이 약용 식물원에서 식물원으로 발전한 흐름과 같은 경향을 보인다. 둘째, 코레아와 제퍼슨은 호기심이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며 온실 설치를 거부하였고,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을 지역 기후에 적합한 해외 수종을 도입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실용 식물 연구 장소로 계획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온실을 설치했던 유럽과 미국의 많은 식물원과 다른 부분으로, 특히 온실을 건축하고 실용 식물 이외에 약용 식물과 장식용 식물까지 두루 수집했으며 국내외 수종을 가리지 않았던 하버드대학교 식물원과 대조를 이룬다.
본 연구는 코레아와 제퍼슨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조성 배경과 구상 내용을 당시 유럽과 미국의 식물원과 비교함으로써 그 특징을 드러냈다는 데 의의를 지닌다.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은 19세기 전후 유럽 식물원의 진화 방향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식물원과 달리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실용 식물 연구와 확산을 추구한, 공공성을 강력하게 띄었던 사례이다. 따라서 제퍼슨의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조성 계획은 미국 초창기 식물원의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 식물학계 및 식물원과의 관계, 그리고 식물원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에 대한 국가 리더의 생각이 반영된 독특한 사례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자료만으로는 미완에 그친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의 공간 구조와 식물 전시 방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버지니아대학교 식물원 구상에서 19세기 전후 구미의 식물원에서 나타나는 비정형적인 공간 구조와 같은 정원 양식의 변화를 논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