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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황상유인첩 (題黃裳幽人帖)」에 나타난 다산 (茶山) 의 정원상 (庭園想)

정수진
Soo-Jin Jung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 수료
Ph.D. Candidate, Interdisciplinary Program in Landscape Architec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Soo-Jin Jung, Interdisciplinary Program in Landscape Architecture, Graduate School of Environment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South Korea, Tel.: +82-2-880-5660, Email: soojin2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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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Feb 23, 2017 ; Revised: Oct 09, 2018 ; Accepted: Oct 09, 2018

Published Online: Oct 31, 2018

국문초록

본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의원기(意園記)라 할 수 있는 「제황상유인첩」의 제작 경위와 글에 나타난 주거지의 입지 및 정원 조영의 특성을 분석하여 다산이 추구한 이상적 정원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고자 했다. 본 논문은 「제황상유인첩」이 이상적 주거향의 설계도로 기능했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주요 연구 대상은 「제황상유인첩」에 서술된 외부 경관이며, 관련 저작의 분석을 통해 정원 요소와 공간 조영을 수묵화로 시각화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황상유인첩」은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하던 1805년(순조 5) 겨울 보은산방에서 은자의 거처에 대해 물어오던 애제자 황상의 질문에 답하여 써준 글이다. 황상은 이를 참고하여 이후 강진 대구면 천개산 아래 일속산방을 조성하였다. 둘째, 「제황상유인첩」 속 주거지는 배산임수의 입지를 취하였고 생활과 여가를 겸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은둔하고 있는 선비의 이상적 주거지였다. 셋째,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정원의 특성은 주거지 입지에 있어서의 자연지리의 운용, 다양한 식물재료의 실용적 이용, 정원의 물리적 경계 확장, 정원 요소 향유에 있어서 공감각적 미학 추구, 확장된 정원에서의 적극적 풍류 체험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제황상유인첩」은 유배 이후 다산이 원했던 은일하는 선비의 아취 있는 삶의 모습을 담았다. 이는 일속산방으로 구현되었다. 「제황상유인첩」은 다산의 정원상이 충실하게 반영된 실현가능한 주거의 이상향으로 해석되었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idea of the ideal garden, pursued by Dasan, by analyzing the production process of his writing and the location of his dwelling,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garden in the writings of Dasan (茶山) Jeong Yag-Yong (丁若鏞)'s 「Jaehwangsangyuincheop (題黃裳幽人帖)」 is concerned with his writings on an imaginary garden (意園). This paper assumed that 「Jaehwangsangyuincheop served as a blueprint for his ideal dwelling. The main research subjects are the external scenes described in the 「Jaehwangsangyuincheop」, and the garden elements and spatial construction that were visualized as a Korean Ink Painting (水墨畵) through the analysis of related works.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Hwang Sang was Dasan's favorite pupil, and 「Jaehwangsangyuincheop」 was written by Dasan while at Boeunsanbang in the winter of 1805 as an answer to a question that Hwang Sang posed about the residence of a hermit. By referring to this response, Hwang Sang established Ilsoksanbang (一粟山房) under Mt. Cheongae in Daegu-myeon, Gangjin. Secondly, the residence in 「Jaehwangsangyuincheop」 has mountains behind it and water in front of it (背山臨水). The residence was used as a place to combine life and leisure. It was an ideal residence that secluded the scholar (隱士). Thirdly, Dasan's ideal garden was shown as operation of natural geography in a residential location, practically using various plant materials, expanding physical boundaries of garden, pursuing synesthetic aesthetics while enjoying garden elements, and having an active experience of the taste for the arts in the extended garden. 「Jaehwangsangyuincheop」 depicted the life of a scholar with the taste of elegance (雅趣), who live in reclusiveness (隱逸), which was wanted by Dasan after exile. It was realized as Ilsoksanbang. 「Jaehwangsangyuincheop」 was interpreted as the ideal of a feasible dwelling that faithfully reflects Dasan's conceptual thoughts on the garden.

Keywords: 정약용; 의원; 치원; 황상; 일속산방
Keywords: Jeong Yag-Yong; Imaginary Garden; Chiwon; Hwang Sang; Ilsoksanbang

I. 연구 배경 및 목적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던 다산 (茶山) 정약용 (丁若鏞, 1762∼1836)1)은 우리 사상계의 거두라는 호칭에 맞게 관련 연구들이 일 년에도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의 사상세계를 위시하여 문학세계, 제도개선책, 음양오행관, 윤리의식, 교육관, 불교관, 다도, 서간문, 초상화 등 다방면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다산의 저서들이 국역되어 일반에 차츰 보급되면서 보다 직접적이고 심도 있는 다산의 실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물 중에 선비의 이상적인 원림생활을 꿈꾸었던 「제황상유인첩 (題黃裳幽人帖)」이라는 의원기(意園記) 한 편이 있다. 의원기란 의원 (意園) 을 다룬 글을 일컫는다. 의원이란 여러 현실 요인으로 인해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 조성한 상상의 정원을 일컫는다. 해암 (海巖) 유경종 (柳慶種, 1714~1784) 은 그의 나이 43세 되던 1756년(영조 32) 에 ‘의원은 마음속에 꾸며 본 정원이다’라고 「의원지 (意園志)」(Ahn, 2001: 24-25) 에 기록하였다. 조선 후기 경화세족들을 중심으로 의원기 형식의 새로운 소품문이 제작되었고, 「제황상유인첩」 또한 그 한 예이다. 이는 다산이 상상으로 꾸며 본 가상의 정원을 포함한 주거지를 다룬 짧은 산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제황상유인첩」이 이상적 주거향에 관한 설계도로 기능했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따라서 이상에 머문 「제황상유인첩」의 정원의 구체적 모습을 규명하고자 현실에 구현된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일속산방(一粟山房) 을 참고하였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을 통해 다산이 꿈꾸었던 원림생활의 모습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제황상유인첩」에 관한 조경학계의 선행연구로는 Lee et al. (2014)이 「제황상유인첩」을 포함하여 조선 후기의 의원기 다섯 편을 분석하여 경화세족의 원림향유문화를 다룬 연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의원기를 짓게 된 다산의 귀전원의식에 관하여 다산이 장기 유배지에서 지은 「미원은사가(薇源隱士歌)」를 통해 살펴본 Sim (2000)의 연구에서는 유배라는 극한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지으며 화초를 가꾸며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염원했던 다산의 전원회귀의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산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은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에 유행한 의원기들에 영향 받은바 크다. 이들 의원기가 유행하게 된 배경과 그 종류들에 대하여서 Ahn (2001; 2004) 은 중국 명말의 황주성 (黃周星, 1611∼1680) 의 「장취원기(將就園記)」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 이들 의원기가 한양에 거주하는 사대부가들인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음을 밝혔다. 조선 후기 저술된 개별 의원기를 심도 있게 분석한 연구로 Hong and Lee (2006a)는 19세기 문인 항해(沆瀣) 홍길주의 숙수념(孰遂念) 의 원거념 속 경관요소를 추출하고, 상상의 정원인 오로원의 공간구조를 도해하여 숙수념의 조경학적 가치를 고찰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인이며, 정치가였던 허균의 공간을 다룬 저작 중에서 상상의 공간에 주목하여 은거와 은둔이라는 저술 배경과 배산임수의 입지 및 선호하는 식재요소 등의 분석을 통하여 허균이 추구한 상상적 공간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Hong and Lee, 2006b).

다산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정원을 조성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Park and Cho (1997)는 다산의 자연관을 원시유학과 연계하여 읽어냄으로써 다산의 자연에 대한 실용적 입장을 부각시켰다. Go (2001)는 정약용의 화훼에 대한 관심을 화훼시의 고찰을 통해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정약용이 미물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관찰을 넘어 학문적 박물지식에 근거하여 화훼시를 제작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다산은 특히나 국화를 아꼈는데, 국화를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을 살펴본 연구(Kang, 2003) 에서 국화그림자 놀이를 즐겼던 다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산이 손수 일군 다산초당의 정원과 관련하여 다산초당을 그림으로 옮긴 <다산도(茶山圖)>의 분석을 통해 다산초당의 원형경관을 탐색한 Rho et al. (2008)과 다산초당을 다룬 화훼시를 통해 다산초당의 조경공사 전반을 살펴본 연구(Park, 2002) 에서 자연 지세를 적극적으로 또한 지혜롭게 이용하는 실용주의자 다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제황상유인첩」 저술과 관련된 치원 (巵園) 황상 (黃裳, 1788∼ 1863 무렵) 의 교유 관계를 다룬 연구로는 황상의 저술서인 「임술기(壬戌記)」를 통해 스승 다산과의 애틋한 정을 살펴본 연구(Jung, 2003) 와 다산의 첫째 아들 유산 (酉山) 정학연 (丁學淵, 1783~1859) 의 글 그리고 추사 (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의 글을 통해 황상의 면모를 파악한 연구(Lee, 2006; Park, 2010a)가 있었다. 이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황상은 다산이 극진히 아끼던 뛰어난 제자였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새겨 실천에 옮겼던 제자였다는 것이다.

황상이 강진 대구면 천개산 아래에 조성한 일속산방과 관련하여 Jung (2006; 2010) 은 다산이 해배되어 귀향한 후 스승을 그리워하며, 10여년의 세월을 기울여 「제황상유인첩」의 내용을 옮겨 은자의 거처를 조성한 경위를 살펴보았다. 일속산방의 당호를 황상의 부탁으로 정학연이 지어주었음을 추측한 연구(Jung, 2010; Park, 2010b)를 통해 「제황상유인첩」의 영향으로 일속산방이 실제 조성되고, 이것이 그림으로 남겨져 전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소치 (小癡) 허련(許鍊, 1808∼1893) 이 <백적산장도(白磧山莊圖)>와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로 그렸고(Jung, 2014), <일속산방도>가 허련이 남긴 서너 점의 실경산수화 중 하나임을 소개한 연구(Gwangju National Museum, 2008)도 살펴볼 수 있었다. 허련이 초의선사 (草衣禪師, 1786∼1866) 의 그림제자이며, 다산의 장남인 정학연을 존경하고, 그로부터 그림에 대한 찬사를 받았음을 살펴본 Kim (2002)의 연구와 황상이 초의선사와 허련과도 교유를 확대했음을 살펴본 Park (2010b)의 연구를 통해 <일속산방도>가 그려지기까지의 인물관계도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제황상유인첩」과 관련하여 진행된 연구들로는 국문학계에서 시도된 국문번역을 중심으로 한 내용의 소개 또는 황상에 관한 인물 탐구 등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조경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 또한 원림의 향유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루다보니 개별 의원기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을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정원 유적은 그 속성상 시간의 추이에 따른 변형으로 원형을 알기가 힘들다. 따라서 글에 표현된 원림의 모습은 해당 시기의 원형 경관을 파악하는데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다. 「제황상유인첩」은 글의 상당부분이 외부 공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정원의 가시적 모습과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통해 「제황상유인첩」의 조경학적 의미와 가치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의원기라 할 수 있는 「제황상유인첩」의 제작 경위를 관련 인물과 더불어 살펴보고, 글에 나타난 주거지의 공간구성과 정원 조영의 특성을 분석하여 다산이 추구한 이상적 정원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II. 연구 범위 및 방법

1. 연구 범위

본 연구의 연구범위는 시간적․공간적․내용적 부분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시간적 범위는 다산 생존 시기인 18세기에서 19세기로 한정한다. 둘째, 공간적 범위는 가상의 공간과 실제의 공간으로 나눠 살펴 볼 수 있다. 가상의 공간은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상상의 공간이다. 실제의 공간으로서 주된 공간은 다산초당과 일속산방이다. 그 외 다산이 유람했던 조선 팔도의 구체적 장소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셋째, 내용적 범위는 「제황상유인첩」의 제작 배경과 상상의 정원의 모습 그리고 정원의 특성을 다룬다.

2. 연구 방법

연구의 대상은 「제황상유인첩」이다. 본 연구는 1934년에서 1938년 사이 신조선사 (新朝鮮社) 에서 발간한 활자본(活字本)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시문집 (詩文集) 영인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국역본은 199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편역하여 솔출판사에서 간행한 (국역)다산 시문집 을 참고하였다. 또한,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과 국역 번역문을 활용하였다. 아울러 세부 연구 목적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진행하였다.

첫째, 「제황상유인첩」의 제작 배경은 다산의 생애와 다산이 유배지에서 지은 주거의 이상향을 다룬 시문을 시문집과 관련 저작을 통해 참고하였다. 다산과 황상의 교유 관계와 황상이 조성한 일속산방 등은 황상의 문집 치원유고 와 관련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관련 저작 등을 통해 <백적산장도>와 <일속산방도>의 제작경위와 화제 및 그림을 분석하였다.

둘째, 「제황상유인첩」에 서술된 주거지의 공간 구성과 정원 요소 분석을 통하여 다산이 꿈꾸었던 이상적 주거공간을 수묵화로 옮겨 시각화하였다. 입지와 조영 요소들의 방위는 본문 속에 언급된 황주성의 「장취원기」를 참조하여 유추하였다.

셋째,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정원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개별 특성별로 분류하여 분석하였다. 본문 속에 언급된 정원 조영 관련 어휘들을 여유당전서 시문집의 소제목에서 검색하여 연관 시문들을 추출하여 보완하였다. 선정된 어휘들은 정원 (庭園)․원림(園林)․연못(芙蕖池)․연꽃(荷花)․배(舟)․남새밭(菜田)․전답(田畓)․국화(菊花)․파(葱, 蔥)․마늘(蒜) 등이다. 국역다산시문집 범례 편(Rim, 1997) 의 관련 어휘들을 추가적으로 검색하여 해당 시문을 찾아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루어진 시문의 형식은 시 (詩)․서 (序)․기(記)․제 (題) ․묘지명(墓誌銘)․서 (書) 등으로 이 중에서 정원 조영 요소와 관련된 다산의 사상이나 주장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취사선택되었다. 서 (序) 와 기(記) 의 글들은 시에 담긴 은유적 내용을 보완하고, 정원이나 자연과 관련하여 다산의 서술적 소회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어 중점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끝으로 논문에 소개되는 인물명은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의 인물검색을 통하여 조사하였고, 미진한 부분은 해당 인물에 대한 관련 문헌을 추가적으로 조사하였다.

III. 연구 결과 및 고찰

1. 제황상유인첩의 제작 배경
1) 다산의 생애와 유배기 저술

다산은 1762년(영조 38) 경기도 광주 (廣州) 에서 부친 정재원 (丁載遠)과 모친 해남윤씨 (海南尹氏)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다산은 어렸을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여 10세 이전에 이미 《삼미자집 (三眉子集)》이라는 시문집을 남겼다. 다산은 16세의 소년기부터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승훈(李承薰, 1756~1801) 등을 따라 성호의 저술을 읽으면서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고, 평생 성호(星湖) 이익 (李瀷, 1681~1763) 을 사숙 (私淑)하였다. 61세인 1822년(순조 22) 회갑을 맞아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22세 (정조 7) 때 과거에 생원 (生員) 으로 합격하였고, 이것이 정조 (正祖, 1752~1800) 와 첫 만남이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이후로 다산은 정조의 총애 속에 여러 벼슬을 거치며 유능한 청년 관료로서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집권층 내부의 격렬한 권력투쟁 속에서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 으로 좌천되기도 하였고, 곡산도호부사 (谷山都護府使) 와 같이 외직으로 내보내지기도 하였다. 38세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왔으나 점차 신변의 위협을 느껴 39세 되는 해 봄에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처자와 함께 낙향하였다. 그리고 거처하는 집을 ‘여유당(與猶堂)’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그해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변화 속에서 다산은 2번의 유배길에 올랐다. 1801년(순조 1) 의 신유옥사 (辛酉獄事)로 수많은 남인 학자들이 화를 당했는데, 이때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 (丁若鍾, 1760~1801) 은 사형을 당하였고, 둘째 형 정약전 (丁若銓, 1758~1816) 은 신지도로, 다산은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0월 다산의 큰형님 정약현(丁若鉉, 1751~ 1821) 의 사위인 황사영이 잡혀 이른바 ‘황사영백서 (黃嗣永帛書)’ 사건으로 정약전은 흑산도에, 다산은 강진에 다시 이배(移配)되었다. 강진으로 유배 와서 처음에는 강진읍 주막에 거처하다가 이후 고성사 (高聲寺) 보은산방(寶恩山房)과 제자 이학래(李鶴來, 1792~1861) 의 집을 거쳐 1808년(순조 8) 47세 때 외증조부 공재 (恭齋) 윤두서 (尹斗緖, 1668~1715) 의 손자 윤단(尹慱) 이 세운 산정 (山亭) 인 다산 (茶山) 의 초당으로 옮겨 1818년(순조 18) 해배될 때까지 거처로 삼았다. 이때부터 호(號)를 ‘다산’으로 불렀다.

두 곳의 유배지에서 다산은 왕성한 저술활동을 이어나갔다.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삼창고훈(三倉詁訓)」을 고증하고, 이아술 (爾雅述) 6권을 저술하였으며,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다. 이러한 고증학적 저술 외에 「장기농가(長鬐農歌)」ㆍ「기성잡시 (鬐城雜詩)」 등 많은 시 (詩)를 지었다. 큰형님 정약현의 편액 수오재에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기문을 쓰며, 지난 40 평생을 회고하기도 하였다2). 강진에서의 18년 유배 기간 동안 경전 (經典) 에 전심하여 《시 (詩)》ㆍ《서 (書)》ㆍ《예 (禮)》ㆍ《악 (樂)》ㆍ《역 (易)》ㆍ《춘추 (春秋)》 및 사서 (四書) 의 제설 (諸說) 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고, 시문(詩文) 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며, 국가의 전장 (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 (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 (疆域) 의 일과, 의약 (醫藥)ㆍ문자 (文字) 의 분변 등을 잡찬 (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으로, 강진에서만 500여권의 저술 활동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 유배기의 저술 중에서 이상적 주거지와 관련하여 장기에서는 「미원은사가」라는 시를 지어 전원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노래했고, 강진에서는 「제황상유인첩」이라는 산문을 지어 유인의 거처에 대해 논하였다.

2) 다산의 애제자 시인 황상과 일속산방

황상은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만나 평생을 아끼던 제자였다. 치원이라는 호도 치자 꽃을 좋아하던 황상에게 다산이 지어준 것이다. 치원유고 에 실린 「치자행(梔子行)」에서 황상은 “스승께서 내게 호를 주신 것은 (師號我)”이라고 되새기며 치자의 덕목을 헤아리고 있고, 「몽치자 (夢梔子)」에서는 치자에 대한 애틋한 정을 노래하고 있다(Hwang, 2008: 68, 223). 다산시문집에는 다산이 황상을 위하여 남긴 두 편의 시 (詩) 와 한 편의 제 (題)가 실려 있다4). 두 편의 시 중 하나가 「차운기황상보은산방(次韻寄黃裳寳恩山房)」으로 다산이 황상의 시를 받아보고 차운하여 보낸 답시이다. 찌는 무더위 속에서 모기와 벼룩에 물려가며 산 속 암자에서 여름밤을 나며 공부하는 제자 황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시의 좌측에 제자 황상을 크게 아끼는 다음과 같은 다산의 친필 메모가 적혀 있다.

보내온 시가 돈좌기굴해서 내 기호와 꼭 맞는다. 기쁨을 형용할 수가 없구나. 이에 축하하는 말을 적으며 아울러 혼자 기뻐한다. 제자 중에 너를 얻은 것이 참 다행이다. / 來詩頓挫奇崛 深契我好. 欣喜不可狀. 玆有賀語 兼之自賀. 弟子中得有汝幸矣(Jung, 2006: 16-17; 2008: 323).

1801년(순조 1) 10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와 다산초당으로 옮겨가기 전인 1805년(순조 5) 겨울 보은산방에서 큰 아들 학연과 제자 황상에게 주역을 가르치던 시기에, 은자의 거처에 대해 물어오던 제자 황상의 질문에 답하여 써준 「제황상유인첩」5)이 다산이 황상을 위하여 남긴 한 편의 제 (題) 에 해당한다.

황상은 아전가 출신으로 다산의 강진 유배기 읍중 제자 중 한 명이다(Lee, 1963: 34; Lim, 1998: 116-121). 15세 되던 해에 다산을 만나 삼근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75세 되던 1862년(철종 13) 에 쓴 「임술기」에서 스승을 처음 뵌 날이 1802년(순조 2) 10월 10일6)이었다고 또렷이 기억했다. 글에서 평생을 스승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충직하고 우직한 제자 황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이때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당시는 어려서 관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스승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폐하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마음에 늘 품고 있었다.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 속에서 노닐고 있다. 비록 이룩한 것은 없다 하나, 구멍을 뚫고 막힌 것을 툭 터지게 함을 삼가 지켰다고 말할 만하니, 또한 능히 마음을 확고히 다잡으라는 세 글자를 받들어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일흔 다섯이 넘었으니 주어진 날이 많지 않다. 어찌 제멋대로 내달려 도를 어지럽힐 수 있으랴. 지금 이후로도 스승께서 주신 가르침을 잃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자식들에게도 져버림이 없이 행하게 할 것이다. 이에 임술기를 적는다. / 予時年十五 童而未冠 銘心鏤骨 恐有所敢失 自彼于今六十一年間 有廢讀把耒之時 因懷在心 今也則手不釋卷 游泳翰墨 雖無樹立者 足可謂謹守鑿而疏戛 亦能奉承秉心確三字耳 然今年壽七十五餘 日無多 安可胡走亂道也 而今而後師授之不失也明矣 小子之不負也行矣 夫玆爲壬戌記(Hwang, 2008: 302; Jung, 2003: 14).

치원유고 서문에는 김정희가 써 준 「치원황처사유고서 (巵園黃處士遺藁序)」와 산천 (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써 준 「서 (序)」가 실려 있다. 서문의 내용을 통해 황상의 시가 김정희 형제에게 극찬을 받았고, 황상이 조선 후기 문단에 시인으로 크게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Hwang, 2008: 3-4, 5-7).

황상은 스승이 써준 「제황상유인첩」 속 유인의 거처를 스승 다산이 해배되어 귀향한 1818년(순조 18)부터 1848년(헌종 14) 에 거쳐 강진 천개산 (天蓋山) 백적동(白磧洞) 에 조성하고, 그 이름을 일속산방이라 부른다.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황상에게 써준 「증치원삼십육운서 (贈巵園三十六韻序)」에 따르면, 스승 다산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의지할 바가 없었던 황상은 집안의 생계를 동생에게 맡기고 홀로 천개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띠집을 짓고 맨땅을 일궈 텃밭을 만들어 뽕나무를 가꾸고 대나무를 심었으며, 샘물을 끌어오고 바위로 꾸며 자취를 감추고 산 지 10년에야 대략 포치를 이룰 수 있었다 한다(Hwang, 2008: 317-320; Jung, 2006: 20). 이를 통해 다산의 해배가 이루어진 1818년(순조 18) 9월 이후부터 「제황상유인첩」 속 유인의 거처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황상은 1848년(헌종 14) 에서 1855년(철종 6) 에 거처 거주지 북쪽 바위산에 암자 하나를 지어 정학연에게 암자의 이름을 부탁하였다. 황상의 부탁으로 정학연은 1855년(철종 6) 에 ‘좁쌀 한 톨 만한 집’이라는 의미로 새로 지은 작은 암자의 이름을 일속산방이라 지어주었다7). 실제로 일속산방은 황상이 백적동에 주거지를 조성한 후 그의 만년에 새로이 조성한 한 칸짜리 암자를 지칭한다. 일속산방이 조성되기 전의 주거지는 백적산방 또는 백적산장이라 불렸고, 조성된 이후에는 일속산방을 포함한 주거지 전체가 일속산방이라고도 불렸다. 일속산방을 포함한 백적동의 주거지 전체가 황상이 조성한 「제황상유인첩」 속 은자의 거처에 해당한다.

조선 후기 남종화가의 대가인 허련은 일속산방과 백적동 살림집을 포함한 황상의 주거지 전체를 <일속산방도>8)로 그려 황상에게 주었다. 그림 속 화제에는 “일속산방도. 치원선생을 위해서 교시한다. 1853년(철종 4) 3월 30일. 소치가 그리고 초의가 바로 잡다(一粟山房圖, 爲巵園先生雅敎, 癸丑暮春之晦. 小痴作 艸衣訂.).” 라고 하여 허련이 그림을 완성한 후 스승인 초의선사에게 보여드렸고, 초의선사가 수정하고 바로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Figure 1은 허련이 45세이던 1853년(철종 4) 늦은 봄에 그린 것으로 일속산방을 방문하지 않고 초의선사로부터 이야기만 듣고 그린 그림이다(Jung, 2010: 244). 화면 아래쪽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집 3채가 황상이 백적동에 정착한 후 수십 년간 가꿔온 살림집이고, 화면 중간 좌측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집 한 채가 일속산방이다(Figure 1 참조). 허련은 <일속산방도> 외에 살림집만을 확대시켜 그린 <백적산장도> (Jung, 2014: 217-220) 의 실경도 그려서 황상에게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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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Heo, Ryeon: Ilsoksanbangdo, 1853

Source: Seoul Arts Center Seoul Calligraphy Art Museum, 2008, retouc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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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이 강진 대구면에 조성했다는 일속산방은 유실되어 현재는 그 모습을 살펴보기 어렵다. 일속산방을 다룬 여러 편의 글과 허련의 <일속산방도>와 <백적산장도> 및 현지 답사를 통해 예전 모습을 유추해 보면 일속산방을 포함한 백적동의 주거지는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인근에 작은 암자가 있고 주거지 남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정원에는 기이한 꽃들과 소나무와 대나무 등을 키웠으며, 채소를 가꾸어 식용하였다.

2.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상상의 정원
1) 공간 구성과 정원 요소

공간의 구성에서 주거지의 입지는 우선 요소이다. 「제황상유인첩」의 주거지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면서 시내를 끼고 있는 산과 가파른 암벽이 마을 입구를 막고 있으며, 거기서 조금 들어가 확 트인 복지의 중앙에 지세가 모인 지점에 초가집 서너 칸을 입지한다. 좌향은 정남향으로 한다9).

입지에 영향을 받게 되는 공간 구성은 다음과 같다. 건물은 대지 중앙에 본채로 쓰이는 초가집 1채, 본채 동북쪽에 초각 1채, 본채 북쪽에 잠실 1채로 총 3채로 구성된다. 초각은 대나무로 난간을 두른다. 사립문은 뜰 동쪽에 1개, 본채와 잠실 사이에 1개로 총 2개 만들어 위요경관을 형성하였다. 수경시설은 규모가 작은 연못은 주거지 내 뜰 서쪽10)에 마련하고 대규모의 방죽은 주거지 외부 남쪽에 위치한다. 남새밭은 본채 남쪽에 채포 1개, 북쪽에 약포 1개로 총 2개가 위치한다. 본채 남동쪽에 전답을 마련한다.

정원 요소는 다음과 같다. 식물의 경우 화훼류는 석류, 치자, 백목련, 국화 48종, 매괴 수 천 그루, 연, 마름, 가시연 등으로 총 8종 이상이다. 수목류는 무성한 숲 (茂林), 대나무, 소나무 몇 그루로 총 3종 이상이다. 식용작물의 경우 채소류는 아욱, 배추, 파, 마늘, 오이, 고구마 등으로 채소가 총 6종 이상이다. 벼과식물은 벼 1종이 있다. 약초류는 인삼, 도라지, 천궁, 당귀 등으로 약초가 총 4종 이상이다. 동물의 경우 붕어와 백학 한 쌍으로 총 2종이다, 수경관은 작은 연못, 대형 방죽, 산속의 샘 (山泉) 각 1개소와 개울 2개소가 있다. 조경시설은 향장, 대나무 홈통, 거룻배 각 1개 및 초각 1채와 화분이 수십 개다. 기타 잠실과 작은 절이 각 1채이다.

이상에서 식물의 경우, 화훼류는 화분에 심어 주거지 내부에서 감상했고, 수목류는 기존의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조성해서 외부에서 감상했다. 식용작물 재배용 남새밭과 전답은 주거지 외부에 마련했다. 실용 작물 재배용 잠실은 본채 뒤에 위치했다. 동물의 경우 연못에 붕어를 키우고 본채 뒤 소나무 아래 백학 한 쌍이 서 있는 정경을 묘사했다. 수경시설의 경우 규모가 작은 연못은 주거지 내에 마련하고, 대규모의 방죽은 주거지 외부에 위치했다. 조경시설에서 향장은 다양한 화분들의 배경경관이자 본채와 남새밭 사이의 가림벽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소규모 정원의 경관을 확대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이상을 토대로 「제황상유인첩」에 서술한 주거지의 입지와 공간 및 정원 조영을 Table 111)에서 정원 요소와 좌향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Table 1. Garden elements and orientation in Jehwangsangyuincheop
Classification Garden elements Orientation Description
Site location Mountain (山), water (水), stream (溪) Unknown Mountains with a beautiful landscape and streams
Rockwall (峻壁), open space (開地) Unknown A steep rockwall blocks the entrance but the inner site is quite opened
Spatial construction Thatch-roofed house (茆屋) (main house) Center (standard) Place a thatch-roofed house faced a full south aspect in the center of the earth
Decorative low wall (響墻) South Build a decorative low wall in the front yard of the main house
Lotus pond (芙蕖池) West On the right side of the yard of the thatch-roofed house, create a small lotus pond about dozens of footsteps in size
Mountain springt (山泉)* West The water in the lotus pond is drawn from a mountain spring
Vegetable garden (圃) Southwest Tend a vegetable garden to the south of the lotus pond
Twig gate (扉) East A twig gate made of split bamboo is made on the left side of the front yard
North There is a small twig gate in the north of pine trees behind the main house
Gazebo (草閣) East Go out to the eastern twig gate and go up the hill about 50 steps and build a house near the stream running over the rocks
Stream (溪)* East There is a rice paddy and a reservoir to the south along the stream
Rice paddy (田) Southeast Move along the stream about 100 steps to the south and prepare a fertile rice paddy
Rfiservoir (隄)* Southeast There is a large reservoir with a circumference of 4-5 km south of the stream
Buddhist tempie (蘭若)* Unknown There is a small buddhist temple a distance of a few kilometers from the reservoir
Medicinal herb gardent (圃) Northeast Prepare a medicinal herb garden en the east side of the pine tree behind the main house
Silkworm-raising house (蠶室) North Go to the small twig gate on the north side of the pine trees behind the main house and arrange a silkworm-raising house with three rooms
Garden construction Decorative low wall (響墻), flowerpot (花盆) Center A variety of pots, such as pomegranate, gardenia, and white magnolia, are placed under the front of the main building. Chrysanthemums make 48 species
Lotus pond (芙蕖池) Lotus (芙蕖), crucian carp (鮒魚), West Plant a lotus flower in a pond and grow crucian carp
Bamboo pipes (竹水筒) West The water in the pond is drawn from a mountain spring by bamboo pipes
Mountain spring (山泉)* West The water in the pond is drawn from a mountain spring and the water overflowing from the pond flows into the lower vegetable garden through the fence hole
Vegetable garden (圃) Curled mallow (蔡), Chinese cabbage (菘), spring onion (葱), garlic (蒜), cucumber (瓜), sweet potato (甘藷), wild rose (玫瑰) Southwest Plant curled mallow, Chinese cabbage, spring onion garlic, etc. without mixing
Cucumber and sweet potato surround the vegetable garden
Thousands of wild roses are planted and used as hedges of vegetable garden
Gazebo (草閣) Bamboo railing (竹檻) East Hang a bamboo railing around the gazebo
Forest (林)*, bamboo (竹)* East The lush forest and the long bamboo leaves around the gazebo are left untouched even if the branches come into the eaves
Stream (溪)* East Go down along the stream from the stream flowing over the rocks nearby gazebo
Rice paddy (田) Southeast Go out into the rice paddy in the late spring season and get wet with the blue light of the rice seedbed where the new sprouts are blue
Reservoir (隄) Cockleboat (艓) Southeast Make a cockleboat and place it in the reservoir
Lotus (芙蕖)*, water chestnut (菱)*, euryale ferox (芡)* Southeast The reservoir is covered with lotus, water chestnut euryale ferox
Reservoir (隄)* Southeast In the moonlit night I ride with the fine poets and calligraphers on the boat blowing the tungso, playing the geomungo, go around the reservoir three to four times and then get drunk and come back
Buddhist temple (蘭若)*, monk (僧)* Unknown Occasionally fellowship with a monk of nearby a buddhist temple
Pine tree (松), white crane (白鶴) North There are some strange pine trees behind the main house and a pair of white crane stands under the pine trees
Medicinal herb garden (圃) Ginseng (人蔘), balloon flower (桔梗), cnidium (江蘺), angelica (山蘄) etc. Northeast Plant ginseng, balloon flower, cnidium, angelica, etc. by arranging medicinal herb garden to the east of pine trees
Silkworm-raising house (蠶室), wife (妻) North Silkworm-raising house is equipped with seven sericultural shelves and teaches wife how to grow silkwo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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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원의 시각화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정원의 모습은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분석한 후 관련 참고 자료를 참조하여 시각화였다.

「제황상유인첩」의 내용은 주거지의 전반적인 공간 조영과 세부적인 정원 조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전반적인 공간 조영은 다음과 같다. 초가집 3~4 칸을 대지의 중앙에 위치시킨다. 초가집 앞뜰 즉 남쪽에 향장을 세운다. 뜰 오른 편 즉 서쪽에 크기가 사방 수십 보 정도의 연못을 파며, 그 아래 남쪽으로 채소 재배용 남새밭(채포) 을 조성한다. 사립문은 뜰 왼편 동쪽에 만들고 거기서 50걸음쯤 언덕을 올라가 석간 가에 초각 1칸을 만들어 대나무 난간을 두른다. 여기서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백여 걸음 옮겨 기름진 전답 수만 평을 마련한다. 다시 시내를 따라 내려가면 둘레가 5~6 리쯤 되는 큰 방죽이 나온다. 방죽에서 몇 리를 가면 작은 절 1채가 나온다. 집 뒤 소나무 동쪽에 약초 재배용 작은 남새밭(약포) 을 하나 더 마련한다. 소나무 북쪽에 있는 작은 사립문으로 들어가면 3칸 잠실이 나온다.

정원의 조영은 다음과 같다. 향장 아래에 석류․치자․백목련 등의 다양한 화분을 놓되, 국화는 48종12)이 되도록 한다. 주거지 내부에 작은 연못을 조성하여 그 안에 연꽃13)과 붕어를 기른다. 연못의 물은 대나무 홈통으로 산골짜기에서부터 끌어 오며, 연못에 넘치는 물은 담장14) 구멍을 통해 아래쪽 채포로 흘러가게 한다. 채포에 아욱․배추․파․마늘 등을 섞이지 않게 심는다. 오이와 고구마로 채포를 둘러싸게 하고, 매괴15) 수 천 그루를 심어 채포의 울타리로 삼는다. 초각 주위의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들을 그대로 두어 가지가 처마에 들어오더라도 꺾지 않는다. 전답을 장만한다. 연․마름․가시연이 덮여 있는 방죽 위에 거룻배 1척을 만들어 띄운다. 인근에 절이 있다. 본채 뒤에 소나무 몇 그루가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아래 백학 1쌍이 서 있다. 소나무 동쪽으로 약포를 마련하여 인삼․도라지․천궁․당귀 등을 심는다. 잠실에는 잠박 7층을 설비해 둔다.

그 외 「제황상유인첩」에 언급된 인물의 활동상을 일별하면, 주인장은 서책을 가까이하는 와중에 남새밭과 전답을 둘러보며 그 향기와 푸르름에 취해본다. 그러나 몸소 농사에 손대지는 않는다. 달뜨는 밤마다 벗들과 집 근처 방죽에 나가 밤배놀이를 즐기고, 인근 사찰의 승려와 가끔씩 오가며 교유한다. 낮차 (午茶)를 마시고 잠실로 들어가 아내가 따라주는 송엽주 몇 잔을 마신 후 아내에게 때때로 양잠을 가르쳐 잠실을 운용하게 한다. 조정에서 벼슬하러 오라고 불러도 웃으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황상유인첩」의 내용 분석은 객관적 분석 부분과 주관적 해석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림에 표현된 요소 중에서 본문에 기초한 객관적 분석 내용은 a (茆屋)․b (響墻)․c (花盆)․d (芙蕖池)․e (山泉)․f (圃)․g (扉)․h (草閣)․i (溪)․j (田)․l (艓)․n (松)․o (白鶴)․p (圃)․q (蠶室) 이다. 이들의 경우, 형태․위치․좌향․수치 등에 있어 본문의 내용을 참조하여 대략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연구자의 주관적 해석이 보태어져 표현된 내용은 k (隄) 의 형태, m (蘭若) 의 위치와 좌향 그리고 r (峻壁) 의 위치이다. 이때 방죽 k는 산천 (山泉) 에서 분출하는 용수 (湧水) 와 산골짜기에서 흘러 들어오는 계곡물을 활용한 산곡형(山谷型) 저수지로 파악하였다. 저수지에서 몇 리 떨어진 작은 절 m의 위치는 현재의 다산초당과 인근 백련사 (白蓮寺)를 참조하여 정하였다. 절의 좌향은 기존의 고찰 (古刹) 을 참조하여 정하였다16). 마을 입구에 있는 높은 암벽 r은 그림 속에 적절히 배치하고자 임의로 위치를 정하였다.

시각화를 위한 관련 참고 자료는 다음과 같다. 방위는 「제황상유인첩」에 언급된 「장취원기」를 참조하여 정하였다. 정원 요소와 좌향 등은 「제황상유인첩」을 분석한 Table 1을 참조하여 본문 내용 순서에 따라 그렸다. 산과 시냇물 등의 자연 지형은 한국의 자연 지형을 참조하였다. 조경시설물 등은 현존하는 조선 후기의 여러 정원 및 그림들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표적 이미지들을 토대로 하여 화면에 조화롭게 표현하였다. 수치는 1796년(정조 20) 영조척 (營造尺)(Yoon, 1975: 9) 을 주로 참조하였다17). 본문에 언급된 수치는, 초가집 (a) 3~4칸 (三四間 : 1間 ≒ 7~9尺 ≒ 217~279cm2), 향장 (b) 1겹(一帶) 높이 수 척 (高可數尺 : 1尺 ≒ 31 cm), 연못(d) 둘레 수십 무(方數十武 : 1武 ≒ 반보(半步), 석 자 (三尺) ≒ 93cm), 본채 동쪽 사립문에서 초각까지의 거리(g~h) 50여 무(五十餘武 : 1武 ≒ 반보(半步), 석 자 (三尺) ≒ 93cm), 초각(h) 1칸 (一間 : 1間 ≒ 7~9尺 ≒ 217~279cm2), 초각에서 전답까지의 거리(h~j) 100여 무(百餘武 : 1武 ≒ 반보(半步), 석 자 (三尺) ≒ 91cm), 전답(j) 수백 묘(數百畝 : 1畝 ≒ 100평 ≒ 330.5 m2), 전답에서 방죽까지의 거리(j~k) 수 궁(數弓 : 1弓 ≒ 8尺 ≒ 248cm), 방죽 (k) 둘레 5~6리(周可五六里 : 1里 ≒ 39,272.7cm), 방죽에서 절까지의 거리(k~m) 수 리(數里 : 1里 ≒ 39,272.7cm), 잠실 (q) 3칸 (三間 : 1間 ≒ 7~9尺 ≒ 217~279cm2) 이다. 이들 수치를 개략적으로 파악하여 그림에 어울리도록 반영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제황상유인첩」의 정원을 수묵화로 옮겨 보았다(Figure 2 참조). 거주지는 산자락 아래 정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남쪽으로 남새밭과 논 및 저수지가 차례로 위치한다. Figure 2는 18~19세기를 살다 간 다산이 쓴 상상의 정원 글을 토대로 21세기를 사는 연구자가 해석하여 그린 모식도의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원저자와 연구자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문화․환경 등의 간격과 차이를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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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Visualization of Jehwangsangyuincheop (2016) Legend: a: Thatch-roofed house (茆屋) b: Decorative low wall (響墻) c: Flowerpot (花盆) d: Lotus pond (芙蕖池) e: Mountain spring (山泉) f: Vegetable garden (圃) g: Twig gate (扉) h: Gazebo (草閣) i: Stream (溪) j: Rice paddy (田) k: Reservoir (隄) l: Cockleboat (艓) m: Buddhist temple (蘭若) n: Pine tree (松) o: White crane (白鶴) p: Medicinal herb garden (圃) q: Silkworm-raising house (蠶室) r: Rockwall (峻壁). Objective analysis: a, b, c, d, e, f, g, h, i, j, l, n, o, p, q. Subjective interpretation: k (Type), m (Location and Orientation), r (Location).

Source: Painting by author, Ink on paper, 35×38cm, Non sc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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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정원의 특성

「제황상유인첩」에 구현된 정원의 조영과 향유 측면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었던 정원의 특성은 Table 2와 같다.

Table 2. Characteristics of the garden through related representative texts in Jehwangsangyuincheop
Characteristics of the garden Garden elements Representative description
Operation of natural geography in a residential location Mountain (山), water (水), stream() When choosing an area, choose mountains with a beautiful landscape and streams
Mountain springt (山泉), lotus pond (芙蕖池), bamboo pipes (竹水筒) The water in the pond is drawn from a mountain spring by bamboo pipes, and the water overflowing from the pond flows into the lower vegetable garden through the fence hole
Practical use of various plant materials Rice paddy() Move along the stream a hundred steps to the south to prepare fertile rice fields
Vegetable garden (圃) Locate a vegetable garden south of the pond
Plant curled mallow, Chinese cabbage, spring onion, garlic, etc without mixing
Cucumber and sweet potato surround the vegetable garden
Medicinal herb garden (圃) Prepare a medicinal herb garden on the east side of the pine tree behind the house
Plant ginseng, balloon flower, cnidium, angelica, etc.
Expansion of physical boundaries of garden Gazebo(草閣), forest(林) bamboo (竹) The lush forest and the long bamboo leaves around the gazebo are left untouched even if the branches come into the eaves
Reservoir(), cockleboat() In the moonlit night, I ride with the fine poets and calligraphers on the boat, blowing the tungso, playing the geomungo, go around the reservoir three to four times and then get drunk and come back
Buddhist temple(蘭若), monk (僧) Occasionally fellowship with a monk of nearby temple
Pursuit of synesthetic aesthetics in the enjoyment of garden elements Vegetable garden (圃), wild rose(玫瑰) Thousands of wild roses are planted and used as hedges of vegetable garden
Rice paddy() Go out into the rice paddies in the late spring season and get wet with the blue light of the rice seedbed where the new sprouts are blue
Active experience of the taste for the arts in the extended garden Cockleboat() Make a cockleboat and place it on the embankment
Reservoir() In the moonlit night, I ride with the fine poets and calligraphers on the boat, blowing the tungso, playing the geomungo, go around the reservoir three to four times and then get drunk and come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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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주거지 입지에 있어서 자연지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였다. 은자의 거처에 대해 논하는 글인 「제황상유인첩」에서는 시내를 끼고 있는 산 아래 집을 입지시키도록 권하고 있다. 이러한 입지적 요소를 살려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조성하고 운영하였다. 뜰 오른편에 연못을 파되 대나무 홈통을 통해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 대고, 연못에서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을 통해 채마밭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연못 속의 연꽃과 붕어뿐 아니라, 채마밭의 채소까지 함께 살리려 했다18). 이는 다산초당의 연못 조성과 운영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다산은 다산초당 근처의 기존 시냇물을 이용하여 연못에 물이 흘러들도록 유도했다. 큰 바위를 굴려다가 섬돌처럼 쌓아 맑은 샘물이 솟아나도록 하였고, 거기에 홈통을 대어 연못에 물이 넘쳐나도록 하였다. 그 연못에는 연뿐만이 아니라, 물고기와 올챙이도 기르도록 하겠다고 했다19). 정원 요소 중에서 연못의 조성과 운용에 있어서 다산은 입지적 요소를 십분 발휘하여 유입수와 유출수의 흐름뿐 아니라, 연못의 수중생물이 잘 어우러지도록 자연스럽게 운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둘째, 식재에 있어서 다양한 식물재료를 실용적으로 구사하였다. 「제황상유인첩」에는 석류․치자․백목련․48종의 국화 등의 진귀한 화목을 심어 구색을 맞추도록 권하고, 채포에는 아욱․배추․파․마늘20) 등을 심고, 약포에는 인삼․도라지․천궁․당귀 등을 심어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했다21). 이러한 다양성의 가치는 정원을 실용적으로 구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산이 추구했던 전원생활은 생활이 빠진 초월적 은둔이 아니었다. 「제황상유인첩」에서 주거지 남쪽에 채포와 전답을 마련하고 북쪽에 약포를 조성하여 여러 가지 채소와 약초를 가꾸어 그것들을 식용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22). 이러한 생각은 다산초당의 화단과 채포에서도 나타난다. 화단은 단풍나무․느릅나무․복사나무․살구나무 등의 수목들과 당귀․작약․부양․국화․모란 등의 화목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채포 역시 무․부추․늦파․올숭채․쑥갓 등의 10가지 채소와 저절로 자라는 나물들로 그 종류가 다채롭다23). 채포의 다양한 채소는 ‘성 안에 가서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24). 「미원은사가」에서 묘사되고 있는 심씨 (沈氏) 의 정원에는 ‘대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제사와 잔치를 치룬다’고 나와 있다. 심씨는 그의 정원에 벼와 조를 심어 생계를 잇고 망아지․송아지․거위․오리․닭․개․돼지 등의 짐승도 치며 뽕나무․삼나무․닥나무․옻나무․대추나무․밤나무․감나무 등을 심어 가꾸었다25). 이처럼 다산은 정원을 운용함에 있어 다양한 식재를 실용적으로 구사하여 일상생활의 건강한 영위를 도모하였다.

셋째, 정원 조영에 있어서 물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확장하였다. 「제황상유인첩」에서 다산이 그리는 정원은 담장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채에서 산언덕으로 50여보 떨어진 곳에 초각을 마련하고 초각 주위의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들을 모두 그대로 두어 가지가 처마에 들어오더라도 꺾지 않고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26). 이는 외부의 자연을 정원 안으로 들여와 정원의 크기를 확장시키는 일면으로 볼 수 있다. 안과 밖을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양자 모두를 취하게 되는 방식이라 하겠다. 또한, 친구가 방문하면 배를 타러 방죽으로 나갔다. 연과 가시연 등으로 덮여 있는 큰 방죽은 그가 조성한 곳이 아니나, 거룻배 하나를 만들어 띄워놓고 뱃놀이를 한다 했으니 이 방죽 또한 그가 자유로이 이용하는 그의 정원이라 볼 수 있겠다27). 인근 절에 사는 승려와의 교유를 위해 오가는 길까지도 즐거운 나들이로 치부했다28). 다산이 정원 경계를 넘나들며 정원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았음은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산이 살았던 서울 명례방 집은 인근에 고관대작들의 집이 많아 하루 종일 수레소리로 시끄러웠다. 이에 다산은 그의 집 뜰 한편에 진귀한 꽃과 과일나무들을 구해 화분에 심어놓고 그 주위에 대나무로 난간을 둘러 감상하기를 즐겼다. 이 작은 뜰에서 다산은 고요한 산림과 원포의 정취를 느끼며 시끄러운 도시의 수레바퀴 소음을 잊었다고 했다29). 비좁은 도심 속 주거지에도 화분을 들여놓고 감상하며, 그곳을 한적한 자연 속 산림과 원포라 생각하며 현실 속 작은 화분정원을 원림으로 확장시켜 감상했던 이가 다산이다.

넷째, 정원 요소의 향유에 있어서 공감각적 미학을 도모하였다. 자연이 언제 가장 아름다운지를 알아보는 다산의 눈은 「제황상유인첩」에서 짙푸른 남새밭 둘레에 붉은 매괴 수 천 그루를 심어 색조의 대비를 구사함과 동시에 봄에서 여름으로의 계절의 교차가 빚어내는 대기의 냄새에 코를 찌를 듯한 매괴의 향기를 교차시킴으로써 남새밭을 둘러보러 오는 이의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공감각적 미학을 선사하고 있다30). 또한, 논에 심은 벼가 늦은 봄이면 파랗게 돋아 그 푸른빛이 사람까지 물들인다고도 했다31). 푸르게 돋아나는 벼를 둘러보는 사람까지 푸르게 물들이고자 했던 시각과 촉각을 아우르는 다산의 공감각적 미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양 도심 한가운데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에도 일상의 고단함을 가을밤이면 국화꽃 그림자를 감상하며 보냈던 그다. 국화를 특히나 아끼고 사랑했던 다산은 그 아름다움을 국화꽃 그림자 놀이로 발전시켜 국화의 향기와 더불어 한밤중의 촛불에 아른거리는 국화그림자의 율동미라는 새로운 시각미를 발견하여 즐겼다32).

다섯째, 확장된 정원에서 적극적으로 풍류를 체험하였다. 「제황상유인첩」에서 달밤이면 시인 묵객들과 배 위에서 퉁소를 불고 거문고를 타며, 방죽을 3~4바퀴 돈 다음 술에 취해 돌아온다고 하였다33). 다산에게 방죽은 확장된 정원의 한 부분이었고, 적극적인 체험의 장소로 향유되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것에서 나아가 직접 체험함으로써 즐긴 것이다. 선천적으로 심미안을 타고났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후천적으로 독서에 매진하여 중국 고사에 밝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자연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졌던 것이다. 다산은 달밤의 뱃놀이34)를 즐겼고, 수차례에 거쳐 산수유람을 하였다. 산수유람을 하면서 시간의 순리에 따르는 자연을 보며 관직생활의 피곤함을 떨쳐버리기도 하고, 유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는 모습은 그의 시 여러 곳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소나기 직후의 터질듯이 세차게 휘감아 내리는 시냇물이야말로 생동감을 가득 품은 세검정의 진면목임을 알고 있었기에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자 벗들에게 권유하여 소나기 속의 세검정 폭포 구경을 나서기도 했던 그다35).

IV. 결론

본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의원기인 「제황상유인첩」의 제작경위를 살펴보고, 이어서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정원 조영 방식을 입지와 조영 부분으로 세분하여 분석하여 그림으로 옮겨봄으로써 최종적으로 다산의 정원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산은 정치적 성쇠를 거듭하는 중에 두 번의 유배 기간 동안 500여 편에 달하는 저술 활동을 하였다. 1801년(순조 1) 10월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옮겨가기 전인 1805년(순조 5) 겨울 보은산방에서 큰 아들 학연과 제자 황상에게 주역을 가르치던 시기에, 은자의 거처에 대해 물어오던 제자 황상의 질문에 답하여 「제황상유인첩」이라는 글을 써 주었다. 황상은 스승이 말씀하신 은자의 거처를 스승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 그의 말년에 강진의 대구면 천개산 아래 백적동에 조성하고, 그 이름을 일속산방이라 불렀다. 일속산방이 조성된 후 황상과 교유 인물들의 관련 글과 허련이 그려 준 <일속산방도>와 <백적산장도>의 그림이 전한다. 이를 통해 일속산방은 북쪽에 산과 남쪽에 강을 둔 배산임수의 입지를 취하였고, 정원에는 기이한 꽃들과 소나무와 대나무 등의 수목과 채소를 가꿔 관상과 식용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제황상유인첩」 속 주거지는 배산임수의 입지를 취하였고, 생활과 여가를 겸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은둔하고 있는 선비의 이상적 주거지였다. 배산임수라는 주거지의 입지적 요소는 정원 조영에 바탕이 되어 큰 골격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수가 아름다우며 시내를 끼고 있는 산을 접한 곳에 정남향으로 주거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주변의 산과 물을 정원 조영 요소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초가집에서는 독서와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잠실에서는 누에를 치는 경제적 생산활동을 하였으며, 초각에서는 풍류를 즐겼다. 채소밭과 약초밭에 전답까지 마련하여 시장에 가지 않고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연못에 붕어와 연을 키워 식용과 관상을 겸할 수 있었다. 집 근처 저수지는 벗과 함께 퉁소를 불고 거문고를 타며 달밤의 뱃놀이를 즐겼고, 인근 작은 사찰의 이름난 승려와 참선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고 싶어 했다. 조정에서 불러도 답하지 않는다 하였다.

셋째,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정원의 특성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첫째, 주거지 입지에 있어서 자연지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였다. 연못의 조성과 운용에 있어서 다산은 주거지의 입지적 요소를 십분 발휘하여 유입수와 유출수의 흐름뿐 아니라, 연못의 수중생물이 잘 어우러지도록 주위 환경을 자연스럽게 운용하였다. 둘째, 식재에 있어서 다양한 식물재료를 실용적으로 구사하였다. 정원을 운용함에 있어 다양한 식재를 실용적으로 구사하여 일상생활의 건강한 영위를 도모하였다. 셋째, 정원 조영에 있어서 물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확장하였다. 담장 안과 밖을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양자 모두를 취하게 되는 방식으로 이는 당대인들의 전형적인 자연관과 상통한다. 넷째, 정원 요소의 향유에 있어서 공감각적 미학을 도모하였다. 다산은 시각․촉각․후각 등의 복합적으로 적용하여 정원 미학을 구사하였다. 다섯째, 확장된 정원에서 적극적으로 풍류를 체험하였다. 이는 자연을 올바로 이해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됨으로써 자연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고자 하였던 행동으로 해석되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제황상유인첩」은 기약 없는 강진 유배라는 극한 상황에서 지은 글이지만, 다산이 진정으로 원하던 삶 즉 전원에 숨어 사는 선비의 아취 있는 삶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36). 본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황상유인첩」이 이상적 주거향에 관한 설계도로 기능했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연구를 진행하며, 「제황상유인첩」은 다산이 유배 중에 글로 풀어 쓴 주거의 이상향을 담은 설계도임을 알 수 있었고, 연구 결과 황상은 「제황상유인첩」을 일속산방으로 실현하였다고 파악되었다. 한국의 지형은 산이 많고 물이 많으며 산자수명하다. 이것은 다산의 의원기 속 주거지 입지와 조영에 영향을 미쳤고, 이에 영향 받은 다산의 의원은 아름다운 산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으며, 여기에 적절한 인공을 가미하여 실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구사한 공간이었다. 현실 속 자연은 다산의 의원에 투영되었고, 다산의 의원은 현실 정원으로 반영될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결국 「제황상유인첩」은 다산의 정원상이 충실하게 반영된 실현가능한 주거의 이상향으로 해석되었다. 다산의 의원은 실현성이 높은 가상의 정원이었던 것이다.

연구의 말미에서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난 다산의 정원상을 추출하고자 의원기 한 편을 중심으로 관련 시문들을 추출함에 있어 다산시문집의 방대함을 따라잡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산의 생애와 저술을 간략히 다루었으며, 교유 인물들의 저서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다산을 살펴볼 수 있는 여지 또한 소략하게 다루었다. 주거지 외부 정원의 시각화와 특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다보니 주거지 내부와 정원의 향유방식 또한 간략하게 다루었다. 이를 후속 연구로 넘기고자 한다. 아울러 다산의 이상적 정원상에 관한 연구가 다산초당의 원형경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 향후 다산초당의 복원 및 관리에 새로운 시각과 이해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한다.

감사의 글

2016년 여름 전통 한국화 기법으로 산수화를 특별 지도해주신 임계(林溪) 김성우 (金聖雨) 선생님과 절의 위치에 대하여 의견을 주신 여천 (與天) 이형주 (李炯周) 선생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Notes

주1. 정약용을 위시하여 논문에 소개되는 인물들의 생몰 년대는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의 인물검색을 참고하였다. 검색되지 않는 인물들의 경우는 별도 주석을 달았다.

주2. 다산의 생애와 저술은 다산이 직접 기술한 다산시문집 권16 「자찬묘지명광중본(自撰墓誌銘壙中本)」(Jeong, 1996f)과 한국고전종합DB의 《정본 여유당전서》 해제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MP_0597A) 및 유배 생활의 애환과 저술 (Keum, 2012: 48-58) 을 참조하였다.

주3. 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6, 「자찬묘지명광중본」(Jeong, 1996f) 참조.

주4. 다산이 황상을 위해 남긴 두 편의 시 (詩)는 다산시문집 권5에 실린 황상의 시를 받아보고 다산이 차운하여 보낸 답시인 「차운기황상보은산방」과 황상의 부친이 술병이 나 죽은 것을 애도한 「황상지부인담만사 (黃裳之父仁聃輓詞)」이며, 한 편의 제 (題)는 권14에 실린 「제황상유인첩」이다(Jeong, 1934-1938; 1996c; 1996e).

주5. 「제황상유인첩」의 원문은 부록으로 실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MP_0597A_0140_030_0230_2014_003_XML). Appendix는 세부 내용 분석 및 수묵화로 시각화하는데 참조한 부분을 중심으로 밑줄을 그어 번호를 매겼다.

주6. 황상, 치원유고, 「임술기」. “昔壬戌 予以十月十日 束脩於洌水夫子(중략)今年又値壬戌 追已往昔歷數日時 百感竝起”(Hwang, 2008: 301). 이어서 스승께서 알려주신 학문하는 방법인 삼근계(三勤戒)(Hwang, 2008: 301-302)를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주7. 치원유고 부록에 실린 칠봉초객의 「일속산방기(一粟山房記)」(Hwang, 2008: 313-315; Park, 2010b: 274; Jung, 2010: 244-250) 에 황상의 당호를 일속산방이라 지은 연유가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주8. <일속산방도>(지본담채, 23×32cm, 1853년작, 김영호 소장)는 2008년 12월 27일부터 2009년 2월 1일까지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소치 이백 년, 운림 이만 리(小癡 二百年, 雲林 二萬里) 전 (展)’으로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었다(Seoul Arts Center Seoul Calligraphy Art Museum, 2008). 이는 <태령십청원도(台嶺十靑園圖)>, <금강산도(金剛山圖)>, <금산사도(金山寺圖)>와 더불어 허련이 남긴 서너 점의 실경산수화 중 하나이다(Gwangju National Museum, 2008: 244).

주9. 부록 4~6 참조.

주10. 황주성은 「장취원기」에서 “左曰將山右曰就山(중략)東近將山者曰將園 西近就山者曰就園”(Huang, 1833) 이라고 하여, 왼쪽이 장산이고 오른쪽이 취산이며 동쪽 장산에 근접한 것을 장원이라 하고 서쪽 취산에 근접한 것을 취원이라 한다고 기술하였다. 「제황상유인첩」서두 부분에는 “昔人有記 將就園者 將就也者 明未就也”(Jeong, 1934-1938; 1996e)라 하여 옛날 「장취원기」를 쓴 사람이 있는데 장차 가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말한다며 「장취원기」를 언급하고 있다. 이 둘의 연관성을 미루어 볼 때, 「제황상유인첩」에서 언급되는 왼쪽은 동쪽을 의미하고, 오른쪽은 서쪽을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제황상유인첩」에서 주거지의 좌향을 남향으로 한 점에서도 주인장이 남향으로 좌정하였을 때를 기준으로 왼편을 동쪽, 오른편을 서쪽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주11. Table 1의 내용은 「제황상유인첩」의 내용 전개 순서를 따랐다.

주12. 정약용, 위의 책 권4, 「미원은사가」에는 “四十八種標格尊”(Jeong, 1934-1938; 1996b) 으로 (국화가)품격이 좋은 것만 사십팔 종이 핀다며 심씨의 국화 가꾸는 솜씨가 세상에 없이 절묘하다고 소개되고 있다. 이는 48가지 품격의 국화를 갖추도록 함으로써 다산의 국화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13. 연꽃은 잎․꽃․열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을 뿐더러, 연못에 연꽃을 키우면 인근 정자에서 책을 읽을 때 서향을 돋을 수 있다고 다산이 즐겨 심는 수종이다.

주14. 담장구멍(墻穴) 에서 담장은 향장 (響墻) 을 일컫는다(Jeong, 1934-1938; 1996e).

주15. 고연희는 “매괴란 장미류의 꽃나무다”(Go, 2001: 45)라고 하였는데, 본 논문에서 매괴(玫瑰)는 붉은 장미류의 꽃나무 또는 찔레꽃으로 추정하였다.

주16. 방죽 (隄) 의 유형은 제천 (堤川) 의림지 (義林池)(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7758&cid=51893&categoryId=53810)를 참조하였다. 절의 위치를 현재의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참조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801년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 외가 쪽 해남 윤 씨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1805년에 보은산 고성사와 만덕산 백련사에서 노닐며 혜장선사와 교유하였고(Keum, 2012: 54), 혜장선사의 도움으로 1805년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9개월을 머물게 된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0312&cid=40942&categoryId=33544). 「제황상유인첩」을 저술한 때는 1805년 겨울 보은산방에서였다. 따라서 「제황상유인첩」을 지을 당시 다산은 이미 백련사를 알고 있었고, 다산초당의 존재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그림 속 절의 위치는 이를 토대로 하였다. 절의 좌향은 한국의 삼보사찰 (三寶寺刹) 인 불보사찰 (佛寶寺刹) 통도사 (通度寺), 법보사찰 (法寶寺刹) 해인사 (海印寺), 승보사찰 (僧寶寺刹) 송광사 (松廣寺)를 참조하여 남서향으로 가정하였다.

주17. 정원의 시각화를 위한 수치의 개략적 파악을 위하여 척 (尺) 등의 수치 단위 한자명은 온라인 검색 사이트 “NAVER 한자사전”(https://hanja.dict.naver.com) 을 이용하였다. 본문에 사용되는 1척 (尺) 은 31cm로 사용하였으며, 이는 1796년(정조20) 영조척 (營造尺) 에 근거하였다. 그 외 1리(里) 와 1평 등은 “NAVER 단위 변환(NAVER Unit Conversion)”을 이용하였다.

주18. 부록 9~11 참조.

주19. 정약용, 위의 책 권5, 「어느 날 매화나무 아래를 산책하다가(一日散步梅下)」(Jeong, 1934-1938; 1996c) 참조.

주20. 다산은 채소밭을 가꿈에 있어 마늘과 파를 특히 중시하였다. 이는 시문집 권21에 실린 「기양아 (寄兩兒)」에서 “然種蒜種葱最宜致力”과 같이 두 아들에게 부치는 서찰에서도 강조하고 있다(Jeong, 1934-1938; 1996g).

주21. 부록 8, 12, 29 참조.

주22. 부록 12, 13, 18, 28, 29 참조.

주23. 정약용, 위의 책 권5, 「어느 날 매화나무 아래를 산책하다가」(Jeong, 1934-1938; 1996c) 참조.

주24. 정약용, 위의 책 권5, 「다산화사 (茶山花史)」(Jeong, 1934-1938; 1996c) 참조.

주25. 정약용, 위의 책 권4, 「미원은사가」(Jeong, 1934-1938; 1996b) 참조.

주26. 부록 16, 17 참조.

주27. 부록 20~23 참조. “得大隄一面 周可五六里”(Jeong, 1934-1938; 1996e)를 보면 큰 못이 하나 있는데 둘레가 5~6리쯤 된다고 하였다. ‘周’는 방죽을 조성한 이가 작중 화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동사로서 본 연구자는 방죽을 조성한 이가 작중 화자가 아니라고 유추하였다. 둘레가 5~6리쯤 되는 못을 작중 화자 혼자의 힘으로 조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에 ‘得’을 ‘(다산이 조성하지 않았으나, 집 근처에 기존하는 못이) 있다’로 해석하였다.

주28. 부록 24, 25 참조.

주29. 정약용, 위의 책 권14, 「죽란화목기(竹欄花木記)」(Jeong, 1934-1938; 1996e) 에서 현실 속 작은 화분정원을 원림으로 확장시켜 감상했다.

주30. 부록 14 참조.

주31. 부록 19 참조.

주32. 정약용, 위의 책 권13, 「국화 그림자 놀이 (菊影詩序)」(Jeong, 1934-1938; 1996d) 참조.

주33. 부록 23 참조.

주34. 정약용, 위의 책 권3, 「달밤에 앞 호수에서 뱃놀이 하다(前湖汎月)」에는 서정적인 뱃놀이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승선한 사람을 신선으로 비유했고, 달밤의 정서와 아취를 뱃놀이에 실어 주변 경관에 아울러 잘 녹여내고 있다(Jeong, 1934-1938; 1996a).

주35. 정약용, 위의 책 권14, 「유세검정기(游洗劍亭記)」(Jeong, 1934-1938; 1996e) 에 다산의 격물치지 자세가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주36. 글의 서두에서 유인의 삶은 하늘도 지극히 아끼는 청복(淸福) 이라고 하였고 글의 말미에서는 벼슬하러 오라는 조정의 징서 (徵書)가 와도 웃으며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록 1, 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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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 丁若鏞, 與猶堂全書,「題黃裳幽人帖」

在《周易》履之无妄曰:“幽人貞吉。” 余釋之曰:“艮山之下, 震林之間。” 巽以隱遯, 仰順天命, 或蒔艮菓, 或種震菜, 履大道而坦坦, 樂天爵以熙熙, 此碩人之寬也。幽人之事, 不已吉乎!顧天甚惜淸福1, 王侯將相之貴, 陶朱ㆍ猗頓之富, 散之如糞土, 而〈履〉九二之吉, 世無聞焉。昔人有記, 將就園者, 將就也者, 明未就也2耽津黃裳, 請問其目, 余曰3:“擇地須得佳山麗水。然江山不如溪山4, 洞門須有峻壁側石, 稍入開朗悅眼5, 方是福地。就中央結局處, 搆茆屋三四間, 正子午盤針6, 匠治須極精巧, 用淳昌雪華紙塗飾, 楣上傅澹墨山水橫圖, 門旁畫槁木竹石, 或題小詩。室中置書架二部, 揷架書一千三四百卷《周易集解》ㆍ《毛詩疏》ㆍ《三禮源委》, 及古書ㆍ名畫ㆍ山經ㆍ地志ㆍ星曆之法ㆍ醫藥之詮ㆍ陳練之制ㆍ軍資之式, 及草木禽魚之譜ㆍ農政水利之說, 以至棊譜ㆍ琴譜之等, 無所不具。案上展《論語》一卷, 旁有花梨几子, 安陶ㆍ謝ㆍ詩ㆍ杜ㆍ韓ㆍ蘇ㆍ陸之詩, 及《中州樂府》ㆍ《列朝詩集》等數帙, 案底置烏銅香爐一口, 曉暮燒玉蕤香一瓣, 庭前起響墻一帶, 高可數尺7墻內安百種花盆, 若石榴ㆍ巵子ㆍ㬅陀之等, 各具品格, 而菊最備, 須有四十八般名色, 方是僅具也8庭右鑿小池, 方數十武9, 便止。池中植芙蕖數十枋, 養鮒魚10, 別刳䈽竹作水筒, 引山泉注池, 其溢者從墻穴流于圃11治圃須碾平如渟水然, 割之爲方畦, 蔡ㆍ菘ㆍ葱ㆍ蒜之等, 別其族類, 無相混糅12, 須用碌碡下種, 苗生視之, 有斑紬文, 纔名爲圃也。稍遠, 種瓜種甘藷, 繞圃13, 植玫瑰累千株成籬, 每當春夏之交, 巡圃者得香烈觸鼻也14庭左立衡門, 編白竹爲扉15, 扉外緣山坡行五十餘武, 臨石澗起草閣一間, 用竹爲檻16, 繞閣皆茂林修竹, 枝條入簷, 不須折也17沿溪行百餘武, 得良田數百畝18, 每晚春, 曳杖至田畔, 見秧針齊綠, 翠色染人, 無一點塵土氣19。雖然, 勿躬治也。又沿溪行數弓許, 得大隄一面, 周可五六里20, 堤中皆芙蕖ㆍ菱芡21, 造艓子一枚泛之22, 每月夜, 攜詩豪墨客, 泛舟, 吹洞簫, 彈小琴, 繞隄行三四遍, 醉而歸23自隄行數里, 得小蘭若一區, 中有名僧一個24, 能參禪示法, 嗜詩縱酒, 不拘僧律, 時與往還, 忘情去留, 斯足歡也25堂後有徂徠松數根, 作龍拏虎攫之勢26, 松下立白鶴一雙27自松而東, 開小圃一區28, 種人蔘ㆍ桔梗ㆍ江蘺ㆍ山蘄之等29松北有小扉30, 從此入, 得蠶室三間31, 安蠶箔七層。每午茶旣歠, 至蠶室中, 命妻行松葉酒數盞, 旣飮, 持方書, 授浴蠶繅絲之法32, 嫣然相笑。旣已聞門外有徵書至, 哂之不就33。此卽〈履〉九二之吉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