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원, 특히 별서원림(別墅園林)은 산수 경승지에서 바위와 물, 지형과 수림, 조망 등 기존의 자연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조성된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 사대부의 작정(作庭)은 빈 땅에 새로운 형태를 구축하는 축조 행위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에 반복적으로 다가가 적절한 터와 경물을 발견하고 이를 삶과 수양의 장소로 의미화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작정의 과정과 방식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조선시대 정원에 관한 자료로 원기(園記)와 기문(記文), 제영시(題詠詩) 등이 남아 있으나, 이들은 대체로 완성된 정원을 감상하거나 그 의미를 노래한 기록이지 정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서술한 기록은 아니다. 작정의 동기와 절차, 순서를 직접 담은 문헌은 물론, 정원 자체를 그린 도면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요컨대 조선 사대부 원림에서 과정은 기록되지 않은 채 결과만이 전해지며, 이 때문에 사대부가 정원을 만든 방식을 일반화하여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자료적 조건 속에서 기존의 조선 정원 연구는 대체로 완성된 원림의 형태와 구성, 조영자의 생애와 사상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축적되어 왔다. 소쇄원과 부용동 등 주요 명원(名園)에 대해서는 실측조사를 토대로 한 공간 구성 분석이 이루어졌고(문화재관리국, 1987), 조영자의 입지 선정과 경관 조영에 관한 개별 연구도 꾸준히 제출되었다(유가현과 성종상, 2009; 정윤영 등, 2011). 또한 정원에 반영된 풍수 및 성리학적 세계관을 해석하거나(성종상, 2012), 소쇄원 사십팔영(四十八詠)과 같은 제영시를 통해 조영 방법을 추론하는 연구(천득염과 한승훈, 1994), 누정 편액에 담긴 자연 인식을 분석하는 연구(이현우와 김재식, 2010) 등 정원의 상징적, 문학적 층위에 주목한 성과도 이어졌다. 이들 연구는 조선 정원의 형태적 실체와 사상적 배경을 규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이러한 연구들은 정원을 대체로 완성된 결과물로 전제하는 경향이 있어,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조영자가 자연을 어떻게 발견하고 선택하며 의미화하고 조성했는지의 과정 자체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였다. 개별 개념에 초점을 둔 연구, 이를테면 부지 선정과 분석으로서의 상지(相地)에 관한 논의(황기원, 1995; 황기원, 1996; 성종상, 2019)나 명명제영을 통한 의미 부여에 관한 논의는 각기 축적되어 왔으나, 이들을 작정이라는 하나의 연속된 과정 속에서 상호 연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드물었다1).
본 연구는 이러한 공백에 주목하여 조선 사대부 원림을 완성된 정원이 아니라 조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직접적인 조성 기록이 희소한 상황에서 작정의 과정을 복원하려면, 개별 사건의 실증을 넘어 여러 원림 사례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식과 실천의 국면을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이에 본 연구는 사대부 원림의 조성 과정을 유(遊), 상지(相地), 명명제영(命名題詠), 인지제의(因地制宜)라는 네 개념을 통해 해석한다.
이 네 개념은 어느 한 문헌이 제시한 완결된 이론 체계가 아니라, 다수의 원림 사례에 대한 반복적 현장 답사와 원기, 제영시 등 관련 자료의 비교와 검토를 통해 귀납적으로 정련된 분석 틀이다. 각 개념은 전통 사상이나 조경, 지리 담론에서 개별적으로 쓰여 온 용어이지만(신은경, 1999; 김종미, 2001; 성종상, 2019), 본 연구는 이를 작정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설명하는 상호 연동적 국면으로 재배열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개별적 용법과 구별된다. 각 개념이 대응하는 국면은 다음과 같다. 유는 자연을 반복적으로 찾아가 몸으로 체득하며 장소와 경물을 발견하는 답사의 국면이고, 상지는 그 가운데 정원으로 삼을 터를 지형, 수계, 방위, 조망 및 사회적 연고까지 아울러 읽어 선택하는 국면이며, 명명제영은 선택된 자연 경물에 이름과 시를 부여하여 물리적 변형 없이 이를 정원 요소로 의미화하는 국면이고, 인지제의는 기존 지형과 수계를 존중하며 최소한의 인위로 이를 정원으로 조성하는 국면이다. 곧 이 네 개념은 발견, 선택, 의미화, 조성으로 이어지는 작정의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상호 연동적 축으로 설정된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 사대부 원림을 자연을 새로 제작한 인공물로 보는 관점 보다는 자연 속에 잠재된 장소적, 상징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의미화한 발견의 정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본 연구가 개별 원림의 형태 규명보다 작정의 과정과 방식 자체를 일반화하여 서술하는 데 목적을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연구 대상은 윤선도의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 이황의 도산서당, 양산보의 소쇄원, 이담로의 백운동 원림, 정영방의 서석지 등이다. 이들은 조영자와 조성 경위에 관한 원기, 기문, 문집, 제영시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 직접적 조성 기록이 없는 가운데서도 작정 과정을 추정하기에 적합한 사례들이다. 본 연구는 이들 문헌 자료와 현존 경관을 함께 검토하여, 장소의 발견(유), 터의 선택(상지), 경물의 의미화(명명제영), 물리적 조성(인지제의), 그리고 점진적 완성에 이르는 순서로 사대부 원림의 작정 과정을 해석한다.
2. 유(遊): 답사를 통한 장소의 발견
원림 만들기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는 작업은 자연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답사하는 것이다. 이 답사는 조선 사대부들이 즐겼던 ‘유(遊)’와 결부시켜서 설명할 수 있다2). 동양적 산수미의 체득방식인 유는 사대부들이 자연 속에서 정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즐겨 선택한 핵심적인 태도이자 방법이었다. ‘유’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다.’라는 의미이며3), 여기에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적인 해방(심유, 心遊)을 추구하는 행위로서 유(遊)에는 ‘놀다’와 ‘다니다’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이는 중국 고대 화가들이 산수의 조화를 본받고 운행원리를 꿰뚫기 위해 택한, 이른바 ‘실컷 돌아다니면서 한껏 보고 나서 그것이 가슴속에 역력하게 새겨지는(장파, 1999: 375. 재인용)’4) 경지를 추구한 것과 닿아 있다.
산수간을 소요하듯 거니는 ‘유’는 정원을 만들고 즐기는 데에 매우 유용한 실천 행위이다. 평소 경치가 아름답다고 알고 있거나 유명한 곳을 찾아 자유롭게 노닐듯 유유히 걸으면서 경치를 즐기거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는 정신적 해방감 속에서 온몸을 통해 대상 자연을 즐기는 방식인 셈이다. 조선 선비들은 수시로 유를 통해 주변을 답사하면서 그곳의 자연 경물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대상을 찾아내고 머물 만한 장소를 정하고자 했다. 사대부들이 자연을 대함에 있어서 관념을 넘어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체득되는 미적 경지나 정신적 감회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유’를 통해 가능하였던 것이다.
고산 윤선도가 해남 연동 종가를 거점으로 하여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으로 이어지는 원림을 차례로 조영한 것은 이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유, 즉 ‘근유(近遊)’의 결과가 구체적인 장소 만들기로 이어진 결과인 것이다(성종상, 2010). 고산이 이들 원림들을 자주 왕래하였음은 그가 금쇄동과 수정동을 오가며 쓴 한시 「우음(偊吟)」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그림 1 참조).
금쇄동 안에는 꽃이 바야흐로 피고 金鎖洞中花正開
수정 바위 밑에는 우레같은 물소리 水晶巖下水如雷
유인이라고 어찌 할 일 없다고 하랴 幽人誰謂身無事
대지팡이에 짚신 신고 매일 오간다네 竹杖芒鞋日往來5)
금쇄동에서 수정동을 이처럼 날마다 오갔다면, 거리가 더 가까운 금쇄동에서 문소동까지는 더 자주 왕래하였을 것이다. 직선거리로 수정동에서 금쇄동까지는 5리, 금쇄동에서 문소동은 겨우 1리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이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지은 ‘문소동에 들면서 읊었다’는 「입문소동구점(入聞簫洞口占)」이라는 한시에서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문소동에 매일 오는데 一月聞簫日一來
푸른 산 붉은 나무는 비단을 천 겹이나 쌓은 듯 碧山紅樹錦千堆
시골늙은이야 그저 살림하는 사람일 뿐 村翁只作營家客
아침 저녁 한정을 어찌 알리오. 朝暮閑情豈識哉6)
문소동 역시 매일같이 오갔다는 것을 보면 이 3개의 원림, 즉 ‘산중삼승(山中三勝)’7)을 고산이 하나로 묶어 원림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보면 당시 고산의 생활은 제사나 집안 대사를 치르기 위해서 들른 연동 종가를 중심으로 하면서, 가까이 위치한 이들 세 원림을 하나의 영역으로 하고, 바다 건너 섬 보길도에 조영한 부용동을 다른 영역으로 하여 일종의 다핵구도를 갖는 별서 체계로 운영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그림 2 참조).
원림을 중심으로 한 이같은 유는 유배 시절 다산 정약용이 조영한 다산초당에서도 발견된다. 다산초당에 머물던 다산은 인근 백련사를 자주 오가며 주지 혜장스님과 유학과 불교를 넘나드는 교류를 하였고, 만덕산 자락을 거닐곤 했다(박석무, 1996). 때로는 산 아래 강진만 바닷가를 거닐며 가슴에 쌓인 근심을 씻어 내거나 수석을 주워와 연못의 석가산을 쌓기도 했다.
평생을 고향 토계(兔溪)를 오르내리며 살았던 퇴계 이황8)도 유를 일상처럼 자주 즐겼다. 어릴 적 숙부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오갔던 청량산을 그는 ‘우리 집 산(吾家山)’이라고 하면서 즐겨 찾았다. 집 앞 작은 시내 토계는 한적하여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에 제격이었고, 청량산으로 이어주는 낙동강은 가슴을 넓히기에 그만이었다. 퇴계는 “어느 날이나 어느 때나 나가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토계와 낙동강변을 자주 찾았다(그림 3 참조). 책을 읽다가도 마음이 동하면 지팡이를 짚고 나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면서 시를 짓고 노래하곤 했다(이황, 「도산기」). 긴수작(緊酬酌)과 함께 한수작(閑酬酌)9)을 중시했던 그는 이사 가는 곳마다 집은 작고 검소하게 지으면서도 반드시 정원을 만들어 즐겼다. 그렇게 만든 정원은 그가 수시로 거닐었던 토계나 낙동강, 혹은 청량산 등과 함께 그에게 한수작처로서 머리를 식히고 정서를 기르는 주무대가 되었다. “내가 그림속으로 들어가네”라고 했을 만큼 낙동강과 청량산 등이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가 청량산을 오가며 걸었던 길은 현재 예던길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복원되어 있다.
3. 상지(相地): 땅 읽고 고르기
사대부 원림에서 정원 만들기 즉, 작정(作庭)은 적합한 땅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주, 여러 번 반복된 유를 통해 그들은 주변의 온갖 자연 속에서 마음에 맞는 경물이나 장소를 선택하여 뭔가를 만들 터로 삼았던(상지) 것이다. 의미상 땅 읽기(reading)와 찾기(searching), 그리고 고르기(selecting)와 다듬기(leveling and shaping)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상지는 한국정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다(성종상, 2019). 상지란 ‘땅을 살피다’라는 뜻이니 물과 바위 등 자연 경물들을 잘 갖추어 정원으로 만들만한 곳을 찾는 것을 말한다. 수시로 즐긴 유를 통해 주변의 땅을 오가며 정원으로 만들어 즐길 만한 곳을 찾아 내고서(찾기와 고르기), 정자나 연못 등을 만들 터를 적당히 다듬는(다듬기) 것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선 사대부 정원의 한 유형으로서 원림(園林)은 산지나 계류변 등 자연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잘 활용해 만들어 즐긴 정원이다. 이미 잘 갖추어져 있는 자연을 활용하니 만들기도 쉽다. 자연을 덜 훼손하게 되니 도리에도 맞고 실리적이다. 좋은 산수를 갖춘 땅 찾기, 곧 ‘상지’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선 사대부들은 틈만 나면 자신이 사는 집 근처나 선산 등 연고지 주변을 다니며 마음에 맞는 곳을 찾아다녔다. 사대부 원림의 입지는 산기슭이나 계곡부, 산중턱이나 봉우리 등으로 다양하지만 대체로 물과 바위, 그리고 지형지세가 잘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산기슭이나 구릉, 혹은 봉우리나 계곡 중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에 따라서 원림은 토양과 식생, 일조와 미기후, 그리고 경관 등에서 다른 조건과 특질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조선 사대부 원림은 각 장소가 지닌 특질을 세밀하게 읽어 내고서 적절히 살려낸, 일종의 장소 특수해(particular solution)라고 할 만하다.
18세기 영국의 저명한 정원가 Lancelot ‘Capability’ Brown은 의뢰받은 땅을 볼 때마다 “이곳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This place has its capabilities).”라고 했다고 전한다10). 고객이 의뢰한 대상지가 지닌 독특한 조건과 특질을 읽어 내어 정원 디자인의 단서로 삼았던 것이다. 대상지를 접할 때마다 그런 표현을 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예사롭지 않은 안목으로 땅을 세심히 읽어내려 했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가 영국의 위대한 정원가로 불리게 된 밑바탕에는 땅을 읽는 빼어난 안목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사대부 원림에서 그 같은 땅 읽기는 단순히 대상지나 상하 주변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해와 달, 그리고 별 등의 천계(天界) 영역까지도 고려되기도 한다. 예컨대 밤에 달이 뜨는 자리에 맞춰 이름 붙인 금쇄동의 월출암(月出巖)이나,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이 내리비추는 길지로 여겨진 금쇄동 터가 그러하다. 나아가 대개의 경우 땅 읽기는 대상지에서 멀리 조망되는 원경 요소들(주요한 산봉우리나 산세, 물줄기의 흐름, 들판, 계곡, 주변 민가나 시가지 등)까지도 중요하게 간주한다.
한국에서 상지(相地)는 비단 정원에만 국한되어 적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도읍을 정하는 데11)에서부터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마을을 고르고 집터를 잡거나12) 정원을 지어 즐길 곳을 찾는데, 심지어는 죽어서 묻힐 곳을 찾을 때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산과 하천이 잘 발달되어 있는 한국에서는 어떤 터를 잡느냐에 따라 자연으로부터 오는 이점과 폐해가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다. 겨울의 혹한과 적설, 여름의 폭염과 장마, 그리고 봄철의 가뭄과 건조 등의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기상조건까지 함께 감안하면 한국에서 상지는 쾌적성은 물론 생존과 안전에까지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비롯된 풍수지리가 유달리 한국에 오랫동안 널리 통용되어 온 까닭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최창조, 1991). 어머니 무덤을 냇가에다 마련한 청개구리가 비만 오면 염려하여 운다는 한국의 전래속담은 땅의 입지에 따른 폐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바람, 햇빛, 온도 등은 물론 식수 확보나 침수, 홍수 등이 모두 상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그림 4 참조)13).
결국 상지란 그 터가 지닌 주변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 간파해 내는 일이라 할 수가 있다. 그 터가 지닌 관계란 지형지세와 고저차에 따른 관계, 방위와 전망의 관계, 산이나 물, 기타 지형지물 등, 나아가 멀리 하늘의 해와 달, 별 등 자연과의 관계에서부터, 현재 나와 주변인들의 삶 및 조상과의 관계 등 인문사회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 걸친 입체적 관련 양상 및 구도의 산물로 드러난다(성종상, 2019). 사실 그 같은 자연과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함께 과거 한국인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해왔다.
16세기 조선의 문인 신응시(辛應時, 1532-1585)는 대전시 갑천변에 정자를 짓는 것을 꿈꾸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평생 땅 잘 보는 눈을 지녀
말 위에서 좋은 곳을 골라 두었네.
(이하 생략)14)
평소에 말을 타고 오가면서 마음에 드는 장소로 골라둔 갑천변의 묘처에다가 정자를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상지는 마음에 드는 특정의 장소를 골라 그 특질을 살려서 정원을 만들려고 하거나, 역으로 마음속 구상한 바에 잘 맞을 만한 땅을 찾아내어 정원을 만들려고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실현 여부를 떠나 정원 만들기의 전과정에서 상지는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정원을 만들기 위한 상지에 탁월한 안목을 발휘한 이로는 고산 윤선도를 들 수가 있다. 그가 완도 앞의 섬 보길도 부용동에 조성한 4개소의 정원은 한결같이 그의 해박한 땅 읽기가 유감없이 구사된 곳들이다. 낙서재는 최고봉인 격자봉(적자봉)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혈맥이 이룬 곳에다 터를 잡고서 자신의 거처로 삼은 곳인데, 정확한 집터를 잡기 위해 고산이 취한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하인을 시켜 긴 장대에 깃발을 달아 위아래로 오르내리게 하고서 고산은 맞은편 산 중턱 조망터15)에 올라 “고저와 향배를 헤아려” 집 지을 터를 잡았다(윤위, 1748; 그림 5 참조). 이는 터 안 가까이에서 읽는 세부적 여건과, 멀리 바깥에서 보는 전체 형국을 함께 고려한 통합적 땅 읽기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정동오, 1987; 정동오, 1989; 성종상, 2012).
작은 계류변에 조성되어 수경 연출이 돋보이는 세연지는 보길도 전체 풍수구도상 외수구에 해당되는 곳으로 고산의 치밀하고도 과학적인 땅 읽기로 탄생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물이 주제가 되는 정원 세연지에서 읽을 수 있는 고산의 땅 읽기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고산은 섬 전체 유역상의 주계류가 아닌 지류변을 골라 입지시킴으로써 여름철 폭우로 인한 홍수 시 범람이나 침식으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지류변에서 상류 산지로부터 침투된 빗물이 용출되는 샘을 발견하고서 바로 그 아래에다 주 연못인 계담(溪潭)이 위치하도록 함으로써 상시 수량확보라는 중요한 과제를 일거에 해결해 버렸다. 즉, 건기와 우기의 유량 차이가 극심한 섬에서 유역 크기도 작고 경사도 완만한 지류변을 택하되, 용출수가 나오는 샘 바로 아래에다 세연지를 만듦으로써 홍수 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연중 일정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림 6 참조). 탁월한 생태적 안목이 돋보이는 상지의 현장이라 할 만하다(성종상, 2005).
다음으로, 고산이 자신의 종가 해남 녹우당에서 5km 남짓 떨어진 산지에 만들어 즐긴 수정동과 금쇄동 원림16) 역시 탁월한 땅 읽기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종가를 떠나 처음 찾아 들어가 원림생활을 시작했던 수정동은 좁은 산지 계곡부에 커다란 노두암과 계류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반면 금쇄동은 움푹 들어간 형국의 산정상부 터로서 “삼광(三光)이 조림하는 승지(勝地)”이고 “십대(十臺)의 원경(遠景)과 일정(一亭)의 천석(泉石) 가운데 있는”17) 최고의 길지(吉地)이다. 두 곳 모두 바위와 물이 어울려서 절경을 이루니 정원으로 만들기에 매우 적절한 곳인 셈이다. 게다가 금쇄동은 고려 때 산성이 있던 곳이다. 산성이 있던 당시의 건물터들을 찾아내어 건물 등을 앉혔으니, 일종의 이전적지 활용인 셈이다(유가현과 성종상, 2009).
백운동 원림은 조선 중기의 선비 이담로(1627-1701)가 전남 월출산 자락에 조성하여 즐긴 별서이다. 이담로가 백운동에 별서를 마련할 즈음인 17세기 후반은 3차례의 환국(換局)18)으로 정변이 극심해서 그 와중에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던 시기였다. 백운동 원림에서 출세 대신에 은일을 꿈꾸었던 이담로의 뜻은 그가 손수 지어 붙인 현판 백운유거(白雲幽居, 흰구름에 그윽하게 머물다)라는 이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뜻을 더 선명하게 확인하게 해주는 것은 원림 터이다. 백운동 원림은 호남의 명산 월출산 남측 자락으로 작은 계류 변에 입지하고 있는데, 바로 남측에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터를 둘러싸고 있다(최정미 등, 2017). 이 터를 발견하기 전 이담로가 살던 곳은 대략 6km 정도 떨어진 성전면 금당리라는 곳이다. 금당리로부터 월출산을 찾아오르는 도중에 있는 터로서, 커다란 바위벽이 가로막고 있는 뒤편의 햇볕이 잘 드는 평탄지이다. 양명한 터(陽明, 밝고 환한 기운이 있는 터)에, 뒤로는 아름다운 자연 월출산을 가까이 둔 데다, 앞으로는 커다란 창하벽(蒼霞壁, 푸른 노을이 비치는 벽)이 은병(隱屛)처럼 속된 인간세상을 적절히 가려주니 최고의 길지인 것이다. 게다가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는 온갖 분진(粉塵)을 씻겨내 주고, 우렁찬 폭포 홍옥폭(紅玉瀑, 붉은빛이 어린 옥 같은 폭포)이 내는 소리는 시끄러운 세상 소음을 상쇄하며 백운동 원림 특유의 정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곳은 이담로가 조용히 세상을 잊고 살아가기에는 최적지인 셈이다. 실제로 이담로는 그곳을 “살아서는 집을 짓기에 마땅하고 죽어서는 넋을 묻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했다. 그의 묘가 백운동 원림 맨 위측 본채 뒤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나, 그가 ‘평천장(平泉莊) 고사(古事)’19)를 들면서 대대로 보전할 것을 후손들에게 당부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각별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후대에 그곳을 방문했던 김창집이 회고하며 쓴 시 「술회」에서 백운동의 거처가 “티끌없이 빛난다”20)라고 칭송했던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명명(命名)과 제영(題詠): 자연 경물의 의미화
산수간의 자연을 활용한 원림에는 당연히 기존 자연요소나 경물들이 중요한 구성요소로 편입된다. 그 편입 방식은 대략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에 있던 바위나 계류 등의 자연 경물에다 이름을 붙이는 방식, 곧 명명(命名)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경물을 활용하면서 최소한의 변형을 추가하여 정원요소화시키는 적극적인 조성 방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 자연을 손대지 않고 이름만 붙이거나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해 정원요소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명명은 조선 사대부 원림에서 구사된 매우 독특한 정원 조성기법이다. 기존 자연 경물에 특별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정원의 주요 요소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현장에 분포하고 있는 바위나 물, 봉우리 등 자연 경물 중에서 교감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내고서 각각의 특징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워도 그것만으로는 좋은 정원이 되기는 어렵다. 기본요건은 되겠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이다. 조선 사대부들이 즐긴 이름난 정자나 구곡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지점은 자연 경치에 더해진 의미와 상징체계이다. 명명제영(命名題詠), 곧 ‘이름 짓고 시로 노래하기’는 조선 사대부 정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핵심 키워드이다. 있는 자연에서 마음에 맞는 곳을 찾아내어 상징적인 이름을 부여하고서 작은 정자나 연못 정도만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정원이 완성된다.
일종의 자연물의 사유화(personalization of natural things) 행위21)라고도 할 수 있는 명명은 실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창의적인 예술적 과정을 거친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몇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오랜 기간 빈번하게 오가며 봐 둔 주변 경물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골라내는 일이다. 그 대상은 대체로 바위나 물, 지형 등으로서 그것의 형상이나 특징이 독특하여 특별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거나 뭔가 의미를 부여하기에 적절한 경물들이 된다. 수많은 자연물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특정의 대상을 고르는 일에는 매우 섬세한 관찰과 읽기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특별함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깊이 교감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려면 진득하게 보이지 않는 그 무엇까지 읽어 낼 필요가 있다. 때로 그것은 과학적, 공학적 탐색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심미적, 감성적 교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 대상에 대해 면밀히 살펴 특질을 파악한다. 대상 파악을 위한 단서는 그것의 모양이나 색깔, 크기, 깊이 등 물리적 속성은 물론 공간 및 지리적 위치나 주변과의 관계22) 등까지 다양하고도 포괄적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곧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 치밀히 살펴 앎에 이르는23) 작업은 그 과정에 중요한 태도이자 방편이 된다. 즉, 빈번한 유를 통해 대상에 가까이 가서 자주, 그리고 상세히 살핌으로써 그것의 속성을 치밀하게 파악해 내면서 친숙해지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로 명명제영은 그렇게 파악한 자연 경물에 적합한 이름이나 시를 짓고 즐긴다. 제영이나 명명 둘 다 예술적 상징과 시적 은유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창조 행위로 간주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고사, 지향하는 가치나 이념 등은 물론 개인적 감성이나 시적 영감 등이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동원된다. 그렇게 하여 명명은 사대부 원림의 언어경관(language landscape) 혹은 의미경관(meaning landscape)24)을 형성시켜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대부 원림을 시경(詩境)으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선 사대부들의 이름짓기는 대체로 몇 가지 방식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첫째, 경물 그 자체의 특성에서 기인하거나25) 둘째, 그 경물의 위치나 처한 상황, 혹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등으로 비롯하거나26) 셋째, 선현들의 말씀이나 고사 등에 유비(類比)하여 취하거나 따오는27) 식이다.
그렇게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경물들은 사대부들에게 선택되고 이름을 부여받게 됨으로써 특별한 존재로 새로 탄생하게 된다. 물적인 조성행위 대신에 추상적, 상징화의 기제를 통해, 있던 자연대상을 각별한 정원요소로 전환시킨 셈이다. 사물에 대한 특별한 권한 행위로서 강력한 의미를 갖는 이름짓기28)는 사대부 원림에서 매우 중요한 차원을 갖는다. 그것은 있는 자연을 손대지 않고서 자신의 정원요소화하는 작정의 기법이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의미 가득한 자연 경물을 마음으로 한껏 교감하며 즐기는 감상의 방식이기도 하다.
명명이 잘 구사된 사대부 원림 현장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따지고 보면 명명이 들어가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대부 원림에는 명명이 널리 구사되었다. 구곡에서도 9개의 경물 혹은 장소 중에서 인위로 만든 것은 많아야 두어 개 정도에 그칠 뿐 나머지는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자연 경물에 이름만 부여한 것이 많다(노재현 등, 2018).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29)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건축행위를 했던 퇴계의 마지막 작품이다. 전 생애에 걸쳐 여러 번 이사를 다녔던 퇴계는 이사 가는 곳마다 자연과 정원을 중시했다. 도산서당은 사실상 주위 풍광과 정원이 중시된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서당은 뒤로 둘러싸인 산과 바로 앞 낙동강을 한껏 아우르는 전체 풍경구도가 중시된 곳이다. 그것은 자연과 정원을 중시했던 퇴계가 의도적으로 구축한 풍경구도이기도 하다. 그런 구도를 실현해 내기 위해 퇴계가 구사한 대표적 기법이 명명이다. 즉, 그는 주변의 주요 자연 경물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도산서당 전체 공간구도 속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주변 산과 강을 포괄하는 장대한 경관구도를 완성시켰다. 즉, 좌우를 크게 감싸는 산을 동취병(東翠屛, 청량산), 서취병(西翠屛, 영취산)으로, 앞쪽 낙동강변의 좌우 높은 언덕은 각각 천연대(天淵臺)와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 이름 지음으로써 전후좌우 전체 경관구도를 설정하여 터가 그 속에 안긴 아늑한 곳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서당 바로 앞 정사각형의 연못은 정우당(淨友塘)으로, 개울 건너 산기슭에 작은 단을 지어 매화, 대(竹),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고 했다. 그 아래 바위틈 작은 샘은 몽천(蒙泉), 우물은 열정(冽井), 그리고 서당으로 출입하는 사립문을 유정문(幽貞門)이라 했다. 낙동강에서 서당을 오르는 길목의 산문(山門) 모양의 바위는 곡구암(谷口巖), 천연대 아래 금빛 모래와 옥 같은 자갈이 비치는 맑고 환한 물을 탁영담(濯纓潭), 그 속 안장 모양의 바위는 반타석(盤陀石)으로 이름 지었다. 도산서당 가까이에는 연못(정우당), 화단(절우사), 샘(몽천)과 우물(열정), 그리고 사립문(유정문) 등이,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천연대, 천광운영대, 곡구암, 탁영담, 반타석, 동취병, 서취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서당 가까이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요소가, 그 밖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물들로 구성된 구조인 것이다. 퇴계가 명명이라는 비교적 쉬운 방식에 의해 서당과 그 주변 자연 전체를 자신의 성리학적 인식체계에 맞춰 공간적으로 재구축한 현장인 셈이다30).
한편 한국의 대표적인 민가정원으로 손꼽히는 서석지는 사실 특별한 볼거리나 즐길거리가 딱히 있는 게 아니다. 벼슬 대신에 향촌생활을 택한 정영방이 영양의 자양산 아래 연당마을에 살 집을 마련하고 만든 정원이다. 서석지라는 이름은 그가 만든 정원 안의 연못의 이름이다. 못을 파는 과정에 드러난 돌들을 그대로 살려내고서 돌 하나하나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였다31). 대체로 그 명명은 신선이 노니는 돌(선유석), 선계로 건너가는 다리 돌(통진교), 옥으로 만든 듯한 자(尺) 돌(옥계척), 나비가 노는 돌(호접암),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듯 세월 보내는 돌(난가대), 신선이 바둑 두는 돌(기평석) 등 초월적 세계를 표상하는가 하면,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갓끈을 씻는 돌(탁영석), 내면을 숭상하는 돌(상경석), 하나의 근본(분수석) 등과 같이 유학적 가치를 담은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얼핏 상서로운 구름(상운석), 물고기 모양 돌(어상석), 꽃술처럼 이쁜 돌(화예석), 웅크려있는 용 같은 돌(와룡암) 등과 같이 모양에 따라 이름을 부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들은 각각 임금의 품격(어상석),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상운석), 혼탁한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아쉬움(와룡암) 등처럼 중의적 뜻이 담겨 있다.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 극기재(克己齋), 서하헌(棲霞軒) 등의 건물 이름이나 사우단(四友壇), 영귀제(咏歸堤), 의공대(倚笻臺) 등과 같은 터의 이름에도 그가 추구했던 신념이나 가치 등이 담겨 있다(정중수, 2021).
이상의 서석지 내원은 집승정(集勝亭), 입석(立石), 대박산(大朴山), 자양산(紫陽山), 나월엄(蘿月崦), 구포(龜浦), 유종정(遺種亭), 임천(臨川), 문암(文巖), 마천벽(磨天壁) 등 주변의 경물들로 명명된 외원과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완성된다. 말하자면 서석지는 일견 작은 연못으로만 만들어진 좁은 정원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변 자연물까지 한껏 싸안은 원림으로서, 유교와 도교 등 자신의 신념으로 표상된 거대한 의미 체계인 셈이다(그림 7, 8 참조). 그는 「경정잡영 32절」과 「임천잡제 16절」에서 그 각각의 뜻과 소회를 시로 풀어 놓았다.
5. 인지제의(因地制宜): 땅의 조건에 맞추어 만들기
인지제의(因地制宜)란 땅(地)에서 원인이나 근거(因)를 찾아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한다(制宜)는 뜻이다. 쉽게 말하자면 땅의 조건에 맞추어 최소한으로 만진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된 명명과 인지제의는 있는 자연을 최대한 살려냄으로써 정원조차 자연에 가깝고 친근하게 만들어 즐기고자 했던 한국인의 자연친화적 태도가 잘 투영된 정원 조성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조선 사대부들은 인위는 최소로 하면서 있는 자연을 한껏 살려놓고서 그 속에서의 체험을 시로 짓고 노래하며 즐겨 온 것으로 확인된다.
‘땅이 지닌 조건에 적절하게 맞도록 조성’하는 인지제의는 조선 사대부 원림 조성에 일관되게 적용된 기본 원칙과도 같다. 그 원칙은 땅을 읽고 고르는 첫 단계인 상지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자연이 아름다운 곳을 골라 정원으로 삼았으니 굳이 인공적인 시설이나 개발행위를 과하게 추가할 필요가 적은 것이다. 자연 경물을 잘 골라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원으로서 기본은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경사나 구릉이 많은 산지형의 지형이니 과도한 형질변경은 용이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현존하는 조선 사대부 원림들을 보면 거처할 집과 한두 채의 정자 외에는 별도로 건물이 많지 않다. 그나마 규모가 큰 주건물이 6칸32)을 잘 넘지 않았고, 정자는 대체로 1칸이 많고 기껏해야 4칸일 정도로 규모도 매우 작았다. 건물 크기가 작으니 경사지 중간 틈새 평탄한 곳에다 살포시 끼워 넣듯이 앉히기도 용이하다.
조선 사대부들이 즐겼던 원림에서 인지제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정자일 것이다. 인지제의 관점에서 정자는 주목할 만한 몇 가지 특질을 갖는다. 첫째는 그것의 위치이다. 정자는 기본적으로 경관을 즐기기 위한 장치이다. 정자가 입지하고 있는 곳을 보면 대체로 산이나 언덕, 바위, 물 등이 빼어난 경치를 이룬 곳들이 많다. 경치가 좋은 곳에 작은 정자만 추가함으로써 기존 자연이 훼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가 더욱 더 살아난다. 둘째는 정자의 크기이다. 대체로 크기가 작은 정자는 짓기도 쉽다. 굳이 넓고 평평한 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커다란 바위 위나 계류변 언덕에다 가볍게 올려두듯 짓기도 한다. 셋째는 정자의 구조, 특히 기초와 다리의 구조이다. 정자는 각 기초와 기둥을 지형 높낮이에 맞춤으로써 어렵지 않게 정자를 앉힐 수가 있다. 한국의 정자 중에는 울퉁불퉁한 땅 위는 물론 바위나 절벽 위에도 사뿐히 놓인 것들이 적지 않다(그림 9 참조). 경관 구도상 가장 바람직한 곳을 택하되 작은 크기로 그곳의 조건에 그대로 살려 맞춘, 인지제의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말하자면 정자는 인지제의를 적용하기에 안성맞춤인 건물유형인 셈이다. 그렇게 조선 선비들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다 작은 정자만 만들어 놓고서 자신의 주거처에서 수시로 오가며 즐겼다. 자연을 접하는 무대이자 거점인 그곳에서 그들은 혼자 혹은 지인과 함께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을 시와 노래 등으로 즐기곤 했다.
사대부 원림에서 건물을 제외한 인위적인 시설로는 단이나 대, 석축, 담장 등이나 마당과 길, 그리고 연못 정도가 모두라고 할 정도로 절제된다. 그중에서 마당과 연못은 건물과 대응되도록 조성되어 직선 위주의 사각형이 많지만 그 크기는 대체로 자그마하다. 작은 건물과의 조화를 유지하면서 산지로서 지형상의 한계에도 적절히 맞춘 탓이다. 산지 내 지형 처리요소인 단, 대, 석축, 담장 등은 사대부 원림의 특질 부여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이다. 기존 지형에 맞추느라 높낮이도 일정하지 않고 꾸불꾸불한 것이 많다. 담장도 그런 지형 요소와 어우러지다가 스멀스멀 산 지형 속으로 만나 소멸된다. 결국 산지 자연 경물이 빼어난 곳에 만든 사대부 원림은 있는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여 정원요소화하면서 인공시설은 최소화함으로써 기존 자연과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구사하였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인지제의의 주요 현장 중 하나로 담양 소쇄원을 들 수 있다. 양산보가 자신이 살던 집 상류 계곡부에 마련한 소쇄원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계류와 바위를 고스란히 정원의 주요소로 받아들인 정원이다. 입구 죽림에서부터 최상부 제월당까지는 약 10m 이상 높이차가 있다. 산기슭으로서 높이차가 있는 땅이지만 지형을 그대로 살려 단을 지어 건물을 앉혔다. 가장 낮은 계곡부에 손님용 정자 광풍각을 앉혀 계곡물과 폭포수 소리를 밤낮으로 들을 수 있게 했다. 반대로 가장 높은 곳에는 주인의 거처 제월당을 놓아 전체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관리할 수 있게 했다. 그럼으로써 소쇄원은 대략 3단계의 지형차를 갖는다. 이곳은 땅의 높낮이는 물론 계류와 바위까지도 있는 그대로를 살려낸 대표적인 인지제의의 현장이다(그림 10 참조).
다음으로 완도군 보길도에 위치한 부용동 동천석실도 중요한 예이다. 부용동에서 동천석실은 높다란 절벽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중력의 한계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감히 오르기 어려운 입지에다 작은 정자를 두고서 선계를 뜻하는 이름 동천석실을 부여함으로써 그곳이 신선들만의 영역임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 아래 바위틈을 살려 물을 모아서 석정, 석천, 석담 등으로 이름 짓고 즐겼다. 산 아래에서 그 곳으로 오르는 도중에 있던 바위를 활용하여 석문으로 설정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선계로의 점진적인 진입 과정을 강조했다. 이름짓기 외에 그가 한 조성행위라고는 암벽의 틈을 정리하여 오르는 계단으로 만든 것, 바위 틈새에 물을 모으기 위해 막은 것, 그리고 절벽 중턱을 다듬어 정자를 앉힐 자리를 확보한 정도이다.
고산이 해남의 산봉우리에 만든 금쇄동의 휘수정터도 부용동 동천석실과 유사한 해석이 가능한 사례이다. 높다란 2중 절벽 중간 지점 작은 턱을 이룬 곳에 부분적으로 석축을 쌓아 작은 단을 만들고 정자를 지은 것이다. 2중 절벽으로 어지간해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를 수 없는 곳에다 최소한의 인위만 가해 터를 잡고 작은 정자 휘수정을 앉힘으로써 휘수(揮手), 곧 ‘인간 세상에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면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신선의 경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6. 원림의 점진적 조성과 완성
대체로 명명과 정자 조성까지는 그다지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인 정원으로까지 진전시켜 나가는 것은 별도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개 본격적인 별서까지 필요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정자를 건립하는 정도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자는 일정 기간 이상 머물거나 생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건축물이다. 그러므로 그곳을 상시적으로, 그리고 생활까지 하면서 즐기기 위해서는 거처까지 포함된 별서 형태가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현대의 주말주택에 비견되는 별서에는 정원이 중요한 구비요소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별서라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살림집으로서의 기능 보다는 휴양과 유식을 위한 효용이 더 중시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원래부터 있던 자연 경물이나 경치를 적극 활용하여 정원으로 조성하는 일은 그와 같은 용도에 매우 적절하면서도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 사대부 별서들을 보면 거처할 집과 두어 채의 정자 외에는 달리 건물이 많지 않다. 계류를 끌어오거나 막아서 연못을 만들고서 물을 흘려 폭포를 연출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지형상 낮은 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거나 물고기를 기르며 즐겼다. 지형 경사가 있는 곳에는 석축과 단으로 땅을 골라 화계나 화단을 조성하고 여러 종류의 꽃이나 과일나무를 심었다. 건축보다는 조경을 중시했다는 평가가 가능한 지점이다33). 커다란 규모를 과시하려 하거나 화려함을 자랑하려 하기보다는 있는 자연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소박함과 간결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대신에 주위 자연 경치와 제대로 어우러지면서 한껏 열린 자연친화적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고자 했다. 조선 사대부 정원은 그렇게 인공적인 건축행위는 최소로 하면서 정신적, 예술적인 노닒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한껏 취했던 곳이다.
그나마 별서원림은 대체로 한 번에 완성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증축하면서 완성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한 경우가 많다(그림 11 참조). 현존하는 조선 사대부 정원의 대표격인 소쇄원이나 보길도 부용동이 적합한 사례이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아버지 창암공이 만들어 즐겼던 초정을 활용하여 자신의 정원으로 확장시켰고, 이후 아들 양자징과 손자 양천운 대에까지 걸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보면 소쇄원은 거의 4대에 걸쳐서 만들어진 셈이다.
그와는 달리 부용동은 고산 윤선도가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나간 정원이다. 나이 51세 때 보길도에 처음 들어간 직후 그는 작은 초막을 짓고 살다가 이후 잡목으로 세 칸짜리 낙서재를 지었다. 그 남측에 사방으로 퇴를 댄 한 칸짜리 외침(外寢, 바깥 침소) 무민당(無憫堂, 근심이 없는 집)을 지어 주거처로 삼고서 섬돌 밑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즐겼다. 곧이어 그곳에서 마주 보이는 안산 중턱에 동천석실을 지어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부용동 제1경이라 자랑하며 즐겼다. 그 외에 세연정은 보길도에 들어와 산 지 16년 되던 해에 그의 나이 67세 때에 조성하였고, 곡수당은 82세 되던 해에 고산의 아들이 주도하여 만든 곳이다. 그렇게 보면 부용동은 고산이 약 30년에 걸쳐 낙서재-동천석실-세연정-곡수당 순으로 지어나가 완성한 정원인 셈이다.
고산이 53세 때 종가와 제사를 큰아들에게 맡기고 산중생활을 시작했던 해남의 수정동 원림도 유사한 해석이 가능하다. 고산은 처음 수정동에 들어가 작은 정자 인소정을 짓고 계류를 모으는 두 개의 연못까지는 조성했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살림집 등을 추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상시 및 장기 거주가 힘들어지게 되자 고산은 곧 수정동보다 넓고 시설이 더 잘 갖추어진 문소동과 금쇄동으로 확장시켜 본격적인 원림생활에 들어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퇴계가 만든 도산서당도 터를 고르고(상지) 나서 낙동강변의 쉼과 조망을 위한 대(창랑대, 나중에 천연대로 고쳐 부름)부터 만들었다가 서당 건물은 3년째 되는 해에 지었다. 마음에 드는 터를 찾아내고서 최소한의 인위로 작은 대만 만들어 놓고서 자주 찾아가 즐기면서 그 땅을 충분히 읽어 낸 후에야 본격적인 건축행위를 한 셈이다.
강진 백운동 원림 역시 점진적으로 조성된 사례로 해석된다. 이담로가 별서형 정원으로 백운동 원림을 건립한 이후, 둘째 손자인 이언길(1684–1767)이 2대 주인으로서 별서를 이어받았다. 이후 전국적인 기근이 들자 1756년부터 이언길의 직계가족이 백운동 원림을 상시 생활주거 공간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하혜경과 소현수, 2017). 여기서 담장 또한 초기에는 외부와 내부를 구획하기보다는 경관의 일부를 가리는 목적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고려되며, 이후 별장형 별서가 생활형 주거 공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경계로서의 담장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정민, 2015). 결국 백운동 원림은 이담로가 월출산 아래에 경관을 즐길 만한 터를 잡고 작게 지어 개인 공간으로 이용하다가, 나중에 가족들을 불러들여 살림집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용동과 백운동 원림은 처음에는 별서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어느 사이에 주거처가 되어 버린 사례이다(표 1 참조).
7. 결론
본 연구는 조선 사대부 원림의 작정이 유, 상지, 명명제영, 인지제의와 점진적 완성의 상호연동 과정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유는 자연을 찾아가 몸으로 체득하는 답사이면서 조성 이후의 향유 방식이었고, 상지는 지형, 수계, 방위, 조망 및 사회적 관계를 함께 읽는 장소 선택이었다. 명명과 제영은 자연 경물을 물리적으로 변형하지 않고도 정원 요소로 편입시키는 문화적 장치였다. 인지제의는 기존 지형과 수계를 유지하면서 정자, 연못, 단, 대와 길 등 필요한 시설만을 더하는 자연에 순응한 조영 원리로 해석된다. 사대부 원림은 한 번의 설계와 공사로 완결되지 않았다. 작은 정자나 대에서 시작해 거처와 정원시설이 추가되고, 이용과 교유, 시문과 후손의 관리가 축적되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들 원림은 조성 당시의 물리적 결과만이 아니라 조성 이후의 이용과 해석까지 포함하는 지속적인 장소 형성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자면 사대부 원림은 면밀한 땅 읽기를 통해 적지를 찾고 교감할만한 자연 요소나 경물을 찾아내는 발견의 정원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다만, 본 연구에서 제시한 모형은 모든 조선 사대부의 원림이 동일한 과정과 방식을 따랐다는 의미는 아니며, 여러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읽어 낼 수 있는 작정의 기본 개념 모형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