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고등교육기관과 정원은 오래전부터 뗄 수 없는 관계를 보였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성벽 밖에 있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Academy)는 커뮤니티 마당으로서 지적 대화와 탐구를 도왔으며, 마찬가지로 아테네 밖에 위치했던 에피쿠로스 정원학파(Garden School)는 자연을 돌보기 위한 채원을 갖추고 자기 연마와 계발 기회를 제공했다(Harrison, 2008). 아카데미 경관은 고등교육의 핵심적 도구로 기능한 것뿐 아니라, 교육기관과 설립자의 교육 철학과 동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얼굴이자 문화유산이다. 예컨대 미국 독립선언문의 저자이자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설립한 미국 버지니아대학교의 아카데미컬 빌리지(Academical Village)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여러 건축물과 함께 캠퍼스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정원이 있었다1).
아카데미 경관은 건축과 조경학의 오랜 주제이나, 최근 다시 한번 화두로 부상한 바 있다.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연구기관인 덤바턴 오크스(Dumbarton Oaks)의 2016년 심포지엄 “경관과 아카데미(Landscape and the Academy)”이 단적인 예이다. 이 심포지엄은 아카데미 경관을 조경의 한 가지 유형으로 규정하고 아카데미 경관이 연구와 교육, 사회문화 영역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논의하였다2). 국내 조경학계에서도 아카데미 경관은 중요한 연구 주제로,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의 교육 무대였던 서원은 한국의 전통조경을 대표하는 정원 유형으로 꼽힌다. 2019년 한국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최근 관련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3). 그러나 국내에서 아카데미와 정원의 관계는 ‘전통’의 원류로서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범위, 서원이라는 공간적 범위에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서구화 및 근대화로 인한 역동적인 변화와 함께 개화기에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아카데미 경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2000년대 들어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법적으로 지원하는 등록문화재제도가 마련되면서 국내 건축학계에서 근대교육시설을 조명하고 있으나, 개별 건물의 건축양식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본 연구는 근대기 아카데미 중 1906년 10월 3일 개성에 설립된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영서원은 근대기의 정치인이자 교육가였던 윤치호(1865-1945)가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후원을 받아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20세기 초 대표적인 사학 중 하나였다4). 윤치호의 개화사상과 애국계몽운동 방식을 살피는 연구(Yoo, 1985)나 남감리교의 개성 지역 선교 성과를 밝히는 연구(Kang, 2016)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등, 한영서원은 근대 한국의 일면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특히 개교 며칠 후인 1906년 10월 17일, 윤치호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5) 총장 워런 캔들러(Warren, 1857-1941) 박사에게 보낸 서신에서 “학교 정원(school gardens)”6)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던 사실은 한영서원 정원이 그의 교육 철학을 반영하는 공간이자 근대 아카데미 경관으로 검토할 만한 대상임을 가리킨다. 더군다나 윤치호는 국내 조경사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인물로, 사절단과 유학생으로서 서구 문물을 경험했던 그는 꾸준한 일기를 통해 동시대 한국인의 공원과 정원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보여준 바 있다7). 이런 그가 한영서원 계획 전면에 정원을 내세웠다는 사실은 조경사 연구에 있어 한영서원 정원이 지니는 중요성을 제고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한영서원의 정원 계획 배경과 공간 특징을 밝히고 아카데미 경관의 조경사적 의미를 논하는 데 있다. 구체적인 연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영서원 정원 조성 배경과 목적은 무엇이었나. 둘째, 정원의 공간 구조는 어떠하였나. 셋째, 정원에 식재된 수종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도입되었나. 이를 위해 먼저 한영서원 설립 이전의 아카데미 경관 사례와 현대 아카데미 경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근대기 미국의 캠퍼스를 중심으로 아카데미 경관의 특징과 의미를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사료를 바탕으로 한영서원의 설립 과정과 배경, 공간 특징을 분석하고, 이것이 아카데미 경관의 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제공하는지 논의하였다.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한영서원이 설립된 1906년부터 학교의 본 모습이 갖춰진 1920년대 초반까지이다.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개성에 위치한 한영서원 단지와 그 부속 시설로 한다. 연구 내용은 한영서원 정원 계획의 기본방향, 공간 구조, 정원의 구성과 형태, 정원에 도입된 식물 종류, 정원 조성과 운영을 위한 미국 남감리 선교회의 지원 내용을 포함한다.
한영서원은 북한 개성시에 위치해 있어 현장 방문이 어렵다. 위성 영상으로 확인해본 결과, 오늘날 그 형태를 상당 부분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20세기 초에 생산된 사진, 지도, 서신과 같은 문서를 대상으로 한 문헌 연구 방법을 취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자료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에모리대학교 스튜어트로즈도서관(Stuart A. Rose Manuscript, Archives, and Rare Book Library)에 소장된 「윤치호 문서(Yun Ch’i-ho Papers, 1865-1945)」와 「워런 캔들러 문서(Warren A. Candler Papers, 1846-1977)」이다. 에모리대학교의 두 컬렉션은 윤치호와 캔들러의 서신 원본을 비롯해 윤치호의 일기 일부와 사진 원본, 윤치호의 연설문, 한영서원 안내 팜플렛 등과 캔들러의 서신, 한영서원 교육 프로그램 구상안, 사진, 회계 문서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어 한영서원의 설립 배경과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할 자료이다. 둘째, 각종 도면과 토지 관련 문서이다. 여기에는 1916년에 제작된 「일만분의일조선지형도」의 개성부와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생산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시기의「개성부전도」가 포함된다. 셋째,『윤치호 일기』, 남감리교와 선교사들이 발행한 잡지와 간행물로, 남감리교회에서 1911년부터 발행했던 선교 잡지 The Missionary Voice와 30주년 기념집인 Southern Methodism in Korea, Thirtieth Anniversary 등이다.
2. 이론적 배경
오늘날 아카데미 경관, 대학과 관련 시설이 위치한 토지를 일컫는 용어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는 캠퍼스이다. 본래 캠퍼스는 라틴어로 들판(field)을 뜻했으며, 18세기 후반 미국에서 대학 공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8). 캠퍼스는 조경과 환경 디자인의 미국 고등 교육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이자, 수목원, 숲, 농업 시설과 같이 다양한 조경 설계 유형을 포함하는 곳이다. 게다가 현대 조경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드릭 옴스테드(Frederick, 1822-1903)와 그의 자녀들은 농업대학 설립을 지지하고 코넬대학교를 포함한 다수의 대학 캠퍼스를 계획하기도 했다(Hilderbrand, 2019; Dümpelmann, 2022). 따라서 Beardsley와 Bluestone(2019)은 캠퍼스를 도시공원, 공원녹지체계와 함께 미국이 남긴 주요 조경 유산 중 하나로 평가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캠퍼스 모델이란 무엇인가? 우선 입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아테네 외곽에 있었던 것처럼, 미국 캠퍼스는 대개 도시가 아닌, 전원 속에 놓여 있다. 이는 일면 1862년 주립대학 설립을 위해 국유지의 무상 불하를 규정했던 일명 모릴법(Morill Act 또는 Land-Grant College Act)이 시행된 결과이다. 그러나 제도적 측면 이외에 대학 캠퍼스가 전원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도 했다. 실제로 옴스테드와 같은 조경가는 캠퍼스를 모델 농장이자 모범적인 커뮤니티로 보았는데, 그 바탕에는 지성의 마당인 대학이 배후지인 시골을 계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Dümpelmann, 2022).
미국 캠퍼스의 또 다른 특징은 물리적 외형에서 찾을 수 있다. Beardsley와 Bluestone(2019)은 수도원의 위요된 회랑 구조와 같은 유럽식 대학과 달리, 미국의 캠퍼스가 건물에 둘러싸인 중앙부 녹지와 주변 경관에 열린 구조를 지녔다고 설명한다. 하버드대학교의 하버드 야드(Harvard Yard)와 버지니아대학교의 아카데미컬 빌리지(Academical Village)가 그 예로, 19세기 들어 하버드대학교는 신대륙의 원시 경관과 미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느릅나무,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밭,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각 건물을 연결하는 소로로 구성된 하버드 야드를 조성했다(Claghorn, 2019). 버지니아대학교는 너른 잔디밭을 중심으로 유(U)자형의 공간을 구성했는데, 잔디밭 주변에 학교 구성원의 숙소를 배치하고, 각 숙소 건물 후면에 작은 정원을 두어 교수와 학생의 긴밀한 소통을 촉진했다(Sung, 2012).
위와 같은 학업 공동체의 장과 같았던 캠퍼스 외에도, 미국의 캠퍼스는 실질적인 학습 장소로 기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국육군사관학교는 19세기 중반 군대에서 필요한 토목 공학 지식을 학습하고 실습하기 위해 숲속에 엔지니어 정원(Engineers’ Garden)을 조성했다(Davis, 2019). 여성 대학인 바사칼리지(Vassar College)는 1900년대 초 캠퍼스의 절반을 실습장에 할당하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실습과 허드슨강 서식지 연구를 시행했다(Lengen, 2019). 조경 교육 과정을 강조했던 대학에서도 이러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데, 19세기 후반 노예제 폐지 후 모릴법의 지원으로 설립된 터스키기 일반산업연구소(Tuskegee Normal and Industrial Institute)가 그 예이다. 조경사학자 Dümpelmann(2022)에 따르면 숙련된 정원가를 양성하는 데 교육 목표를 두었던 이 학교의 설립자 부커 워싱턴(Booker, 1856-1915)은 농업대학의 공간 계획에 있어 옴스테드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국 조경학계에서 아카데미 경관은 주로 조선시대 전국에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을 가리킨다. 성균관과 향교와 같은 관학 교육기관이 존재했으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600여 개소라는 규모가 암시하듯, 조선시대 서원은 건축사와 조경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서원은 한국의 여러 정원 유형 중에서도 독특한 사례로 꼽히는데, 위계와 영역별 짜임새 있는 공간 구조로 인해 현대 조경에 시사하는 바가 큰 정원으로 평가된다(Roh, 2006; Roh et al., 2014). 최근 2019년에는 소수서원, 남계서원, 도산서원 등 서원 9곳이 조선 왕조의 성리학 아카데미 유형9)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통조경으로서 서원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입지와 시대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사액서원의 시작인 소수서원과 같이 식재나 석물 없이 빈 마당을 둔 예가 있는가 하면, 연지를 파고 기단을 쌓고 식재를 한 도산서원도 있다10). 따라서 최근의 연구들은 서원의 보편적인 특성을 밝히기보다, 개별 서원을 대상으로 각각의 고유한 조경 특성을 드러내는 초점을 두고 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고유의 아카데미 경관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서원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몇 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기적인 배치 구조이다. 입지에 따라 위치나 방향에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를 따르는 기관이었기에 강학 공간과 함께 존현을 모시는 공간이 기본 골자를 이루었다. 둘째, 확장된 조망 경관으로, 서원은 담장 밖의 강이나 산과 같이 주변 자연환경을 경관 요소로 적극적으로 포함했다. 따라서 서원의 외부조망경관 요소와 특징을 밝히고 보호구역 설정을 판단하는 것은 서원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Choi, 2013). 셋째, 행단이나 학자를 상징하는 식물 배치이다. 공간별 식재 현황에서도 규칙성이 나타나며, 가장 많이 나타나는 대표 수목은 향나무, 은행나무 등 5종이다(Lee et al., 2013).
3. 연구 결과 및 고찰
한영서원은 근대 한국의 개성에 위치한 한 학교였으나, 그 명칭이 암시하듯 그 기반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윤치호의 일기나 그와 캔들러 박사가 주고받은 서신은 한영서원이 윤치호와 미국에 있는 그의 동료 및 후원자들의 합작품임을 알려준다. 윤치호는 캔들러 박사와 서신을 통해 학교 부지, 교육 방향, 조성 비용, 건설 과정, 교원 구조 등, 학교 조성부터 운영에 이르는 전반적인 사항을 꾸준히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한영서원 조성 계획과 실천의 주체는 윤치호였다. 윤치호가 자신의 생각이나 요청이 담긴 서신을 보내면, 캔들러와 남감리교는 이를 검토하고 지원하는 답장을 보내는 식이었다. 예컨대 1895년 7월 윤치호는 캔들러에게 당시 송도로 불렸던 지금의 개성에서 선교와 교육 활동을 제안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학교 방향을 제시하였다12). 한영서원이라는 학교명 역시 그의 제안이었다(Wasson, 1934: 57). 게다가 그는 일찍이 에모리대 재학 시절부터 기독교 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주변에 알렸으며, 캔들러에게 설립 자금을 맡겨두기도 했다13).
학교 정원 조성에 적극적인 이 역시 윤치호였다. 윤치호는 학교 부지를 매입하기 전부터 정원 운영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 10월, 구입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에서 선교 부지 인근의 밤나무숲과 밭을 언급하며 이를 확보해야 과수원과 정원 조성에 착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14), 얼마 후 교사 파견에 관한 서신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건축뿐 아니라 과수원과 정원 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능한 교사를 요청했다15). 학교 정원에 열망을 보였던 윤치호와 달리, 캔들러는 윤치호의 계획과 실천을 지원하기는 했으나 정원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906년 캔들러가 직접 작성한 문학(library department), 성경(department for biblical instruction), 실업(industrial department) 세 가지로 이루어진 교육 프로그램 개요를 보면, 그는 실업 교육을 “청년들의 필요에 가장 적합한 종류에 우선하는 실업 기술”16)이라는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 그쳤다. 실업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실업 교육에 있어 정원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선교사로 추정되는 램버스(Lambuth)가 1907년 6월 캔들러에게 제출한 한영서원과 선교 단지 계획 방향과 예산을 다룬 구상안에서도 학교 건물의 위치와 건축 재료, 조성 비용에 관한 내용은 발견할 수 있으나, 정원에 대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17).
한영서원의 교육 방향을 문학, 성경, 실업 순으로 소개했던 캔들러와 달리18), 윤치호는 “한국에서 실업학교가 아닌 다른 종류의 교육 활동은 지지하지 않는다”19)라고 말하며 한영서원을 실업학교(industrial school)로 규정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기 약 10년 전인 1890년대 중반부터 실업학교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1895년 캔들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학교를 갖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한국 청년들이 노동이 불명예가 아니며, 한국의 미래가 노동에 달려 있고, 기독교는 일하는 종교라는 진리를 구원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실업학교여야 합니다. 학교에서의 농업이나 대규모 농업 부속물은 이곳에서 선교 사업을 지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20).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윤치호가 말하는 실업은 기계공학이 아닌 농업이었다. 그는 특히 당시 한국의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과일과 채소 재배와 같은 농업 기술에 있다고 보았다. 1907년 윤치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문학과 농업을 각각 셰익스피어와 딸기에 빗대어 표현하며 농업 교육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튼튼한 딸기를 키우는 방법을 아는 것이 더 낫다. ... 우리 아이들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딸기를 택하게 하자. 셰익스피어는 기다릴 수 있으나, 현 체제 아래 토지는 법을 모르는 군사적 필요와 필요 없는 법에 의해 점령당할 수 있다(Wasson, 1934: 57).
결국 농업 교육이 문학보다 시급한 과제였던 윤치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공간은 정원이었을 것이다. 정원은 학교 부지를 선정하는 데 있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개성 북쪽 송악산 기슭의 숲과 농경지를 매입하고자 했던 이유도 학교 정원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1907년 6월, 그는 학교와 선교 시설로 이루어진 복합단지 건설 계획을 제시하며, 그가 고려하고 있는 토지가 “거주하거나 과수 재배 및 원예 목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위치”21)라는 설명과 함께 2만 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같은 글에서 윤치호가 학교 정원에서 출발한 실업 교육이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지역 산업을 이끄는 시설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 정원은 농업 교육을 실행하기 위한 실험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한영서원에 있어 정원은 실업학교를 지향했던 학교의 얼굴과 같았다.
윤치호와 캔들러 사이에 오고 간 편지와『조선남감리교 30주년 기념집(Southern Methodism in Korea: Thirtieth Anniversary)』(Ryang, 1930), Songdo Academy(2006)에서 발행한 학교 100년사를 바탕으로 한영서원 계획과 조성 과정을 정리하면 크게 설립 준비기, 계획안 작성기, 조성 및 발전기와 같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설립 준비기로, 이는 윤치호가 학교 설립을 구상하기 시작한 1893년부터 학교를 연 1906년까지를 이른다. 이때 윤치호는 선교사들과 함께 송도를 방문하고 학교 설립에 대한 지지를 얻었으며, 캔들러와 교육 방향을 논의하였다. 건축위원회도 이때 조직되었다. 한영서원은 1906년 10월 3일 개성의 한 인삼 창고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학생 수는 14명이었다. 두 번째는 계획안 작성기로, 개교 직후인 1906년부터 계획안이 제출된 1908년까지이다. 이때 교육과 선교 부지가 구입되었다. 1907년 6월에는 교육 및 선교단지 제안서(memorandum)가 마련되었다22). 같은 해 9월에는 톰슨(Thompson J. A.)이 교사로 합류하여 학교 배치와 건축 계획, 정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23). 세 번째는 발전기로, 본관 건물이 완성된 1908년부터 학교의 여러 시설이 완성된 1920년대 초반까지를 아우른다. 1908년 석조 기숙사를 시작으로, 1912년 실업본관, 1918년 과학관, 1921년 본관이 완공되었다. 1920년대 초에 이르러 한영서원은 기숙사, 실업장, 교사 본관과 같은 건축물과 함께 농장과 목장도 운영했다(Songdo Academy, 2006). 1920년대에는 미국 남감리교에 성공적인 교육 사례로 알려졌으며, 한영서원과 유사한 형태의 여학교가 개성 내 다른 지역에 설립되기도 했다(Figure 1 참조).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한영서원 개원 초기 연대표를 작성한 결과는 다음 Table 1과 같다.
Source: a. The Board of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December 1922: 384, b. The Board of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October 1921: 310
한영서원은 지금의 개성, 구한말과 일제시기에는 송도로 불렸던 곳에 위치했다. 당시 주소로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이다. 이곳은 개성 북쪽 송악산 바로 아래 자락으로, 고려의 궁궐터이자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The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의 일부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려궁성, 속칭 ‘만월대’와 지천 하나를 두고 마주한 곳이다. 1916년에 제작된「일만분의일조선지형도」의 개성 부분을 살펴보면 한영서원의 위치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는데, 고려궁성으로부터 동쪽, 삼업조합건조장으로부터 북동쪽에 위치한 곳에 한영서원이 있었다. 지도에는 ‘한영서원(韓英書院)’과 ‘한영서원공학과(韓英書院工學科)’라는 글자와 건물 여러 채가 표기되어 있다(Figure 2 참조). 일제시기에 발행된「개성부전도」에도 학교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에는 ‘송도소학교(松都小學校),’ ‘송도중학교(松都中學校),’ ‘송도실학교(松都實學校)’와 같이 바뀐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Figure 3 참조).
Source: Author’s marking on the map of Gaeseong at Seoul Museum of History
윤치호가 이곳을 교육과 선교 부지로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송도는 개인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윤치호에게 의미 있는 곳이었다. 그는 캔들러에게 보낸 서신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을 지원해 줄 친척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과 상업과 농업이 두루 발달하여 실업학교의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송도의 특징으로 묘사했다24). 실제로 한영서원은 송도, 즉 개성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발간된 개성시 지방신문인 고려시보(高麗時報)는 한영서원 혹은 송도고보의 입학 및 졸업, 교육 행사와 같은 소식을 자주 다루었고, 학교 실업장의 가치를 소개하기도 했다25). 또한 1933년에는 개성 지역에서 한영서원 재단 설립을 위한 지지 운동도 일어났다26). 1922년에 조성된 목장에서 생산된 우유는 지역에 공급되기도 했다(Ryang, 1930; Songdo Academy, 2006).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듯, 송도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밤나무 숲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정원 조성을 꿈꾸고 있던 그에게 그 무엇보다 이상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실제로「일만분의일조선지형도」의 개성 부분을 보면 한영서원은 숲으로 둘러싸인 농경지 위에 위치했다.
윤치호의 계획이 학교뿐 아니라 선교 단지와 부속 시설을 포함했던 점을 고려하면, 송악산 자락의 상당 부분이 학교와 관련 시설 부지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개교 다음 해인 1907년 윤치호는 복합단지 계획을 설명하며 희망하는 부지 규모로 500ac라는 숫자를 언급했는데27), 이는 오늘날 올림픽공원 면적의 1.4배에 이르는 크기이다. 같은 해 다른 서신 역시 부지 규모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 약 70ac가 선교 부지로 확보되었고 학교 부지로는 오늘날 선유도공원 크기에 해당하는 25ac가 논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8). 실제로 1920년대 한영서원의 교지 면적은 37,000평, 즉 30ac에 이르렀다(Songdo Academy, 2006).
보다 정확한 공간 규모와 범위는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29). 1912년에 생산된 개성군 송도면 고려정의 「토지조사부」에서 남감리회와 윤치호가 소유하고 있던 땅의 지번과 규모를 확인한 후, 그 위치를 「지적원도」에서 찾아 표시하면 다음의 Figure 4 (a)와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감리회선교부(監理會宣敎部) 소유로 등록된 토지의 위치는 1916년의「일만분의일조선지형도」개성부에 표기된 한영서원과 일치한다. 총 면적은 66,435평(약 219,620m2)으로, 이는 1907년 윤치호와 캔들러가 논의했던 학교 부지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지목별로 살펴보면, 밭 52.7%, 대지 37.2%, 논 5.7%, 잡종지 4.4%이다. 그 분포를 살펴보면, 학교 부지로 추정되는 대지는 남북 방향의 길을 따라 동서 양쪽에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으며, 논은「일만분의일조선지형도」에 공학과로 표기된 건물 동측에 위치해 있다. 부지 북측으로는 전반적으로 밭이 분포하고 있으며, 대지를 감싸는 형국이다(Figure 4 (b) 참조). 이외에도 윤치호 소유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남감리회 소유지 북측에서 이어진 곳이다. 총 면적은 6,956평(약 23,000m2), 지목은 밭 69.4%, 대지 30.6%로, 여러 필지가 분산된 구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Source: a and b. Author’s marking o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1912a, c. Author’s marking o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1985: 31
학교 정원은 남감리회 소유지 중 논으로 등록된 2,360평의 땅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은 남감리회 소유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을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한영서원공학과 혹은 송도실학교 바로 등측에 위치한 땅이다. 이외에도 1920년대 한영서원의 사진에서 농경지의 형태를 띤 부지가 학교 건물 남쪽으로도 이어지는 것을 보아, 정원은 한영서원공학과 남측이자 삼업조합건조장 동측의 밭으로 등록된 부지에도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Figure 5 참조).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영서원 내 정원의 위치를 추정하면 Figure 4 (c)와 같다. 정원은 재배 식물에 따라 다시 여러 개의 공간으로 구획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정원 중앙부 우측에 위치한 작은 부속 건물을 중심으로 그 남쪽에는 4개의 소정원이, 그 북쪽에는 3개 이상의 소정원이 확인된다. 부속 건물 바로 아래에 위치한 2개의 소정원에는 각 작물이 밭이랑을 따라 일렬로 배열되었으며, 그 아래 오른쪽 소정원에는 동심원 구조의 밭이랑이, 삼업조합건조장으로 이어지는 그 왼쪽 소정원에는 다단 구조의 지형과 동서 방향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한영서원 정원 도면이나 식물 목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윤치호와 캔들러 사이에 오간 서신을 통해 정원에 식재된 식물의 종류와 유입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 주로 한영서원 개교 초기인 1906년과 1907년에 작성된 서신에서 나타나는데,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Table 2와 같다. 서신에 적힌 식물은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 피칸, 목화 씨앗으로, 모두 경제성 작물이다. 이러한 식물 구성은 한영서원의 정원이 실업교육을 위한 실험장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목화 씨앗을 보내며 산업화를 말했던 캔들러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30). 또한,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의 경제적 재배가 구한말 혹은 대한제국기의 외국 선교사 등을 통한 서구문화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한영서원 정원은 이 시기 한국에서 해외 식물 유입 현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다31). 더 나아가 최근의 연구에서 Gil과 Park(2022)은 1920~30년대 주택 정원에서 외국 화훼종이 사용되고 정원 가꾸기가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밝혔는데, 이를 고려하면 20세기 초의 한영서원 정원은 근대기 한국과 서구의 식물 교류 현황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로 판단된다.
교류 형태는 상호 교환이 아닌, 지원 구조를 띠었다. 윤치호가 특정 수종을 먼저 요청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캔들러가 미국에서 식물을 구해 배편으로 한국에 보내는 식이었다. 예컨대 1906년 10월 25일 윤치호의 서신을 보면 그는 캔들러에게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대한 답장으로 1907년 1월 12일 캔들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과실수를 주문했다32). 그러나 목화 씨앗이나 피칸과 같이 캔들러가 직접 실업 교육에 적절한 식물을 추천하기도 했다. 1907년 2월 5일 캔들러가 윤치호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피칸을 보내며 재배 토양과 시기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피칸 약간을 보내니, 따뜻하고 습기가 있는 모래질 땅에 심으십시오. 6월이면 도착할 텐데, 약 1년이 지나면 가장 좋은 땅에 이식하세요. 이 피칸은 송도와 같은 기후에 딱 맞는 최상의 품종입니다33).
캔들러의 식물 지원은 한영서원 개교 직후인 1906년과 1907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식물 교류 규모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1907년 11월 20일 캔들러는 윤치호에게 보낸 서신에서 식물 수량을 적었는데, 이에 따르면 사과나무 50주, 복숭아나무 25주, 포도나무 25주였고, 1907년 1월의 서신에 따르면 목화 씨앗은 10파운드가량이었다34).
4. 결론
조선의 서원이나 미국의 캠퍼스와 같은 아카데미 경관은 조경사의 중요한 주제이다. 본 연구는 서구 문물의 도입과 근대화가 일어났던 역동적인 시기, 윤치호가 미국의 남감리교와 함께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 내 정원을 아카데미 경관으로 보고, 그 설립 배경과 공간 특징을 검토하였다.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한영서원 정원은 한국의 전통적인 아카데미 경관인 서원과 입지, 기능, 식재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결을 지니는 유형이다. 또한 근대 한국 조경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외에도 한영서원 정원은 도시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소로, 향후 개성 지역 연구를 위한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영서원은 비록 그 명칭으로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을 가리키는 ‘서원’을 그대로 쓰고 있으나, 성리학 사상에 토대를 두었던 서원과 달리 농업 혹은 원예를 중심으로 한 실업 지식,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교육기관이다. 한영서원은 교육 방향뿐 아니라 공간 배치 원칙에도 서원과 차이를 보였다. 서원이 대화와 토론의 마당이자 상징적 장소라 한다면, 한영서원의 정원은 철저히 실용적인 공간이었다. 자연 속에 안겨 조망 경관을 중요하게 여겼던 서원과 달리, 한영서원은 개성이라는 사회·경제적으로 융성했던 도시에 위치했으며 학교 정원은 지역사회의 산업 발전을 이끄는 기제로 계획되었다. 한편 한영서원은 미국 남감리교와 같은 미국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19세기 미국의 아카데미 경관 유형인 캠퍼스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미국의 캠퍼스가 윤치호의 한영서원 정원 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거나 참조를 제공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농장과 밭으로 구성된 한영서원의 정원은 비어 있고 열린 구조의 잔디밭과 이를 둘러싼 건축물로 요약되는 일반적인 미국의 캠퍼스 경관과 기능과 구조 면에서 다르다. 윤치호가 한영서원 정원은 정원(garden), 들판(field), 과수원(orchard), 농장(farm)과 같은 단어로 묘사되었을 뿐, 캠퍼스로 불린 예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한영서원의 정원은 서원과 캠퍼스의 학습 공동체를 지원하는 마당이 아니라, 농업과 원예 기술인을 배양하는 실습장으로서 특수한 목적을 지닌 시설 공간이라 하겠다. 다만, 미국 캠퍼스 중에서도 한영서원과 마찬가지로 원예나 농업 실습을 위해 정원을 설치한 농업대학과 같은 사례도 있기에, 한영서원을 이러한 사례와 함께 비교하여 하나의 아카데미 경관 유형으로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하겠다.
20세기 초에 조성된 한영서원 정원은 근대 한국 조경의 지형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한다. 우선 당시 정원 식물과 재료, 기술, 지식, 용어의 교류 주체와 통로를 보여주는데, 윤치호와 캔들러의 긴밀하고 꾸준한 소통 교류, 남감리교의 물질적, 인적 지원은 당시 정원 식물과 재료의 유입에 있어 민간 영역과 선교 단체의 역할이 컸음을 알려준다. 또한 사과나무와 피칸과 같이 한영서원 정원에 식재된 수종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관상수나 조경수 외에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수종의 경제성 식물이 해외에서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20~30년대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주택 정원을 가꾸는 일이 취미로 확산되고 외국 화훼종을 정원에 심는 사례가 등장한 사실을 고려할 때, 1906년 미국 선교단체와 긴밀한 협력 속에 조성된 한영서원의 정원은 1920~30년대 한국의 정원 문화와 발전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연결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간 공원이라는 공공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근대 조경사 연구가 한영서원의 정원과 같은 사회적 제도 밖의 유형이자 민간 정원에 초점을 두어야 함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영서원의 정원은 20세기 초 개성의 도시 공간과 사회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다. 한영서원은 개별 건축물 단위를 넘어서 여러 건물군과 정원, 교사 거주 시설, 선교 시설 등 여러 시설로 구성된 복합단지로, 학교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개성에서 지니는 위상이 작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에서 생산된 작물이 개성에 소개되었고, 개성 지역사회는 학교를 지원했다. 한영서원을 모델로 개성 내 또 다른 교육선교 단지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간 개성 지역은 동아시아 중세도시로서 고려시대 유산을 중심으로 논의되었으나, 근대기의 변화와 발전 양상 속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개성에 위치했으며 지역의 사회경제 체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던 한영서원과 같은 교육 및 선교 시설의 분포와 그 영향을 분석함으로써, 개성을 근대 계몽 도시이자 산업 도시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근대 도시로서 개성을 깊이 이해하는 일은 남북한이 공유하였으나 잃어버린 기억과 문화를 발굴하여 남북한의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윤치호가 언급한 “학교 정원”에 주목하여 1906년에 설립된 한영서원 정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한영서원 내 정원이 실업 교육을 위한 실습장으로 계획되었으며, 미국 남감리교의 경제적, 물리적 지원 속에서 윤치호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조성되었음을 드러냈다. 이와 함께 정원의 위치와 범위, 구조를 개괄하고, 미국에서 도입된 경제성 식물이 정원에 식재되었음을 밝혔다. 본 연구는 20세기 초 기술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서원과 다른 유형의 아카데미 경관 사례를 제시하고, 근대 조경사에 있어 아카데미 경관의 가치와 근대 도시로서 개성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다만 윤치호와 캔들러의 서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기에 정원의 활용 방법과 실습 과정을 상세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구체적인 공간 형태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몇몇 지도를 통해 공간 범위를 유추하기는 하였으나, 계획 도면을 발굴하고 확인하지 못하였다.
20세기 초에는 한영서원 외에도 이화학당이나 경성약학전문학교와 같이 정원을 포함하고 있던 근대 교육기관이 여럿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등록문화재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러한 개별 정원의 조성 배경과 공간 구조를 밝히는 연구가 증가하여 한국의 근대 조경 문화의 모습을 구체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