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은 19세기 전반 한양에 거주하여 활동한 경화사족(京華士族)인 안동 김문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순조 연간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조경계에서는 김조순을 조선시대 별서 정원인 옥호정(玉壺亭)의 소유자이자 경영자로 인식하고 있다. 옥호정은 김조순이 삼청동의 북악산 자락에 조성한 별서로, 물리적 실체가 손실되고 현재 개인 주택가로 고고학적 발굴이 힘들어 그것을 재현한 <옥호정도(玉壺亭圖)>라는 시각 자료를 통해 연구되고 있다(유병림 등, 1989; 정재훈, 1996; 정봉구와 한동수, 2007; 이원호 등, 2014). 작자 미상의 <옥호정도>는 상당히 공들여 그린 그림으로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고, 한국 회화사에서도 19세기의 개인 소유지를 그린 회화의 성격을 논의하는 사료로 주목해 왔다(장진아 2017; 김수진, 2018). 현실 세계의 정원은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그림 속에서는 과거에 현존했던 상태를 전제하듯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리하여 옥호정은 조선 후기 경화사족의 별서 정원의 중요한 사례로 간주되었고, 현재에도 한국 정원사의 대표 작품의 하나로 다뤄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 별서 정원은 사대부의 은거 장소로 자연 친화적 아취(雅趣)와 관련하여 서술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별서 정원은 문인 사대부의 단순한 은일 자중의 태도로 자연을 감상하는 장소성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특히, 옥호정과 같이 한양에 조성되었던 경화사족의 별서는 문인들이 시서화를 통한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정봉구와 한동수, 2007: 83-84). 이러한 점에서, 별서라는 공간을 논의할 때 그것의 소유주에 대해 보다 주목할 필요성이 요청된다. 별서 정원의 소유주가 문인이자 정치 관료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생애에 주목하여 별서의 다양한 기능과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정원의 소유주의 중요성이 일찍이 학계에서 주목되어 왔다. 1990년대부터 서구의 미술사와 정원 역사 연구에서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치(Medici) 가문의 별장 정원, 17세기 프랑스의 정원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의 정원, 18-19세기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landscape garden)을 비롯한 서구의 경관과 그것을 재현한 풍경화에 담긴 사회정치적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Mitchell, 1994; Weiss, 1995; Giannetto, 2008; Finch, 2014). 마르틴 바른케(Martin Warnke)는 서구의 지성사에서 풍경화, 정원, 공원에 담긴 정치적 함의를 분석하면서 이를 ‘정치적 풍경(politische landschaft)’이라 명명한 바 있다. 바른케의 통찰처럼 “풍경을 보는 눈,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치적인 의미 때문에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한층 더 명료해질 수 있다(Warnke, 1992: 15).”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 정원을 소유주의 정치적 생애를 반영한 디자인된 경관(designed landscape)으로 간주하여 그것의 조성, 기능과 활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이 연구는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가 그의 별서였던 옥호정의 경영과 향유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김조순에 주목하는가. 첫째, 상술했듯이 김조순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활동하며, 정조 연간에 정치적 기반을 형성해 순조 연간에 조선시대를 대표했던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오랜 기간 정치적 생애에 따른 정원 문화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김조순의 문집 ⌜풍고집(楓皐集)⌟은 옥호정 경영과 향유 문화, 나아가 그의 자연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다수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셋째, ⌜풍고집⌟의 글은 창작 시기별로 선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생애에 따른 옥호정 경영과 정원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김조순, 옥호정, 그리고 <옥호정도>에 관한 연구는 역사, 미술사, 그리고 조경,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어 왔다. 첫째, 역사학계에서는 김조순을 세도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간주하여 세도정치의 맥락에서 그의 정치적 생애를 조명해 왔다. 대표적으로 유봉학(1997)은 김조순에 대한 연구가 “조선후기 사회와 문화, 학문과 사상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고 언급하면서, 세도정치의 관점에서 김조순의 정치적 성장과 장악 과정, 나아가 문풍 및 학풍을 검토했다(유봉학, 1997: 252). 또한, 정조의 문예사상을 실천한 정치인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생애가 논의되었고, 그가 북촌에서 주도했던 시회 활동이 탐구되기도 하였으며, 근래에는 ⌜풍고집⌟의 완역서가 출간되어 그의 시의 특성이 해제되기도 하였다(정옥자, 2001; 김용태, 2016; 안대회, 2019). 둘째, 미술사학계는 <옥호정도>의 시각적 재현의 특징에 대한 해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 권력의 전개 양상을 탐구해 왔다. 전자의 대표적 예로, 장진아의 연구는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옥호정도>가 “건축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도면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 당대의 다양한 형태의 회화와 건축 관련 도면을 검토하면서 재현물(representation)로서 <옥호정도>의 회화 양식, 제작 시기, 공간 구조 등을 개관하였다(장진아, 2017: 135). 후자를 대표하는 김수진의 연구는 옥호정과 <옥호정도>, 석파정과 <석파정도>를 각각 그것을 조성․경영한 김조순과 이하응(李昰應)의 문화 권력으로 간주하고, 소유권의 변동과 사회정치적 의미의 변화를 추적했다(김수진)1). 셋째, 옥호정에 관한 연구는 조경과 건축계에서 가장 빈번히 이루어져 왔다. 옥호정 연구는 상술했듯이 물리적 공간이 아닌 <옥호정도>와 김조순의 글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이들의 연구는 일정 부분 역사학, 미술사학적 접근을 차용하고 있지만,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나 재현물의 회화적 특징을 규명한다기보다 그것의 공간적 특성, 즉 옥호정의 조성, 공간 구성, 식재, 정원 문화 등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유병림 등, 1989; 정재훈, 1996; 정봉구와 한동수, 2007; 신현실, 2023). 특히, 신현실의 최근 연구는 ⌜풍고집⌟에 실린 글을 통해 옥호정의 조성과 경영의 특징을 탐구한 바 있다(신현실, 2023).
이 연구는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와 옥호정 경영과 정원 문화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선행 연구와 유사한 주제와 내용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와 옥호정의 조성과 향유 문화에 관한 축적된 학계의 지식은 이 연구에 포함된다. 다만 기존 연구들이 옥호정을 시간의 변화에 대한 고려 없이 정적인 산물로 간주하여 분석해 온 바와 달리, 이 연구는 그러한 옥호정의 조성과 문화를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기 위해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변화 양상을 장기적 관점에서 추적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또한, 대부분의 선행 연구가 옥호정의 문화를 조성자인 김조순의 정치적 생활과 유리되어 자연에 은거하여 자연을 찬미하는 문화로 서술하는 경향이 짙었다면, 이 연구는 정치적 변화에 따라 옥호정 조성과 경영의 전개 양상을 파악하고 정원의 문화와 기능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와 옥호정 문화를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역사, 조경사, 미술사 등의 다학제적 성격을 지닌다.
우선, 이 연구는 선행 연구를 검토하여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에 따른 옥호정 경영 및 향유 문화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기 위한 분석의 관점을 마련하고 연구의 대상을 한정하는 과정을 수행했다(2장). 먼저 선행 연구를 검토하여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 시기를 구분하였다. 김조순의 생애를 기간별로 나누어 서술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대체로 주요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면서 김조순이 정치에 입문하여 세도 정권을 장악해가는 과정, 말년에 정계에서 후퇴해가는 흐름으로 논의되고 있었다(유봉학, 1997; 2009; https://contents.history.go.kr/). 특히, ⌜풍고집⌟은 그의 맏아들 김유근(金逌根, 1785-1840)에 의해 권별로 편집되어 있고, 대부분의 시가 창작 시기별로 배열되어 있다고 여겨진다(안대회, 2019: 26). 그리고 그러한 권별 편집은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의 주요 사건들과 연관된 생애의 변곡점을 상당 부분 반영한 구분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권별 편집을 따라 재구성하여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 구분을 “초기 관료 시기(1783-1800)”, “정치적 부상기(1801-1809)”, “권력의 정점 및 안정기(1810-1820)”, “정계 후퇴기(1821-1831)”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풍고집⌟의 권별 편집을 기초로 하되, 정치적 위상의 연속성과 변화를 두루 고려하여 일부 권을 하나의 정치적 국면으로 간주해 재구성한 것이다. 다음으로, 연구의 주요 대상인 ⌜풍고집⌟의 편찬 성격, 구성과 특징을 개관하면서 연구의 주요 대상으로서의 활용 방법을 설정하고 분석 대상을 한정했다. 구체적으로, 일차적으로 수록된 글을 검토한 결과 대부분의 시가 자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록된 시 중 옥호정과 관련한 텍스트를 중점적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이와 관련한 자연 및 정원 조성과 감상을 다룬 글을 추가적으로 검토했다.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제문(祭文), 잡저(雜著) 등과 같은 유형에서도 옥호정 및 정원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을 선별하여 연구 대상으로 한정했다. 이 연구에서 인용한 ⌜풍고집⌟의 시는 이성민과 김채식의 번역을 따랐다(이성민, 2019; 이성민과 김채식, 2019; 김채식, 2020a; 2020b; 이성민, 2020). 이외에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와 정원 문화를 알 수 있는 논저도 연구의 개진에 보조적으로 활용하였다.
다음으로, 앞서 선별된 ⌜풍고집⌟의 글을 앞서 설정한 네 가지 정치적 생애 시기에 따라 검토하여 김조순의 옥호정 경영 및 향유 문화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3장). 모든 시기의 글이 자연 및 정원을 향유하는 문화라는 기조를 공유하고 있지만 시기별로 그의 정치적 위상 변화에 따라 옥호정을 비롯한 정원 문화에서도 주목할 만한 특징과 변화가 관찰되었고, 그 결과를 “문인적 자연 감수성의 형성”, “옥호정 공간의 조성 시작”, “옥호정 공간의 완성과 경영”, “은거와 성찰의 공간으로서 옥호정”으로 유형화하여 면밀히 검토하였다.
2.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 시기 구분과 ⌜풍고집⌟의 편찬 성격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는 주로 순조 연간의 세도정치와 관련하여 논의되며, 그가 정조 연간에 정치적 입지를 형성하고 순조 연간에 세도 정권을 확립하는 한편,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권력 관계의 변동이 발생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서술된다(유봉학, 1997; 2009; https://contents.history.go.kr/). 이러한 서술은 대개 명시적으로 시기를 구분하지는 않고 김조순의 개인적․정치적 삶에서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정치적 입지의 변화를 설명한다. 첫째, 정조 연간인 1785년 김조순이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의 신임을 받아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었고, 1788년 규장각 대교(待敎)를 비롯한 직책을 맡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시기에 주목한다. 179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연행 직전에 문체반정의 대상자로 거명되어 정조로부터 견책을 받기도 하였으나, 연행 도중 글을 지어 바쳐 정조의 신임을 되찾아왔다.
둘째, 이후 그의 정치적 생애의 변곡점은 정조 승하와 순조가 즉위한 1800년 전후로 논의된다. 정조 사망 전 김조순의 딸이 세자빈에 간택되었으나 정조 서거 이후 중단되었고,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정국의 주도권을 노론 벽파가 주도하게 되면서 시파에 속한 안동 김문은 위기에 처한다. 이후 1802년 딸이 순원왕후에 책봉되어 김조순은 외척이 되어 국구(國舅)에 봉해지고, 정순왕후 서거 후 형세가 반전되다가 1805년에 김조순은 경주김씨와 벽파 정권을 몰아내고 180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를 계기로 안동 김문과 순조의 외가 반남 박씨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세도 정권이 형성된다. 이후 김조순은 순조 재위기 외척으로서 세도 정권의 실세로 권력을 행사했다.
셋째, 1812년 사헌부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이 반남 박씨의 박종경(朴宗慶)을 탄핵하면서 김조순의 정국 장악은 더욱 확고해졌다. 1814년 김조순은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교인(校印)하였고, ⌜홍재전서⌟의 편찬에 참여한 관료의 시문을 모은 ⌜동성교여집(東省校餘集)⌟이 같은 해 간행되면서, 유력 정치인과의 정치적 결속을 통한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1815년 혜경궁의 만장(挽章)을 작성하면서 정조 시대의 기억을 외척 세도가가 정리하는 상징적 권력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819년에는 반남 박씨 이후 새로운 외척으로 김조순이 선택한 풍양 조씨 가문과 효명세자가 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넷째, 1821년 정조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김조순이 상소하여 천봉(遷封)을 실현하는 등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지만, 동시에 돌림병에 전염되어 사경을 헤매다 소생했다. 이후 1824년 관서 지방을 목욕 휴가로 유람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1825년 회갑을 맞았고, 한편 평생 교유 관계를 맺던 김조(金照)가 사망하였다. 이후 1827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풍양 조씨 세력이 부상하여 김조순의 세력이 견제되면서 여주 현암(玄巖)에 거처했지만, 효명세자가 1830년에 급서(急逝)하면서 다시 세도를 확고히 했다.
이상의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의 주요 변곡점을 반영한 선행 연구의 내용과 흐름은 김조순의 문집 ⌜풍고집⌟의 권별 편집과 유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풍고집⌟은 김조순의 아들이자 그의 사후 이후 안동 김문의 권력자였던 김유근이 그의 아버지의 글을 선별하여 편집한 것으로, 이 중 시는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거의 전체가 창작 시간순으로 실려있다고 추정된다(안대회, 2019: 26). 구체적으로, 제1권은 1783년부터 1800년까지, 제2권은 1801년부터 1809년까지, 제3권은 1810년부터 1814년까지, 제4권은 1815년부터 1820년까지, 제5권은 1821년부터 1826년까지, 제6권은 1827년부터 1831년까지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연도별 구분은 편집자이자 당대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유근이 의도한 산물로, 상술한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의 흐름, 그리고 주요 사건과 정치적 입지의 변화를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를 재구성하면, 제1권에 해당하는 기간은 정조 연간 정치에 입문하여 초기 관료로서 입지를 다져가는 시기(1783-1800), 제2권의 기간은 순조 즉위 후 세도정치를 확립해가는 시기(1801-1809), 제3권과 4권의 기간은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주도해가던 시기(1810-1820), 제5권과 6권의 기간은 김조순이 병에 들고 노쇠하여 정계에서 차차 후퇴하여 정치력을 행사한 만년의 시기(1821-1831)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부침을 반영한 구분을 통해 시문을 검토하여 김조순의 옥호정 조성과 경영, 향유 문화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표 1 참조).
김조순의 자연과 정원 문화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연구 대상인 ⌜풍고집⌟의 편찬 성격에 대해 개관할 필요가 있다. 김조순의 문집 ⌜풍고집⌟은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이 1854년 간행하였다. 본문은 총 16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부터 6권까지 시, 7권부터 16권까지는 문장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시의 경우 창작 시기별로 배열되어 있어 창작 시기를 대략 유추할 수 있고(안대회, 2019: 26), 그러한 권별 연도 구분은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의 흐름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표 1 참조).
첫째, ⌜풍고집⌟은 전집이 아닌 선집으로, 편찬 방향은 그의 “정치적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안대회, 2019: 28). 세도가와 문인의 성격을 함께 보여주되 김조순의 정치적 명성을 해치지 않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풍고집⌟이 김조순의 모든 글을 포함한 것은 아니지만 편찬 과정에서 그의 정치적 위상과 문인적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들이 선별되었다는 점에서, 검토 과정에서 대체적인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로 간주하였다. 둘째, ⌜풍고집⌟에 실린 ‘시’와 여러 문체의 ‘문장’ 중 전자는 자연과 정원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안대회에 따르면, 김조순은 “관각문인(館閣文人)”과 “문예취향이 짙은 문인”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공유하고 있으며 전자의 성격은 문장에서, 후자의 성격은 시에 잘 드러난다고 설명한다(안대회, 2019: 32). 특히 그의 많은 시는 자연과 정원을 주요한 문예적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과 정원 문화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기에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수록된 모든 글을 살펴보되, 그의 별서 옥호정을 다룬 시, 이와 관련한 자연과 정원 문화를 다룬 시를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옥호정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지시하는 시는 일부분이며, 옥호정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글, 예컨대 정원을 다루지만 옥호정인지 본제인지 혹은 다른 사람의 정원인지, 아니면 중국의 고사를 따른 은유적이고 관습적인 자연 표현인지를 확신하기 힘든 시들이 대다수 존재한다. 이 연구에서는 전자의 경우를 주요 분석의 대상으로 한정하여, 옥호정의 구성 요소를 지시하는 낱말이 포함되거나 <옥호정도>에 재현된 정원 경관과 흡사한 공간이 설명되는 시를 주요 대상으로 삼아 검토하였다. 이외에도, 문장 중 제문(祭文), 잡저(雜著)에서도 김조순의 옥호정 경영 및 정원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을 함께 분석하였다.
3. 옥호정 경영과 향유 문화의 전개
앞서 개관했듯이 김조순은 정조 연간인 1785년 2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초계문신, 규장각 대교를 비롯한 주요 직책을 맡아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규장각에서의 정치 생활과 연행 등을 통해 청의 문헌과 자료, 문화를 접하였고 진보적 학풍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문인 자연 문화의 감수성을 형성하였다(유봉학, 1997: 258). 옥호정이 언급되는 시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옥호정 조성 이전의 시기로 추정되나, 후에 옥호정 조성과 경영에 영향을 미칠 당대의 문인 자연 감상과 조성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시들이 다수 등장한다(표 2 참조). 특히, 그는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거주한 경화사족으로서 그의 시는 당대 문인의 도시적 자연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유봉학, 1997: 270).
첫째, 야생의 자연을 유람하고 감상하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양의 진산인 북한산 유람의 감회를 다룬 시들과, 1792년 청에 파견되어 서장관으로 연행 도중에 남긴 일련의 시들 중 만주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감상하며 지은 시에서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생 자연의 장엄함과 웅장함, 기이한 형상을 놀라움과 감탄을 담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望醫巫閭山歌」(의무려산을 바라보며 노래하다)에서 그는 만주의 명산 의무려산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한다(이성민 역, 2019: 171).
[…]
조물주의 유희가 어찌 끝이 있으랴 造化之戲那可旣
갑자기 구름 밖에서 오는 검푸른 빛에 놀라니 黛色忽驚雲外來
의무의 산이 높이 우뚝 솟았네 醫巫之山高崔嵬
노도보다 용솟음치고 송골매보다 요동치면서 湧於怒潮搏於鶻
사막을 넘고 건너 끝없이 뻗쳐나가 踰沙度漠亘不廻
동서를 막고 남북을 가르며 꿈틀대는 용처럼 그 기세 대단하니 塞西東截南北蜿蜒磅礴
웅대하고 기이해라 겹겹의 산봉우리 보는 곳마다 펼쳐졌네 雄乎奇哉重嶂疊巘逐面開
[…]
둘째, 김조순이 관직 생활을 하던 궁궐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는 시가 주목된다. 김조순은 1788년 규장각 대교로 임명되면서 자연스럽게 규장각이 위치한 창덕궁 금원(禁苑)의 경관을 묘사하는 시를 창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이 있는 부용지 주변뿐 아니라 옥류천 영역을 다룬 시도 관찰된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 지형에 적응하여 건축과 조경을 통합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조경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고, 옥류천(玉流川) 영역은 후원 중 가장 깊숙한 자연 계곡 지형에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의 정자가 자리하여 향후 김조순이 조성한 별서인 옥호정과 비견될 만하다. 대표적으로, 「覃恩得遊上苑諸勝仍宿籠山亭 志喜恭賦」(성상의 은혜로 상원의 여러 승경을 구경하고 이어 농산정에서 하룻밤 묵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삼가 읊다)에서 그는 옥류천 영역의 진입 과정과 위요된 정원 영역의 미학적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이성민, 2019: 99-100).
[…]
꼬불꼬불 몇 번 숲길 돌다가 紆廻屢轉蹊
홀연 다시 그윽한 봉우리 만나니 忽復值幽岑
[…]
골짝 밑에서 콸콸 물소리 나니 潨然壑底聲
푸른 물이 사람 마음 맑게 하네 寒碧澄人心
작은 정자는 산의 깊숙한 곳과 마주하고 小亭當山奥
소나무 회나무 둘러싸여 빽빽하니 松檜擁以森
어느새 속세와 떨어졌어라 便與塵世隔
[…]
셋째, 야생의 자연과 궁궐 정원뿐 아니라 본제의 정원 감상이나 조성 기법과 관련한 시가 발견된다. 예컨대, 「還城南宅」(도성 남쪽 집으로 돌아오다)에서는 본제의 뜰의 봄 풍경을 묘사하였고, 「引泉」(샘물을 끌어오다)에서는 대나무 홈통으로 산의 샘물을 끌어와 정원에 연못을 조성했던 구체적 경험을 간결한 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이성민 역, 2019: 68-69, 207). 이러한 점에서 초기 관료 시기의 시들은 옥호정 조성 이전에 이미 야생 자연, 궁궐 정원, 그리고 본제의 정원 경험을 축적하며 자연 문화의 기반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조의 승하 이후 순조 즉위 초기에 김조순은 일시적인 정치적 열세를 겪다가 본격적으로 세도정치의 핵심 권력으로 부상하였다. 상술했듯 정조 연간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정조의 서거로 절차가 중단되었고, 순조 즉위 직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안동 김문은 정국에서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1802년 김조순은 순원왕후 책봉으로 마침내 외척으로 국구가 되었고, 1803년 수렴청정 종료, 1806년 병인경화를 계기로 벽파 세력이 축출되고 안동 김문과 반남 박씨 중심의 세도 정권이 형성되면서 김조순의 정치적 위상은 강화된다. 별서 옥호정에 관한 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첫째, 여러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옥호정의 조성 시작은 이미 김조순이 불혹에 접어들 무렵인 1804년으로 추정된다(이성민, 2019: 407; 정옥자, 2001: 226; 신현실, 2023: 52). ⌜동성교여집⌟에 갑자(甲子, 1804)년에 장생(張生) 소유의 옥호를 샀다는 기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정옥자, 2001: 226. 재인용).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가 김조순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며 정치적 권력을 강화해 가는 시기라는 점이다. 김조순이 옥호정을 명시적으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언급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옥호정은 후술할 권력의 정점 및 안정기에 정치적 교유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옥호정과 관련한 시에서는 별서의 입지를 표현하는 관습적인 묘사가 빈번히 등장한다. <옥호정도>에 표현되어 있듯이 옥호정 부지는 소나무가 가득 심긴 산을 배후산으로 삼아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버들 가득한 개천 사이에 자리 잡아 배산임수의 형세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풍고집⌟에서 ‘옥호’가 제명에 명시되는 첫 작품 「壺亭」(옥호정)은 입지와 경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이성민 역, 2019: 407-408).
[…]
이내 덮은 산봉우리 천고의 빛이요 煙巒千古色
안개 긴 골짝은 사시사철 청량하네 雲峽四時涼
돌길 위엔 숲 단풍 어우러지고 石徑林楓合
솔 문 앞엔 계곡물 길게 흐르네 松門澗水長
[…]
이 외에도, 이 무렵의 글로 보이는 ⌜풍고집⌟ 제9권의 제문(祭文) 「祭玉壺洞土地文」(옥호동 토지신에게 올린 제문)은 옥호정을 조성하기 위해 집터의 형세를 살피고 정지(整地)하는 사전 행위를 설명하고 있다(김채식, 2020b: 403-405).
둘째, 여러 학자들이 추정하듯이, 옥호정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장진아, 2017: 137; 이성민 역, 2019: 391). <옥호정도>에는 1815년을 뜻하는 을해벽(乙亥壁) 각자가 재현되어 있고, 이 연도가 ⌜동성교여집⌟의 1804년과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민에 따르면, 「謹次內舅寄示韻」(내구께서 보내주신 시에 삼가 차운하다)에 언급된 “시냇가의 띠풀로 작은 정자 엮으니 小亭茅結澗之濱”에 등장하는 정자를 옥호정 조성 초기의 산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옥호정에 그려진 정자 및 정원 시설로 추정되는 공간의 묘사와 구체적 명칭이 관찰된다. 구체적으로, 죽정(竹亭), 혜생천(惠生泉) 및 배후산의 소나무 숲, 사랑채, 산반루(山半樓) 등이 시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표 3 참조). <옥호정도>를 살펴보면(그림 1 참조), 부지의 남동쪽, 즉 그림의 왼편과 아래 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물과 정원 요소가 이 시기에 창작된 시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간들이 먼저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연대 미상인 제문 「祭井文 鑿拓石壁下小井」(우물신에게 올린 제문: 석벽 아래에 작은 우물을 팠다)을 통해 혜생천의 조성 취지와 형태, 공공적 이용 양상, 후속 확장 계획을 두루 가늠할 수 있다. 혜생천은 “이곳 백성들이 마시려고 居民承飲, 우물 모양으로 팠는데 刳象井形 […] 거의 흩어져 고이는 것이 적으니 多散少停 […] 장차 두드려 파내고자 하여 將試椎鑿, 정일을 길일로 잡았습니다 吉日維丁”라고 서술하고 있다(김채식, 2020b: 406-407). 초기 혜생천의 규모가 작아 수량 확보와 집수 기능에 한계가 있어 확장을 계획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옥호정도>상에 혜생천은 사랑채와 죽정, 산반루와 담을 통해 분리되어 있어, 이 구역은 인근 주민에게 개방된 반공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또한, 산반루는 단일 시의 제명으로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산반루는 산의 중턱을 의미하며 그것의 위치가 부지의 높은 곳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옥호정도>에서도 산반루는 다른 정자들보다 높은 레벨에 위치하여 개방된 시야로 전망이 좋은 곳처럼 묘사되어 있다. 山半樓成」(산반루가 이루어지다)에서 그는 산반루의 조성 과정과 경위, 전망의 미학적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읊는다(이성민, 2019: 454).
어린 소나무 두세 뿌리 잘라내고서 翦去稚松三兩根
집 서쪽 담장 가에 한 칸 누각 세우니 一間樓起屋西垣
응봉이 금세 나와 평평히 눈에 들고 鷹峯出迅平看挹
용폭은 낮게 흘러 시끄럽지 않네 龍瀑流低不聞喧
나무 끝에 앉은 듯해도 오히려 평온하니 坐似樹顚猶穩處
산반이라 이름 붙인 건 대개 과장한 말이네 名之山半蓋夸言
어찌 후손에서 바라는 좋은 송축 없으랴 那無善頌期來許
나는야 못하지만 행간거고하기를 行簡居高我則惛
셋째, 옥호정은 김조순의 시서화 공간으로 빈번히 등장한다. 아울러, 김조순의 문인들과의 교유 공간으로 주택이나 정자 등이 종종 언급되지만, 옥호정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김조순과 시서화를 통해 교유한 인물로 심상규(沈象奎), 이만수(李晩秀), 김조(金照), 김려(金鑢), 서영보(徐榮輔), 박종선(朴宗善), 이헌기(李憲琦), 안광우(安光宇) 등이 등장하며, 이 중 유력 정치인이자 김조순과 같은 시파인 심상규와 이만수, 그리고 정치 실세는 아니었지만 평생 학문과 문화를 공유한 벗 김조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외에도, 옥호정인지 혹은 본제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죽, 대나무, 화단 풍경 등 정원 문화에 관한 시가 관찰되며, 그러한 소양이 옥호정 조성과 운영, 향유 방식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이 시기 김조순은 한양의 거처를 현재의 서울 중구 장교동 일대인 죽동(竹東)으로 옮겼으며, 본제와 옥호정을 오가며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이성민, 2019: 484)2).
이 기간은 김조순의 권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로, ⌜풍고집⌟의 3권, 4권에 수록된 시들의 창작 연대가 이 기간에 해당된다(표 4 참조). 1812년 반남 박씨의 주요 인물 박종경이 탄핵되자 김조순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1813년 효명세자의 책봉에 참여하고 1814년 선왕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교인하여 정조의 정치적 유산을 관리하는 상징적 권력을 행사하며 노론 계열의 결속을 강화하였다(정옥자, 2001: 236). 같은 해 ⌜홍재전서⌟ 편찬에 참여한 당대 유력 관료의 글을 모은 ⌜동성교여집⌟이 간행된다. ⌜동성교여집⌟은 대체로 김조순이 중심이 되어 시작(詩作)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김조순이 이들 세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가늠해 볼 수 있다(정옥자, 2001: 221-222). 이후 김조순은 1815년 혜경궁의 만장을 작성하여 상징적 권력을 행사하였고, 1819년에는 새로운 외척으로 풍양 조씨 가문을 선택해 효명세자와 혼례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권력을 안정적으로 행사하였다. 이 시기는 옥호정과 관련한 다수의 시가 관찰되며, 특히 ⌜홍재전서⌟와 ⌜동성교여집⌟이 간행된 시기에 해당하는 3권에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첫째, 이 시기 옥호정 부지가 확장되었고 <옥호정도>에 재현된 모습으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옥호정은 1804년에 작은 정자를 조성하면서 시작하여 <옥호정도>에 재현된 을해벽 각자가 지시하는 1815년에 그림에 재현된 모습을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장진아, 2017: 137). 부지의 확장과 관련한 시로 「從金生思皓 借北庭地半丈 拓南墙 戲吟絶句與之」(김생 사호로부터 북쪽 정원 땅 반 장을 빌려 나의 남쪽 담장을 넓히고 장난삼아 절구를 읊어 주다)가 주목된다. <옥호정도>에 재현된 부지의 남쪽, 즉 그림의 서쪽에 옥호정과 담장을 맞닿은 곳에 거주하던 서생으로부터 작은 땅을 빌려 부지를 확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이 시기 옥호정이 정치적 교유 공간으로 빈번히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부상기’의 시에도 옥호정은 등장했지만, 문인들의 아회 공간으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홍재전서⌟와 ⌜동성교여집⌟이 간행되면서 김조순의 정치적 권력이 정점기에 접어든 시기에 해당하는 제3권의 작품들에서 옥호정에서의 정치인들과의 회합이 두드러진다(표 3 참조). 이 시기는 옥호정이 <옥호정도>에 재현된 모습으로 완성되는 1815년 시기와도 중첩된다는 점에서 옥호정이 김조순의 정치적 입지를 상징하는 공간적 장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조순은 ⌜홍재전서⌟의 교정을 맡을 당시 병을 얻어 옥호정에 머물기도 하면서 빈번히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성민과 김채식, 2019: 252).
⌜풍고집⌟의 시에 나타난 옥호정 방문 인물 중 심상규와 김이교(金履喬)는 ⌜동성교여집⌟의 참여 학자이자 김조순과 동일한 시파 인물로 당대 유력 정치인이었고, 이만수는 ⌜홍재전서⌟를 위해 정조의 글을 정리한 역시 시파이자 명망가였다(정옥자, 2001: 194, 201). 또한, 김려와 김조는 김조순과 오랫동안 학문, 문화를 교유한 문인적 교유 관계에 있었다. 심상규, 김이교, 김려, 김조는 김조순과 함께 19세기 초 삼청동과 가회동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단, 일명 ‘북촌시단’의 구성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김용태, 2016). 이들은 옥호정에 모여 옥호정의 경관을 감상하며 시작(詩作)을 통한 결속을 공고히 하였다. 예컨대, 「陪松園從叔父 遊玉壺洞 同遊者 憨軒石閒薄庭三戒齋也 拈唐韻共賦」(송원 종숙부를 모시고 옥호동에서 노닐었는데, 함께 노닌 이는 감헌․석한․담정․삼계재이다. 당인의 운자를 뽑아 함께 짓다)에서 김조순은 “현재(賢才)들에게 의지해 유유자적 즐기니 優遊資俊彦, 금란지교 맺는 마당 부럽지 않네 不羨結金場”라고 감회를 밝힌다(이성민과 김채식, 2019: 63-64). 이외에도 ⌜동성교여집⌟의 참여 학자이자 유력 인사였던 정원용(鄭元容), 서영보(徐榮輔), 이광문(李光文)도 옥호정에 방문하여 김조순과의 정치, 학문적 교유 관계를 맺었다(정옥자, 2001: 230-231)3). 문인들과의 교유 장소는 옥호정에 국한되지 않고, 당대 유력 인사의 집, 예컨대 심상규의 집 소안원(蕭雁園)이나 서영보의 증조 서명균(徐命均)의 정자 재간정(在澗亭), 그리고 봉원사(奉元寺)와 같은 사찰까지 다양하였다(이성민과 김채식, 2019: 385, 397, 499). 옥호정 이외에도 현재 성북동 인근인 북저동(北渚洞), 낙산 인근 협간정(夾澗亭) 등 한양 교외 명소를 문인들과 유람하였고(이성민과 김채식, 2019: 428), 명소 방문을 통한 교유 양상은 ⌜풍고집⌟의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셋째, ‘정치적 부상기’의 시에 기 언급된 정원 요소에 더해 추가적인 정자와 정원 공간이 이 시기의 작품에 처음 등장한다. 전자의 경우 혜생천과 죽정이 대표적이다. 혜생천은 김조순이 옥호정을 묘사할 때 빈번히 등장하고, 대나무 홈통에 흐르는 물의 풍경 묘사와 혜생천의 물을 마시는 행위가 내용의 주를 이룬다. 예를 들어, 「壺舍春夜 與屐翁斗室拈韻共賦」(옥호정사에서 봄날 밤 극옹과 두실과 운자를 뽑아 함께 짓다)는 혜생천의 풍경을 “산꽃은 집을 두른 솔 울타리 사이에 피었고 山花繞屋籬松間, 바위샘은 수조에 걸린 대나무 홈통에 흐르네 石溜懸槽筧竹孤”로 묘사한다(이성민과 김채식, 2019: 30). 이러한 풍경 묘사는 ‘초기 관료 시기’의 시 「引泉」(샘물을 끌어오다)에 재현된 정원 실천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정원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애에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죽정은 사랑채와 가장 가까운 정자로 김조순이 일상적으로 손님을 대접하거나 홀로 시짓기를 행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壺中秋晩」(호중의 늦가을)에서 김조순은 초정에서 옥호정의 가을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는다(이성민과 김채식 역, 2019: 458).
초가집 대나무방에 앉으니 청량하기 그지없어 茅堂竹室坐來清
시내와 산을 가리키며 이름을 새삼 확인하네 指點溪山始有名
송이를 찾으니 붉은 고사리보다 낫고 却覓松蕈勝紫蕨
메벼로 밥을 지으며 청정반을 생각하게 旋炊秔飯憶靑精
무심한 구름 절로 흩어져 수풀을 뚫고 당도하니 閑雲自解穿林到
조용한 골짜기 홈통에 떨어지는 물방울 이따금 바라보네 幽澗時看落筧明
이 시기 새롭게 등장하는 요소로 석가산(石假山), 첩운정(疊雲亭), 혜생천의 암벽 각자 “산 빛은 유구한 옛날과 흡사하고 山光如邃古, 바위 기운은 오랜 세월 누릴만하네 石氣可長年” 등이 주목된다(표 4 참조). 석가산과 첩운정은 부지의 남서쪽 영역에 위치하여, 다른 정원 공간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혹은 작품 선정 과정에서 이들 공간을 다룬 작품이 배제되었거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외에도 사랑마당과 단풍대(丹楓臺) 등 <옥호정도>에 재현된 대부분 영역이 이 시기의 시에 등장한다. 특히, 김조순의 호, 풍고(楓皐)는 정조가 지어준 것으로(유봉학, 1997: 256), 그의 호를 함축하는 단풍나무는 <옥호정도>에 단풍을 감상하는 공간, 즉 단풍대로 재현되어 있다. 김조순 자신을 상징하는 징표로, 또 경관 미학의 소재로 단풍나무에 대한 예찬은 이 시기를 포함하는 생애 전반에서 옥호정과 여타의 자연 풍경을 묘사할 때 빈번히 등장한다.
1821년 이후에도 김조순은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으나, 건강 악화와 효명세자 대리청정 이후의 정국 재편 속에서 중앙 정치에서의 주도적 역할은 이전에 비해 제한되는 양상을 보인다. ⌜풍고집⌟ 제5권에 해당하는 1821년은 돌림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회복하고, 1824년 관서 지방에 목욕 휴가를 다녀오고 이듬해 회갑을 맞으면서 인생의 만년을 맞이했다. 한편, 제6권에 해당하는 1827년부터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외척을 견제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김조순의 정치적 권력은 상대적으로 축소되면서 여주 현암에 마련한 시골집에 거처하기도 하다가 1830년 효명세자의 사망으로 권력을 회복하는 등 정치적 입지의 부침도 발견된다. 옥호정 부지의 확장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고, 옥호정은 이전 시기의 유력 인사들과의 회합 장소라기보다 만년에 접어든 김조순의 은거와 인생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공간으로 묘사되는 경향으로 변모한다.
첫째, 앞선 ‘권력의 정점 및 안정기’에 비해 옥호정에 관한 시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경기도 여주 현암에 시골집을 마련하여 거처하면서 한양에 위치한 옥호정의 별서로서의 역할이 이전보다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옥호정은 여전히 김조순과 문인들과의 교유의 장소로서, 나아가 후학 양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표 5 참조). 다만, ‘권력의 정점 및 안정기’에 옥호정에서의 교유 인물이 당대 권력가 및 정치적 실세와 구분되는 문인 관료 등을 두루 포함하였다면, 이 시기 옥호정에서 교유한 문인, 예컨대 심노숭(沈魯崇), 이의철(李懿喆), 김조 등은 유력 정치인이라기보다 김조순과 학문․문화적 관심사를 공유한 문인으로 파악된다. 당시 한양 인근의 동령사(東領寺), 옥천암(玉泉庵), 진관사(津寬寺), 경기 이천의 영원사(靈源寺)를 비롯한 사찰을 방문하거나 그곳에 머물며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하고, 스님과의 교유가 빈번해졌다는 점도 이전 시기와는 다른 변화 양상이다(김채식, 2020a: 108, 183, 205, 218)4). 김조순은 만년에도 새로운 정자를 건립하였다. 졸하기 한 해 전인 1831년, 그의 육촌 동생인 종조제(從祖弟)이자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던 김난순(金蘭淳)이 보내준 자금을 화수정(花樹亭) 건립에 사용했다(김채식, 2020a: 435-436). 화수정은 김조순의 거처에 마련되었지만, 그것이 옥호정인지 본제인지, 또 다른 정원인지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둘째, 이 시기 작품들에서는 김조순의 정원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인생의 무상과 자신의 노쇠를 투사하는 성찰의 매체로 기능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물론, 김조순은 어릴 적부터 목에 종기를 앓아 생애 전반에 걸쳐 병환이 잦았으며, 옥호정은 그가 불혹에 접어들었을 무렵 조성되어 휴식을 취하거나 병을 회복하는 장소로 빈번히 활용되곤 했다(이성민, 2019: 407-408; 이성민과 김채식, 2019: 36, 462). 노년기에 이르러 돌림병에 걸렸다 회생하기도 하다가 회갑을 맞이하였으며, 무엇보다 평생 절친한 벗이었던 김조가 사망했던 이 시기, 옥호정을 비롯한 정원과 자연은 슬픔을 투영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공간으로서 빈번히 관찰된다. 김조순은 정원 요소에 자신의 그러한 노년에 대한 자각과 상실의 정서를 투영하였다. 예컨대, 「次蓉城見寄韻」(용성이 보내온 시에 차운하다)에서 김조순은 “사물에 의탁하여 내 마음 위로하노니 寓物聊娛我, 흐르는 세월이 사람을 저버릴까 두렵네 流年恐負人”라고 읊는다(김채식, 2020a: 74). 또한, 「壺舍共賦」(옥호정사에서 함께 짓다)에서 옥호정은 노쇠를 자각하고 인생무상을 성찰하는 장소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김채식, 2020a: 368). 이 작품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간에 상대적으로 김조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된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그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시기 옥호정이 유력 정치인들과의 교유가 이루어지던 정치적 별서로 기능했던 양상과 사뭇 대비된다.
참선과 수도를 하지 않아도 不煩禪悅與修眞
골짜기가 마음 편해 정신을 기를 만하네 邱壑情安可養神
출세하는 것은 지금에야 법이 있음을 아노니 出世於今知有法
한가함 얻음에 예부터 그런 사람 없었으랴 得閑從古豈無人
백 년 동안 산간의 달을 희롱하고 百年自弄山間月
천 일 동안 술 속의 봄에 길이 머물렀네 千日長留酒裏春
부귀는 뜬구름이라 어찌 말할 가치 있으랴만 富貴浮雲何足道
나는 쇠하였으니 대아를 끝내 누가 진설하랴 吾衰大雅竟誰陳
셋째, 이 시기에 <옥호정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옥호정도>는 1815년을 지시하는 을해벽 각자와 함께 옥호정의 완성된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 ‘을해’가 지시하는 1815년 이후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장진아, 2017: 147). 또한, <옥호정도>에 그려진 ‘옥호산방(玉壺山房)’ 편액도 주목된다. ⌜풍고집⌟ 제 16권에 수록된 1828년에 쓰인 잡저(雜著) 「大水判」(대수판)에 “지금 비은사(費隱舍)에 있는 ‘옥호산방(玉壺山房)’이라는 편액은 바로 수옥의 글씨”라고 언급되어 있다(이성민, 2020: 620-621). 여기서 수옥은 김조순이 초기 관료 시기인 1793년 연행 도중 만난 청나라 문인 장도악(張道渥)을 뜻하며, 이 때 글씨를 받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이 쓰인 1828년에는 편액이 옥호정 사랑채에 걸려있었으므로, 편액이 그려져 있는 <옥호정도>는 1815년 이후에서 1828년 이전, 혹은 1828년 이후에 그려졌을 수도 있어 이를 통해 제작 연대를 한정하기는 어렵다.
한편, <옥호정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계화 <동궐도(東闕圖))>와 건축물 및 산수의 표현 양식이 유사하다고 여겨진다(안휘준, 2005: 21; 장진아, 2017). <동궐도>는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간인 1828년에서 1830년 사이 세도가를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이민아, 2008: 208). 또한, 도화서 화원, 그리고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비정기적으로 왕실 행사에 참여한 방외화사(方外畵師)들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옥호정도>는 <동궐도>에 비해 채색과 표현이 다소 검박하나 왕실 계화의 기록화적 특성과 산수 표현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전문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재료 또한 19세기 초 궁중 계화를 비롯한 왕실 회화에서 사용된 고급 종이인 도련저주지(濤鍊楮注紙)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장진아, 2017: 136). ⌜풍고집⌟을 살펴보면, 김조순은 겸재 정선(鄭敾)과 심사정(沈師正) 등 문인적 회화에 조예가 깊었으며(이성민, 2020: 614-615), 화원과의 직접적인 친분을 시사하는 작품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컨대, 1826년 창작된 「丙戌季秋 宿欣涓館作」(병술년 늦가을에 흔연관에 유숙하며 짓다)에서 김조순은 화원 이재관(李在寬)의 화실 흔연관(欣涓館)에 자주 왕래해 왔다고 언급하고 있다(김채식, 2020a: 250). 이재관은 1833년 창덕궁 중건에 방외화사로 참여했고, 이러한 점에서 건축물의 정확한 묘사가 필요한 <동궐도>와 같은 계화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안휘준, 2005: 18-19).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옥호정도>는 19세기 전반 궁중 계화와 재료 및 재현 방식이 일부 유사하며, 이를 통해 제작 시기 역시 효명세자 대리청정기를 전후한 <동궐도> 및 궁중 계화 제작 시기를 중심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또한, <옥호정도>의 주문자를 특정할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김조순의 정치적 위상과 옥호정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김조순의 말년에 옥호정을 기념해 재현하려는 의도 아래 제작되었거나, 사후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추모의 목적으로 추진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4. 결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연구는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에 따른 옥호정 경영과 향유 문화의 변화를 그의 문집 ⌜풍고집⌟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먼저 김조순의 생애에서 주요 정치적 사건과 변곡점, 그리고 이러한 맥락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풍고집⌟의 권별 편집과 연도 구분을 검토하여, 그의 정치적 생애는 초기 관료로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는 시기(1783-1800), 세도정치를 확립해가는 시기(1801-1809), 권력의 정점에서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1810-1820), 노쇠하여 정계에서 차차 후퇴하는 만년의 시기(1821-1831)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시기 구분에 따라 ⌜풍고집⌟을 검토한 결과, 김조순의 옥호정 조성․경영․향유 방식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첫째, 초기 관료 시기에는 야생 자연, 궁궐 정원, 본제의 정원 등을 경험하며 문인적 자연 감수성을 형성하였다. 둘째, 정치적 부상기에는 옥호정 조성이 시작되었다. 김조순은 주택이나 정자 등에서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나 옥호정에서의 모임을 직접적으로 지칭한 시는 찾기 어렵고, 이 시기 옥호정은 주로 김조순의 시서화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셋째, 권력의 정점 및 안정기에는 옥호정 공간이 확장되어 <옥호정도>에 재현된 모습으로 완성되었고, 당대 유력 정치인들과의 아회 장소로서 빈번히 등장하였다. 특히, ⌜홍재전서⌟와 ⌜동성교여집⌟이 간행되며 김조순의 정치적 권력이 정점일 무렵 옥호정에서 정치인들과의 회합이 두드러진다. 넷째, 김조순이 건강이 악화되고 노쇠하여 정계에서 점차 물러난 정계 후퇴기에는 옥호정이 인생무상과 노쇠의 감회를 투영하는 은거와 성찰의 공간으로 표상되었으며, 옥호정 관련 시가 이전보다 감소한다. 또한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이 위축된 시기는 <옥호정도>의 제작 연대로 제시되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위와 같이 ⌜풍고집⌟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검토하면 다음과 같은 세부적 판단이 가능하다. 첫째, 옥호정의 조성 단계를 일정 부분 가늠할 수 있다. 죽정, 혜생천 및 배후산의 소나무 숲, 사랑채, 산반루 등 부지의 남동쪽 영역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시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석가산이나 첩운정을 포함하는 남서쪽 영역이 후대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공간 조성의 선후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둘째,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의 변곡점, 즉 부침이 나타나는 시기에 옥호정이 조성, 확장되고 <옥호정도>가 제작되며 새로운 정자가 건립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경관 조성과 회화 제작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입증할 사료는 확인되지 않기에, 그러한 문화적 산물을 김조순의 정치적 장치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옥호정의 활용 방식의 변화가 그의 정치적 부침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옥호정이 문화 권력의 장소로 기능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조순이 자연과 정원을 예찬하는 태도는 생애 전반에 걸쳐 지속되지만,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거나 노쇠한 국면에서는 자연과 정원이 인생 성찰과 노쇠의 정서를 투사하는 매체로 표상된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과 정원이 단순한 자연 애호의 대상을 넘어, 김조순의 정치적 풍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공간적 장치로 작동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김조순의 정치적 생애에 따른 옥호정 경영과 향유 문화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주요 텍스트인 ⌜풍고집⌟의 편찬 성격과 구성 방식은 이 연구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풍고집⌟은 그의 아들 김유근에 의해 대체로 창작 시기별로 배열, 편집되어 생애 흐름에 따른 자연과 정원 문화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지만, 전집이 아닌 선집이기에 편집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김조순의 전체 사고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풍고집⌟의 편집에 기입된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편집자인 김유근의 정치적 생애를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아울러, 정치적 생애의 국면과 시기별 옥호정 경영 및 문화의 특성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반화의 한계를 지닌다. 논의 전개를 위해 그의 정치적 생애의 큰 변곡점을 고려하여 ⌜풍고집⌟의 여러 권을 재구성하여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으나, 각각의 정치적 시기에서도 일부 정치적 부침은 나타난다. 후속 연구에서는 김조순과 교유했던 인물들의 시문, 그리고 그들의 본제, 별서 및 아회 공간과의 관계를 추적하여 당시 경화사족의 자연 및 정원 문화 네트워크와 그 안에 내재된 인식과 향유 방식을 보다 면밀히 탐구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한시의 특성상 ⌜풍고집⌟은 함축적 언어와 옛 경전이나 고사를 인용, 암시하는 전고(典故)를 활용하여 의미를 정제하고 있어, 번역과 독해의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도출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옥호정을 명시하지 않은 작품의 경우, 그것이 본제인지 정원인지, 타인 소유의 공간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사례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 연구의 해석은 다른 문인들의 기록과의 교차 검토, 공간 데이터 분석, 나아가 가능하다면 고고학적 조사 등 실증적 접근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김조순은 죽기 한 해 전 화수정(花樹亭)이라는 정자를 정원 안에 건립한다. 친족이 보낸 자금을 화수정 조성에 사용하고 친족 간의 우정의 중요성을 노래한 시 「花樹亭 幷序」(화수정 병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물이란 오래 보존되는 것이니, 비록 백년 뒤에라도 우리 형제의 우정 넘치던 흔적이 땅으로 인해 보존되어서, 사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김채식, 2020a: 436).” 인간 삶의 유한함을 자각하면서 정원이라는 공간에 인간관계의 기억을 각인하고자 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화수정 건립 당시 김조순은 외척을 견제하던 효명세자의 서거로 다시 권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처럼 그의 정원은 단순한 자연 향유의 장소를 넘어, 그의 정치적 삶과 인간의 관계를 함께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연구는 조선 후기 경화사족의 자연과 정원 문화를 정치적 생애의 변화와 연동된 산물로 파악하고, 그것의 조성과 경영, 향유 방식의 전개를 통시적으로 규명한 시론적 논의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