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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적 관점을 적용한 실향민 메모리얼 설계 연구,††

최영준*,**, 송유진***
YoungJoon Choi*,**, Youjin Song***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 겸무연구원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석사과정
*Assistant Professor, D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Rural Systems Engineering, College of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 Seoul National University
**Adjunct Researcher, Research Institute of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 Seoul National University
***MLA Student, D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본 연구는 서울대학교 신임교수 연구정착금으로 지원되는 연구비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 본 연구는 2024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 논문을 토대로 발전시킨 논문임.

Corresponding author : YoungJoon Choi, Assistant Professor, D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Rural Systems Engineering, College of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Korea, Tel.: +82-2-880-4887, E-mail: yj.choi@snu.ac.kr

© Copyright 2024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Oct 18, 2024; Revised: Nov 05, 2024; Accepted: Nov 05, 2024

Published Online: Dec 31, 2024

국문초록

본고는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분단의 현실을 환기하고 윗세대의 선조들과 후세의 방문자들을 만나게 하는 목적을 가진 메모리얼 프로젝트의 설계과정을 다룬다. 특별히, 기호학의 갈래 중 기호작용의 다각적 역동성을 강조하는 퍼스의 기호학을 설계단계에 도입함으로써 메모리얼 프로젝트를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살펴본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호학을 설계 전개 및 피드백 과정에 적용할 수 있는 전략을 도출하고 그 적절성을 검토하였다. 첫째, 기호작용을 통해 기호가 역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확장되는 퍼스의 기호학을 조경설계에 접목하였다. 퍼스의 기호학은 대지를 둘러싼 환경과 맥락에 대한 설계가의 해석을 공간화하여 옥외 공간을 조성하고 여러 이해관계 사이에서 관계를 조율하는 조경설계의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증폭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둘째, 기호학의 해석적 접근을 접목하여, 풍성해진 메모리얼의 사회문화적 서사를 폭넓게 담아내고, 조경설계 프로세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전략인 다중스케일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셋째, 퍼스 기호학의 삼원적 관계를 다양한 스케일에 대응하여 중첩적으로 적용하고 해석 및 설계 드로잉을 제시함으로써 다원적 스케일 차원에서의 해석적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다. 본고는 주어진 설계조건들 사이에서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직조하고, 다수의 스케일 차원에서의 해석적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제안하는데 기호학을 활용하는 접근법이 유용함을 논의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discusses the design process of a memorial project that aims to recall the reality of division more than half a century after the Korean War and to bring together older generations with younger visitors. In particular, it examines how Peirce's semiotics, which emphasizes the multifaceted dynamics of semiosis among the branches of semiotics, can be applied to the design process to enrich the representation of the memorial project and how semiotics can be applied to design methodologies. The paper identifies strategies for applying semiotics to the design development as well as feedback process and examines their applicability. First, Peirce's semiotics, which emphasizes the dynamics by which signs relate to each other and expand through semiosis, can be used to compose spaces from the designer's interpretation of the environment and context surrounding the site, revealing and amplifying the multiple and complex nature of landscape design in creating outdoor spaces and orchestrating relationships among multiple interests. Second, by incorporating the interpretive approach of semiotics in practice, a multi-scale approach was proposed as a practical strategy that can be applied to the landscape design process to capture the broader socio-cultural narrative of enriched memorials. Third, by applying the triadic relationship of Peirce's semiotics in a nested manner in response to different scales and presenting interpretive and design drawings, it was possible to clearly propose interpretive messages across multiple scale considerations. This paper has discussed the usefulness of an approach that utilizes semiotics to weave spaces that provide the intended experience and to explicitly propose interpretive messages across multiple scale dimensions.

Keywords: 기념공간; 퍼스의 기호학; 설계방법론; 다중스케일 접근
Keywords: Memorial Space; Peirce's Semiotics; Design Methodology; Multi-Scale Approach

1. 서론

1.1 연구의 배경과 목적

조경설계를 포함한 설계에 대한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난제는 설계 과정에 대한 공식화와 표준화의 어려움이다1). 설계 과정을 보이지 않는 암실에 비유하는 블랙박스 이론과 가시적이고 명료한 절차로 풀어낼 수 있다고 보는 화이트박스 이론이라는 상반된 담론이 널리 알려져 있듯, 설계 프로세스는 좀처럼 간명한 정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와 설계가의 설계 방법론 정립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설계 과정에 대한 초기 논의는 1950년대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와 존스(Christopher J. Jones)를 주축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설계 과정을 정량화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공학적인 프로세스의 설계 방식을 일반화하여 여러 설계 분야에 적용함으로써 설계 프로세스를 합리화하고 과학화시키고자 하였다(전영일, 1992). 설계 방법론을 정의하려는 학자들의 시도는 디자인 및 각종 엔지니어링, 데이터 등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계속되면서,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선형적인 흐름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점차 디자이너의 창의적 사고와 직관에 의한 비선형적, 가역적 디자인 과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이는 이론적 설계 방법론이 기초적인 수단이자 논리적 바탕으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디자인 과정에서 지속해서 발생하는 다수의 직관적 피드백을 수렴하여 설계안의 반복적인 보완을 포함하는 순환적인 구조의 일반화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양상은 디자인 프로세스에 유연하고 창의적인 과정의 도입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귀결되었고(윤주현, 2020), 현재까지 실무 디자이너들의 이어지는 참여도 더해져 통합적 디자인 프로세스(total design process),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등의 많은 방법론이 개발됐다.

조경에서의 설계방법론도 이와 궤를 같이하여, 계획론이나 설계절차에 대한 일반적인 틀은 있으나 매 과업마다 특수해를 가지거나 조경가의 개별성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본고는 조경설계에서 디자이너의 창의적 사고와 직관을 존중하면서도 통합적 디자인 프로세스의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설계도구를 사용한 하나의 융합적 설계접근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도구적으로 활용하려는 기호학은 주로 건축 공간이나 경관, 개념을 분석하기 위한 틀로써 사용되었다(홍근표와 이경훈, 2010; 김영민, 2015; 이상범, 2016). 조경 분야의 경우 기호학을 도입한 기존 연구는 전통 조경분야를 대상으로 기호학을 통하여 외연과 내연의 의미를 찾거나(노재현, 2009; 김홍렬, 2011; 한희정과 조세환, 2014), 현대의 외부 공간을 대상으로 공간구성 상의 기호적 특성을 분석하는 두 갈래의 흐름을 보인다(우석용, 1998; 이관희와 윤주철, 2012; 황영삼, 2020). 기존 연구들에서는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틀로써 기호학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조경 분야의 경우 주로 사후평가 과정에서의 지표적 기능으로 쓰여왔으나, 연구에서는 기호학이 설계 프로세스의 창발적 과정에서 능동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호학은 특정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개체를 총칭하는 ‘기호’ 그 자체와 다른 기호 사이의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관계를 파악하고 규명하는 학문으로, 기호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전경갑과 오창호, 2004). 그와 마찬가지로, 조경설계 또한 사회․문화․지리적 맥락에서 조경가의 해석을 통해 주어진 설계요소 간의 관계 설정을 제안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기호학적 해석 방식의 도입을 통해 더욱 풍부한 경험과 경관을 직조하는 새로운 설계 프로세스의 틀로 승화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기호학의 해석이 열어줄 또 하나의 기대효과는 설계자가 전달하는 설계의도와 실제 공간 이용자의 경험 간의 소통 간극을 최소화하는 측면이다. 두 주체 간의 대화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혼선에 대해, Bellentani and Panico(2024)는 설계가가 구축된 환경에 대한 사용자의 해석을 통제할 수 없음을 구축된 환경이 지니는 사회적 속성과 사용자들의 해석 차이에서 강조하고, Akar(2024) 또한 사용자의 해석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 정립이 어렵다는 점을 경관이나 정원 등 외부공간 설계의 예를 들어 지적한다. 본 설계는 기념할 만한 서사를 담아내는 메모리얼의 설계이기에, 메모리얼 소재와 관련된 당사자는 물론 더불어 그와 무관한 일반 방문자에게도 메모리얼과 관련된 내러티브와 함께 추가적 의미의 전달까지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서사와 상징성을 담아, 방문자에게 다층적인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메모리얼의 설계에서 기호학적 접근이 제공할 다각적 해석은 특히 이야기 전달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

1.2 연구의 범위와 내용

본고에서 다루는 메모리얼 프로텍트의 초기 설계 요건은 후손들의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실향 이북도민들의 이름이 새겨진 메모리얼 벽의 설치였다. 이에 설계팀은 군사분계선 근방에 위치한 대상지의 지리적 맥락을 반영하고, 한반도 역사 및 정치 상황에 대한 사회문화적 서사를 설계안에 풍성하게 담아내기 위해 기호학의 해석적 접근을 설계과정에 접목하였다. 이는 대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기호학이 설계의 구체화 과정에 도입된다면 더욱 풍부한 메모리얼의 경험을 직조할 수 있다는 가설에 기초한다. 본 프로젝트는 기호학의 갈래 중 기호작용의 다각적 역동성을 강조하는 퍼스의 기호학에 주목하여, 메모리얼의 설계과정에 적용할 수 있는 전략의 도출을 시도하였다. 본고는 초기 설계단계에서 다양한 설계재료를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하고, 귀환과정이 반복되는 설계 발전과정에서 정합성의 확인 및 완성도의 증진을 위한 피드백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일종의 점검도구를 제시함으로써 기호학의 효용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본 설계 연구는 크게 이론 접목, 전략 도출, 설계 예시의 세 단계로 구성하여 조경설계 과정에서 기호학의 도입 가능성을 살피려 한다. 2장의 이론 접목 단계에서는 기호학과 관련된 선행 연구와 문헌 검토를 통해 기호학과 조경설계 과정과의 접목을 모색한다. 3장은 2장의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본 프로젝트의 설계 과정에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설계 접근법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한다. 최종적으로 앞서 도출한 전략을 바탕으로 4장에서 실향민 메모리얼의 설계 및 예시 드로잉을 제시함으로써 그 적절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2. 조경설계와 기호학의 접목

2.1 이론적 고찰
2.1.1 기호학

기호학은 기호의 본질과 그 구성 요소는 무엇이고, 사회적 삶의 맥락에서 그 의미작용을 지배하는 법칙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때 기호는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개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기호 자체만이 아닌 의미를 전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기호학에서 기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생성되고 변화하는 속성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기호는 사회․문화적 맥락과 변화의 영향을 받고, 사회구성원들의 관계 속에서 사회의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의미를 갖는다. 강태희는 인간 문화의 모든 것을 기호로 보고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보여주는 학문으로(강태희, 1996), 김경용은 연구 대상이 되는 기호, 즉 상징체가 어떠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분석하는 학문으로(김경용, 1994), 김은정은 기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대부분이 맥락(context)에 의해 결정되기에 기호와 더불어 그 맥락에 대한 학문으로 기호학을 바라본다(김은정, 2013). 이처럼 기호학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기호를 통하여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고 전달되는지 탐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목적을 지닌다. 즉, 기호학에서는 기호가 성립되는 과정인 기호화 과정과 기호가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의 의미작용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때 기호는 글이나 말, 표정이나 동작, 조형물이나 건축물 등 주변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재현적이고 표현적 행위에 개입하는 것들을 포함하는데(김은정, 2013),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기호를 연구하는 기호학의 접목은 언어학이나 철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수 있다.

2.1.2 퍼스의 기호학

현대 기호학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 이론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한 갈래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 기호학이고, 다른 하나는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 Peirce)를 중심으로 한 해석 기호학이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호의 형태인 기표(Signifiant)와 그 의미인 기의(Signifié)의 이원적 구조로 정의하고, 이들의 결합이 의미작용을 만든다고 본다.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기표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물리적 측면이고, 기의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정신적 개념으로, 이 두 성분은 필연적인 관계로 묶여 있다(김은정, 2013). 소쉬르가 기호를 분리가 가능한 두 개의 요소로 구분했다면, 퍼스의 이론에서 기호는 표상체(sign), 대상체(object), 해석체(interpretant)의 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동시에 그들 간의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2).

퍼스의 기호학은 모든 사고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에 의해 확립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기호를 포함한 삼원적 관계(a triadic relation)의 성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이다(노양진, 2016). 퍼스의 기호학에서는 삼원적 관계를 바탕으로 기호의 정태적 구조보다는 기호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세미오시스(Semiosis), 즉 역동적인 기호작용에 초점을 둔다(강미정, 2007). 주목할 점은 소쉬르의 기호학의 경우 기호화 과정에서 대상이 실종되고 연속성이 파괴되지만(박연규, 2021), 퍼스의 기호학에서는 모든 관계가 삼항적인 관계를 맺고 순환한다. 가령 표상체와 대상체의 관계를 통하여 생성된 해석체는 다시 하나의 표상체가 된다. 퍼스는 더 나아가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이라는 세 가지 성질로 모든 현상들을 바라본다. 그는 세 가지의 관계항에 근거하여 하위 위계의 삼분법을 도출하는데(그림 1 우측 참고), 그중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설계행위와 유사한 지점은 어떤 것을(표상체)를 무엇인가로 나타내는(대상체) 기호방식에 대한 분류인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의 세 가지 유형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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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기호학의 두 가지 주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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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조경설계와 퍼스의 기호학

조경설계는 대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설계가의 해석을 공간화하여 옥외 공간을 조성하는 작업이기에 그 해석과정에서 기호학과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인공과 자연, 민간과 공공, 대지와 맥락 등의 상충하는 다채로운 구도에서 적절한 관계 설정을 하는 과정이 수반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관여되기에, 조경설계는 다중성 및 복합성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설계가가 추상적인 생각을 구체적인 디자인 컨셉이나 실질적인 디자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설계의 언어나 스케치, 모델과 같은 시각적 표상은 설계가의 선별과 해석을 거쳐 공간적 성질을 가지는 설계 결과물로 만들어진다. 이는 설계가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 설계 도면이라는 도식의 형태를 거쳐 사용자가 인식하고 지각할 수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다른 기호들과 관계 맺으며 기호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게 조성된 장소는 이용자로 하여금 경험을 통해 새로운 해석체를 생성하고 행위를 유도하도록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떤 표상체와 대상체 간의 관계 양상인 설계결과물은 설계가의 설계의도나 목표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그림 2a 참고), 이용자가 공간을 해석하는 양상 또한 개별적 관점의 차이로 모든 이용자에게 동일한 의미나 해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그림 2b 참고). 이처럼 설계가의 주관성이란 변수는 매 프로젝트마다 존재하고, 이용자들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요구는 지속해서 변화하기에 조경설계에 있어 누구에게나 유효한 정답의 존재는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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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설계가와 이용자 사이에서의 기호작용 출처: Liu, M. and S. Nijhuis(2022)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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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메모리얼 설계와 기호학적 접근

앞서 언급한 불특정성이 결정적 쟁점이 되는 대표적인 공간 중 하나가 메모리얼(memorial)이다. 메모리얼은 특정한 사건이나 과거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설계된 공간으로, 개인이나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고 영속적으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집단의 기억을 하나의 오브제에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상징물인 모뉴먼트(monument)에 비해, 메모리얼은 한 장소에서 관람자가 메모리얼의 서사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공간이 제공하는 명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켜 추모에 이르게 한다(김허경, 2021).

그렇기에, 메모리얼에서는 설계자나 기획자의 의도와 이용자와의 원활한 대화적 관계의 성립이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관건이 된다. 본고에서는 그 성취를 위해 첫째, 작자의 의도 전달 방식을 강화하고, 둘째로 방문자의 감상과 해석의 폭을 확대하고자 한다. 전달 방식을 강화하는 전략에 대해서는 문은미(2008)이재준(2016)이 이미 논하였듯 추모 방문객의 주체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과거의 기억과 교감하고 소통하도록 하는 경험적 접근을 기본값으로 삼으려 한다. 본 메모리얼의 경우 한민족의 적층되어 온 역사적 사실과 지리적 위치의 의미 등 서사의 절대량이 풍부하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2c와 같은 다층적 내러티브 방식으로 조성하여 방문자가 입체적인 체험을 하도록 하는 경험적 접근을 취하려 한다. 이러한 입체적인 공간의 서사를 경험한 이용자들에게서는 기호학의 세미오시스와 유사한 다각적인 해석을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메모리얼에서 방문자들의 문화적인 생성이 축적된다면 그 장소는 집합적 기억을 담는 해석의 장이 된다.

3. 기호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설계 전략

퍼스의 기호학은 설계의 소재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도구로서 작동할 가능성을 지님을 앞 장에서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설계자의 입장에서 기호학적 접근을 메모리얼의 공간화 과정에 적용하는 설계의 전략을 제시한다. 먼저 대상지를 분석하고, 주어진 설계 목표와 범위에서 퍼스의 삼분법 논리에 따라 도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호 요소를 취합한다. 이는 설계에 활용할 수 있는 소재로서, 표상체와 대상체 간의 관계에 따라 기호를 도상, 지표, 상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고, 분류된 기호들은 공간화 과정에서 다섯 가지 스케일의 해석틀에 따라 재정리된다. 이 장에서 수립한 전략을 바탕으로 다음 4장에서 상세한 설계과정을 다루도록 한다.

3.1 대상지 분석 및 메모리얼 대상 구체화
3.1.1 대상지 개요 및 주요 경관자원

설계 첫 단계에서는 설계의 개념과 이야기의 소재를 확장하기 위하여 표상체들을 취합하고 분류한다. 여기서 표상체는 기존에 주어진 기호, 즉 메모리얼의 재료들이다. 본 메모리얼의 설계는 남북분단의 오랜 지속으로 실향 가족의 세대 간 벌어진 거리와 더불어 역사적 인식의 괴리감을 좁히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초기에 의뢰인으로부터 부여된 설정은 이북도민 명단을 기억의 벽에 기록하는 모뉴먼트 형식의 메모리얼로, 이때 주어진 표상체는 이북도민 명단과 메모리얼이 위치할 대상지뿐이었다. 본 설계에서는 메모리얼 소재와 구현 대상을 실향민 목록과 기억의 벽으로 한정 짓지 않고자 퍼스의 기호 분류를 재해석하여 기호 요소의 목록을 확장하였다.

동화경모공원4)의 총면적은 779,925m2로, 공원 내부에는 봉안시설로 분묘와 납골당이 운영되고 있다. 공원은 서남측 방향으로 약 10개의 출입구가 존재하나, 현재 출입이 가능한 출입구는 헤이리 공원에서 이어지는 공원 남측에 위치한다(그림 3b 참고). 내부로 진입하면 공원의 북동쪽으로 구릉을 따라 이북도민의 분묘가 이어지는 경관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차도와 보도는 중앙의 광장으로 이어지고, 광장에는 주차장과 식당, 관리사무소가 조성되어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구형의 거대한 분수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고(그림 4a 참고), 조각상 뒤쪽으로는 분묘 사이에 있는 도로를 축으로 하여 시야의 축이 기존의 메모리얼이라 할 수 있는 망향의 제단으로 이어진다(그림 4b 참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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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대상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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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현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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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기호 요소 수집 및 분류

의뢰인이 초기에 설정한 메모리얼은 이북도민의 이름을 벽에 기록함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고취하는 장소였다. 이를 반영하여 설계자는 이북도민들의 이름을 벽에 새겨 세대 간의 만남을 이루는 기억의 벽과, 시퀀스가 있는 시설물들의 공간적 구성, 그리고 민족 정서를 공유하는 장으로 공간화 전략을 수립하고 설계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공간 경험적인 어휘에 대응하는 기호 요소들을 수집하고 분류한 결과, 그림 5와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퍼스에 따르면 도상, 지표, 상징을 구별하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대상체와 해석체의 유무이다. 도상은 꽃이나 나무의 그림, 초상화, 한반도 지도, 사진 등 대상과의 주로 형상적 유사성에 기초하는 기호로서, 현존하는 대상체과 해석체의 존재는 필수적이지 않다. 지표는 대상과의 인접성에 기초하고, 지시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기에 현존하는 대상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예컨대 방향을 지시하는 축, 빛과 사람과 관계 맺는 반사면, 벽과 나무로 만들어지는 그림자와 같이 해석체나 해석자의 존재 여부와는 무관하나 대상체가 맺는 관계에 집중하여 원인과 결과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지표의 특성이다. 반면, 상징의 경우 해석자의 자의적 연상을 기호화하여 하나의 문화적 또는 관습적 규약이 된 경우의 기호 요소이다. 가령 북한의 국기나 국화는 실재하는 북한과 유사하거나 연관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는 인공기와 목란(木蘭)을 보고 문화적 관습과 공유된 이해를 기반으로 이들이 북한의 국기와 국화임을 알 수 있다. 즉, 해석자가 생산한 연상인 해석체가 상징을 기호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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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기호 요소의 수집과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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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분류된 기호의 공간화 전략
3.2.1 다중스케일적 접근

앞 장에서 기호학을 접목하여 도상, 지표, 상징에 따라 분류한 기호들을 조경공간으로 공간화 하기에 유용한 기준으로 재분류하고자 한다. 대상지를 둘러싼 서로 다른 규모의 관계 설정을 위해 고려해야 할 여럿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려는 과정이고, 개별 규모의 층위에서 기호들 간의 기호작용을 동시다발적으로 기대하려는 의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마을이나 도시, 문화권 등을 규정하기 위하여 공간을 특정한 스케일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스케일이 다층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다중스케일적 접근과 그 맥을 같이 한다(이동민과 최재영, 2015). 특히 외부 공간이나 경관은 다중의 공간 스케일이 공존하기에, 대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관계를 풀어내는 조경설계 과정에서 다중스케일적 접근이 유효하다.

기호작용을 입체적으로 발생시키고자 설정한 다중스케일은 지역(regional scale), 단지(district scale), 대상지(site scale), 시설(facility scale), 경험 및 상세 (experience/detail scale)의 다섯 스케일이다. 먼저 지역 스케일에서는 도시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여 지역적 문화나 역사 등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다. 단지 스케일에서는 대상지를 포함하는일정 영역 내에서의 거시적인 접근을 다룬다. 이때 주변 건물이나 구조물 및 인접 대지와의 관계를 파악하여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대상지 내부의 공간구성과 배치, 동선 등을 살피는 단계와 각종 시설 프로그램의 관계를 거쳐, 각종 물성과 경험 및 상세 스케일에 이르며 이용자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로 점차 좁혀지는 적층의 이야기를 통해 메모리얼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중량감과 깊이를 기대한다.

3.2.2 기호 요소 분류에 스케일별 분류를 접목한 공간화의 틀

기호가 표상되는 형태의 한 축과 적용 용이한 스케일에 따른 분류의 다른 한 축으로 기호 요소를 단계적으로 배열하고 정렬하면 그림 6과 같은 두 축의 표로 정리할 수 있다. 도상, 지표, 상징이라는 1차적 분류에 다중스케일의 개념을 적용해 2차원으로 확장시켜 설계 적용이 가능한 틀을 만들었다. 공원묘지 단지 스케일 이상에서는 표상체의 물리적․의미적 크기가 인식범위 이상인 거시적인 의미의 관계성과 연관성을 구축하는 지표 기호가 놓이고, 경험 및 상세 스케일로 향할수록 벽면과 안내판 등에서 물성이 직접 체험이 가능하고 형상이 체감되는 도상기호가 중심이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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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다중스케일별로 분류한 기호학적 설계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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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설계안 내용 및 기호학적 해석

4.1 설계내용 개괄 및 배치계획

본 장에서는 3장에서 전략화된 설계의 방법을 바탕으로 기호적 성격에 따른 분류와 스케일에 따라 2차적으로 재분류한 메모리얼 소재들을 활용하여 메모리얼의 배치와 형태 및 경험을 계획하는 본 설계의 과정을 다룬다. 가장 첫 단계로 수평적인 배치계획 상의 짜임으로 고려한 두 가지 개념은 지역적 맥락과 공원묘지 단지스케일에서 착안한 특정 방향으로 향하는 원심적인 방향성의 설정과 남북한이 하나의 겨레라는 역사적 인식을 반영하여 대상지를 묶어줄 구심적인 아이디어였다. 원형의 도상이 강화하는 구심적인 결속을 메모리얼의 전체 형상으로 삼고, 고려할 축선과 향을 각각 원주 상의 강조점으로 삼거나 축선을 따라 부분적으로 삭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내었다(그림 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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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다중스케일적 프레임워크에서의 기호학적 설계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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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설계안의 수직적으로는 크게 저층의 ‘기억의 제단’ 및 ‘어울림 마당’, 지상층의 ‘한반도 역사의 둘레길’ 그리고 상층의 ‘기억의 벽’ 및 ‘망향루’까지 세 높이의 레이어로 구성된다(그림 8 참고). 이북 7도를 상징하는 예닐곱 구간으로 나뉜 기억의 제단은 행사를 위한 어울림 마당을 감싸안고, 메모리얼 벽체와 둘레길이 한 번 더 둘러싸며 기억과 추모를 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기억의 제단 기단석의 옆면과 기억의 벽에는 각 도의 이북도민 명단이 행정구역별로 표기되어, 방문자들은 가족과 고향 지명을 발견하고 그 곁에 앉아 사색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태극 무늬와 유사한 평면 도상으로 남북이 하나 됨을 상징하는 기억의 벽은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을 반영하여 동측에 경사로를 놓아 대상지에서 가장 높은 망향루 높이까지 방문자의 걸음을 이끈다. 마지막으로 최외곽의 ‘한반도 역사의 둘레길’은 주차장 및 출입구에서의 접근 동선의 연장이자 벽체를 둘러싸는 길로, 방문자들이 길을 따라 걸으며 한반도의 역사를 상기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고취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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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평면계획도 및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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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세부설계 내용
4.2.1 지역적 맥락의 반영 Regional Scale

본 설계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다루는 메모리얼인 만큼,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관계와 질곡의 역사라는 메모리얼의 바탕 소재를 남북 방향으로 열린 구조와 거친 질감의 암석원으로 해석하려 하였다. 특히 남북의 화합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느낄 수 있도록 정북 방향을 향한 시선 축을 따라 겹매듭의 외곽동선을 조성하고 기억의 벽체의 일정 폭을 최대한 비웠다(그림 9a 참고). 열린 방향을 따라 대지 경계 넘어까지 연장되는 암석원은 거친 조경소재를 활용하여 남북 분단의 역사를 담고 상징하는 동시에, 어울림 마당과 기억의 제단, 기억의 벽과 역사의 둘레길을 모두 관통하는 암석원은 현재의 비무장지대를 은유하기도 하는 다의적 제스쳐가 된다(그림 9b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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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지역적 맥락 스케일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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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공원묘지 단지와의 관계 District Scale

헤이리마을 방향 입구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은 주차장 방향에서의 길과 매듭을 이루면서 메모리얼 원형 전체를 한 번 감싸는 주 동선이 된다. 공원묘지 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자 주된 이동 흐름인 망향의 제단을 향한 축으로는 동선과 시야를 모두 개방하여 기존 공원묘지와 물리적, 시각적 소통을 의도하였다(그림 10a, b 참고). 또한 주 동선에서 기억의 벽에 결합된 경사로를 따라 올라설 수 있는 입체적인 시설물인 망향루를 설치하여 망향의 제단(그림 10c 참고)과 더 적극적인 시각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온전한 원형이 기본 틀인 본 메모리얼에서 원주의 적절한 이어짐과 끊어짐은 공원묘지 단지의 다른 요소와 메모리얼 간의 융화를 이끌어 내는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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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공원묘지 단지 스케일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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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메모리얼 대상지의 구성 Site Scale

메모리얼 대상지는 주변부를 벽으로 감싸고 땅을 내려서 방문자들이 하나의 공간감에 둘러싸여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장소성을 부여한다(그림 11a 참고). 추모의 감정을 오롯이 공유할 수 있는 원형의 둘레벽과 선큰구조는 대상지의 물리적 뼈대이자 심리적 영역성의 경계가 된다(그림 12b 참고). 중앙부의 장소성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한, 기억의 제단과 어울림 마당은 우리나라의 전통 정주 문화의 마당과 한옥의 기단을 지표로 삼아 장소화의 영감으로 활용한 결과이다. 구심점이 되는 어울림 마당은 한 민족이 공유하는 땅을 상징하고 대상지를 한민족의 터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이북도민의 날 등의 행사 시 천여 명 정도를 수용하는 공연 및 집회의 장으로 기능한다(그림 12c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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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메모리얼 대상지 스케일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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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주요 시설 스케일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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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주요 메모리얼 시설 Facility Scale

핵심 시설인 기억의 벽은 태극문양의 도상을 본체로 음과 양이 맞물리고 관계를 맺는 구조로 설계하였다. 상단면의 경사로는 대상지에서 가장 높은 망향루까지 이어지는데, 망향루에서는 내측의 어울림 마당과 외측 동화경모공원의 전경을 둘러볼 수 있으며, 망향의 제단까지의 연속된 축을 조망할 수 있다. 벽면에는 이북도민의 명단이 이름과 생년월일 순서로 기록되고, 다양한 도상과 지표, 상징 기호들을 소재로 양각과 음각이 혼용되어 새겨진다(그림 12a 참고).

기억의 제단은 실향 대지인 5도 및 미수복 2도를 상징하는 예닐곱 구간으로 나뉜 다단의 공간으로, 한옥의 기단과 유사한 앉음벽이 교차 조적 되어 마당을 원형으로 둘러싼다. 겹겹이 쌓이는 기단석의 경계 사이로 조성된 건천 식재영역은 자연 배수로 역할을 하여 빗물을 마당의 자연지반으로 스며들도록 한다(그림 12b, c 참고).

4.2.5 경험 및 상세의 구현 Experience/Detail Scale

메모리얼의 내용을 가장 감각적으로 담아내는 상세 스케일에서는 재료의 가공과 물성의 발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감각적인 경험으로 추모행위를 유도하는 디테일을 세 가지 다른 높이의 층위로 구현한다. 가장 상층인 기억의 벽 내측은 반사 마감의 흑색 자연석을 적용하여 그 위에 음각된 이북도민명과 투영된 방문자의 모습이 동시에 병치되며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한 시선에서 마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억의 벽 외측과 바닥에는 원주를따라 한민족의 역사 컨텐츠를 연대기식으로 나열하여 남북이 공유하는 반세기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통일에 대한 염 원을 고취하는 걸음을 제공한다. 아래층인 기억의 제단에서 방문자들은 가족이 속한 고향 지역을 찾고 실향가족의 이름이 각인된 기단석을 발견한 후, 앉음벽 역할을 하는 기단석 곁에 앉아 사색의 시간을 보내거나 기단석 사잇공간에 헌화하며 추모할 수 있다(그림 13 참고). 기단석으로 둘러싸인 어울림 마당은 전통 마당의 마사토포장 마감을 지표삼아 그 질료가 불러일으키는 고유한 정서를 담았고, 동서 방향 양 끝에 식재된 두 그루의 느티나무 대교목이 시간에 따라 제단과 마당에 그림자를 드리워 공간의 입체적 양감을 증폭시키며, 한민족이 공유하는 상징인 동네 어귀의 정자목과 같은 정감 있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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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경험 및 상세 스케일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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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기호학적 해석

앞 장의 투시도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본 설계에서 활용된 다양한 기호들이 실제 공간으로 구현될 경우, 이용자에게 경험되고 인지될 해석체의 형성과정을 시각화하였다. 이와 같은 재현과정은 각 영역의 메모리얼 소재들이 설계의도에 따라 구현되어 방문자의 개별적인 추모 행위와 기념 행사 등의 대규모 집회를 포함하는 경험과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앞선 전략을 바탕으로 도출한 설계안에 대한 해석의 의미를 정리한 표 1은 본 설계를 특성화하는 두 축인 기호 학의 활용과 다중 스케일적 접근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퍼스 기호학의 삼원구조를 활용한 설계 소재의 공간화 및 의미구축이라는 가로축의 전개와 설계의 전개를 다중 스케일로 적용함으로써 양산되는 폭넓은 설계 내용의 스펙트럼을 동시에 드러낸다. 정리하자면, 기호학과 다중스케일의 결합은 조경설계 과정에서 적용 가능한 설계의 틀로 기능할 수 있고, 풍부한 공간적 의미를 함축할 수 있도록 돕는다.

표 1. 기호학적 접근을 통한 메모리얼의 계획과 설계
해석의 스케일 메모리얼 소재 (표상체) 기호화 유형 설계 결과물 (대상체) 설계의도 및 의미 (해석체)
지역적 맥락 Regional scale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관계와 역사 상징, 지표
  • 남북 방향으로 열린 구조

  • 분단 질곡의 역사를 상징하는 암석원

  • 방문자가 북녘으로 방향을 취하기를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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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의 염원

  • 남북의 화합

공원묘지 단지 District scale 기존 기념물과 본 메모리얼 상징적 지표
  • 두 진입지점에서 시작되어 메모리얼 원형을 둘러싸고 매듭지어 묶는 주동선

  • ‘망향의 제단’으로 열린 비스타 및 망향루의 설치로기존 기념물과 시각적 관계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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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원묘지와의 물리적․시각적

    소통 및 융화

  • 공원묘지 전 영역 활성화

메모리얼 대상지 Site scale 한민족 화합의 터 상징적 지표
  • 한옥의 기단과 마당에서 영감을 받은 한민족이 공유하는 땅과 기초를 의도

  • 움푹한 땅의 구조가 강화하는 화합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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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이 공유하는 문화 상기

  • 함께 어울림, 공연의 장

시설 Facility scale 이북도민 목록을 담은 벽, 한반도 역사 연대기, 북녘 실향대지 (5도 및 미수복 2도) 도상적 지표
  • 태극문양 나선의 꼴로 엮인 통합된 벽

  •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기록한 산책로

  • 이북5도 및 미수복 2도 표현하는 일곱 묶음의 기단과 원형으로 둘러싸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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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향민들의 어울림과 만남

  • 역사의식 고취

  • 이북도민 성명의 비위계적 배치를 통한 융화

경험 및 상세 Experience / detail scale 다양한 감각의 추모행위, 남북한 및 한반도의 도상, 도상, 도상적 지표, 도상적 상징
  • 반사마감의 흑색 자연석에 각인된 도민명과 투영된 방문자의 모습 병치

  • 교차조적된 앉음벽을 오르내리며 발견하는 기단 챌면의 각인과 헌화를 위한 사잇공간

  • 사이니지 및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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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대간의 만남

  • 다감각적 추모

  • 동포의식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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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및 제언

본고의 메모리얼 설계는 기호학의 기호작용이 설계 프로세스에서의 난점을 긍정적으로 보완 가능하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퍼스의 기호분류법을 적용한 설계대상의 분류는 설계 시작 단계에서 주어지는 추상적인 조건과 낯선 대상지에 대한 독해를 수월하게 하고, 삼원구도에 기반한 기호작용의 확장적 속성을 다중 스케일의 병렬식으로 활용함으로써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고 의미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론적 접목과 설계 프로세스를 완료하고 확인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호작용을 통해 기호가 서로 관계를 맺고 확장되는 역동성을 강조하는 퍼스의 기호학은 대지를 둘러싼 환경과 맥락에 대한 설계가의 해석을 공간화하여 옥외 공간을 조성하고 여러 이해관계 사이에서 관계를 조율하는 조경설계의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증폭하기에 유용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실제로 기호학의 해석적 접근을 접목하여, 풍성해진 메모리얼의 사회문화적 서사를 폭넓게 담아내고, 조경설계 프로세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전략인 다중스케일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설계재료에 해당하는 메모리얼의 소재를 확산하고 선별하는 수렴적 절차에서 도상․지표․상징의 기호적 속성에 따른 구분을 시작으로, 경험적․상세 측면에서부터 시설과 물성, 대상지, 단지, 마지막으로 지역적 스케일까지의 여러 겹의 스케일에 충족하는 다양한 위계와 깊이를 가지는 공간을 도출해내는 설계 전략을 적용하였다.

셋째, 퍼스 기호학의 삼원적 관계를 다양한 스케일에 대응하여 중첩적으로 적용하고 해석 및 설계 드로잉을 제시함으로써, 주어진 설계조건들 사이에서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직조하고, 다수의 스케일 차원에서의 해석적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제안하였다. 이는 설계가가 설계의도를 공간에 담아 전달하는 바와 조성된 공간을 경험하는 이용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화의 혼선을 완화할 수 있는 노력이 된다. 아쉬운 점은 제시한 설계안이 실제 공간으로 구현되지 않아, 실제 시공된 공간에서 체험할 이용자들의 해석과 경험의 과정까지 연구범위를 확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설계는 창의적 아이디어의 발산과 동시에 무한한 피드백의 수렴 과정이다. 3장의 결론을 바탕으로 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자인의 종합적인 전개를 돕고 반복적인 설계 검토의 기반이 되는 어떠한 틀은 디자인을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인다. 특히, 메모리얼의 사례처럼 다층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다중스케일의 조경작업에서 퍼스의 기호학은 디자인 내용을 밀도있게 검토하기 위한 도구로서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끝으로, 본 설계 연구의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퍼스의 기호학이 가진 역동적 기호작용이 복잡한 피드백의 과정을 수반하는 여러 설계의 과정에서 도움이 되길 바라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설계 프로젝트에 기호학적 접근의 적용 가능성을 더욱 확장하는 후속 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Notes

주 1. 설계(設計)는 영어 디자인(design)을 번역한 한자어이다. 디자인은 ‘지시하다, 표현하다, 성취하다’를 뜻하는 라틴어의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하여 계획, 구상, 설계 등의 여러 업무 범위를 통칭하고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를 번역한 한자어인 설계는 19세기부터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되어 오늘날 디자인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초기에는 엔지니어링이나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시작으로 설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외래어인 디자인을 미술과 결합하여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현재 디자인과 설계를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사회 현상을 초래하였다(윤주현, 2020). 따라서 본고의 전개에 앞서 용어의 범용성이 내재하는 모호성(김동일 등, 2014)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설계를 설계가가 인문․환경적 맥락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체계적으로 공간화하는 과정이자, 더 나아가 사용자가 경험하도록 하는 일련의 분야인 건설환경과 관련된 건축 및 조경 설계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주 2. 표상체는 기호로서 형태, 재료, 색상, 촉감 등과 같이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대상체는 기호가 지시하는 실재로서 표상체를 통하여 존재를 드러내며, 해석체는 대상을 매개로 한 관념이자 표상체로부터 촉발되는 의미(meaning)이다.

주 3. 퍼스는 더 나아가 세 가지 범주에 대항하는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각 범주는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에 대응하는데, 일차성이란 그 자체로서 어떤 것과 관련되지 않고 존재하는 능동적 양상이고, 이차성은 제2의 존재와 내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삼차성은 관념과 관계된 범주로서, 다른 두 가지 대상의 관계를 서로 관계 맺게 만드는 사물이 존재하고 이상의 세 가지 범주들은 모든 현상과 실체에 편재한다. 먼저 도상은 유사성과 닮음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직설적 재현으로, 지시대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성립한다. 지표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부분 또는 전체와 인과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는 구체적 개별성을 특징으로 하여 사물이나 사태를 지시하기에 지시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상징은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에 유사성이나 인과관계가 없는 자의적 관행의 산물로서 해석체의 존재에 의존하여 표상체와 대상체 사이의 관계를 확립한다.

주 4. 동화경모공원은 이북 7개 도민회로 구성된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 이북도민들의 추모의 장으로 조성되었다. 망향의 한을 위로하고, 후손들에게도 주요 명절 등에 도민 1세들의 뜻을 기리며 애향행사 및 통일안보교육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 5. 축을 따라 대상지의 고도가 점차 높아지고, 도로의 끝은 계단을 통하여 망배단과 망향의 제단으로 연결된다. 망향의 제단은 공원 내에서 가장 높은 공간으로, 뒤로는 기존의 숲이 우거져 있으며 전체 대상지를 조망할 수 있다. 언덕 위에는 주차장과 전망 휴게실, 납골당이 위치한다. 최근에는 국가보존묘지 2호로 지정된 노태우 전 대통령 묘가 추가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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