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정원의 의미를 둘러싼 논의는 정원이 단순한 미적 대상인지, 또는 가치와 신념을 담아 발언하는 경관인지에 집중되어 왔다. Spirn(1998)은 경관을 읽고 쓰는 언어로 파악하였고, Francis and Hester(1990)는 정원을 자연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이상화된 장소로 설명하였다. Hunt(1998)는 정원을 자연의 상징적 표상으로 보았으며, Cooper(2006)와 Harrison(2008)은 정원이 인간의 조건과 자기 이해에 관여하는 철학적 장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별히 정원사가(庭園史家) 헌트(John D. Hunt)는 설계와 조성 등 결과물 위주로만 바라보던 정원을, 조성 이후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고 해석되며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되어 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간 속에서 변화해 나가는 존재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Hunt, 2004). 이러한 논의는 정원이라는 것을 단순히 조형적 형태 차원을 넘어, 그곳에 내재한 의미, 조성 이후의 이용과 해석, 그리고 삶의 실천까지 함께 아우르는 문화적 과정이자 산물로 읽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가정원으로 평가되는 서석지원은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대상이다. 서석지원은 경북 영양의 자양산 아래 연당리에 자리하며, 연못과 소수의 건물, 연못 안의 자연 암석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가 크지 않고 인공적인 조경 요소도 많지 않지만, 조선 선비의 자연관과 성리학적 세계관이 응축된 장소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이곳은 꽃이나 기물을 소비하는 유락의 정원이라기보다 자연을 통해 마음을 닦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수양의 장소였다(그림 1 참조).
서석지원에 관한 기존 연구는 조영 배경과 공간 구성, 외원의 범위와 경관 구조,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의 문학과 사상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민경현(1982)은 서석지를 중심으로 임천정원의 특성을 고찰하였고, 김동훈 등(2003)은 서석지원의 조영 배경과 공간 구성을 분석하였다. 길승호와 양병이(2013)는 주변 경관요소를 통해 외원의 범위와 구조를 밝히고자 하였으며, 신두환(2018)은 정영방의 문학과 원림을 함께 살펴 서석지에 구현된 성리학적 이상과 미의식을 논의하였다. 이들 연구는 서석지원의 공간적·사상적 특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정영방의 자연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원림의 조영과 향유를 통해 하나의 성리학적 풍경으로 생산되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석지(瑞石池)’ 대신 ‘서석지원(瑞石池園)’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서석지는 엄밀히 말해 연못의 이름이며, 정영방의 원림은 연못과 주변 건물 및 공간뿐 아니라 자양산, 청기천, 반변천, 입석과 자금병, 주변 봉우리와 바위로 구성된 외원을 함께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유(遊), 상지(相地), 명명(命名), 인지제의(因地制宜), 제영(題詠)·시창(詩唱)을 성리학적 풍경 생산의 주요 과정으로 설정하고, 정영방이 자연을 발견하고 선택하며 의미화하고 조성·향유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서석지원이라는 성리학적 풍경이 어떠한 인식과 실천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 대상은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영양 연당리에 조성한 서석지원의 내원과 외원이다. 분석 자료로는 ┌국역 석문선생문집(國譯 石門先生文集)┘의 「경정잡영삼십이절(敬亭雜詠三十二絶)」과 「임천잡제십육절(臨川雜題十六絶)」, 수와(睡窩) 정요성(鄭堯性, 1650–1724)의 「임천산수기(林泉山水記)」, 천연대(天然臺) 정도건(鄭道鍵, 1668–1740)의 「서석지부(瑞石池賦)」후손과 교유 인물의 기록, 관련 선행연구, 그리고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한 경관 구조를 활용하였다. 문헌에 나타난 공간 행위와 경물 인식의 특징을 추출한 뒤 조선 사대부 원림의 조영 및 향유 과정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분석 틀은 유(遊), 상지(相地), 명명(命名), 인지제의(因地制宜), 제영(題詠)·시창(詩唱)의 다섯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이 개념들은 정원 조성의 시간적 단계를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다. 자연에 다가가는 몸의 방식, 터를 읽고 선택하는 판단, 경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 행위, 땅의 조건을 존중하는 조성 원리, 그리고 자연 경험을 시적 언어와 공동체적 기억으로 확장하는 향유 방식이 서로 맞물리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다섯 가지 개념을 통해 자연을 발견하고(遊), 적절한 장소를 선택하며(相地), 마음에 맞는 경물을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하고(命名), 최소한의 개입으로 정원화하며(因地制宜), 이를 시와 교유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題詠·詩唱)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분석 틀을 통해 서석지원을 개별 경관 요소의 집합이 아니라, 성리학적 가치가 자연 속에서 구현되고 향유되는 풍경 생산의 과정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조선 사대부 원림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문화적 실천 과정으로 해석하려는 의도와 닿아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2. 조선 사대부 원림의 성격과 독해 틀
조선 사대부가 즐긴 정원 가운데 산수 자연에 입지하고 기존 지형과 수계, 암석과 수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유형을 흔히 원림이라 부른다. 원림은 성내나 마을의 일상적 주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과 물이 아름다운 장소에 자리한다. 현존하는 원림이 별서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별서는 본가를 떠나 휴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해 마련한 비일상적 거처이다.
사대부의 별서(別墅)는 자연을 지배적으로 다루거나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기 보다는 기존의 아름다운 산수에 최소한의 건축과 시설을 더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간소한 집과 정자, 작은 연못, 단과 대, 담장과 같은 인공 요소들이 기존의 자연경물들과 조화롭게 결합하도록 구상, 설치되었다. 이러한 공간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1)이며, 동시에 성리학적 가치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장소였다.
좋은 땅을 찾는 것은 원림 만들기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는 작업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자연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답사하며 마음에 드는 경물이나 그것들이 잘 어우러진 땅을 찾으려 애썼다(성종상, 2012). 사대부들이 즐겼던 ‘유(遊)’는 이 같은 땅을 찾기 위한 답사의 한 방식인 동시에, 조성된 원림을 몸소 거닐며 자연과 경물을 체험하고 향유하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동양적 산수미의 체득방식인 유는 사대부들이 자연 속에서 정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즐겨 선택한 핵심적인 태도이자 방법이었다. ‘유’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거닐다’라는 의미이며, 놀이 이상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적인 해방(心遊 심유)을 추구하는 행위로서 유(遊)에는 ‘놀다’와 ‘다니다’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신은경, 1999). 이는 중국 고대 화가들이 산수의 조화를 본받고 운행원리를 꿰뚫기 위해 택한, 이른바 ‘실컷 돌아다니며 한껏 보고 나서 그것이 가슴속에 역력하게 새겨지는(飽游飫看 歷歷列羅於胸中 포유어간 역력열라어흉중)2)’ 경지를 추구한 것과 닿아있다. 따라서 유는 자연을 찾아가 몸으로 체득하는 답사이면서, 그렇게 발견하고 조영한 원림을 걸으며 감상하고 향유하는 체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Hunt, 2003).
사대부 원림의 작정(作庭)은 정원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조선 사대부들은 일상적으로 행한 유(遊)를 통해 주변 자연을 살피고, 마음에 맞는 경물과 장소를 찾아 정원의 터로 삼았다(성종상, 2019). 이러한 상지(相地)는 땅을 읽고(reading), 찾고(searching), 선택하는(selecting)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한국정원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즉, 지형지세와 물, 바위 등 자연조건을 갖춘 장소를 찾아내고, 그 안에서 정자나 연못을 조성할 터를 정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조선 사대부에게 아름답고 깨끗한 산수는 거주지와 원림의 입지를 결정하는 핵심 조건이었다. 서유구는 선비가 살 만한 집터의 요건으로 지리(地理), 생리(生理), 인심(人心)과 함께 산수(山水)를 들었으며, 가까이에 즐길 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정(性情)을 도야하거나 시름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보았다3). 이는 산수가 단순한 경관 요소를 넘어 심성 수양과 정신적 안정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대부 원림은 대체로 산지나 계류변 등 자연경관이 뛰어난 장소를 찾아 기존의 지형과 경물을 활용하여 조성되었다. 이는 자연 훼손을 줄이면서도 조성의 실리와 도리를 함께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원림의 입지는 산기슭, 계곡, 산중턱, 봉우리 등으로 다양하지만, 물과 바위, 지형지세가 조화를 이루는 장소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입지에 따라 토양, 식생, 일조, 미기후와 경관 조건이 달라지므로, 조선 사대부 원림은 각 장소의 특질을 세밀하게 읽고 이를 적절히 살려낸 장소 특수적 해법(place-specific solution)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명명은 기존 자연 경물에 이름을 붙여 특별한 정원 요소로 전환하는 행위이다. 바위, 봉우리, 계류, 소, 대와 같은 경물은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 물리적 대상 이상의 존재가 된다. 이름에는 경물의 형태와 위치, 선현의 고사, 조성자가 지향하는 도덕적 가치와 시적 상상이 응축되어 담긴다. 명명은 보이지 않던 의미를 드러내고 자연을 언어경관이자 의미경관으로 조직하는 창조적 실천 행위였다(Tuan, 1991). Sung(2015)은 이러한 조선 사대부 원림의 한 유형으로서 물리적 조형보다 상상과 의미가 축적된 대표적인 사례로 ‘의원(意園)’을 들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명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경물을 구분해 내려는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을 상상과 기억, 의미와 상징이 결합된 정원의 핵심요소로 전환시키는 매우 유효적절한 방편으로서 조선 사대부 원림 특유의 조영 방식4)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림 2는 전남 담양 식영정의 현판과 내부의 시문 편액이다. ‘그림자(影)가 쉬어 가는(息) 정자’라는 시적 의미와 함께, 해를 보지 않듯 임금과 나라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선비의 뜻을 담고 있다. 단지 세 글자만으로도 조영자의 시적 정취와 의지를 함축적이면서 중의적으로 잘 담아낸, 명명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인지제의는 땅의 조건을 근거로 적절한 조성 방식을 선택하여 행한다는 뜻이다. 기존 자연을 최대한 살리고 인위적 개입을 줄이는 원칙으로, 지형에 맞춰 건물의 기초와 높이를 조절하고 자연 수계를 끌어 연못을 만들며 원래 있던 바위와 숲을 정원의 주요 요소로 활용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성종상, 2010; 2022). 명명이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여 정원화하는 상징적인 기법이라면, 인지제의는 자연의 물질적 조건을 존중하며 최소한으로 변형하여 정원화하는 실질적인 행위이다. 그림 3은 정선의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소정(西園小亭)(삼승정[三勝亭])’이다. 인왕산 기슭의 지형을 따라 마당과 단을 조성하고 초정과 작은 연못을 두었으며, 주변의 송림과 수림, 산길, 계곡과 폭포 등 기존 자연경관은 가능한 한 그대로 살렸다. 자연의 지형과 경관에 순응하면서 필요한 요소만 최소한으로 더한 인지제의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제영은 경물을 주제로 시를 짓고 읊는 행위이며, 시창은 그렇게 창작된 시를 고저장단과 리듬을 주어 길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원림에서 시는 자연 및 정원 감상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감상을 심화하고 향유하는 매개였다. 경물을 보고 마음에 일어난 감흥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자연 경물이 문화적 풍경으로 변환되고. 일시적 경험은 기억 가능한 정신적 경험으로 전환되었다.
Hunt(2004)는 정원의 의미는 조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경험과 해석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고 보았으며, Moore et al.(1988)은 정원을 형태 이전에 상징과 은유가 축적된 시적 공간(poetic place)으로 이해하였다. 제영은 경물의 의미를 규정하고 공간의 정신을 해석하여 시적 언어로 상징화한다. 시창은 개인의 감상을 벗과 문중의 공동체적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매우 적절한 방편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 사대부 원림은 자연 경관인 동시에 시문이 누적된 텍스트화된 풍경이 되는 셈이다.
3. 서석지원의 성리학적 풍경 미학
정영방에게 유는 일시적인 유람이 아니라 평생 지속된 학문적·심미적 수행이었다. 그는 출생지 예천 풍양에서 안동과 상주, 영양을 오가며 살았고, 전란 중에는 일월산 일대에서 피난 생활을 경험하였다. 이후 정치적 격변과 전란이 이어지자 출세보다 은거와 수양을 택해 연당에 거처를 마련하였다(정중수, 2021). 그의 이동은 단순한 생활상의 이주가 아니라 혼탁한 시대 속에서 올바른 삶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었다.
서석지원에서 유의 성격은 영귀제(咏歸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영방은 ‘영귀제’ 시에서 영귀제를 돌을 쌓아 만든 평평한 제방으로 설명하면서 그 위에서 배회하고 읊조릴 수 있다는 소주(小註)를 덧붙였다. 달리 보면, 영귀제는 처음부터 걷고 시를 읊는 장소로 조성된 것이다. ‘영귀제’ 시에는 달빛 아래 옥계를 산보하며 운곡의 시를 맑게 읊는다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산보는 천천히 걸으며 경관을 감상하는 행위로, 산보 이후로는 낭송과 수양이 이어지게 된다. 즉 산보는 자연을 몸으로 경험하며 시적 사유와 수양으로 이어가는 유(遊)의 실천이었다. 그림 4는 서석지원 내원의 전경을 보여준다. 내원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연못을 중심으로 순환하며 걷고 주변의 경물과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散步玉溪月 달빛 아래 옥계를 산보하며
朗吟雲谷詩 운곡의 시를 맑게 읊조리네
靑巒增矗矗 푸른 산은 더욱 높아 보이고
綠水故遲遲 푸른 물은 더욱 느리게 흐르네
– ┌국역 석문선생문집┘, 「경정잡영삼십이절」, ‘영귀제’(정영방, 2019)
정영방의 시문에는 배회하고, 산보하고, 오르고, 바라보고, 완상하는 행위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산과 봉우리, 바위와 계곡, 물굽이와 숲뿐 아니라 정자와 나루, 다리와 제방, 오솔길 등 자연과 인문 경관을 두루 찾아다녔다. 물가에서 물고기를 보고 산에서 약초를 캐며,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말없이 푸른 산을 마주하는 모습은 그의 일상적 유(遊)를 보여준다.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가 쓴 「묘지명(墓誌銘)」에도 “바람이 온화하고 경치가 좋으면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고 샘과 바위 사이를 거닐며 읊조리고 휘파람 불고 멀리 바라보다가 종일토록 돌아갈 줄 몰랐다(每遇風和景暖 杖屨徜徉於泉石間 吟嘯眺望 盡日忘返)”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걷기는 관물과 성찰, 독서와 분리되지 않는다. 자연 속의 경물은 천리가 드러나는 대상이고, 걷기는 그 경물에 가까이 다가가 몸과 마음으로 이치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걷기의 리듬이 사고의 리듬을 이끌어 낸다는 Solnit(2014)의 지적이나, 정원에서의 걷기와 이동을 몸을 통한 경관의 탐색과 경험으로 본 Hunt(2003)의 논의는 이러한 걷기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정영방 역시 서석지원 안팎을 거닐면서 숨겨진 경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삶의 태도와 도덕적 의미를 되새겼다(성종상, 2012).
정영방이 연당을 처음 발견한 시점과 구체적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임천잡제십육절(臨川雜題十六節)」의 ‘문암(文巖)’에는 산과 내가 서로 얽힌 곳을 은거처로 정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그는 이전에도 이곳을 유람했지만 눈 내린 문암의 경치만 감상했을 뿐 장소의 가치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반복된 유를 통해 연당의 지형과 경관을 다시 읽고, 마침내 은거와 수양의 터로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山水相繆結 산과 내가 서로 얽힌 곳에
定爲幽居設* 이곳을 정하여 은거할 곳 만들었네*
可惜舊日遊 애석하도다, 지난날 유람이여
但賞文巖雪 단지 문암에 내린 눈만 감상하였네
–┌국역 석문선생문집┘, 「임천잡제십육절(臨川雜題十六節)」, ‘문암(文巖)’(*연구자)(정영방, 2019)
연당은 자양산(紫陽山)이 뒤를 감싸고 청기천(靑杞川)과 반변천(半邊川)이 앞과 옆을 흐르며, 가까운 곳에 나월엄(蘿月崦)이 자리하여 아늑한 영역을 형성한다. 「임천산수기」는 주변 산들이 완만하게 안으로 향해 중심을 에워싸는 형세라고 묘사한다. 입구의 입석(立石)과 자금병(紫錦屛)이 만든 석문(石文)을 지나면 외부 세계와 분리된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이러한 폐쇄성과 개방성의 조화는 은거지로서 연당의 적합성을 높였다. 그림 5는 연당 주변의 수계와 암벽이 어우러진 외원의 산수 경관을 보여준다. 연당리 입구의 입석과 자금병이 석문과 같은 경계를 이루고, 그 안쪽으로 자양산 자락과 계류가 이어지는 지형은 정영방이 은거와 원림 조성을 위한 터를 선택하는 데 중요한 자연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입지는 주변 산수의 조건을 살피고 적합한 장소를 선택하는 상지(相地)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정영방은 광해군 즉위 무렵인 1608년경 연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1610년경부터 초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정원 조성은 1620년경부터 본격화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가족과 함께 연당으로 옮겨 노년의 생활 기반으로 삼았다(정중수, 2021). 연당 선택은 아름다운 경치를 좇은 취향의 결정이 아니라 전란과 정국 혼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처(處)’의 실천5)이었다.
자양산과 부용봉(芙蓉峯)을 배경으로 경정(敬亭)을 남동향으로 배치하고 그 앞에 연못을 둔 구성은 자연 조건과 성리학적 상징을 함께 고려한 결과이다. 자양(紫陽)이라는 이름은 붉은 흙과 물 북쪽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가리키는 동시에 주희의 학문적 전통을 환기한다. 부용은 연꽃과 군자의 덕성을 연상시킨다. 상지는 물리적 입지 선정에서 끝나지 않고 유학적 의미가 충만한 풍경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완성되었다.
서석지원은 명명을 통해 성립한 정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원과 외원의 건물, 연못, 대, 제방, 바위와 봉우리에는 각각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다.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 수직사(守直舍)는 경과 주일, 수직이라는 수양의 태도를 공간의 이름으로 드러낸다. 영귀제는 이상적인 귀의와 자적의 삶을, 사우단은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와의 교유를 통해 군자의 품격을 상징한다.
서석군의 개별 암석에도 상경석, 분수석, 옥성대, 조천촉, 와룡암, 어상석과 같은 이름이 부여되었다. 상경석은 외면을 꾸미기보다 내면의 덕을 기르는 군자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고, 분수석은 물이 갈라지지만 근원이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 일관된 도의 원리를 상징한다. 옥성대는 인격의 완성, 와룡암은 때를 기다리며 은거하는 선비의 이상을 환기한다.
한편 선유석, 통진교, 기평석, 낙성석, 봉운석, 희접암과 같은 이름에는 신선세계와 초월적 상상이 담겨 있다. 선유석은 신선이 노니는 모습을, 기평석은 신선들의 바둑 놀이를 연상시키며, 희접암은 장자의 호접몽과 같은 자유와 초월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성리학자인 정영방의 원림에 이러한 도교적 어휘가 나타나는 것은 은거와 자연 향유라는 사대부의 삶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물러나 산수에 처하는 것은 출처지의에 따른 유교적 실천이었지만, 그 산수를 노닐고 향유하는 과정에서는 세속을 벗어난 신선세계와 탈속의 이미지가 함께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서석지원이 유교적 수양의 공간이면서도 도교적 탈속과 시적 자유를 함께 수용한 복합적 사유의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소는 서로 병렬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삶의 실천을 중심으로 자연과 우주를 폭넓게 관조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그림 6은 서석지 연못에 자리한 자연 암석군인 서석군(瑞石群)이다.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채 자연스럽게 물을 가르는 암석들은 각각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윤리적·우주론적 의미를 지닌 경물로 전환되었다.
명명은 자연을 소유하기 위한 표식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한 결과이다. 정영방은 경물의 형태와 작용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학문적 기억과 삶의 지향을 연결해 이름을 붙였다. 그 결과 서석지원의 자연은 윤리와 역사, 고사와 시적 상상이 겹쳐지는 의미경관으로 전환되었다.
서석지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연못 안에 분포한 90여 개의 자연 암석, 곧 서석군이다. 이 돌들은 별도로 옮겨 놓은 석재가 아니라 연못을 파는 과정에서 드러난 기반암과 자연석이다. 정영방은 이를 제거하거나 규칙적으로 재배열하기보다 원래의 형상과 위치를 살려 연못의 핵심 경물로 삼았다. ‘상서로운 돌의 연못’이라는 서석지의 이름도 이러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돌은 오랜 시간과 지속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되어 왔으며(조지훈, 2016), 서석군은 정영방의 장소 인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연당 입구의 석문, 입석과 자금병, 외원의 문암과 마천벽 등은 연당을 은밀하고 아늑한 장소로 만드는 핵심 경물이다. 그는 자신의 호를 석문이라 하고 정원의 이름을 서석지라 하였다. 변화가 적고 견고한 돌은 군자의 지조와 절개, 오랜 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중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신과 정원의 이름으로 삼기에도 적합하였다.
연못 안의 돌은 물을 만남으로써 더욱 역동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수위가 높아지면 일부 돌은 물속에 감추어지고, 수위가 낮아지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숨었다가 드러나는 은현(隱現)의 변화는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으나 때가 이르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군자의 덕, 난세에 은거하였다가 도가 행해질 때 세상에 나아가는 선비의 출처와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은현의 변화는 끊임없는 현상의 변화 속에서도 본체와 원리는 지속된다는 성리학적 자연관에 빗대어 이해할 수 있다. 그림 7은 수위 변화에 따라 일부가 감추어지고 다시 드러나는 서석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 암석을 그대로 살린 서석군은 물과 결합하여 수위와 빛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관을 만들어낸다. 이는 자연의 조건을 그대로 살리면서 물과 돌의 은현(隱現)을 정원의 경관으로 드러낸 인지제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정영방의 「경정잡영삼십이절」은 내원의 건물과 연못, 바위와 식물을 노래하고, 「임천잡제십육절」은 연당 주변의 산과 하천, 바위와 봉우리를 노래한다. 두 작품은 내원의 작은 우주와 외원의 큰 산수를 언어적으로 연결한다. 제영은 경치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경물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장소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날씨가 화창하고 경물이 마음에 맞는 날이면 수석 사이를 거닐며 종일 읊조렸다는 기록, 제현(諸賢)들과 계산(溪山)의 경물을 점유하고 창수(唱酬)하였다는 기록 등은 시창이 정영방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원림을 함께 걸은 벗들은 경물을 보고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자연 감상, 학문 토론, 인격 수양과 교유가 한 행위 안에서 결합하였다.
제영과 시창을 통해 자연은 문학적 기억으로 보존되며 개인의 체험은 공동체의 경험으로 확장된다. 이름 붙은 경물과 그 경물을 노래한 시는 정원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각별하게 해석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 경물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군자의 덕과 은일, 수양과 도의 의미를 담은 인문적 경물로 전환된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교감 속에서 성리학적 가치와 삶의 태도가 구체적인 경관으로 드러나는 것이 곧 서석지원의 성리학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 정원은 시문을 통해 의미가 심화되고, 시문은 실제 경관을 통해 감각적 근거를 얻는다. 이 상호작용 속에서 서석지원은 보는 정원을 넘어 걷고, 바라보고, 이름 붙이고, 읊고, 화답하는 문화적 실천 풍경으로 완성된다.
그림 8은 「경정잡영」 시문을 판각한 편액이다. 경물을 노래한 시문은 판각을 통해 기록되고 전승되며, 원림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지속적인 문학적 기억으로 확장한다. 제영과 시창을 통해 서석지원의 경관 경험과 의미가 후대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4. 논의: 성리학적 풍경으로서의 서석지원
서석지원은 조선 중기의 전란과 정치적 혼란을 겪은 정영방이 출세보다 처를 선택하고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원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쟁과 명·청 교체의 격동은 한 유학자에게 출처의 문제를 현실적인 삶의 과제로 제시하였다. 정영방의 은거는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이라기보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시대에 자신의 뜻을 보존하고 학문과 교유를 지속하기 위한 능동적 실천이었다.
경정의 ‘경(敬)’과 주일재의 ‘주일(主一)’은 퇴계학파가 중시한 수양 개념을 직접적으로 환기한다. 사우단 역시 퇴계의 절우사와 육우원처럼 식물을 벗으로 삼아 군자의 품성을 일상적으로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명명과 공간 구성은 정영방이 영남 사림의 학문적 전통을 자연 속 생활에 재현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적 가치가 정원 안의 건물과 식물, 경물의 이름에 투영되고, 이를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수양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서석지원은 정영방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생활 속 풍경으로 구체화된 장소라 할 수 있다.
서석지원의 조영과 향유는 유, 상지, 명명, 인지제의, 제영·시창의 연속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를 통해 산수와 경물을 몸으로 체험하고, 상지를 통해 은거와 수양에 적합한 터를 선택하였다. 명명은 자연 경물에 윤리적·우주론적 의미를 부여하였고, 인지제의는 암석과 수계, 지형의 조건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개입으로 정원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영과 시창은 경관 경험을 언어와 기억, 교유의 차원으로 확장하였다.
이 과정은 정원 조성의 기술적 절차라기보다 자연 속에서 성리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생활 속에 구현하는 수양의 여정이었다. 특히 서석군의 은현은 정영방 자신의 출처와 유비되며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지속되는 도의 원리를 상징한다. 경정과 주일재, 사우단, 영귀제와 여러 명명 경물은 정영방이 지향한 경과 주일, 군자의 덕성과 은일의 태도를 공간적으로 드러낸다. 서석지원의 성리학적 풍경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명명과 조영, 제영과 시창을 통해 자신의 삶과 연결해 나가면서 만들어진 ‘발견의 정원’이라 할 수 있다.
5. 결론
본 연구는 서석지원을 조선 사대부 원림의 성리학적 실천과 풍경 생산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서석지원은 규모나 조형적 화려함보다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실천을 통한 의미에 주목해야 하는 정원이다. 정영방은 반복적인 유를 통해 자연에 다가가고, 상지를 통해 자신의 처에 적합한 터를 선택했으며, 명명으로 자연 경물에 윤리적·시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또한 인지제의를 통해 기존 암석과 수계, 지형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개입으로 정원을 만들었고, 제영과 시창을 통해 개인의 체험을 문학적·공동체적 기억으로 확장하였다.
서석군의 은현은 서석지원의 미학을 집약한다. 물과 돌은 고정과 변화, 감춤과 드러남의 관계를 형성하며, 이는 군자의 덕성과 출처, 현상 속에서 지속되는 도의 원리를 상징한다. 연못은 하늘과 주변 경관을 비추는 동시에 조성자의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 된다. 이러한 의미는 돌과 물이 갖는 물질적 조건이 명명이라는 언어, 걷기와 제영, 그리고 시창이라는 행위와 통합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서석지원은 자연을 소비하는 관람 대상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도덕적 주체를 형성하는 실천의 장이다. 자연과 인간, 물질과 언어, 개인의 수양과 공동체적 교유가 하나의 경관 안에서 결합한다. 이러한 점에서 서석지원은 정영방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물리적 경관과 문학적 텍스트, 반복된 생활 행위로 응축된 유교적 정신풍경이며 한국 전통 원림의 장소성과 생태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화경관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서석지원이라는 단일 사례를 중심으로 한 해석적 연구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향후 다른 사대부 원림과의 비교를 통해 유, 상지, 명명, 인지제의, 제영·시창이라는 분석 틀의 적용 가능성과 보편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