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최근 대부분 조경 설계 과정에서 드로잉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산된다. 각종 공모전에 제출되는 이미지는 오토 캐드 (AutoCAD), 일러스트레이터 (Adobe Illustrator), 포토샵 (Adobe Photoshop) 등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지고, 교과 과정에서도 소프트웨어 교육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한편, 근래 국내․외 조경 학계에서 디지털 드로잉의 경향과 한계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디지털 조경 드로잉이 회화와 유사한 사실적 묘사에 기반한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러한 경향에 내재된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Kingery-Page and Hahn, 2012; Belanger and Urton, 2014; Kullmann, 2014; M'Closkey, 2014; Lee and Pae, 2018).
그런데, 조경 드로잉의 역사에서 컴퓨터 이용은 20세기 중후반에 시작된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다시 말해, 손으로 그려지던 드로잉이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매체가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매체의 이행 과정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을까. 또한, 최근 조경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디지털 드로잉의 사실적 묘사 경향에 대한 비판의 쟁점이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만일 문제가 된다면 그에 대한 대안적 방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연구는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드로잉의 전반적 역사를 검토하여 컴퓨터가 조경 드로잉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 왔는지를 살펴보고, 최근 디지털 드로잉에 나타나는 사실적 묘사 경향에 관한 쟁점을 진단한 후 대안적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드로잉과 관련한 논의는 국내․외에서 두루 발견된다. 먼저, 컴퓨터 드로잉을 손 드로잉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논의는 컴퓨터와 손을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매체로 간주하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도 컴퓨터 드로잉은 손 드로잉에 비해 설계 과정에 창조적으로 활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우세했었고, 최근 들어 컴퓨터 드로잉이 설계에서 창조적 매체로 활용되어야 할 당위와 가능성이 점차 주목받고 있다1). 둘째, 앞서 언급했듯이 근래에 조경 이론가와 설계가는 최근 디지털 드로잉에 짙게 드리워진 사실적 묘사 경향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2). 이러한 논의는 조경 설계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설계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창조적인 매체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적 묘사 도구로 사용되는 경향의 문제점을 논의한다. 셋째, 컴퓨터 드로잉의 역사와 관련하여, 아직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이용의 구체적 역사를 심층적으로 다룬 연구는 발견하기 힘들다3).
이 연구는 선행 연구와 유사하게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드로잉의 활용의 역사와 현재를 다룬다. 다만, 이 연구는 그러한 컴퓨터 드로잉의 역사를 현재의 디지털 조경 드로잉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설계 과정에 어떻게 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검토한다. 또한, 이 연구는 손에서 컴퓨터로 매체가 변화할 때의 시기, 즉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활용의 초기 역사에 주목하여 구체적 양상을 살펴본다는 점에서도 선행 연구와 차별성을 지닌다.
이 연구는 우선 손과 컴퓨터 드로잉에 관한 조경계의 담론을 검토하여 그러한 담론에서의 드로잉 매체에 대한 인식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II장). 이러한 논의는 이 연구를 이끌어가는 주요 해석의 관점으로 기능한다.
이어서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드로잉의 역사적 사례를 살펴본다 (III장). 조경 설계의 교육과 실무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왔고, 현재에도 빈번히 이용되고 있는 드로잉 기법의 매체가 손에서 컴퓨터로 전환되는 이행기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4). 구체적으로 경관 정보의 과학적 시각화 기법인 레이어 케이크가 손에서 GIS 소프트웨어로 변화하는 1970–80년대, 지형을 스터디하는 물리적 모형 제작 과정에 이용된 CAD 소프트웨어의 초기 활용 양상이 나타나는 1980–90년대, 손으로 만들어지던 콜라주와 몽타주가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교체되던 2000년대 초반 시기를 검토하여, 그러한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조경 설계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정리했다.
다음으로 2000년대 이후의 디지털 드로잉의 제작 특성과 쟁점을 진단하여 대안적 방향을 모색한다 (IV장). 근래에 각종 공모전이 증가하면서 조경 설계에서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프리젠테이션 드로잉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고, 여기서 현실에 존재하는 경관처럼 보이도록 하는 사실적 묘사 경향이 우세해지고 있다. 이러한 드로잉 방법의 특성, 이점과 한계를 논의하고,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대안적 활용 방안을 모색한다.
II. 손과 컴퓨터: 드로잉 매체에 관한 담론
조경 설계에 컴퓨터가 이용된 이후, 조경계에서는 손과 컴퓨터라는 드로잉 매체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대개 이러한 논의에서는 손과 컴퓨터 어느 한 매체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먼저, 손이 컴퓨터에 비해 뛰어난 드로잉 매체라는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손 드로잉이 경관에 대한 설계가의 감수성을 잘 구현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조경 이론가 마크 트라이브 (Marc Treib) 는 “기계 매체[컴퓨터]가 인간을 장소와 거리 두게 하는 반면, [손] 드로잉은 특정 장소에 시간, 집중력, 이목을 집중하게 한다 (Treib, 2008a: x) ”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조경가 로리 올린 (Laurie Olin) 은 “키보드나 마우스로 공간의 감수성, 즉 공간의 형식, 재료, 구조, 중량감을 발전시킬 수 [그려낼 수] 없고 (Olin, 2008: 97) ” 대신 손 드로잉이 그러한 공간의 감수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컴퓨터 드로잉이 설계 아이디어를 생성하거나 발전시키는데 활용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트라이브는 “포토샵과 같은 소프트웨어의 등장으로 [...] 컴퓨터 이미지가 손쉽게 대량으로 생산되고, [...] 여기서 설계 아이디어, 질, 예상 경험, 수용자의 능력까지 손실”된다고 우려한다 (Treib, 2008b: xix). 셋째, 손 드로잉을 할 때에는 인간의 뇌와 손이 직접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올린은 “뇌는 손에 곧바로 반응하여, [공간의] 구성, 균형감, 움직임, 예기치 않은 감정이 생성되어 다음 선을 어디에 그려야 할지 떠오른다 (Olin, 2008: 85) ”고 말한다. 조경계에서 컴퓨터 드로잉이 설계가의 창의적 감수성을 구현하는 데 부적합하다는 인식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우세했다5). 2000년 실시된 미국조경가협회 (ASLA) 회원 대상 설문 조사에 따르면, 컴퓨터는 조경 설계 과정에서 효율적으로 사용되지만,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우세했다 (Tai, 2003: 121).
한편, 컴퓨터 드로잉의 장점도 분명 있다. 컴퓨터는 빠르고 정확하고 수정이 용이하며, 쉽게 복제가 가능했는데, 조경가는 이러한 기계의 효율성을 컴퓨터 드로잉의 장점으로 인식했다. 컴퓨터가 조경 계획과 설계에 이용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일부 조경가는 컴퓨터 드로잉 절차가 손 드로잉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5년 저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Landscape Architecture) 에서 아서 쿨락 (Arthur Kulak) 은 “모든 캐드 드로잉은 근본적으로 손으로 그려지는데, 복잡한 심볼을 그리고, 복사, 편집, 스케일, 비율을 변경하는 작업”이라고 하면서 손 드로잉과의 유사성을 주장했다 (Kulak, 1985: 144). 유사하게 브루스 사키 (Bruce Sarky) 는 “컴퓨터가 창조성을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 기능을 성취할 수 있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역설했다 (Sarky, 1988: 74).
컴퓨터 드로잉의 창조적 활용 가능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점차 우세해지고 있다. 최근 조경가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전통적 손 드로잉의 경직성을 벗어나 경관의 자유롭고 모호한 특성을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Waldheim and Hansen, eds., 2014; Amoroso, ed., 2015). 로베르토 로비라 (Roberto Rovira) 는 “전통적 방식의 평면도는 경관의 역동적 프로세스를 묘사하기 힘들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반복, 스케일 조정, 레이어링, 필터 적용, 복사 등을 이용하면 대상지에 대해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드로잉을 제작할 수 있다 (Rovira, 2015: 99) ”고 한다.
위의 드로잉 매체에 관한 논의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조경 드로잉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테크놀로지, 즉 매체의 특성이라기보다 그러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만들어내는 특정 드로잉 방식, 즉 테크닉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손과 컴퓨터라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어떤 형식의 드로잉을 그려내느냐에 따라 각각의 매체는 설계가의 창조적 수단으로 혹은 단순한 도구적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조경가 캐런 맥클로스키 (Karen M'Closkey) 의 통찰처럼 “디지털 묘사가 드로잉의 질적인 측면의 손실을 가져온다는 주장은 ‘테크놀로지, 즉 연필과 컴퓨터’와 ‘테크닉, 즉 드로잉 타입과 이미지 만들기’ 양자를 혼동하는 것이다. 만일 디지털 매체가 [손에 비해] 부족하다면 그러한 매체가 내재적 역량을 탐구한다기보다 손 드로잉의 테크닉을 흉내내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M'Closkey, 2014: 125-126).”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2000년 ASLA 회원 대상의 설문 조사 결과에서, 컴퓨터가 창조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때 그 사례는 캐드 (CAD) 소프트웨어였다. 즉, 캐드가 이차원의 투사 드로잉을 그리기 위한 효율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경관의 역동성, 복잡성, 미묘한 차이를 그려내는데 활용한다면 이때의 테크놀로지는 설계에서 창의적으로 활용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올린의 주장처럼 손 드로잉은 설계가의 감수성을 발전시키는 창조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손을 이용해 평면과 단면, 입면 등 공사를 위한 투사 도면을 만든다면 이때 손은 창의적 도구라기보다 도구적 드로잉 생산 매체로 이용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드로잉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어떠한 테크닉을 펼치느냐에 따라 설계 과정에 도구적으로도 상상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6). 이러한 점에서 손에서 컴퓨터로 드로잉 매체가 변화하였을 때 컴퓨터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즉 손을 모방하는 도구적 수단으로 이용했는지 혹은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잠재성을 활용하는 창의적 매체로 기능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III. 손에서 컴퓨터로: 드로잉 매체의 이행
현대 조경 설계의 교육과 실무에서 자주 이용되는 시각화 방식 중의 하나는 광역 계획의 대상지 조사에서 많은 경관 정보를 목록화하는 것으로, 주로 GIS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이루어진다. 경관 요소를 데이터화하고, 중첩시켜 적지를 찾는 일명 ‘레이어 케이크 (layer-cake) ’ 기법은 20세기 중후반 이안 맥하그 (Ian McHarg) 가 생태 계획에서 널리 사용된 방식이다7).
맥하그의 레이어 케이크를 이용한 적합성 분석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McHarg et al., 1998: 242-263). 첫째는 대상지의 여러 요소를 맵핑하여 목록화하는 것이다. 생태적 요소, 예를 들어, 지형 (physiography), 지질 (geology), 토양 (soils), 수문 (hydrology), 식생 (vegetation), 야생 동물 (wildlife), 기후 (climate), 광물 (resources) 등 생태적 요소 이외에 사회적, 법적, 경제적 요소도 포함하면서 다학제적인 특성을 지닌다. 둘째, 경관 요소의 가치를 고려하여 특정 토지 이용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연산의 과정이다. 각각의 경관 요소는 특정 토지 이용에 대한 기회요소와 제한 요소로 평가되어 적합한 토지 이용을 도출한다8). 셋째, 최종적으로 하나의 “적합성 지도 (suitability map) ”를 만드는 시각화 과정이다. 시각화 과정은 앞의 두 과정에도 이용되는 만큼 맥하그 적합성 분석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적합성 지도에 따라 토지 이용이 결정된다9).
맥하그의 레이어 케이크 분석은 시각화에 공들였다고 평가된다 (Figure 1 참조). 다양한 생태 요소와 기회, 제한 요소를 맵핑할 때 서로 다른 색, 명암, 패턴으로 채색하여 육안으로 식별되도록 만들어야 했고, 가중치가 포함될 경우 더 많은 수의 색이 필요했다. 따라서 맥하그는 레이어 케이크에 이용할 매직 마커의 종류와 색이 다양하길 바랬다 (McHarg, 1995). 이러한 점에서, 맥하그의 디자인 위드 네이처 (Design with Nature) 의 맵 오버레이 방식은 “가장 그래픽적으로 공들인 오버레이 분석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 (Steinitz et al., 1976: 448).
맥하그의 레이어 케이크는 1960년대 중후반 초기 컴퓨터 지리정보시스템 (GIS) 에 영향을 주었다 (Yaro, 1998: xi). 이러한 점에서, 조경 계획과 설계에서 드로잉의 매체가 손에서 컴퓨터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10).
맥하그는 손을 이용해 레이어 케이크를 처리하던 당시부터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69년 디자인 위드 네이처에서, 레이어 케이크의 “분석 요소들의 동등함”과 “사진의 해상도” 등의 문제를 컴퓨터가 해결해주길 기대했다 (McHarg, 1969: 115).
맥하그가 컴퓨터를 이용해 생태 계획을 수행한 시기는 197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러나 당시 맥하그는 컴퓨터를 신뢰하지 않았다. 초기 컴퓨터의 정확성과 그래픽 질 모두가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McHarg, 1995; 1996: 285).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자 1984–85년 사이 맥하그는 지리학자 존 라드케 (John Radke) 와 함께 펜실베이나대학교 디자인 학교 (School of Design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재도입했고 (McHarg, 1996: 367; Weller and Tlarowski eds., 2014: 119), 이후 레이어 케이크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처리되었다.
맥하그는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손으로 처리하던 레이어 케이크의 절차 즉 목록화, 연산, 시각화 과정을 모방하는 도구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먼저, 경관 요소의 인벤토리는 컴퓨터를 통해 훨씬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정확하게 디지타이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경관 요소 사이의 관계를 평가하는 연산 절차는 컴퓨터의 쿼리 (query) 기능으로 개선되었다. 매직 마커를 이용한 색칠은 이제 총천연색의 좋은 품질로 출력되고, 3차원으로 렌더링할 수 있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맥하그에게 컴퓨터는 손으로 처리하던 유사한 절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도구성의 기술로 기능했다.
모형은 조경 설계 과정에서 지형을 스터디하거나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효과적으로 이용된다. 최근에는 모형뿐 아니라, 캐드, 스케치업 (SketchUp), 라이노 (Rhino) 등의 소프트웨어에서 제공하는 3D 모델링을 이용해 지형 스터디가 이루어진다. 캐서린 구스타프슨 (Kathryn Gustafson) 과 조지 하그리브스 (George Hargreaves) 의 초기 작업에서 모형 만들기와 관련한 컴퓨터의 초기 이용 양상이 관찰된다. 두 조경가는 유려한 지형의 형태를 스터디하기 위해 물리적 모형을 만들어 왔고, 그러한 모형을 실재화하는 과정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했다.
우선, 두 조경가는 가시적이고 인공적인 지형을 만들어낸다. 구스타프슨의 설계 작업의 특성은 “대지를 조각하는 것”이나 “땅을 모양내는 것 (Levy, 1998: 11; Betsky, 2005: 7, 10) ”이며, 하그리브스의 프로젝트에서도 인공적 랜드폼을 구축하는 대지작업 (earthwork) 이 두드러진다 (M'Closkey, 2013: 12-13).
지형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두 조경가는 랜드폼 테스트 모형을 만들어왔다. 특히, 모형은 설계 초기 스터디에 자주 활용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구프타프슨은 지형 스터디에 점토와 석고 모형을 이용하여 “부드럽고 촉각적인 형상”을 만들어냈다 (Levy, 1998: 9). 굴곡진 지형의 특성은 2차원의 투사 드로잉보다 3차원 모형으로 구현하는 것이 유리했고, 클라이언트, 회사 동료와의 의사소통에도 효율적 매체로 기능했다 (Amidon, 2005: 24, 29-30). 이와 유사하게, 하그리브스도 다양한 물리적 모형을 이용해왔다. 하그리브스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에 모래 박스 모형과 점토 모형을 활용해 지형을 스터디했다. “모래는 실제 토목공사와 거의 일치하는 자연 안식각을 보여주는 ‘정직한’ 스터디 매체 (Rieder, 2008: 169) ”였고, 점토 모형은 “반응적이고, 가소성이 뛰어나고, 유연하여 다루기 쉬워 [...] 경사 (slope) 와 교차지점 (intersection) 을 스터디”하기에 유리했다 (Rieder, 2008: 171-175).
모형 만들기 과정에서 캐드 소프트웨어의 초기 활용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11). 모래나 점토 모형이 현실 공간에 조성되기 위해서는 공사 사항을 지시하는 시공 도면이 필요했고, 캐드는 삼차원의 모형을 이차원 드로잉으로 번역하는데 이용되었다 (Figure 2 참조).
Source: Levy, L. (1998) Kathryn Gustafson: Sculpting the Land, p. 61.
구스타프슨의 점토 모형은 시공을 위해 컴퓨터 드로잉으로 번역되어야 했고, 그러한 작업을 위해 건축, 엔지니어링과의 협업을 중요시했다 (Levy, 1998: 55-56). 하그리브스의 1990년대 프로젝트에서도, 모래와 점토 모형은 시공을 위해 시공 도면으로 변환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삼차원 점토 모형을 이차원 시공 도면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실재화를 위한 중요한 단계 (Rieder, 2008: 177) ”였고, 이 과정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물리적 모형을 수치화하여 투사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캐드의 도구적 이용이 발견되는 설문 조사가 있다. 제임스 팔머 (James Palmer) 와 에이리히 버흐만 (Erich Buhmann) 은 1993년 ASLA 회원 대상 설문조사를 토대로, 조경가는 대체로 캐드를 시공 도면을 그리는데 이용하며, 그래픽이나 설계 아이디어의 발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Palmer and Buhmann, 1994: 55)12).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러한 캐드의 도구적 이용이 이어졌다. 앞서 언급했듯, 2000년 ASLA 회원 대상의 설문에서, 캐드는 설계 과정에서 창조성과 예술성을 향상시키지 않고, 시공 도면을 만드는 기계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Tai, 2003: 121). 대부분은 “[캐드의] 속도, 용이함, 힘, 호환성, 더 많고 좋은 심볼, 정확성, 계산 능력의 향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Tai, 2003: 119, 121).
물론, 캐드 소프트웨어는 경제성, 속도, 수정과 재생산 가능성이 뛰어나 표준화된 투사 도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소프트웨어이다. 또한, 시공 도면으로 변환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공학 기술이 적용되어 실현 가능한 모형으로 발전해간다. 다만, 그러한 과정 중 물리적 모형을 컴퓨터 드로잉으로 번역하는 행위는 창조적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 때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설계가 이루어지는 제도판의 역할이라기보다 물리적 모형으로 고안된 경관의 외형을 모사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투시도는 풍경화의 형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유리하여 조경 설계의 역사에 빈번하게 등장했던 드로잉 기법이다. 특히,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는 사진을 비롯한 여러 재료를 활용한 콜라주와 몽타주 테크닉이 많이 이용되었고, 이제 그러한 기법은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콜라주와 몽타주는 아르카디아적 자연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경관에 대한 인식을 반영했다. 이브 브뤼니에 (Yves Bruiner) 는 “자연을 범하거나 (rape) 자연의 속성을 벗겨내, 자연을 표현적 대상으로 바꾸는 것 (Fillion, 1996: 89-90) ”을 원했고, 아드리안 허즈 (Adriaan Gueze) 는 조경 설계가 목가적 자연의 이상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도시적 맥락을 고려한 인공 자연을 만드는 실천이라 생각했다 (Geuze, 2000: 9-10, 12). 이들은 몽타주와 콜라주를 활용해 자연의 새로운 인식과 감수성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또한, 콜라주와 몽타주는 설계 과정에서 상상적 아이디어를 발생하는 기능을 했다. 예컨대, 브뤼니에의 협업 파트너인 이사벨 오리코스테 (Isabelle Auricoste) 는 브뤼니에의 드로잉이 설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창조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Auricoste, 1996: 16-17).
제임스 코너 (James Corner) 는 콜라주와 몽타주라는 대안적 드로잉 기법을 이론과 실천에서 두루 탐구했다13). 코너는 1990년대 발표한 이론 저작에서, 드로잉이라는 시각 이미지는 경관 매체의 다감각적 특성을 온전히 그려낼 수 없기 때문에, 경관의 외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관의 다감각적 경험을 대안적으로 시각화 (re-presenting) 하는 실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Corner, 1992; 1999a; 1999c). 이를 위해, 코너는 콜라주와 몽타주, 나아가 조경에 적합한 다이어그램 형식으로 맵핑을 실험했다. 예를 들어, 1999년 다운스뷰 공원 국제설계공모 (Downsview Park International Design Competition) 에서 몽타주와 콜라주를, 2001년 프레쉬 킬스 공원 공모전 (Fresh Kills Lanfill Park Competition) 당선작에서 맵핑의 한 형식인 플랜 콜라주 (plan collage) 기법을 실험하여 (Figure 3 참조), 경관의 생태적 역동성을 시각화하고 설계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창의적 테크닉으로 활용했다 (Lee, 2017b).
Source: Jeong, W. and J. Corner (2005) Fresh Kills Park design, Staten Island, New York, p. 104.
콜라주와 몽타주라는 대안적 투시도는 대부분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진다. 어도비 (Adobe) 는 1987년 일러스트레이터를 1989년에 포토샵을 출시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 그러한 소프트웨어는 조경 설계 회사에서 빈번히 이용되었다.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콜라주와 몽타주를 만드는 절차는 디지타이즈된 사진을 잘라 조립하는 과정으로 손 드로잉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콜라주와 몽타주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 (Lev Manovich) 는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이미지 제작의 속성이 레이어 팔레트 (layer palette) 와 필터 (filter) 를 포함한 다양한 명령어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포토샵은 “개별 레이어에 포함된 시각 요소를 병치하여 (Manovich, 2013: 142-145) ” 이미지가 생성되고, 이러한 절차는 손을 이용한 콜라주와 몽타주와 기본적으로 유사한 프로세스를 지닌다. 또한, 마노비치는 이미지에 효과를 입히는 필터를 ‘이전의 미디어 효과를 모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한다 (Manovich, 2013: 139). 예컨대, 브러쉬 (Brush) 나 스케치 (Sketch) 필터는 손 드로잉이나 회화 효과를 모방하고, 노이즈 (Noise) 필터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콜라주와 몽타주는 손 드로잉의 프로세스를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고, 대신 이미지에 부여하는 효과가 다양해졌다.
그렇다면 조경 설계 과정에서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어떻게 창조적 아이디어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가. 여러 조경가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시각화 테크닉의 실험을 펼쳐왔다. 이 중 코너는 프레쉬 킬스 공원 공모전의 당선작 라이프스케이프 (Lifescape) 에서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잠재력을 활용하여 설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는 창조적 테크닉을 선보였다. 코너는 컴퓨터 테크놀로지보다 그것을 상상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드로잉 테크닉의 발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Corner, 1999a: 8; 1999b: 162; 1999c: 217, 220-221; Lee, 2017b)14). 플랜 콜라주 (plan collage) 는 평면도와 다이어그램이 혼합된 “다이어그래매틱 플랜 (diagrammatic plan) ”의 형상과 기능을 수행하는데 (Jeong and Corner, 2005: 105), 이러한 기법은 설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활용되었다. 여기서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단순한 제도 도구의 역할에서 벗어나 디자인의 혁신적인 전개 방법에 기여 (Jeong and Corner, 2005: 106) ”하는 창조적 테크놀로지로 기능하였다.
IV. 디지털 조경 드로잉의 사실적 묘사 경향의 쟁점과 대안적 방향
일부 조경가와 이론가는 조경 분야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소극적으로 이용해온 경향을 지적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설계 프로세스에서 창조적 가능성이 없이 단순한 묘사 도구로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Walliss, Hong, Rahmann and Sieweke, 2014: 72; Walliss and Rahmann, 2016: vii)15). 주목할 점은 이러한 언급에서 다루는 소프트웨어가 구조 모델링을 위한 3D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는 구조 모델링을 중요시하는 건축이나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보다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대신, 조경 설계 과정에서는 GIS나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도 중요했다. 건축사가 앙투앙 피콘 (Antoine Picon) 의 통찰처럼, 1960년대 건축에서 초기 캐드 테크놀로지의 개발에 열중하던 시기에 조경은 기초 GIS 소프트웨어의 발전과 관련이 있었다 (Picon, 2013: 124, 126)16).
1990년대 건축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구조 생성의 창의적 도구로 활용하려는 흐름이 나타났다. 당시 건축가는 복잡하고 유동적인 건축 구조, 유려한 곡선 표면을 생성하는 도구로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용했다 (Lynn ed., 1993)17). 그들은 건축 형태 만들기의 논리와 작용에서 “묘사 (representational) 를 제거”하고,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삼차원에서 복잡한 구조와 곡선의 표면을 실험했다 (Oxman and Oxman, 2014: 1, 12).
당시 조경 설계에서도 컴퓨터 모델링을 활용한 형태 만들기의 실험이 있었지만, 회화적 묘사의 전통이 여전히 중요했다. 건축 설계가 묘사를 지양했다면 조경 설계는 묘사의 전통 안에서 형태 만들기를 실험했다. 이러한 차이는 경관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건축 드로잉이 구조 내부까지 꿰뚫어 그려낸다면 조경 드로잉은 경관 외양의 시각적 특성을 중요하게 여겨 자연 현상이나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이 빈번히 활용되었다18). West8처럼 랜드폼, 벤치, 교각 등의 구조물을 설계하는 회사에서 컴퓨터 모델링이 이용되었지만, 구조 설계 이후에 그것이 주위 환경과 어떻게 조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투시도의 렌더링도 중요했다. 이처럼,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경관의 외양을 묘사하는 투시도의 시뮬레이션이었다 (Figure 4 참조)19).
Source: Lindhult, M. S., and N. T. Dines (1985) Perspective sketching with microcomputers, p. 57.
최근 디지털 조경 드로잉에서 회화와 유사한 사실적 묘사 방식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조경 설계에서 점차 대중의 참여 과정과 관련 공모전이 많아지면서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유리한 프리젠테이션 드로잉 제작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대중과의 의사소통에는 3D 소프트웨어로 모델링한 후 공들여 렌더링 한 시각 이미지가 유리하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발간된 디지털 조경 드로잉 관련 서적에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나디아 아모로소 (Amoroso, 2015) 가 편집한 Representing Landscapes: Digital에 실린 시각 이미지 제작에는 캐드, 스케치업, 라이노, 구글 어스 (Google Earth) 등이 이용되지만, 결과적으로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마무리된다.
특히, 디지털 사진 재료를 재구성하는 포토몽타주가 조경 드로잉에서 빈번히 이용되고 있다. 3D 모델링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실재하는 인물과 경관을 포착한 사진과 합성되어, 마치 현실 경관을 포착한 사진처럼 보이도록 보정되는 경향이 있다 (Figure 5 참조).
사실적 묘사로 접근하는 투시도는 앞서 다룬 1990년대 조경가의 몽타주와 콜라주와 다른 속성을 지닌다. 코너를 비롯한 조경가는 사진 재료를 뜯어 붙인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상상적 사고가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냈다. 반면, 근래의 디지털 투시도는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명령어를 통해 가시적 흔적을 지워내면서 마치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경관을 찍은 사진처럼 제작되는 경향이 있다20). 이 과정에서 17세기의 역사주의 풍경화나 18세기 영국의 픽처레스크 (picturesque) 미학에서 나타난 사실주의적 묘사 기법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21).
회화와 같은 사실적 묘사로 만들어지는 디지털 투시도는 가능성과 한계가 공존한다. 우선, 이러한 기법은 픽처레스크 미학처럼 조경의 중요한 역사적 관습을 디지털 시대에 계승하고 있다. 둘째,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다양한 명령어는 손 드로잉에서 좀처럼 다루기 힘들었던 현대 경관의 역동성, 복잡성, 모호하고 자유로운 속성을 시각화할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 풍경화나 사진과 유사한 이미지는 클라이언트와 대중에게 쉽게 이해된다.
반면, 사실적 묘사의 한계도 존재한다. 우선, 디지털 드로잉은 정태적 시각 이미지이므로 경관의 움직이고 다감각적인 특성을 온전히 시각화할 수는 없다. 둘째, 사실적 디지털 이미지는 현존 대상이 아닌 아직 조성되지 않는 가상의 경관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은 매체의 특성상 실재하는 사물을 포착했다는 인상을 감상자에게 심겨준다. 따라서 사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디지털 드로잉은 그것이 묘사하는 경관이 현존하고 있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기 쉽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래의 경관을 과장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칼 쿨만이 지적했듯, 디지털 조경 드로잉은 가장 아름답고 이용이 극대화된, 즉 현실에서 좀처럼 발생하기 힘든 이상화된 순간을 그려내는 경향이 있다 (Kullmann, 2014: 22). 셋째,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설계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결과물로서 프리젠테이션 드로잉을 생산하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시각 이미지가 설계 결과물로 간주되어 설계 과정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22), 대신 설계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활용될 필요가 있다. 물론, 사실적 이미지 만들기는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유용하다는 점에서 설계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고, 따라서 설계 경관에 대한 비전을 최대한 잘 드러내는 데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23).
우선 디지털 드로잉의 사실적 묘사의 문제는 경관의 겉모습 (appearance) 을 시각화한다는 점에 있다. 드로잉은 정태적 시각 이미지이므로 경관이 지닌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과 시간에 따른 움직임을 그려내는데 한계가 있다 (Corner, 1992). 최근 조경 설계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경관의 외양이 아니라, 기능 (performance) 을 시뮬레이션하는 다양한 실험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파라메터 (parametric) 조작 기능을 제공하는 3D 캐드나 라이노 등의 모델링 테크놀로지가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첫째, 파라미터 기반의 모델링은 여러 경관 기능의 관계를 시각화한다. 예를 들어, 맥클로스키 회사 (PEG office of landscape + architecture) 의 모델링은 물이나 바람의 흐름 같은 경관 정보를 힘, 양, 방향의 관점에서 점과 선의 형식으로 모델링하고, 그러한 기능들의 관계와 변화, 즉 “강도의 장 (fields of intensity) ”을 시각화한다. 파라미터 기반 모델링은 “피드백 메커니즘이 가능하여 양적이고, 질적인 정보를 연관시킬 수 있고, [...] 경관 매체의 내재적 활력을 상상하는 가능성을 제공 (M'Closkey, 2014: 126-127) ”한다.
둘째, 경관 기능 모델링은 회화적 묘사가 결합되기도 한다 (Figure 6 참조).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지로 (Christophe Girot) 의 경관 시각화와 모델링 연구실 (Landscape Visualization and Modeling Lab) 에서는 레이저 스캐너와 사진 측량 (photogrammetry) 에서 얻어낸 점구름 데이터 (point cloud data) 를 이용하여 삼차원 모델링을 만든다. 이러한 모델링은 “정밀한 숫자 데이터, 즉 위치 (x,y,z 좌표) 와 색상 (RGB 값) 으로 코딩된 점들로 만들어진 것으로 [...] 회화적인 것과 메트릭적인 것의 합성체”를 시각화한다 (M'Closkey, 2014: 127). 지로는 이 모델링 기법을 위상학 (topology) 으로 개념화하고, “지형 정보와 시적인 (poetic) 직관이 혼성화되어 강력한 설계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Girot, 2013: 29).
Source: Waldheim, C. and A. Hansen, eds. (2014) Composite Landscapes: Photomontage and Landscape Architecture, p. 129.
셋째, 최근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설계 초기부터 마지막 시공까지 설계 전반의 프로세스에 활용되고 있다. 질리안 월리스와 헤이크 라흐만은 “창조성의 개념을 설계 아이디어 발전, 재료 (materiality), 시공 과정까지 포괄 (Walliss and Rahmann, 2016: xx-xxi)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2002년 설계된 구스타프슨 포터 (Gustafson Porter) 의 다이애나비 추모 분수 (Diana, Princess of Wales Memorial) 는 매끈한 돌 구조물을 어떻게 가공하여 시공하는가가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Figure 7 참조). 구스타프슨의 점토, 석고 모형은 자동차, 비행기 공학 등 여러 엔지니어링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시공될 수 있었다 (Walliss and Rahmann, 2016: 178-184)24). 또한, 2009년 설계되어 2011년 조성된 오피스박김 (PARKKIM) 의 머드 인프라스트럭처 (Mud Infrastructure) 는 설계 초기 라이노를 이용하여 랜드폼을 만들고, 이를 설계의 전반적 과정에서 생태 성능을 테스트하는데 활용하였다 (Walliss and Rahmann, 2016: 23-24)25).
Source: Walliss, J., and H. Rahmann (2016) Landscape Architecture and Digital Technologies, pp. xxii, 180.
디지털 드로잉의 사실적 묘사의 또 다른 문제는 경관의 겉모습을 사실과 똑같아 보이도록 (realistic) 시각화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진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설계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발전시키면서 경관의 다채로운 경험을 구현할 수 있는 드로잉 실험이 필요하다.
드로잉 테크닉과 테크놀로지의 혼합적 이용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첫째, 드로잉 유형, 즉 평면도, 투시도, 단면도, 입면도, 다이어그램 등의 테크닉을 혼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한 합성 드로잉은 경관의 다양한 특성을 그려내는 상상적 시각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설계 공모는 대체로 사각형의 최종 패널 이미지를 요구하지만, 다양한 드로잉 유형을 재구성하여 제한된 캔버스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둘째, 서로 다른 드로잉 매체, 즉 테크놀로지를 혼합할 수 있다. 손과 컴퓨터는 각각의 매체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 보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조경 설계에서 드로잉 테크놀로지의 혼합 실험이 제안되고 있다. 칼 쿨만 (Karl Kullmann) 은 근래의 디지털 조경 드로잉에 나타나는 사진을 이용한 사실적 묘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느슨한 사실주의 (loose-reality) 를 대안으로 제안하는데, 구체적 전략의 하나를 손과 컴퓨터의 혼합 드로잉으로 설명한다 (Kullmann, 2014: 20-31). 손 드로잉은 컴퓨터 드로잉에 아날로그 감수성을 불어넣는다.
셋째, 최근 공모전에서 빈번히 요구되는 동영상의 기능과 역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Figure 8 참조). 동영상은 조경 드로잉의 한계인 청각과 움직이는 시각을 보완하여 시각화한다. 동영상 연출에서 카메라 워크와 시점의 문제가 중요하다. 2013년에 개최된 자리아드예 공원 국제 설계 공모 (International Landscape and Architectural Competition for the Design of Zaryadye Park) 의 1등작 딜러 스코피디오와 렌프로 (Diller Scofidio+Renfro) 의 와일드 어바니즘 (Wild Urbanism) 의 동영상 시뮬레이션은 인간의 눈높이와 공중 뷰의 시점을 적절히 혼용한다. 설계 공간의 특성을 보여줄 때는 인간의 눈높이 시점에서 이동하고, 특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는 공중 뷰를 이용하면서 설계된 랜드폼과 구조물의 표면을 따라가거나 관통하면서 설계 경관의 형태와 구조,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26). 동영상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설계안을 시각화하는 다양한 연출 방식을 고민하고, 나아가 설계안을 발전시키는 생성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계속해서 실험할 필요가 있다.
V. 결론
이 연구는 조경 설계에서 컴퓨터 드로잉의 역사를 검토하고, 근래의 디지털 드로잉의 사실적 묘사 경향에 관한 쟁점을 진단한 뒤 그에 대한 대안적 방향을 모색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경 드로잉 매체가 손에서 컴퓨터로 이행하는 초기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대체로 손 드로잉의 테크닉을 모방하거나 물리적 매체를 컴퓨터 파일로 번역하는 기계 도구의 기능을 담당했다. GIS는 손으로 이루어지던 레이어 케이크의 절차를 컴퓨터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활용해 처리하는 기능을 담당했고, CAD는 물리 모형을 시공 도면으로 변환하는 기계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던 콜라주와 몽타주 절차를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예외적으로, 코너는 프레쉬킬스 공모전에서 플랜 콜라주라는 맵핑 테크닉을 실험하면서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설계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창조적 도구로 활용했다.
근래에 대중과의 의사소통이 점차 중요해지고,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상용화되면서 디지털 조경 드로잉에서 경관의 외양을 회화와 같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짙다. 특히,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명령어를 통해서 사진 재료의 조립 흔적이 지워지고, 마치 실재 경관을 포착한 사진처럼 보이도록 제작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손으로 좀처럼 하기 힘든 여러 효과가 가능하여 경관의 역동성을 그려내는데 적절할 수 있고, 사진과 같은 이미지는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수월하다. 한편, 이러한 기법은 경관의 다감각적 특성을 온전하게 시각화하기 힘들고, 아직 조성되지 않는 경관을 묘사한 가상 이미지라는 점에서 수용자를 기만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며, 설계 과정에서 최종 결과물로서 프리젠테이션 드로잉의 생산에만 집중하게 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사진을 이용한 사실적 드로잉 기법은 조경가의 설계 내용을 그려내는데 이용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경관의 기능 정보를 삼차원으로 모델링하고,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설계의 전반적 프로세스에서 설계안을 발전시키는 창조적 매체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다양한 드로잉 테크닉과 드로잉 테크놀로지를 혼용하여 경관에 대한 대안적 감각과 인식을 만들어낼 필요도 있다.
이 연구는 현재 디지털 조경 드로잉 기법과 테크놀로지의 이용 양상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컴퓨터 드로잉의 초기부터 현재까지라는 다소 광범위한 시기를 다루었고, 때문에 특정 조경가의 드로잉 테크닉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선택적으로 다뤘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예컨대, III장에서 그래픽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창조적 드로잉의 실험은 코너 이외에도 다른 설계가들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결코 짧지 않은 컴퓨터 조경 드로잉의 역사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혹은 지금까지 진화해온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상세한 역사를 논의하지는 못했다. 또한, 조경 드로잉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공모전 드로잉을 주된 사례로 다뤘기 때문에 조경 설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실험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27). 무엇보다 국내 조경 설계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이용의 초기 역사와 현재까지의 진화 과정은 보다 면밀하게 추적해야 할 후속 과제이다28). 이 연구는 새로운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지금까지 조경 설계에서 드로잉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 그 태도를 진단하여 앞으로 조경 설계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모색했다는 의의가 있다. 계속해서 진화하고 발전할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조경가의 손을 돕는 효율적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동시에, 조경가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잠재력을 활용하여 전반적 설계 과정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생성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조경의 여러 절차, 즉 분석, 계획, 설계, 시공을 통합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설계가의 인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과정에서 다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실험이 활발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