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우리의 시선은 사회적, 문화적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곰브리치(Ernest Gombrich)는 ‘본다’는 행위가 대상에 관습화된 환영(illusion)을 투사하는 과정이라 주장했다(Gombrich, 1961). 오늘날 병산서원을 지배하는 환영은 바로 ‘그림과 액자’다. 이는 서원 앞에 펼쳐진 수려한 자연 경관과 이를 담기 위해 비워진 건축적 틀을 일컫는 비유로 ‘자연과 건축의 조화’라는 현대 한국인이 건축 유산에 기대하는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자연을 담은 액자라는 매력적인 이미지는 병산서원이 전통 건축의 자연친화성을 대표하는 사례로 인식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비어있는 틀로 단순화된 차경의 기능이 자리한다. 자연의 순수성이 강조될수록 그 건축적 의의가 강화되는 논리 구조가 초래한 결과다1).
본 연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의 시선으로 병산서원의 풍경을 바라보고자 한다. 순수한 자연(pristine nature)이라는 현대적 환영에서 벗어나, 서원을 설계하고 이용하던 인물들이 보고자 했던 자연의 모습과 이를 연출하는 장치로서 차경의 기능을 구체화하기 위한 접근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당대의 경관 예술로 눈을 돌린다. 조경은 동시대의 예술과 문화적 이미지로서의 자연과 그 연출 방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Cosgrove, 1998)2). 본 연구는 병산서원의 차경 기법이 산수시의 형상화 기법이나 산수화의 투시도법과 같이 성리학자들이 기대하던, 성리학적으로 이념화된 환영을 촉발함을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차경이 선사하는 ‘그림’에 성리학적 맥락을 부여하고, 차경이라는 ‘액자’를 성리학적 수양의 도구로 기술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본 연구는 병산서원의 차경이 선사하는 장면에서 이를 바라보는 인물로 해석의 초점을 이동시키고자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첫째, 자연과 건축의 관계에서 자연과 보는 이의 관계로 차경 담론의 구도를 전환한다. 둘째, 차경을 보는 이의 시선에 개입하는 적극적인 설계 행위로 인식한다. 셋째, 차경을 통한 조망을 시대적, 문화적 보기 방식의 실천으로 기술한다. 이러한 접근을 바탕으로 기존의 건축적 관점을 넘어 보다 광의적인 경관 문화의 한 갈래로 병산서원을 바라보고자 한다.
오늘날 병산서원은 한 장의 사진으로 소비된다. 서원의 강당에서 촬영한 사진에는 서원의 누각인 만대루와 이를 통해 바라보는 병산과 낙동강의 모습이 담겨있다(Figure 1 참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영문으로 편찬한 서적 《한국의 미(Korean Beauty)》(2011)는 이 장면을 한국의 차경 문화를 대표하는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오늘날 병산서원을 수식하는 보편화된 비유인 ‘그림과 액자’와 그것이 표상하는 가치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7칸으로 구성된, 완전히 비어있는 2층의 건물이다. … 만대루는 뼈대만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 거대한 비어있는 액자(empty picture frame)를 형성한다. 이 건축적 액자는 산과 강의 풍경으로 가득 차 … 7폭의 산수화(landscape paintings)로 꾸며진 병풍이 된다(Kim, 2011: 50).
이상의 묘사는 “건축적 액자”의 비어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만대루의 구조가 ‘허(虛)의 건축’이나 ‘자연을 위한 여백’ 등으로 인식되면서 자연을 향해 열린 ‘창’ 또는 자연으로 가득 찬 ‘파노라마’로 묘사되는 상황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되는 자연을 일컫는 비유가 바로 “산수화”다.《한국의 미》를 인용하자면 이는 “인위적 수단(artificial means)을 통해 자연의 형태를 모사하는” 여타 문화권의 조원과 달리 “그저 전망을 고르면 자연 그 자체로 정원이 되는” 한국의 차경을 대표하는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Kim, 2011: 51).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도 병산서원의 차경은 “그림 같은 경관(a picturesque landscape)”으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는 “성리학적 풍경미의 전형”으로 홍보되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하는 서원의 설계적 전형성을 잘 드러내는 사례로 제시되었다(World Heritage Convention, 2011). 결과적으로 서원은 그 사회문화적 의의(기준 iii)에 근거하여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으나 그 설계적 전형성(기준 iv)은 인정되지 않았다3).
이러한 결과는 그림과 액자라는 비유와 비인위성을 강조하는 레토릭에 내재된 약점을 드러낸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한국의 건축, 더 나아가 한국인의 자연존중사상을 강조하는 대가로 차경은 “전망을 고르는” 행위로 축소된 것이다. 그 결과 차경을 통해 조망하는 풍경은 문화적 이미지로 연출된 자연이 아닌 “자연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를 “성리학적 풍경미”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빈약해진다. 차경을 “좋은 경관을 향한 창문 만들기와 다름없다고 단순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So, 2011: 60)”는 지적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스페인의 알함브라궁(Alhambra)이나 일본의 텐류지(天龍寺) 등 차경으로 잘 알려진 여타 세계유산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알함브라의 전망창(mirador)을 통해 바라보는 숲은 코란에 묘사된 낙원으로(Ruggles, 1997), 텐류지의 호수에 비친 언덕은 실체와 허상이라는 불교적 화두로 풀이되는 반면(Johnson, 1989) 만대루에 담긴 풍경은 “자연 본래의 아름다움(the intrinsic beauty of nature)”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Kim, 2011: 51).
액자의 ‘비어있음’을 강조하는 레토릭은 부정을 통한 정의(negative definition), 즉 차경이 ‘무엇을 하지 않는지’를 골자로 한다. 자연 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차경의 자연친화성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차경이라는 경관 설계의 기능이 될 수는 없다. ‘자연’이라는 소재를 이념화된 ‘경관’으로 각색하는, 보다 적극적인 설계적 간섭으로 차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요구된다.
2. 연구의 방법론
“바라보는 눈(The Beholding Eye)”(1979)은 장면에서 이를 바라보는 인물로 경관 해석의 초점을 이동한 기념비적 연구다. 저자인 마이닉(D. W. Meinig)은 시야에 들어온 장면이 연상 작용(association)을 통해 재구성될 때 비로소 경관이 된다고 정의하였으며, 연상의 방식은 보는 이의 인식체계에 따라 좌우됨을 강조하였다(Meinig, 1979). 곰브리치의 개념으로 풀이하자면 경관이란 ‘관습적인 인식의 틀 또는 도식(schema)’이 빚어내는 환영인 셈이다4).
본 연구는 그림과 액자라는 구도에서 소외되어온 보는 이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차경은 “감상자가 의경에 이르게 하는 의도적 장치(So, 2011: 60)”라는 지적과 같이, 완결된 도상으로서 건축적 액자에 담긴 자연을 분석하기보다는 이를 바라보는 인물이 연상하게 되는 주관화된 자연의 이미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 위함이다. 따라서 본 연구가 고찰하는 ‘그림’은 차경이 선사하는 장면이 아닌, 보는 이가 마음속으로 그려가는 환영이다.
이상의 접근에서 ‘보는 이’란 서원을 설계하고 이용하던 조선 중기의 인물들을 뜻한다. 본 연구는 그들의 눈에 병산서원의 풍경이 어떻게 비추어졌을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지를 묻는다. 그리고 차경은 그 연상의 과정을 ‘성리학적’으로 유도하는 장치로 기술될 것이다. 연상의 매개체(medium)로서 차경이 작동하는 방식을 추론하기 위하여 본 연구는 조선 중기의 산수시와 산수화를 참고하고자 한다. 이는 조경이 동시대의 예술과 자연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도식(schema)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근거한 접근이다(Corner, 2014).
이상의 접근을 통하여 본 연구는 조선 중기의 시대적, 문화적 시각성(visuality)에 근거한 차경 해석을 진행하고자 한다5). 또한 장면에 담긴 의미를 특정하기보다는 보는 이가 장면을 의미화하는 과정과 그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조건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성리학적 사유 체계와 수양론(修養論)이 그 대표적 조건들로, 본 연구는 현대 철학과 미학의 개념으로 이들을 풀이하고 그 인식론적 함의를 추론하고자 한다6). 이를 통해 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차경 논의를 확장하는 것이 본 연구의 방법론적 의의라 할 수 있다7). 이와 더불어 경관이 수용되는 방식에 근거하여 차경 설계의 의도를 추론하는 방법은 병산서원의 설계 의도 및 경관 경험을 담은 1차 사료가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접근이 될 수 있다8).
산수시와 산수화는 성리학적으로 이념화된 환영을 촉발하는 기법을 발전시켜왔다. 자연을 소요(逍遙)하며 그 이치(理)를 발견하는 여정을 대체하는 일종의 시뮬라크르인 것이다(Maeng, 2019). 본 연구는 “비어있는 액자”라는 대중적 레토릭에서 벗어나 차경의 적극적인 시지각적 간섭을 고찰한 연구들을 재조명한다9). 그리고 그 간섭이 당대의 시와 회화에 상응하는 소요와 발견의 여정을 연출함을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차경을 통한 조망이 격물치지(格物致知)라 불리운, 리(理)를 탐구하는 수양적 행위였음을 주장할 것이다.
본 연구는 산수시에 묘사된 격물치지의 경험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 통해 ‘격물’과 ‘치지’란 각기 성리학적인 인식의 틀을 체화하고, 그 특수한 인식의 틀을 통해 자연을 이념화하는 과정이었음을 강조할 것이다. 이어서 산수화 속 풍경이 격물치지의 장(場)으로 기능하였던 방식을 고찰하고, 이를 가능케하는 화면의 구성과 서사 구조를 도출할 것이다. 병산서원의 차경이 이에 상응하는 무대 연출(scenographics)을 제공함을 주장하고, 차경을 보다 적극적인 설계 행위로 인식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연구는 마무리된다10).
이상의 논의는 강당과 동·서재로 구성된 기숙사 건물, 그리고 만대루가 형성하는 서원의 중정 권역을 공간적 범위로 삼는다11). 또한 퇴계학파의 거두 서애 류성룡(1542-1607)과 그의 제자 정경세(1563-1633)가 관여한 원래의 설계 의도를 추론하기 위해 1921년 이전의 배치를 기준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1921년, 서원의 측면에서 정면으로 정문이 옮겨졌으며, 이후 중정과 서원 전면에 다양한 식재가 추가되면서 시야를 가리게 되었기 때문이다(Figure 2 참조). 따라서 원래의 중정 권역은 강당과 누각의 계단 배치에 따른 우측 보행이 연출되었으며, 동선을 따라 보다 자유로운 시점 및 시선의 이동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본 연구는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적인 눈높이를 고려하여 선정된 강당과 누각의 주요 조망점들과 그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조우하는 장면들을 사진 자료를 통해 기록하고 분석하였으며, 이를 하나의 연속적인 경관 경험으로 기술하고자 하였다13).
3. 본론
격물치지는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수양법으로 주희에서 퇴계, 그리고 서애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보에서는 이를 ‘사물에 다가가 그 이치에 이른다’고 해석한다. 이는 경물의 이치(理)를 이해하고 이에 부합하는 마음의 작용(性)을 함양하려는 주지주의적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격물치지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이어지는 이상적 사회 구현의 첫 단계인 수신(修身)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오늘날의 생태윤리적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호혜적 관계를 사회 윤리에 투사하려는 유비적 사유(analogy)라 할 수 있다(Ivanhoe, 1998). 따라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치, 즉 리(理)란 개체에 담긴 진리를 넘어 관계망의 작동 원리를 포괄한다(Tu, 2001).
퇴계가 도산서당의 전경을 보고 지은 시 <천연대(天淵臺)>에는 격물치지의 경험이 잘 드러나 있다. 시는 일상적 풍경이 곧 격물치지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강변의 정경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événement)에 주목하고 있다.
날개 솟구치고 지느러미 놀리는 것 누가 시켰던가 / 자연 운행이 활발하니 하늘과 연못의 이치가 오묘하구나
강가 높은 곳에 올라 종일토록 마음의 눈 열리니 / 중용을 세 번이나 읊조렸다네(Lee, 1561).
시에서 흥미로운 점은 새와 물고기의 움직임을 “하늘과 연못의 이치”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천연대>가 묘사하는 격물은 경물 자체(날개)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특정 맥락 속에서 진행되는 경물의 작용(날갯짓)을 고찰하는 과정으로, 대상(날개)과 그 배후(하늘)를 인식의 단위로 묶어 보는 방식이다. 현대 조경의 개념으로 풀이하자면, 대상을 배경에서 유리된 물체(figure)가 아니라 연속된 장(field)에서 융기된 지점으로 인식하는 태도라 할 수 있겠다(Waldheim, 2016).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를 격물한다는 것은 곧 시선이 닿은 나무와 그 배후의 나무들이 형성하는 상호관계(correlation)를 살피는 것이 된다. 그리고 격물치지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살피며 조금씩 숲의 관계망을 그려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방식에서 ‘세계’란 한 지점에서 뭉뚱그려 조망한 객체가 아니라 다가가는 만큼 확장되는 지평(horizon)으로 인식된다(Collot, 2011). 이는 숲을 ‘몇 그루의 나무’로 정량화, 균일화하려는 근대의 시선(Fowles, 1979)과 달리 개체 간의 차이를 톺아보는 보기 방식이다.
이상의 지각 구조는 ‘상보적 이항(correlative dyad)’이라 불리는 성리학적 존재론에서 비롯된다14). 이는 음-양으로 구성된 태극의 이항 구도가 시사하듯 존재 간의 ‘차이’를 생성과 조화의 동력으로 인식하는 입장이자(Li, 2006), 한 잔의 물을 용량이나 성분 구성으로 파악하는 대신 냉-온수의 대류로 직관하려는 의도성(intentionality)으로 이해할 수 있다15). 이처럼 격물치지란 이항적 사유를 인식의 틀(schema)로 신체화하는 과정으로, 이것이 퇴계가 “마음의 눈이 열린다”고 노래한 이유일 것이다16).
격물치지를 통해 체화(體化)된 이항적 사유는 ‘나’는 상대의 ‘배경’으로 존재한다는 윤리적 당위론으로 이어진다. 이를 ‘제가-치국-평천하’로 확장되는 사회적 관계망에 적용한 것이 바로 ‘부부, 부자, 붕우, 장유, 군신’의 이항(dyad)으로 구성된 오륜(五倫)으로(Choi, 2002), 이는 생각하는 나(cogito)를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1인칭의 사유와 달리, 누군가의 상대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2인칭의 사유 방식”이다(Lee, 2018: 44). 이상의 논의에서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버리는 것을 정허(靜虛), 이를 바탕으로 알맞게 응대하는 것을 동직(動直)이라 부르며 이는 퇴계의 경(敬) 사상에서 핵심을 차지한다(Keum, 2009: 224).
산수화의 감상은 실재 경관에서 진행되는 격물치지에 상응하는 효과를 제공한다. 산과 물의 이항으로 짝지워진 ‘산수(山水)’라는 개념이 상승과 확장, 굳건함과 유연함 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상보적 작용을 암시하듯, 산수화는 경물들 사이의 “양극화된 긴장(polarized tension)”을 감지할 수 있는 화면 구성을 제시한다. 프랑스아 쥴리앙은 이를 “긴장-상태”로 재구성된 경관이라 설명한 바 있다(Jullien, 2018: 22, 67). 마치 자석의 N극-S극의 관계와 같이, 경물과 경물이 조응(correspond)하는 상보적 역장(force field)을 구현한다는 것이다(Hay, 1985: 102).
따라서 산수화 속의 경물들은 여백이나 지형지물을 사이에 두고 모호하게 분절된 상태로 제시된다. 서구적 개념의 풍경화가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하는 균질하고 완결된 화면 구성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연상을 통해 보는 이 스스로 경물들 사이의 상보적 작용을 그려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이처럼 산수화는 과거의 한 시점을 재현하는 풍경화와는 달리 경물 간의 작용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효과를 제공한다17). 그리고 한 폭의 그림을 소요(逍遙)하는 것은 다수의 경물들 또는 경물의 부분 부분을 살피며 점진적으로 상보적 작용의 관계망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그림 속 소요는 경물에게 ‘다가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는 문인산수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양팽손(1480-1545)의 그림 <산수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속 여정은 화면 우측 하단에서 시작해서 상부에 부유하는 산세를 마주하며 마무리된다. 강을 거슬러 언덕을 오르는 여정은 정자와 인물들로 암시된 다수의 조망점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산과 강의 부분 부분을 올려다보고, 마주보고, 굽어보는 등 시선의 방향과 대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보는 이의 상대적 위치를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효과를 갖는다(Figure 3a 참조). 산점투시(散點透視)라 불리는 이상의 기법은 보는 이에게 “그림 안으로 들어가는 시선”을 부여한다. 그림의 전개를 따라 변모하는 시점을 제공하면서 화폭의 내부를 거닌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Park, 2010: 41).
소요의 여정을 제공하기 위해 산수화의 화폭은 필연적으로 길어지게 된다. 이는 병풍과 족자 등의 수평적으로 긴 비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퇴계와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향유했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가 그 대표적 사례로, 그 감상은 지형의 굴절에 의해 분절된 장면을 우에서 좌로 살펴가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각 장면은 대(臺), 봉(峰), 암(巖) 등의 경물을 위시한 개별적인 조망점을 제공하여 보는 이가 구곡의 굽이굽이를 순차적으로 대면하는 효과를 제공한다(Kim, 2012). 긴 그림의 감상을 일관된 격물의 여정으로 전환하는 장면 연출이라 할 수 있다(Figure 3b 참조).
격물의 끝에서 도달하는 의미는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보는 이는 경물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하나가 나머지 하나와 짝을 이루고, 모든 것이 서로에게 화답하는” 호혜적 관계망을 그려나가고(Jullien, 2018: 36), 그 과정에서 주관화된 경관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때문이다18).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회의 작동 원리를 유추함으로써 산수화를 통한 격물치지는 마무리된다(Jang, 2010). 이처럼 산수화는 화가의 손으로 완결된 형상이 아니라, 보는 이가 상상력을 투사하여 완성해야 할 질료로 주어졌다. 따라서 당시의 학자들에게 ‘그림 같은 풍경’이란 성리학적 사유를 투사할 수 있는 장면과 여정을 제공하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의경(意境)이란 소요를 통해 도달한 이념화된 경관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Kim, 2017).
서애 류성룡의 시 <연좌루추사(燕坐樓秋思)>에는 격물을 통해 확립한 성리학적 의경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관직을 떠나 학문을 되돌아보던 시기, 하회마을의 부용대(芙蓉臺)를 대면하며 도달한 심상이다.
옛 주역의 이치를 / 삼년 동안 연좌루에 앉아 생각함에
마음속에는 푸른 벽이 우뚝이 서고 / 음미하는 밖으로는 저녁 강이 깊구나(Ryu, 1588).
높이와 깊이, 녹음과 노을의 대비로 치환된 절벽과 강의 심상은 이항적인 인식의 틀을 드러내며 “우뚝이 선” 절벽을 통해 이를 체화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동시에 “마음속”에 자리 잡은 절벽과 그 “밖으로” 흐르는 강을 병치함으로서 경물의 상대역이자 풍경의 일부로 자신의 정위(orientation)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무대가 되는 연좌루(燕坐樓)는 병산서원 만대루의 건축적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Kim, 2006). 강 건너편의 절벽과 눈높이를 맞추도록 들어올려진 누각의 구조는 병산을 마주보는 서원의 배치에 격물의 구도와 시점이 반영되었음을 시사한다. 다음의 보다 상세한 분석은 이를 뒷받침한다.
서원의 강당에서 바라본 병산은 만대루로 분절되어있다. 만대루가 지붕 위로 솟아오른 병산의 봉우리와 처마선 아래를 횡단하는 낙동강을 “독자화”하기 때문이다(Kim, 2006: 51). 이와 더불어 동·서재의 지붕선은 봉우리 양 끝을 쳐올리듯 재단하면서 그 양감을 상쇄하고,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만대루의 계자난간은 완만히 굽은 강줄기가 직선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병산의 봉우리와 그 아래를 횡단하는 낙동강의 ‘양극화된 긴장’을 연출하는 셈이다. 당시의 독법을 따라 우에서 좌로 시선을 옮겨보면 능선의 상승과 강물의 수평적 흐름이 이루는 대비는 더욱 강조된다. 현대인의 보기 방식에 맞춰 전경의 좌우를 반전시켜보면 이러한 효과를 보다 쉽게 체감할 수 있다(Figure 4 참조).
또한 낮은 채도로 마감된 누각의 지붕면은 짙푸른 산과 강 사이의 여백으로 기능하면서(Moon, 1998: 70) 병산과 낙동강이 연속된 시각장(field of vision)으로 인지되는 대신 산을 올려다보고-강을 마주보는 “이원적 경관 속성으로 조망(Huh, 2009: 91)”되게끔 한다. 즉 눈앞의 풍경은 공간적 깊이를 상실하고 산과 강이 개별적으로 부유하는 추상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상의 착시 효과를 통해 보는 이는 산-수의 이항 구도를 목도하게 된다. <연좌루추사>의 ‘푸른 벽-저녁 강’이 차경을 통해 구현되는 셈이다.
중정은 산-수의 환영이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너비와 깊이를 가진 공간으로 변모해 가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강당에서 출발하여 만대루에 올라서기까지 보는 이의 시선은 돌출된 산마루에서 시야를 매우는 녹음으로, 이윽고 넓게 펼쳐진 강변으로 이동한다. 점에서 면으로, 그리고 공간으로 지각의 범위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보는 이는 풍경의 내부로 들어선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Figure 5 참조). 이러한 측면에서 강당에서 중정으로 이어지는 장면의 전환은 정관(靜觀)과 동간(動看)의 조합을 통하여 경관을 관조의 대상에서 소요의 장으로 전환하는 원림 조영 기법(Sung, 2011)에 상응하는 효과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9).
이러한 효과는 만대루 대신 담으로 서원의 내·외부가 구획된 상태를 떠올려 보면 보다 명료해진다. 이 경우, 서원 경내에서 외부의 풍경을 응시하는 시지각 구도가 지속되며 병산과 낙동강은 보는 이의 위치와 무관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조망되기 때문이다. 반면 만대루는 풍경의 전모를 한꺼번에 노출시키는 대신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변모하는 장면을 제공한다20). 그 결과 보는 이는 불과 수 미터를 전진하는 동안 산마루를 올려다보고—산등성을 마주보고—산기슭을 굽어보는 상이한 시지각 구도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산수화의 산점투시와 마찬가지로 보는 이에서 풍경으로 공간 인식의 기점(reference point)을 옮겨오는 기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변모하는 풍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서 자신을 중심으로 풍경을 응시하는 대신 그 내부를 거닌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21).
만대루는 고조된 풍경의 공간감을 바탕으로 상상을 통한 소요가 진행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산수화의 긴 화폭이 소요의 장을 제공하듯, 만대루의 긴 비례는 마늘봉에서 너들대벽에 이르는 폭 넓은 장면을 제공한다(Figure 6a 참조). 오늘날의 방문객에게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다가오는 이 장면은 실상 유생들이 하회와 풍산을 오가던 통학로였다. 그리고 만대루는 그 여정을 점진적으로 되짚어 보는 과정을 제공한다. 이러한 조망의 방식은 “7폭의 병풍”에 비견되는 만대루의 액자 구조에서 비롯된다. 만대루 속 어디에서도 전경(全景)을 한 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당 쪽으로 물러앉으면 처마와 난간이 산마루와 강변의 풍경을 차단하고, 강변으로 당겨앉으면 열주들이 좌우의 시야각을 제한한다(Figure 6b, c 참조). 결국 보는 이에게 허락된 것은 두 기둥으로 구획된 한 칸의 장면뿐이다. ‘7폭’이라는 비유에 걸맞게 풍경을 7번 나누어 조망하는 “유목적(遊目的) 관조 방식(Kim, 2013: 115)”을 제공하는 것이다22).
이처럼 만대루는 그 대중적 인식과는 달리 ‘파노라마’와는 대비된 시지각 구도를 선사한다. 파노라마는 하나의 눈(monocular)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기하학적인 시각장을 통칭한다. 최초의 파노라마가 “자연을 한 눈에(la nature a coup d’œil)”라 불리웠던 이유다. 반면 만대루의 선형적인 형태는 그 앞에 펼쳐진 산세와 평행을 이루면서 이를 따라 배치된 다수의 조망점을 제공한다. 전자가 데카르트적 원근법에 따라 고정된 시점에 종속된 풍경을 재현한다면(Bigg, 2007) 후자는 산세의 흐름에 맞추어 보는 이의 시점을 바꾸어 가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이구곡도>의 화면 구성과 마찬가지로 보는 이를 ‘세계-내-존재’로 유입하는 수평적이고 점진적인 시선의 이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대루는 그림의 내부를 소요하듯 일상적으로 거닐었던 풍경을 새로운 시점으로 복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23).
보는 이의 위치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풍경을 노출시키는 방식은 만대루를 비롯하여 중정 권역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지속되는 시지각 구도다. 이는 “한 눈에 파악되는 지표의 일부(Jackson, 1984: 3)”라는 근대적 경관 개념과는 달리 ‘걷는 만큼 확장되는 지평’이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부합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원의 경관 경험을 강당이나 만대루에서 응시하는 한두 개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축소하기보다는 강당과 중정, 만대루를 거치며 조우하는 단편적인 장면들이 누적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미셸 코난(Michel Conan)은 경관을 거니는 경험이 “연상의 흐름(the flow of associations)”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보는 이가 마주하는 장면들이 점증적인 연상의 단계를 통해 하나의 유의미한 네러티브로 수렴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Conan, 2003: 23).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만대루는 강당과 중정을 거치며 확립된 산-수의 심상과 그 내부를 거니는 감각이 통학로를 따라 투사되는 장소로 이해될 수 있다. 마늘봉에서 병산으로, 또 병산에서 너들대벽으로 수없이 오가며 마주했던 풍경들이 산-수의 ‘긴장-상태’로 새롭게 인식되는 과정인 셈이다.
자연을 조망하며 그 상보적 작용을 연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면 하나 하나를 대면하며 그 작용의 관계망을 그려나간다는 점에서 만대루는 격물의 장소로 이해될 수 있다. 쥴리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과 강이 짝을 이루고, 서로에게 화답하는’ 모습이 병산의 굽이굽이를 따라 펼쳐지는 것이다. 이항적으로 재구성된 풍경을 바라보며 사회의 윤리적 작동을 유추하는 것으로 만대루에서의 격물치지는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서애가 부용대를 대면하던 과정이 병산과 낙동강을 무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서애는 부용대를 격물하여 “푸른 벽”과 “깊은 강”을 노래했다. 음과 양으로 대변되는 성리학적 인식의 틀을 통해 자연의 상보적 작용을 연상한 것이다. 이처럼 서애의 산수시는 자연의 감상이 성리학적인 연상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보기 방식이 산수화의 화면 구성과 그 내부를 소요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산서원의 차경 설계는 이상의 관습화된 보기 방식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서원의 강당이 일상적 풍경을 산-수의 이항으로 재인식하는 장소였다면, 중정은 이를 소요의 장으로 전환하고, 만대루는 상상을 통해 풍경을 누비며 이항적으로 재구성된 지평을 그려나가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퇴계가 그러하였듯, 일상적인 풍경이 이념화된 의경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보는 이는 “마음의 눈이 열린다”고 느꼈을 것이다. 병산서원의 중정 권역을 격물의 현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상의 추론은 전각들이 명명(命名)된 방식을 통해 보다 설득력을 얻는다. 격물치지의 수신론(修身論)에서 이항적 인식을 체화하는 과정을 ‘정허’로, 이를 바탕으로 주어진 상황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동직’이라 함을 살핀 바 있다. 이들은 각기 서재와 동재의 이름—정허제(靜虛齋)와 동직제(動直齋)—로 중정에 새겨져 있다. 하급생과 상급생이 기거하는 기숙사의 이름을 통해 격물치지의 단계와 목표를 밝힌 셈이다. 만대루 역시 그 이름을 통해 중정의 프로그램을 분명히 한다. 앞서 살펴본 <무이구곡도>는 주희가 서원을 짓고 제자를 양성하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주희는 서원의 정자인 만대정(晩對亭)에 앉아 동명(同名)의 시를 남긴 바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 남산에 오르니 / 멀리 만대봉이 있네
가파른 모습 차가운 하늘에 우뚝한데 / 지는 해는 푸른 벽에 볕을 드리우네(Zhu, 1183).
<천연대>나 <연좌루추사>와 마찬가지로 <만대정>의 짧은 구절이 표현하는 것은 상승-하강, 차가움-따뜻함, 빛-그림자의 상보적 작용으로 인식된 자연의 리(理)다. 따라서 ‘만대루’라는 이름은 만대정에 대한 오마주이자 주희가 확립한 격물치지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원의 차경 설계가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면 현판들은 그 화기(畵記)로 기능한다. 격물치지라는 작화(作畵)의 의도를 밝히고 주희에서 퇴계로, 그리고 서애로 이어지는 수양론적 전통을 명시하는 셈이다24).
지금까지 성리학적 보기 방식에 근거하여 병산서원의 경관 경험을 재구성해 보았다. 자연을 조망하는 행위의 양식성(modality)과 그 수양론적 함의를 이해하고, 이를 매개하는 장치로 차경을 기술하기 위한 접근이었다. 이를 통해 강당에서 중정 권역 전체로 해석의 범위를 확장하고, 차경의 심미적 특성에서 그 도구적 특성으로 해석의 초점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병산서원의 중정 권역이 격물치지의 장으로 고안되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병산서원의 차경 설계는 “그림과 액자”라는 비유와 그에 수반되는 레토릭에 관한 보다 확장된 인식을 제공한다.
첫째, ‘그림 같다’는 표현은 강당에서 조망한 풍경을 넘어 강당-중정-만대루로 이어지는 여정을 포괄하는 비유로 확장될 수 있다. 즉 ‘그림 같은 장면’에서 ‘그림 같은 여정’으로의 전환이다. 이는 특정 시점에서 조망한 회화적 장면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펼쳐지는 회화적 무대 연출(scenographics)로 감상의 범주를 전환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 경우,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맞는 포토제닉한 장면들만큼이나 그 사이를 매개하는 연출 기법과 장치들이 주된 해석의 대상이 된다. 한 장씩 사진을 넘겨보는 슬라이드 쇼처럼 차경을 분석하기보다는 신체화된 반응을 활용해 장면 사이의 네러티브를 형성하는 기술로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건축적 액자의 ‘비어있음’은 빈 공간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서원의 건축군은 풍경의 일부를 모호하게 가리면서 보는 이의 상상을 통한 의경을 완성하도록 만든다. 병산과 낙동강 사이를 분절하면서 산-강의 상보적 작용을 연상케 하는 만대루의 지붕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때 산수화 속 빈 공간, 즉 ‘여백’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건축물의 빈 틈이 아니라 기둥이나 지붕과 같은 구조체다. 따라서 건축적 액자의 “비어있음”은 공간적 공백—풍경을 위해 열려있는 틈—과 시각 정보의 공백—상상을 위해 가려진 부분—이라는 중의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개구부가 수행하는 보편적 기능과 더불어 성리학적 보기 방식을 반영한 특수성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상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과 서원은 더 이상 ‘그림과 액자’로 구별되지 않는다. 고전적 회화에서 액자는 감상의 대상을 특정할 뿐 그 의미 전달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정의 건축군은 주어진 장면을 분절하고 조망의 구도를 조정하면서 병산이라는 소재에 새로운 의미 구조(semantics)를 부여한다. 따라서 서원은 그림의 액자라기보다는 구도에 상응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림 같은 풍경을 담은 틀(frame)을 대신하여 화폭을 종횡하며 그 내용물을 재구성하는 체계(framework)로 차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액자’라는 비유의 형태적 특징에 매도되지 않고 그 개념적 잠재력을 온존할 수 있다.
4. 결론
지금껏 병산서원 수양론의 방점은 ‘자연’에 찍혀왔다. 이는 때로는 서원의 건축과 차경 기법이 간직한 ‘자연스러움’에 대한 상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대변되는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자연경관이 차지하는 절대적 위상을 고려하면 이에 수긍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설계의 비인위성을 강조하는 레토릭으로 이어질 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 지세를 그대로 활용하고 주변 환경을 모두 수용한다는 서술은 200평에 달하는 중정의 절토면이나 시야를 가로막는 건축군의 시지각적 간섭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자연 경관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보는 이의 인식에 개입한다’는 사실로 연구의 초점을 전환하고자 하였다. 이는 병산서원의 차경 설계가 ‘무엇을 하지 않는지’에서 ‘무엇을 하는지’로 기술의 방식을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리학적 환영을 촉발하는 다양한 인지적 착시 기법의 발견이었다. 즉 병산서원이 제공하는 ‘자연’이란 착시와 환영의 풍경에 다름 아닌 것이다.
병산과 낙동강이 액자 속 풍경으로 보일지, 산수(山水)의 작용으로 다가올지는 보는 이가 무의식적으로 연상하는 ‘그림’이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그림 같은 풍경“이란 관습적인 인식의 틀(schema)에 따라 다르게 촉발되는 환영일 것이다. 그 환영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해석의 준거(frame of reference)로 삼은 ‘그림’에 따라 풍경의 모습과 의미가 변모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차경이라는 시각적 틀은 보기 방식이라는 보다 큰 문화적 틀(cultural framing)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병산서원의 차경을 연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서원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그림과 액자’라는 보편화된 비유를 바탕으로 병산서원의 차경을 바라보는 대안적 시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병산서원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다변화되고 그 차이가 새로운 경관 담론을 잉태할 때, 서원은 ‘성리학적’ 유산으로서 동시대적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적 사유에서 ‘차이’는 곧 생성과 변화의 동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